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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음악/공연

마치 그렇게 되도록, 운명을 관장하는 누군가의 종이 위에 쓰여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개인의 처신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가측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은, 항상 이중적인 면을 지니고 있어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전날, 선임이 몰고 가던 내 차가 도로 위에 서버렸다. 만일 차가 말썽을 일이키지 않아서, 차를 찾으러 가기 위해 40~50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2부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을까? 혹은 목요일 저녁의 우연한 회식이 아니었더라면 내 고물 차는 주말 저녁 정체를 빚는 고속도로 위에 떡하니 멈춰 서서 정체를 더욱 극심하게 만들며 57분 교통정보에 ‘고장 차량’ 소식을 띄우게 되었을까?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주행 중에 목숨을 걸고 카드를 물린 하이패스 단말기. 한 번 충전하면 두세 달은 끄떡없다던 녀석이, 잭을 제거한 지 1주일도 안 되어 방전되어버렸는지 침묵이다. 수리를 받았지만 여전히 상태 불량인 차. 오르막길에서는 아무리 액셀을 힘껏 밟아도 속도가 80km를 넘지 못 한다. 정체 구간에 들어서니 그나마도 속도를 낼 수 없다. 해가 기운다. 하늘은 눈부신 주홍빛에서 점차 깊은 바다의 어두운 푸른색으로 변해간다. 이윽고 잿빛이다. 내 마음도 그렇게 어두워져간다.

서울은 변함이 없다. 주말 저녁의 극심한 시내 교통 체증까지도. 1부 공연이 이미 끝났을 시간이다. 기름 게이지가 바닥을 친다.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본다.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인공의 불빛들만 환하다.

생상스 3번 2악장이 들려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단히 닫혀있다. 나는 우측 복도를 통해 무대 뒤편 연주자 대기장소로 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악기 케이스. 조금 전까지 이곳을 가득 메웠을 긴장의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음악이 잠시 멎었다. 그리고 3악장, 시작이다.

무대 옆벽의 뒤편에 서서, 작은 틈새로 무대를 엿보았다. 힘차게 타점을 내리찍는 지휘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지휘자의 모션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지휘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악장의 모습도.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활이 상하로 춤춘다. 뒤에서 바라보니 그 높이가 제각각인 것이 좀 많이 티가 난다. 피아노 소리도 들려온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전자 오르간은 바로 눈앞에 있다. 연주자는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풍부한 C 코드의 울림! 4악장 Maestoso(사실은 2악장의 두 번째 파트) 시작이다.

도취를 걷어내고 바라보면, 현실의 모든 것들이 하찮아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저 안에 있을 때, 함께 땀을 흘리고 연주하며 동경에 가득 차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던 때와 교하면, 이 날 이 자리에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예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솔직하게 살아가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 ‘실체’를 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이고, 추억과 상상력이 부여하는 환상은 연주장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어떤 감동의 파장을 더한다. 그래, 당신들에게 열정이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가득 찬 무대, 숨죽인 객석, 그리고 텅 빈 연주자 대기실에서 무대 벽에 기댄 채 좁은 틈으로 다른 세상을 엿보는 관객 한 사람. 이것은 썩 괜찮은 그림이다. 나는 취하기 위해 왔으니, 잔을 들어 올리겠어. 이것은 편파적이지만, 술 취한 사람은 오직 감정에만 솔직하니까.

브라보!

2010/09/05 01:44 2010/09/05 0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