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Filed under 서재/편지
시선이 닿지 않는 마음의 저변에 깔린 어둠, 그 한 구석에 불안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깊은 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며칠 째 우울함을 벗어버리지 못 하는 하늘이, 습기에 가득 찬 공기가, 무엇보다도 마음을 차갑게 적시는 빗물이 나를 깨친다. 절정의 나날이 지나가고, 나를 가두어버린 이 음울한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갈 것이라고.

우산을 비스듬히 받쳐 들고 바짓단을 적셔가며 내딛은 무신경한 한 걸음에, 의도하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소모(消耗)의 피로와 정체(停滯)의 불안이 실린, 한숨과도 같은 한 걸음을 축축한 땅 위로 내딛어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고개를 들고 온통 젖어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했던 것이다.

어느 한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또한 눈여겨보아야만 했던 많은 것들에는 주위를 기울이지 못 하고 지나쳐버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후회를 막아주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 천분을 배반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끌어안으려 했던 유쾌함은 나의 품 안에서 산산이 부수어져 무수한 유리 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인간은 늘 절정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시간의 흐름은 사람의 등을 떠밀어 산의 꼭대기에서 밀어내고, 다시 등줄기를 타게 만든다. 정점도 아니고 계곡도 아닌 등성이 어느 곳에서 멈추어 바위에 걸터앉아 안개로 눈을 흐리고 위도 아래도 바라보지 아니하며, 다만 어린애처럼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겠노라고 생떼를 부려보려 해도, 붙잡은 고목의 앙상한 가지는 나를 당기지도 밀치지도 않는데.

아, 아티쿠스여, 나는 내려가야겠다. 가장 낮은 밑바닥으로, 모든 하찮은 것들이 흘러드는 계곡으로 내려가야겠다. 그리고 구름으로 뒤덮인 어두운 하늘을 마주하고 서서, 떨어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빗물까지 전부 맞아야겠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새벽의 빛을 건져 올리듯, 심중심연(心中深淵)으로 가라앉아 방향을 더듬는다. 그렇다, 아티쿠스여! 오직 글을 쓰는 자만이 자기 내부의 모순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한 구석에서부터 여명이 밝아올 때, 퀭한 눈을 가진 불안의 짐승이 다시 마음의 그늘로 몸을 숨기면, 나는 비할 데 없이 무거운 한 장의 종이를 올려놓아 형편없이 기울어버린 저울에 균형을 되찾아 줄 것이다.
2007/07/29 15:19 2007/07/29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