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Filed under 일기장

구름이 많았지만, 이따금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깨끗했다. 노을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남한강변을 시원하게 달려 좁고 구불구불한 충주 시내의 도로로 들어서자, 퇴근 차량들로 정체를 빚고 있었다. 제 속도로 달렸다면 15분이면 도착했을 텐데, 30분이나 걸려버렸다. 초등학교가 보였다. 그 앞으로 초등학생들 상대로 하는 분식집이며 치킨집, 미술학원 따위가 늘어서 있었다. 그 중 ‘예당 음악 교실’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곳도 있었다.

공터가 눈에 띄어 차를 대어 놓고, 학원 문을 두드렸다. 선생 한 사람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해 주고 있었다. 전화로만 몇 차례 통화한 바이올린 선생임에 분명했다.

“그럼 레슨 받으시겠어요?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눈 후, 선생은 최종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내게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확인할 것이 남아있었다. 평소 저녁 때 이 학원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할 수 있는가였다.

“그건 어렵습니다.”

이유란 것이, 선생의 어린 조카와 친구들이 저녁때면 이 학원에서 과외를 받는단다. 무슨 고도의 음악적 훈련도 아니고, 고작 누구나 바라보고 사는 별 볼일 없는 것들에 목메며 사는 인생을 위한 ‘과외’ 따위 때문에 음악학원이 음악 배우는 학생에게 연습할 공간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게 웃겼다. 이런 게 이 사회에서는 너무 쉽게 납득될 사정이라는 것에는 차라리 짜증스러웠고.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은 레슨을 받기로 했다. 주 1회 1시간, 타임 당 4만원이다. 가장 최근에 받던 레슨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선생의 성격은 상당히 꼼꼼한 듯싶다. 당장 이번 주 목요일 저녁부터 레슨을 시작하기로 했다.

부대로 돌아왔다. 차 뒷좌석에는 바이올린 케이스와 각종 교본 및 악보를 넣은 가방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대로 관사로 돌아가지 않고, 부대 내의 스포츠 센터로 갔다. 2층 헬스클럽 창문으로 런닝머신 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1층 로비를 통과 해 2층으로 올라갔다. 헬스클럽에는 눈길로 주지 않고, 맞은 편 강당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강당 안을 살폈다. 꽤 널찍한 강당이다. 책상과 의자가 수십 개 있다. 스탠드 형 에어컨도 코너마다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는 작은 스테이지도 있고, 반음 내지 무려 1도 가까이 음이 내려간, 고물 피아노도 한 대 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다시 1층 로비로 내려가, 데스크의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우선 헬스클럽 한 달 등록했다. 한 달 회비가 겨우 만 원이다. 이래서야 등록해 놓고 이용 안 한다고 해도 그다지 아까울 게 없을 정도다. 등록부에 이름을 올리고 카드로 결재했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헬스클럽 맞은편 강당 말인데, 거기 좀 써도 되나?” 병사가 대답한다. “예약하면 쓰실 수 있습니다.” “아니, 예약 말고. 저녁 때 아무도 안 쓸 때. 자습실 같은 걸로 좀 쓸 수 있을까?” “저녁 때, 아무도 안 쓸 때라면, 괜찮지 싶습니다…….”

낮에야 이따금 부대 장병들 교육 목적으로 쓰이는 곳이지만, 저녁 때 누가 쓸 일이 있을까. 차에서 바이올린과 가방을 꺼내 2층 강당으로 갔다. 보면대가 없다. 낡은 피아노 위에 악보를 어정쩡하게 걸쳐 놓고, 바이올린을 꺼내 튜닝을 했다. 먹먹한 소리가 난다. 이 녀석도 제 소리를 찾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다. 흐리말리를 펴놓고 스케일 연습을 했다. 가장 기본적인 C 장조 스케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서드 포지션 잡는 것도 고역이다. 잠깐 악기를 내려놓고 깊은 한 숨을 쉬었다. 이내 악기를 다시 들고, 묵묵히 연습을 시작한다.

그렇게 약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이 정도 연습은 오랜만이라 피로가 느껴졌다. 연습의 성과라고 하면 손가락 근육이 약간 풀어진 정도. 반년 전 이미 도달했던 위치에 가기에도,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연습 중간에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설마 누가 쫓아내기야 하겠냐마는.

일본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시절, 현부터 목관, 금관, 타악이 다 들어차서 시끌벅적 연습하던 학관이, 가장 마음 편안한 연습 장소였다. 저녁 8시면 일찍도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유일한 흠이긴 했지만, 누구나 악기 연습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나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그러면서도 내 자신의 연습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포니아에 지원하고 첫 번째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오디션 볼 때 유포니아 단원이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혹시 오디션 떨어지더라도, 여기 대강당 복도에 와서 연습해도 되나요?” 그때 들었던 대답이 “해도 될 걸요. 근데 자기가 쪽팔릴 수 있으니까.”였던가. 때로는 쪽팔림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다.

다행히 신촌 인근에서 학원을 찾았고, 너무 붐비지 않는 낮이나 늦은 저녁 때는 학원에서 마음껏 연습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매일 강의가 끝나면 학원에 가서 2시간 정도씩 연습을 했다. 오사카 대학의 학관만큼 열정이 넘치는 곳은 아니었지만, 방 하나 차지하고 차분히 연습할 수 있었다. 각 방에는 원장 선생님의 배려로 온풍기와 에어컨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학원을 오가며 연습한 기간이 약 1년 정도 된다.

두 번째로 유포니아 문을 두드렸을 때, 대강당 옆 복도라는 그 열악한 연습 장소를 이용하기 위해 ‘쪽팔림’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곳은 여름이면 너무 덥고 모기가 들끓었고, 겨울이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추웠다. 그러나 나는 많은 나날 그곳에서 11시까지 연습하며 순찰 도는 경비 아저씨와 함께 하루를 마감하고는 했다. 그곳은 오케스트라의 ‘공식적’ 연습실을 표방하는 곳이었지만, 그리 많은 단원들이 늘 그곳을 애용하지는 않았다. 향상 음악회나 정기 연주회를 앞둔 시점이 아니면 대체로 한산했고, 특히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많은 날 밤을, 나는 홀로 연습하며 보냈다.

대학 강의실에서 보던 것과 흡사한 책상과 의자들. 굳게 닫힌 철문, 창문을 덮은 커튼, 낣은 피아노. 소리가 텅텅 울리는 이 황량한 공간. 어쩌면 여기가 앞으로 3년 간 나의 연습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또 다시 고독한, 아주 고독한 연습이 시작될 것이다.

2010/09/07 22:57 2010/09/07 2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