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ra Incognita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2023-11-16T17:24:48+09:00Textcube 1.10.6 : Tempo primo[文選] 4. 이사(李斯) <간축객서諫逐客書>김민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872009-10-15T05:17:54+09:002009-10-15T04:54:03+09:00<P class=바탕글>기원전 237년은 훗날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영정이 진(秦)나라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를 맞이한 해였다. 훗날의 위업으로 역사상 시황제(始皇帝)라 일컬어지는 인물이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적극적인 정복 사업을 벌이기는커녕 섭정 여불위의 손아귀에서 이제 막 벗어나 겨우 친정(親政)을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정이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 그는 겨우 13세의 소년에 불과했고, 반면 여불위는 영정의 아버지인 영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부터 그를 도와, 영자초가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장양왕) 이미 승상으로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해온 노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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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영정은 즉위 후 10년간을 여불위의 그늘 아래서 숨을 죽이며 보냈다. 그러나 영정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불비불명(不飛不鳴)하며 10년의 세월 동안 서서히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기원전 238년, 여불위의 수하였던 노애의 반란을 계기로 기회를 잡은 영정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여불위를 압박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 여불위가 자결함으로써 비로소 영정의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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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거의 시기를 같이 하여 진나라를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위수 지역 북쪽에 관개수로를 설치하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위수는 남북으로 기다랗게 자리한 진나라의 허리를 관통하고 있는 강이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이 위수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함양의 북동쪽으로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역은 땅이 매우 넓지만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인공 운하를 설치하여 물을 끌어오면 별 쓸모가 없는 황무지가 단숨에 곡창 지대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한(韓)나라 출신으로 토목 기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정국(鄭國)이란 인물이었다. 진나라에서 이 진언이 채택이 되어, 정국이 운하 건설의 총책임자로 선정되었고 공사가 시작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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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img src="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attach/1/1113060688.jpg" width="500" height="519" /><BR><BR>그런데 이 정국이 사실은 한나라가 파견한 첩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국 시대의 나라들 중 가장 세력이 약했<BR>던 한나라는, 반대로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언제 진나라의 병사가 파도처럼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나라 조정은 선수를 치기로 했다. 물론 힘으로 겨뤄서는 승산이 없다. 힘으로 안 된다면 꾀로 승부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 한나라의 속셈은, 진나라에 전대미문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스스로 국력을 소진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어설픈 감언이설로 이런 대공사를 일으키게 할 수는 없다. 정말 진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처럼 완벽하게 꾸밀 필요가 있다. 한나라도 국가의 명운을 걸고 펼치는 작전인 만큼 신중을 기해서 완벽에 가까운 제안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가짜 제안에 그쳤어야 할 것이 오히려 너무 완벽한 계획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 운하가 완성되었고, 완벽하게 기능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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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정작 더 신중을 기했어야 할 부분은 비밀의 유지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정국의 정체가 탄로 났고, 이 일은 진나라를 뒤흔든 일대 스캔들이 되었다. 이때 진나라 조정의 왕족들이며 진나라 토박이 귀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타국 출신의 관료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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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기원전 237년은 전국시대의 말기에 해당한다. 주나라가 주도하는 봉건 질서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보통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사회적으로는 100개도 넘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패권을 다투느라 한시도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혼란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왕성한 지적 활동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립한 수많은 제후국들은 저마다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해 많은 인재들이 필요했고, 이런 수요가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천한 신분이면서도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자가 있었고, 타국 출신이면서도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시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새파랗게 어린 증삼으로부터 자신의 가르침을 ‘충서(忠恕)’라는 단 두 글자로 요약 당해버린 공자도 춘추시대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나와 여러 국가를 떠돌며 일자리를 