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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에서 반팔 티와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맨살에 와 닿는 햇살은 따가우리만치 강렬했다. 마당에는,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아침 산책을 다녀온 두 마리의 개가 널브러진 채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늘은 깨끗했고, 산은 덤벼들 기세로 푸르렀다. 여름이었다. 셔츠 소매를 들추어 보았다. 자외선의 흔적은 이곳에 이르러 모호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살을 그을려 놓은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여름의 태양이 아니다. 이것은 ‘생겨나는 흔적’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흔적’이다. 회상 속에서만은 여전히 찬란히 빛나고 있는, ‘호주 하늘의 태양’에 대한, 몸의 기억인 것이다.

지난겨울, 한반도에 본격 한파가 몰아칠 무렵, 나는 적도 이남의 대륙 국가 호주로 떠났다. 한겨울에도 장정들은 반팔 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시드니. 북반구에 위치한 한국과는 계절이 정반대여서 여전히 한여름인 그곳의 하늘은, 그야말로 염천(炎天)이었다. 피부암 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호주의 저 이글거리는 태양이, 불과 며칠 전에 눈발 흩뿌리는 구름 사이로 언뜻 모습 내비치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완전히 다른 하늘, 전혀 새로운 태양 아래에서, 나는 온전한 ‘여름’의 한 달을 보냈다.

지붕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뜨거운 여름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눈이 녹아내렸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쌓여 있던 우울한 몽상. 여름은 그마저도 집어삼키고 불타올랐던 것이다. 내 안에서, 더욱 뜨겁게! 나는 혼자였고, 고독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쾌활(快活)하였고, 자유로웠다. 나는 심지어 ‘열정(熱情)’을 생각했다!

지붕이 드리운 그늘 아래서 무성한 나뭇잎 속에 몸을 묻고 여유롭게 눈만 껌뻑이는 코알라를 바라보며, 지붕 없는 곳에 선 채 선 블록을 바르지 않아 벌겋게 익어버린 얼굴을 하고 부신 눈을 겨우 가늘게 뜨고 있던 나는, 그러나 ‘네가 귀물(貴物)이로구나.’하고 웃어버렸다. 나는 보았다. 사막의 태양을. 그것은 대지를 그슬리는 파에톤의 수레바퀴. 우울 · 고뇌 · 번민 · 불안마저 녹아들어간 용광로이며, 열정 · 낭만 · 분노 · 격앙 · 흥분을 토해내는 사출구(射出口). 거대한 화구(火口)로부터 뿜어져 나온 용암과도 같은 아침놀은 광요(光耀)를 끌어안고 퍼져나가 구름조차도 삼켜버렸다. 아, 불타는 하늘, 화염의 바다! 그 일렁임은 거대한 힘이 되어 내 안으로 들이쳤다. 감정의 격류! 그리고 외쳤다, 나는 바란다! 나는 원한다!

그렇게 여름은, 한순간 거센 열풍(熱風)으로 휘몰아쳤다.

나는 돌아왔다. 이곳 3월 초엽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그 신선한 냉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섣불리 앙양(昻揚)되었던 광분한 정신은 조금씩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날씨는 곧 더워지기 시작하였다. 봄은 어느 구석엔가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벚꽃과 함께 폭발하였고, 사라졌다. 또다시 계절은 여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올려다본 태양은, 나를 그토록 뜨겁게 달구어놓았던 바로 그 태양. 너무나도 짧은 주기로 반복되는 여름, 계절감이 흐트러진다.

아, 눈부신 태양이여, 인생의 어느 한 도막이 그대와 같이 찬란할 수 있을까? 여름과도 닮은 한 때의 젊음을 골라 뜨거운 빛을 쪼이는 너, 우울(憂鬱)에 그대의 빛 쇠하는 일 없고, 청춘의 번민마저도 잡아먹어 더 거세게 불타오르는구나. 지친 숨 헐떡이는 여름,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젊음이 있으니!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팽창하는 의욕. 노곤(勞困)도, 게으름도, 방만(放漫)도, 방황(彷徨)도 어쩌지 못하는 열망, 그 위대하고 오만한 착각이야말로 광분하여 불타오르는 한여름 날의 태양이어라!
여름, 다시 여름으로.
2006/05/09 15:55 2006/05/09 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