Posted
Filed under 일기장

훈련소 안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나, 나는 군대와 관련된 꿈을 꿔 본 일이 없다. 어떤 이들은 훈련소에 있을 때도 훈련소로 끌려오는, 그러니까 군대에 있으면서 다시 군대에 끌려오는 끔찍한 꿈을 꿨다고도 한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나가면, 훈련소로 다시 들어가는 꿈을 언젠가 한 번쯤은 꾸게 될 것이란 얘기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내 느낌에, 앞으로도 그런 꿈을 꿀 일은 없을 것 같다. 간절히 바라는 일도 아니요, 극심히 두려워하는 일도 아닌 일은, 구태여 꿈을 통한 생생한 체험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훈련소에 있을 때, 이런 꿈을 꿨다. 나는 무대 위에 자리한 수 십 명 오케스트라 단원 중의 한 명. 그러나 나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연주자의 시선을 자유로이 오가며 오케스트라를 안과 밖에서, 전체와 부분을 모두 바라보았다. 지휘자와 악장은 내가 마지막 연주를 섰을 때의 지휘자와 악장이었고, 주위의 모두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유포니아로 돌아가 있었다. 단원들은 분주했다. 이제 막 연습을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올린다. 단원들은 저마다 연주 준비를 한다. 나도 악기를 든다. 지휘봉이 첫 타점을 찍는다. 타악기와 금관의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음악은 시작한다.

따딴따딴따따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악. 꿈속에서 연주되는 것 같지 않아. 이어서 보컬의 음성이 들린다.

“기상, 기상, 기상, 장교교육대대의 전 후보생은 침구를 반대로 펴고 창문을 개방하며 스트레칭과 공공실 출입 후…….”

그렇게 몇 번인가 쓴 웃음 지으며 아침을 맞이한 적이 있다. 본래 나는 과거를 추억하거나 회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고 난 다음 날에는 내가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시간, 어떤 장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치 그 지나가버린 시간에 내 생의 모든 즐거움이 다 응축되어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런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서는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감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고작 몇 년 앞의 일이 불분명해지면 금방 과거에서 희망을 탐색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라니. 그러나 그런 나약함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추억이이야말로 가장 큰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지난 토요일, 유포니아를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 세컨드 바이올린 파트장을 맡고 있는 후배(입단 선배)에게 연락 해 간식 거리로 뭘 사가면 좋을지 물었다. 선배들의 간식이라면 크리스피크림 도넛이라는 정통 메뉴가 있긴 하지만, 내가 현역 단원이었을 때 이미 식상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누군가 에그 타르트를 먹고 싶어 한다는 답문을 받고 주저할 것 없이 연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앤드루스 에그 타르트 이대점에 전화를 걸어 에그 타르트 50개를 예약 주문 해 두었다. 연습 시작은 4시. 에그 타르트는 5시까지 준비가 가능하다니까, 보통 연습이 4시간 정도 진행되는 걸 감안하면 연습 중간 쉬는 시간에 적절히 간식을 들고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 후 받은 한 통의 전화. 지휘자 사정으로 연습이 6시쯤에 끝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바이올린 파트의 선배가 파트원 전부에게 저녁을 사주기로 했다나. 간식을 찾아서 가기에도 빠듯한 시간. 또 시간에 맞춘다 하더라도 저녁 식사 직전에 간식이라니. 하지만 이미 넣어놓은 주문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 사실 에그 타르트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유포니아의 연습 장면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아무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정체는 극심했지만 버스는 한산한 전용차로를 유유히 내달렸다. 덕분에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도로 사정은 시내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았다. 서울. 언제나 불쾌감을 안겨주는 도시.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인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불행과 피로를 향해 달려가도록 부추기는 도시. 삶에 피곤함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고, 하루하루 지쳐가도록 만드는 괴상한 도시. 종종 이렇게 한없이 혐오감이 들게끔 하는 서울이다.

버스를 포기하고 지하철로 갈아타, 이대역에서 내려 서둘러 베이커리를 찾았다. 에그 타르트는 이미 포장 완료되어 있었다. 묵직한 비닐 주머니를 양속에 하나씩 들고, 지름길로 내달렸다. 무더운 날씨.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대강당에 들어섰을 때, 단원들은 생상스 3번의 피날레 부분을 연습하고 있었다. 비록 템포는 느리고, 음정도 제각각에 호흡도 엉키고 밸런스는 실종된 상태였지만, 유포니아는 항상 이런 상태에서 출발하여 누구나 기대했던 그 정도 이상의 지점에 도달한다. 나는 고작 5분 남짓 연습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임관 후, 나는 아직까지 제대로 악기를 만지지도 못 하고 있다. 악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꺼려진다. 훈련소에 있을 때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바이올린이었는데. 배워가던 비브라토 기술은 다 까먹고, 마치 이제 막 바이올린 배우는 사람처럼 활로 비브라토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면 실소를 할 지경이다.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몇 달 전에는 어렴풋이나마 그려졌던 지향점이, 이제는 안개 속에서 그 향방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단 5분. 그걸로 충분했다. 내가 다시 악기를 연습해야 할 이유를 깨닫고, 앞으로 10년간 다시 연습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기에는 말이다. 바로 저 자리에 앉기 위해. 단순히 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으로 지휘자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주위의 소리를 듣고, 호흡하고, 함께하기 위해. 그건 내가 한 번도 제대로 경험 해 본 적 없는, 그러나 문틈으로 살며시 엿본 적은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도달하고 싶은 지향점이었다.

에그 타르트는 생각보다 잘 팔려서 기분이 좋았다. 먹성 좋은 대학생들이라, 저녁 식사 직전이라는 상황에는 아랑곳 않는 듯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나눴다. 생각해보면 마지막 연주로부터 겨우 5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공백의 시간은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바이올린 파트 회식에도 따라갔다. 이제는 얻어먹는 입장이 아니라 사주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선배님은 나의 작은 일조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건 그것대로 그 선배님의 역할이며 입장이니 존중하기로 했다.

파트별 회식이 끝난 후, 2차로 전체 모임이 있었다. 한 공간에 모여도 결국 파트별로 갈라져 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생각해보면 입대 후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부담이 없을수록 거리낌 없이 손은 잔으로 향하고, 평소 싫어하는 쓰디 쓴 소주도 제법 달게 마실 수 있다.

아직까지는 제법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했지만, 낯선 사람도 많았다. 앞으로 점점 나를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겠지. 이번 악장은 나와 나이가 같다. 25살이지만 이미 나이가 많은 축이라 단원들은 장난삼아 이름 뒤에 ‘옹(翁)’자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나로서는 나를 편하게 대해주는 동년배가 악장을 맡고 있으니 더없이 반갑지만, 앞으로는 나를 까마득한 선배쯤으로 여기고 어려워하는 후배들이 그 자리를 대신 해 나갈 것이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과거의 시간을 다시 사는 꿈을? 아니면 이제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나? 악기를 들고 있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새로운 시간, 새로운 장소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든 모습으로 낯선 듯 익숙한 듯 그 때를 살고 있기를.

밤이 늦어 돌아왔다.

2010/07/26 00:49 2010/07/26 0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