구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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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런 시대였던 만큼, 외국 출신의 인사가 국가의 중요한 책임을 맡아보는 자리에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진나라는 외국 인재 등용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BR><BR><img src="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attach/1/1154466354.jpg" width="500" height="416" /><BR><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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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진나라는 비록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는 있어도 중국 대륙의 중심이 아니라 서쪽으로 치우친 변방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진나라가 중국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상당히 소외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당시 진나라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맹하고 호전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열등한 야만족의 인상이 짙게 풍긴다. 진나라의 건국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진나라는 은나라 주왕을 섬기던 신하 악래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은나라의 주왕은 폭정으로 주나라에게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 폭군이었고, 악래는 그 주왕과 죽이 잘 맞은 간신이었던 모양이다. 주나라는 은나라 정복 후 설령 주왕의 친족이라 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제후로 봉했을 정도로 처분에 관대했지만, 악래는 처형했다. 그런 악래의 후손들이 변방에 세운 나라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까, 당시 중국 대륙 중앙에 위치한 국가들이 진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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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은 곧 뛰어난 인재를 배출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국민들의 기질이 용맹하다고 해도, 이것을 잘 통합하고 이끌 지도자가 없어서는 패자(覇者)가 될 수 없다. 진나라가 외국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납득이 갈 뿐만 아니라, 훌륭한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무리 국경의 의미가 오늘날과 같지 않은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외국 인재의 등용을 모두가 달갑게 여긴 것은 아니다. 외국 인사를 관료로 임명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오늘날에는 심지어 험한 일을 도맡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조차 눈을 흘기는 것이 인심이다. 따지고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나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게 그들을 배척하는 본심이지만, 항상 대의명분은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귀결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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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또한 높은 문화 수준으로 동질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중국 중앙부의 국가들과는 달리, 진나라 토박이들은 열등의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외국 출신의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정국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순수 진나라 토박이들은 이것이 외국 출신의 인사들을 추방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회복할 기회라고 생각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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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진나라 왕 영정은 이제 겨우 여불위를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시작부터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영정의 국가 운영 방침을 결정하는 중대한 사안이기도 했다. 당시 영정의 나이는 고작 이십대 초반. 그의 결정에 따라 향후 수십 년 진나라의 정책 노선이 달라질 터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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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역시 젊었던 탓인지, 영정도 혈기왕성했다. 외국 인사들을 추방하고 진나라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자는 의견에 솔깃했다. 지난 10년간 자신을 억눌렀던 여불위도 실은 한나라 출신이었다고 하니까, 그로 인해 더욱 타국 출신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영정은 결심을 한다. 곧 축객령(逐客令)이 내려졌다. 객(客)이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손님’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객(客)들을 좇아내라(逐)라는 령이라고 해서 통칭 축객령이라고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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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웃 나라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하던 정국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것은 당연하지만,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진나라 조정을 섬겨왔던 많은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성취를 잃고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이사(李斯) 역시 그런 난처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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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사(李斯)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 뒷간의 쥐와 곳간의 쥐의 태도가 다른 것을 보고 환경의 중요성을 통찰했다고 하니까,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사가 초나라에 머물러서는 뒷간의 쥐 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일찌감치 진나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는 과연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여 순조롭게 승진했다. 