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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내가 유희를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가지만, 이번 주말같이 특별한 경우에는 유희가 서울로 올라오기도 한다. 부모님은 홍콩에서 공부 중인 동생을 위로방문하기 위해 금요일 아침 비행기로 떠났다. 나마저 대전으로 내려가 버리면 이 집에는 돌봐줄 사람도 없이 방치될 개가 무려 세 마리나 있다. 화이트 데이도 끼어있는 주말. 그래서 유희를 집으로 초대에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계획은 훌륭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최근 수원의 사업장에서부터 서울로 파견되어 근무 환경이 싹 바뀐 탓에 다시 모든 것에 새로 적응해야만 했다. 게다가 특별히 할 일도 없이 한가로웠던 전 사무실에서와는 달리, 이곳에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하루 수십 통에서 많게는 백통 이상의 전화를 걸어대며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나는 비교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물론 그것은 내 주위 환경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무관심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환경이 바뀌게 되면 긴장을 하게 되고, 그 긴장이 풀릴 즈음 이렇게 한 번 앓는다. 아무튼 금요일은 최악의 하루였다. 거의 나오지 않다시피 하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전화 통화를 해댔으니, 나중에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열이 오르는지 오한까지 들었다. 강남에서부터 양재역까지 유희를 만나러 가는 겨우 한 정거장의 거리가 만 리길처럼 느껴졌다. 사무실 답답한 공기에 질려 일부러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건물 밖으로 걸었는데, 초봄 추위에 사시나무 떨 듯이 떨다가 헛구역질까지 할 뻔했다. 화이트 데이에는 보잘 것 없는 사탕 한 봉지를 사주더라도 뭔가 의미 있게 엽서라도 써 주고 싶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정신을 놓고 지내다보니 그마저도 챙기지 못 했다. 서울까지 올라오는 유희를 화이트 데이에 빈손으로 맞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 텀블러를 하나 샀다. 몇 달 전부터 표면이 다 상한 스타벅스 텀블러를 사용하는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어서다. 내가 선물을 고르는 기준은, 물론 상대방이 무엇을 받으면 기뻐할까를 먼저 생각하긴 하지만, 세부적인 것을 고르는 점에서는 결국 내 맘에도 드는 것을 고르게 된다. 상대방에게 주는 선물에는 상대방의 취향에 대한 고려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내 취향도 반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표면에 갈색이 그라데이션으로 도색되어 있는 금속 재질의 텀블러를 하나 샀다. 거기에다가 초콜릿 한 봉지는 덤으로. 텀블러를 구입했더니 공짜 음료 한 잔을 준다고 하기에 몸을 녹일 겸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들고, 다른 한 손에는 텀블러와 초콜릿이 든 가방과 또 점심 때 회사 와인 할인 판매 행사 때 구입한 와인 한 병을 들고, 미열에 들뜬 몸을 간신히 휘적거리며 양재역으로 향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지, 유희는 나를 보고는 대번에 걱정부터 했고, 꼭 같이 가야할 곳이 있다며 정자역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철 5번 출구로 나아가 24시간 의료원에 데려가 기어이 링거를 맞혔다. 약기운 덕분인지 체력이 돌아온 듯하여 금요일과 토요일은 신나게 놀아재꼈으나, 결국 링거의 힘은 거기까지였는지 유희가 떠난 토요일 밤부터는 다시 앓아누웠다. 일요일은 거의 침대 아니면 소파에 누워서 보낸 듯하다. 일요일 저녁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온 엄마가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따뜻한 국물이 있는 먹을거리를 좀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엄마가 사온 설렁탕을 뜨끈하게 데워서 밥까지 말아 한 그릇 해치우고, 지어온 약에 홍삼 엑기스, 쌍화탕까지 마셨다. 이제 한 숨 푹 자고나면 내일은 좀 개운해지지 않을까. 비교적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책이나 읽다가 눈을 붙여야겠다.
2014/03/16 22:41 2014/03/16 2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