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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해지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불행해지지 않는 확실한 방법은 알고 있다. 그것은 남의 행복을 나의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하루 행복했던 사람에게는 축복을.

아침에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벌써 네 번째 레슨이다. 스케일을 먼저 체크하고, 카이저 10번, 이어서 하이든 바이올린 협주곡 2번. ‘힘차게, 애절하게, 간결하게.’ 하이든 악보 군데군데 선생님이 적어놓은 것들이다. 음악에도 표정이 있다. 그걸 몰라서 표현 못 하는 것이라면, 개선의 여지는 없어도 마음은 덜 답답할 것이다.

점심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나가 외식을 하고 왔다. 간밤에 통 잠을 못 자서 연주회 가기 전에 눈 좀 붙일 요량으로 소파에 누워 TV를 켜니, 마침 Arte TV에서 대한민국 국제음악제의 연주회를 재방송 해 주고 있었다. 음악이나 듣다가 서서히 잠들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연주곡이 오늘 저녁 성남시향 연주회 프로그램에도 들어있는 브람스의 이중협주곡이 아닌가. 원래 연주회에 가기 전에 곡을 복습(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라면 예습)하는 습관이 있어, 잘 됐다 싶어 졸음을 잠시 참고 연주를 감상했다. 협연자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게데,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였다. 오케스트라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율리우스 베르거라는 첼리스트가 사용하는 첼로, 수령이 400년도 넘은 아마티의 작품이라던가.

브람스의 이중협주곡이 끝나니, 이번에는 지난 9월 유포니아 정기 연주회 때 연주했던 베토벤의 삼중협주곡을 연주했다. 계속 보다가는 연주회장에 가서 졸 것 같아서, 적당히 볼륨을 낮춰놓고 일단 눈을 감아버렸다.

연주 시작 2시간 전쯤 집을 나섰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조금 일찍 도착하면 간단히 뭐라도 사먹을 요량이었다. 차는 버스 정류장 근처 무료 주차장에 세워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먼저 강남으로 가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서초역으로 갈지, 아니면 양재로 가서 3호선 남부터미널역으로 갈지 잠깐 고민했다. 결국 고속도로를 타는 강남역 직행 버스를 타기로 했는데, 이 선택이 잠시 후 예상치 못 했던 엄청난 결과를 몰고 왔다.

도로 사정은 이미 고속도로 상에서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일반차량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여 버스가 요금소를 빠져나와 전용 차로로 진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전용차로에 오른 뒤부터는 어느 정도 속도를 내긴 했지만, 오늘따라 버스가 많아서 여느 때처럼 빨리 달리지는 못 했다. 게다가 이따금 꽉 막힌 도로 사정에 짜증이 폭발한 일반 승용차 운전자들이 무단으로 버스 전용 차로에 진입하면서 버스의 앞길을 가로 막는 일도 생겼다.

반포 IC를 통해 강남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이미 끔찍한 정체가 시작되었다. 교보타워 앞 사거리를 돌아 신논현역 앞 정류장까지 평소라면 5분도 안 걸릴 거리를 가는데, 평소의 몇 배의 시간이 걸렸다. 이미 이 시점에서 내가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서울의 교통 혼잡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이 엄청난 낭비를 초래하는 도시 문제가 과연 언젠가 해결 될 날이 오긴 할지 의문이다. 이건 문제다. 그러나 누구나 여기에 짜증은 내면서도, 정작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래서 나는 정부 정책으로 행정 수도를 이전한다고 했을 때 쌍수를 들어서 환영을 했던 것인데, 헌재에서 관습 헌법 운운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이미 반쯤은 포기했고, 요즘 세종시를 둘러싼 유치한 논쟁을 보면서 완전히 절망했다.

강남역 인근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강남에 대체 무슨 볼거리가 있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꾸역꾸역 밀려드는지 모르겠다. 인파를 헤치고 강남역으로 걸어가, 간신히 지하철을 탔다. 그러나 여기서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다.

강남역과 예술의 전당이 가까운 서초역 사이에는 단 한 역, 교대역이 있을 뿐이다. 이동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 서초역에 도착해 출구에서 버스를 잡아타면, 적어도 연주회 시작 10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있었다. 배고픈 것은 인터미션 때 로비의 카페에서 케이크라도 한 조각 사먹으면 달랠 수 있을 터. 교통이 혼잡했지만, 지각을 면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이제 막 교대역에서 승객을 태운 열차가 다시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차례 열차의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출입문 닫겠습니다.”란 기장의 안내방송. 다시 닫히는 문. 그러나 이내 문이 다시 열렸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다시 한 번 방송. 그러나 또 닫혔다 열리는 문.