축객령이 내려질 당시 이사는 객경(客卿)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경(卿)은 공경대부(公卿大夫)로 통칭되는 중국 고유의 직위 제도 안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다. 경(卿) 앞에 객(客)자가 붙은 것은 외국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위치가 높은 만큼 표적이 되기도 쉽다. 이사는 당장에라도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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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때 이사가 왕에게 글을 한 편 써 올린다. 축객령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명을 물릴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축객령에 간(諫)한 글’이라 하여 ‘간축객서(諫逐客書)’라 불리는 유명한 글이다. 여기 그 전문을 소개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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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PADDING-BOTTOM: 10px; BACKGROUND-COLOR: #c9edff; PADDING-LEFT: 10px; PADDING-RIGHT: 10px; PADDING-TOP: 10px">
<P class=바탕글><들리는 바에 따르면 진나라 관리들이 외객의 추방을 결의하였다고 하는데, 신의 생각으로 이는 당치도 않은 결정입니다. 옛날 목공(穆公)은 어진 선비를 구하여 유여를 서쪽의 융(戎)에서 취했고, 백리해를 동쪽의 완(宛)에서 얻었으며 착숙을 송나라에서 맞이했고 비표, 공손지를 진(晉)나라에서 찾았습니다. 이 다섯 사람의 모국은 진나라가 아니었지만 목공은 그들을 등용하여 20개국을 병합하고 마침내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또 효공(孝公)이 상앙의 법을 채용하여 풍속을 개혁함으로써 백성은 번영하고, 나라는 부강하게 되고, 백관은 즐거이 봉사하고 제후는 친히 복종하고, 초(楚), 위(魏)의 군사를 깨뜨려 넓힌 토지가 천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군사가 강한 것입니다. 혜왕(惠王)은 장의의 계획을 써서 삼천(三川)의 땅을 둘러 빼고, 서쪽으로 파(巴), 촉(蜀)의 땅을 합하고, 북쪽으로 상군(上郡)을 치고, 남으로 한중을 취하여 여러 오랑캐를 아우르고, 언(?), 영(?)을 제압하고, 동은 성고의 험난한 곳을 의지하여 기름진 토지를 뺏고, 마침내 6국의 합종을 해체하여 진나라에 복종케 하였습니다. 그 공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왕(昭王)은 범수를 얻어 그 계략에 의하여 양후(穰候)를 폐하고 화양군을 추방함으로써 공실을 굳세게 하고, 사가의 번창하는 길을 막고, 제후의 땅을 잠식하여 진나라의 제업을 이룩하였습니다. 이 네 분의 군주는 모두 외객을 등용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외객이라 하여 반드시 진나라를 배반한다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란 말입니까? 만약 이 네 분의 군주가 일찍이 외객을 물리쳐 받지 않고 어진 선비를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부귀함을 거두지 못 하고 진나라의 굳센 명성이 없었을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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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제 폐하는 곤륜산(崑崙山)의 유명한 옥을 손에 넣었고, 수후주(隨侯珠)와 화씨벽(華氏璧)을 지니고 계시고, 명월주(明月珠)로 몸을 치장하고, 태하의 명검을 차고, 성리의 좋은 말을 타며, 취봉(翠鳳)의 깃털을 세우고, 악어가죽으로 만든 북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이들 여러 가지 보배는 어느 하나도 진나라에서 난 물건이 아닌데 폐하께서 이런 물건을 귀중히 생각하는 것은 어쩐 일이십니까? 만약 진나라에서 나는 물건만을 쓰신다고 하면 야광의 벽옥은 조정에 장식할 수 없고, 뿔과 상아로 만든 기물은 완상할 수 없으며, 정(鄭), 위(衛)의 미녀는 후궁으로 들일 수 없고, 결제 같은 준마도 마구간에 넘칠 수 없으며, 강남의 금, 은도 쓰임새에 충당할 수가 없고, 서촉의 단청도 채색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후궁을 장식하고, 궁내의 쓰임새를 충당하고, 심정을 즐겁게 하고, 이목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진나라 산물이 아니면 쓸 수가 없다고 한다면, 완의 주옥으로 만든 비녀, 구슬을 붙인 귀고리, 아호(阿縞)의 비단옷, 금수의 장식은 대왕의 앞에 올릴 수가 없으며, 토속 그대로 아취를 더한 조나라 미인 역시 지금처럼 폐하를 모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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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물독을 치고, 항아리를 두드리고, 쟁을 퉁기고, 무릎을 치며 노래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참으로 진나라의 음악이며 정(鄭), 위(衛), 상간(桑閒), 소(昭), 우(虞), 무(武), 상(象)은 이국의 음악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진나라에서는 물독과 항아리를 두드리는 대신 소와 무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이 곧 마음을 즐겁게 하고 눈으로 보기에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물을 취하는 것은 이와 다르게 논설의 가부와 행위의 곡직을 말하지 않고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제외하여 외국 사람을 추방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진나라가 존중하는 것은 여색과 음악뿐이며 인물은 경멸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일어서서 해내(海內)의 제후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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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신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고, 나라가 크면 사람이 많고, 군대가 굳세면 병졸이 용감하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FONT style="BACKGROUND-COLOR: #ffffff">태산은 한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기에(泰山不辭土壤) 그토록 크며, 바다는 한 가닥의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아(河海不擇細流) 그토록 깊어진 것입니다.</FONT> 임금 역시 한 인간일지라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덕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의 땅에는 사방의 구별이 없고, 임금의 백성에는 이국의 차별이 없고, 네 계절이 조화하여 그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귀신도 성인의 시대를 칭송하여 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삼황과 오제로 하여금 적이 없게 했던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민을 버리고 적국을 이롭게 하며, 빈객을 물리치고 제후를 도와 천하의 선비를 뒷걸음질 치게 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아니하며, 발을 묶어 진나라로 들여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원수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됩니다. 