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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쿠스여, 나는 길을 잃었다.

사람의 인생은 한 단락을 맺고 그것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같은 곳을 맴돌 뿐이 아닌가 싶어. 나는 언제나 책의 어느 한 페이지로 돌아와, 낯익은 풍경 속에서 길을 잃고 똑같은 이야기 안에서 갈등에 빠진다. 어쩌면 나는 광활한 초원의 한복판에 서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막막함 속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날아든 희미한 불씨 하나뿐이지.

생각해 봐, 무언가가 나를 붙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들고 있는 거야. 하지만 어느 날 늦잠을 자서 머리가 멍해진다든가 등굣길 전차 안에서 잠시 생각에 골몰하느라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두 눈이 초점을 잃어버리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 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일생을 온전히 내받칠 어떤 영웅적이고 원대한 뜻이 아닌, 그저 하루하루를 지탱해 줄 소소한 행복의 근원조차도 어째서 이렇게 늘 긴장한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수호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강렬한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을 때였다. 우연히 내 눈에 어떤 유충의 시체가 보였지. 잠시 후 개미 한 마리가 그 유충의 시체에 다가갔다. 개미는 유충의 시체를 어떻게든 옮겨보려고 했지. 그러나 자신의 몸보다 수십 배는 더 큰 시체를 움직일 수는 없었어. 나는 한참동안이나 자리를 뜨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30분이 흘러도 개미는 포기하지 않고 안간힘을 쓰며 유충의 시체에 매달렸어. 개미는 온 힘을 소진한 듯 움직임도 점차 적어졌지만,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이렇게 말하겠지,

“보아라! 인간보다도 훨씬 짧은 수명밖에는 지니지 못 했으면서도 그 짧은 생을 벌레의 시체나 썩어가는 과일 조각, 혹은 과자 부스러기 따위나 밀고 끄는 데 소모해야하는 개미의 삶을!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한평생 의미 없이 돌덩이나 굴려야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일 것이다.”라고.

하지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유충의 시체다!”라고 말이야.

공교롭게도 강물에 반사된 5월의 화사한 햇살이 우울증에 빠진 한 남자를 투신하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어떤 사소한 사건 하나가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을 찌르는 송곳의 끝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소한 기쁨이 이 지나친 상념을 거두어 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은 단지 침묵 속에서 기다려 볼 뿐이다.
2007/05/11 15:17 2007/05/11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