“승객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열차는 현재 출입문 고장으로 잠시 정차하고 있습니다. 조치 후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뭐든지 꼬이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강남에서 서초까지 고작 두 정거장 가는데, 하필이면 그 사이에서 열차가 고장 날 게 뭐란 말인가? 처음에는 금방 고치겠지, 했는데 5분, 10분이 지나도 열차는 출발할 생각을 안 했다. 연주회 시작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표정이 일그러지고 나도 모르는 새에 주먹을 꽉 쥐기도 했다. 가끔은 정말 있는 힘껏 발로 땅을 구르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짜증이 솟구치기 마련이다.

열차는 15분가량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열차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도로 사정은 이쪽도 별로 좋지 않았다. 첫 프로그램인 ‘대학축전서곡’은 물 건너 간 것이 확실했다. 이제는 두 번째 프로그램 전에만 입장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할 판이었다.

콘서트홀에 도착했을 때, 홀 안에는 대학축전서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서둘러 현장매표소에 가서 티켓을 구매했다. 프로그램 일부를 놓쳤지만, 그래도 R석 괜찮은 자리의 표를 샀다. 일단 화장실에 들러 땀을 좀 닦아내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로비에서 역시 지각한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입장을 기다렸다. 금방 대학축전서곡이 끝났다. 직원은 티켓에 적힌 좌석과는 상관없이 일단 가까운 빈자리로 안내를 해주었다.

다행히 협주곡을 놓치지 않아서 안도했지만, 숨 가쁘게 온 터에다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1악장 연주 때는 연주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악장 안단테가 시작되자 차분한 주제 선율에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첫 머리의 호른이 약간 불안한 것 같았지만, 무난하게 넘어갔다). 아름다운 선율을 고음부의 바이올린과 저음부의 첼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참으로 평온하게 느껴졌다. 연주회장까지 오면서 쌓인 짜증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이날의 협연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아와 첼리스트 송영훈. 송영훈은 자주 본다.

그리고 3악장. 아마 브람스의 이중협주곡 중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악장일 것이다. 시작부터 첼로가 경쾌한 주제 선율을 연주한다. 이것을 곧바로 바이올린이 받고, 이어서 전체 관현악이 포르티시모로 연주하는데, 관객들로부터 최고의 몰입을 이끌어 낸다.

입구에서 공짜로 나눠준 프로그램 북은 공짜인 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곡 해설은 책의 것을 그대로 베꼈거나 혹은 개인 일기장에나 적어두는 게 어울릴 만큼 주관적인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이 곡을 작곡할 때 브람스는 솔리스트들의 기량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고 되어있다. 이 곡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텐데, 아마 브람스가 너무 어렵게 곡을 써놔서 마치 당시의 연주자들의 기량이나 한계 따위는 아랑곳 않은 듯 여겨진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곡은 연주에 고도의 기교를 필요로 해서, 솔리스트들 개개인에게 높은 역량이 요구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뛰어난 연주자들이 워낙 많으니. 이것도 프로그램 북에 적혀있던 내용이지만,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아는 뉴욕 콘서트 리뷰로부터 “정교하고 화려한 테크닉, 맑고 영롱한 소리, 깊고 넓은 음역, 열정적이면서도 담백한 연주 스타일, 바이올리니스트로 최상의 기량과 미덕을 갖춘 연주자”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화려한데 정교하고, 열정적이지만 담백하며, 깊은데다가 넓기까지 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하지만 분명 솔리스트들의 연주는 훌륭했다. 다만 워낙 힘에 넘치는 대곡이고, 또 협주곡을 쓸 때에도 항상 오케스트라 부분을 탄탄하게 작곡해 놓는 브람스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바이올린의 경우에 프로젝션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던 건 있다.