진나라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고도 보배로 삼을 것이 많으며, 진나라에서 난 선비가 아니고도 충성을 바치는 자가 많습니다. 이제 외객을 추방하여 적의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줄여서 원수에게 이롭게 하고, 국내에서는 스스로 모자라는 것을 견디고, 국외에서는 열국의 원한을 사면, 어떻게 나라의 편안을 바라며 어떻게 소원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P></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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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타국 출신의 인사들이 진나라 조정에 진심을 다해 충성할 리가 없다, 결국 자기 출신 나라의 이익이 결부되면 배신을 할 게 분명하니까 미리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논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주장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물리치기가 더 어렵다. 아무리 정연한 논리를 세워 반박하더라도 듣는 쪽에서 귀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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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사(李斯)의 글은 과연 명문이다. 논리적으로도 흠잡을 구석이 없다. 그러나 이 글이 진정 명문으로 꼽히는 까닭은, 이 글이 단지 완벽한 논리만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는 어떤 기백이 서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진나라 토박이들의 옹졸한 생떼로 들뜬 왕의 가슴을,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웅장한 기상으로 달궈놓는 것이다. 이사는 글에서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도 서슴지 않지만, 요순시대 이야기를 꺼내며 왕이 앞으로 이룩해야 할 위업이 어떤 것인지를 넌지시 암시한다. 요순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그것은 중국 대륙이 완전히 통일되어 하나의 왕 아래 질서를 갖추고 국가의 구분 없이 모든 백성이 화목을 누렸던 이상의 시대가 아닌가? 장차 그런 시대를 다시 열어야 할 분이 지금 이 나라 사람 저 나라 사람 운운하는 것은 너무 쩨쩨한 것 아닌가? 이사가 글 서두에 구구절절 늘어놓은 과거의 예는 단지 과거의 예일 뿐이다. 그런 케케묵은 이야기들은 사실 무시해도 좋다. 하지만 장차 진나라가 중국 대륙의 태산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한 줌의 흙이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시기에, 오히려 산을 스스로 허물 작정인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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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결국 축객령은 폐지되었다. 이사가 계속 중용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번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인 정국조차 첩자 노릇을 관두고 공사에 최선을 다해 운하를 완벽하게 완성시킨다는 조건 하에 처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직위도 그대로 두었다. 이후에 정국은 자기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일국의 일개 첩자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운하의 완성자로 이름을 남기고 싶은 토목 전문가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정말 운하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정국의 이름을 따 정국거라고 불린 이 운하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 고대 중국의 뛰어난 건축 기술의 증명이 되었다. <BR><BR><img src="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attach/1/1240933572.jpg" width="400" height="490" /><BR><오늘날 새로 정비된 정국거의 모습><BR><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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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사의 호소가 이제 막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접어든 야심찬 젊은이의 가슴을 새로운 기백으로 채우고 시선을 미래로 돌리게 만든 것이다. 어차피 조만간 자신이 대륙을 통일하면 진나라, 초나라, 한나라의 구분도 없다. 이사의 글을 읽고, 영정은 벌써 여기에 생각이 미쳤는지도 모른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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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정국이 완성한 운하로 황무지는 옥토로 변모했다. 이 옥토의 생산물이 진나라가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사 등 외국 인재들을 두루 활용한 것도 종전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중국 대륙을 통일했고, 영정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게 되었다. 대륙 변방의 가장 야만한 나라 중 하나였지만, 외국의 것을 배척하지 않고 잘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에 마지막에는 오히려 다른 나라들을 모두 제압하고 패자(覇者)가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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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div class="imageblock left" style="float: left; margin-right: 10px;"><img src="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attach/1/1326993882.jpg" width="200" height="409"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div>그러나 젊어서는 포용력이 있고 진취적인 기백이 넘쳤던 영정이, 통일 이후에는 그런 장점을 모두 잃고 만다. 너무 젊어서부터 두드러지면 쇠퇴도 빠른 것일까. 진나라는 이사나 정국 같은 타국 출신의 책사, 기술자들을 등용함으로써 패업을 이룬 나라다. 그런데 통일 이후에는 밖으로는 오랑캐 대책으로 만리장성을 쌓아 국력을 소모시키고, 안으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대표되는 사상 탄압 정책으로 다양성의 씨를 말려버렸다. 결국 진나라는 통일을 이룩한 지 15년 만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망하고 말았다. 외국인 기술자를 등용하여 만든 운하는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외침을 막으려고 세운 성벽은 오히려 국가가 망하는 원인이 되어버렸으니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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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오늘날 여전히 우리, 우리의 것, 국가, 민족을 외치는 것을 진정한 애국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간축객서의 태산불사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辭土壤 河海不擇細流)란 구절과 더불어 이런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P><p><strong><a href="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87?commentInput=true#entry87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文選] 3.