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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조선이 1876년에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따라서 세 번째로 개항한 항구였다. 개항 이전에는 바닷가의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인천은, 그러나 조선의 수도(首都)이자 최대의 인구 밀접지인 한성(漢城)과 가깝다는 지리상의 이점 덕분에 개항 이후 일본이나 청()은 물론, 미국, 영국 등으로부터도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급속한 팽창을 이루어, 곧 누항(陋巷)의 모습은 벗어버리고 조선 최대의 무역항으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인천에는 19~20세기 초기에 지어진 인상적인 건축물들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인천근대건축전시장역시 그 중 하나다. 이 건물은 1890년에 준공된 뒤 1903년에 한 번 개축되었는데, 이 당시 이 건물을 세운 것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두고 있던 18국립은행이었다. 여기에서 18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이 은행이 일본 내에서 국립은행조례에 따라 18번째로 설립 허가를 득한 국립은행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들이 1890년에 인천에 세웠던 이 건물은, 바로 제18국립은행의 첫 해외 지점이었던 것이다.

사실 조선에 최초로 진출한 일본 은행은 제18국립은행은 아니었다. 무려 12년이나 앞선 1878, 그러니까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 지 불과 2년 뒤에 일본의 제1국립은행이 부산 개항장에 최초의 지점을 설립한다. 그 경위는 은행에 대하여’ 5편과 6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1국립은행은 이를테면 당시의 메가 뱅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국립은행조례를 최초로 설계한 이물은 이토 히로부미였고, 당대 일본의 최대 부호였던 미쓰이와 오노 두 가문이 이 은행의 설립에 출자했다. 그리고 제1국립은행의 초대 은행장이 된 인물은 정부의 고관을 역임하기도 한 경제계의 저명인사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

1국립은행이 조선에 진출하게 된 배경에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조일수호조규는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의 사용을 허용했고(부속장정 7), 이로 인해 조선 내에서 환전이나 어음 거래를 맡아 줄 금융기관의 존재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8국립은행은 어떠한가? 여러 면에서 볼 때, 이 지방의 소규모 상업은행은 제1국립은행과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제18국립은행의 초기 자본금은 16만엔에 불과했다. 250만엔의 자본으로 시작한 제1국립은행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규모다. 게다가 이 은행의 설립과 운영에는 구 사족(士族) 출신이나 당대의 저명한 정부 고관이 관여하지도 않았다. 이 은행의 설립자들은 나가사키의 상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18국립은행은 어떤 경위로 인천에 최초의 해외 지점을 개설하게 될 정도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을까? 나가사키의 무역상인들이 설립한 이 상업은행이 조선 시장으로 뛰어들게 된 내적, 외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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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8 23:44 2017/10/18 2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