이중협주곡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객석에서 휴대폰이 한 차례 울렸다. 그리고 1악장이 끝난 뒤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주회장 안에서 휴대폰을 꺼놓아야 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부주의에 의한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악장 사이에 박수는 좀 더 미묘한 문제다. 아마추어 연주회 때에는 별다른 주의가 없으면 십중팔구 악장 사이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지난 번 삼성필 연주회 때는 브람스 4번 1악장이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가 나오려는 것을 지휘자가 객석을 향해 손을 내저어 제지한 바 있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은 하나의 에티켓으로 여겨지지만, 이것은 물론 강제적인 사항은 아니다. 또 어떤 곡들은 정말 마음껏 박수를 쳐보라는 식으로 1악장을 끝맺는다. 가령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이 끝났을 때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악장이 연주 될 동안 어떤 감정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라는 것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는 것은 무식한 행동’이라고 정의 해 버리면 간단히 끝날 일이겠지만, 오페라의 훌륭한 아리아가 끝나면 그 감동을 당장 표현하기 위해 열렬한 박수를 치는 것처럼, 종종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는 것도 허용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악장 사이의 박수보다도 이때다 하고 터져 나오는 기침이나, 마지막 악장 마지막 음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아는 체하고 브라보를 외치는 따위의 행동이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터미션 시간에는 로비의 카페에서 치즈 케이크 한 조각과 카페라테를 사서 일단 허기를 달랬다.

오늘 연주회는 브람스 스페셜로 구성되었다. 첫 프로그램인 대학축전서곡은 놓쳐버렸지만, 그렇더라도 이중협주곡과 메인 곡인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이다. 특히 오늘 성남시향의 연주로 듣는 브람스 4번에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는 국내 시향들의 연주를 직접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은 경험은 별로 없지만, 매일 같이 클래식 연주회 장면을 방송해주는 고마운 Arte TV를 통해 국내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향들의 연주를 다 감상했다. 이건 나의 솔직한 감상인데, 요즘 국내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것 같다. 과거의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듣는 바에 따르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시향조차 오늘날의 영광을 상상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정말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들을 만한 연주’를 들려준다.

매년 봄이면 전국의 시향들이 총출동하여 ‘교향악 축제’를 여는데, 각 시향들이 서로의 역량을 비교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2003년에 생긴 성남 시향도 지금까지 세 차례 교향악 축제에 참가하였다. 자기 고장에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것은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다. 앞으로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겠다.

브람스 4번.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 전체적인 짜임새도 정말 훌륭하지만, 2악장이 너무나 아름다운 곡. 이 2악장은 시작과 함께 호른과 목관이 주제 선율을 연주해 나간다. 그 사이에 현은 피치카토로 반주를 한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 프로 오케스트라를 비교하면 그 차이점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현악기의 ‘피치카토’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있어 피치카토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만일 ‘시간’을 x축에 놓고, 그 위에 현악기로 연주되는 음의 길이를 표시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다란 선분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피치카토는 시간 축 위에 점을 찍는 것이다. 연주 되는 음의 길이가 충분히 길면, 설령 첫 머리에 연주자들 간에 호흡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나중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소리로 모이게 된다. 그러나 피치카토 주법으로 연주 할 때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 한 번 소리가 어긋나면 시간 축 위에 무수한 점이 찍히게 된다. 그러면 정말 참아줄 수 없는 지저분한 소리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연주자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추어 연주자라면 누구라도 피치카토 부분에서는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혼자 엉뚱한 박자에 소리를 내면, 피치카토 부분에서는 너무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위험부담을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지저분한 소리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소리가 사라져버린다.

의미 없는 음표는 한 개도 쓰지 않는 브람스다. 반주는 화성을 채워주고, 소리를 두텁게 하며, 긴장감을 유지시켜주고, 주제 선율을 돋보이게 한다. 이 반주가 무너졌을 때, 연주는 맥이 없어지고 흐물흐물 거리며, 무게 중심 없이 그저 부유하게 되어버린다.

탄탄한 소리와 팽팽한 긴장감 끝에 아름다운 현악기의 소리로 주제 선율이 변주되어 연주될 때, 비로소 감상자는 감동으로 살짝 눈시울을 붉힐 수 있는 것이다.

앙코르 곡은 예상했던 대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었다. 다행히 5번은 아니고, 1번을 들려줬다. 브람스가 꼭 가을에만 어울리는 작곡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을이면 브람스의 곡을 많이 찾는 건 분명하다. 이제 겨울을 바라보는 늦가을, 브람스와 함께한 저녁은 즐거웠다.

2009/11/12 05:32 2009/11/12 0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