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페리클레스의 추모 연설>김민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252009-11-10T03:45:04+09:002009-05-29T03:36:52+09:00<p id="more25_0" class="moreless_fold"><span style="cursor: pointer;" onclick="toggleMoreLess(this, '25_0','연설문 전문','less..'); return false;">연설문 전문</span></p><div id="content25_0" class="moreless_content" style="display: none;">오늘까지 이 연단에 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몰자들에게 조사(弔辭)를 바치는 것을 옳다고 보고, 이 연설의 관례를 법으로 정한 인물을 칭찬 해 왔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행동으로 나타난 그 명예는 행동으로 표창되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공중(公衆)의 손으로 준비된 이 매장 행사를 여러분이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이, 다수인의 덕행이 한 개인에게 맡겨져 그 사람의 뛰어나거나 혹은 서툰 연설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중용을 얘기할 때에는 청중들조차 믿기 어려워하는데, 하나의 주제 아래 완벽하게 연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죽은 사람과 친했던 사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중용의 연설은, 발표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나 죽은 사람에 관한 자신들의 지식에 비해 뭔가 부족한 인상을 주고, 또 죽은 사람과 교제가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한 연설은 질투심에서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이 이런 관습을 좋은 것으로 인정한 이상, 나도 그 법에 따라 되도록 여러분의 생각과 희망을 표현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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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먼저 나는 우리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회에 조상을 생각하고 그분들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올바르고 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들은 이 나라에 대대로 변함없이 상주하고, 그 덕행을 통해서 자유를 현세대에까지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이런 칭송을 받을 만하다면, 더욱 그에 적합한 것은 우리의 선대(先代) 분들입니다. 요컨대 선대 분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 받은 것 위에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지배권을 애써 쌓아올려 그것을 물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FONT color=#0000ff>이 지배권을 손수 돌보고 키운 것은 아직도 여전히 젊음이 넘치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전시나 평시를 가리지 않고 각각의 도시에서 자원을 의존할 수 있도록 모국(母國)의 힘을 키운 것도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FONT> 그러나 나는 이 연설이 지루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지배권을 발전시킨 전적을 일일이 열거하거나, 선조나 혹은 우리가 이어족 및 헬라스인의 침공에 대해 어떻게 과감히 대항했는가를 여기에서 되풀이해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떠한 생활 태도가 우리를 오늘로 인도하고, 어떠한 정체와 정책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대제국을 이루게 했는지 이러한 점들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그런 뒤에 이 전몰자들에 대한 찬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점들이 이 단상에서 언급되는 것이 어울릴 뿐만 아니라 시민이든 외인이든 모든 청중에게 유익하리라 나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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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우리의 정체(政體)는 이웃의 관례에 따른 것이 아니며,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정치 책임이 소수자에게 있지 않고 다수자 사이에 골고루 나뉘어 있기 때문에 ‘데모크라티아’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분규와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이와 동시에 개인의 가치에 따라, 즉 각자가 얻은 성망(聲望)에 기초하여 계급에 의논하지 않고 능력 본위로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그리고 국가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난 때문에 이름도 없이 헛되이 죽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공직에 종사하고, 서로 일상생활에 힘씁니다. 서로 질투에 찬 감시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이웃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든 무례해 보이는 손해 행위를 하든, 심지어 명백한 형벌 없이 위해를 가하든 우리는 분노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방치해두지도 않습니다. 악의를 갖고 개인의 일에 간섭치 않고, 두려움을 품고 마땅히 공적인 일에서 법을 어기지 않으며, 언제나 법과 판사를 존중하고, 특히 학대받는 사람을 지키는 법과 모두에게 수치를 가르치는 불문율에 유넘하고 있습니다.</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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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더 나아가 우리는 많은 기분 전환거리를 강구해 놓았습니다. 국가가 사계절을 통해 경기 대회나 제전을 개최하고, 개인의 유쾌한 주거지는 나날의 노고를 잊게 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의 위대함 때문에 온갖 물건이 빠짐없이 모이고, 그래서 우리 아테네인은 세상 끝의 산물까지도 이 땅의 산물처럼 똑같이 즐기고 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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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또 우리의 군사 정책도 적과는 다릅니다. 먼저 우리는 문호를 활짝 열고 소위 외인 추방 등으로 다른 사람의 견문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설사 이 공개주의 때문에 적이 우리에게서 뭔가를 배워 편의를 도모할지다로 장비나 책략보다 우리의 감투(敢鬪) 정신을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 군사 교육에 있어서도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엄격한 훈련으로 용기의 함양을 추구하고 있지만, 우리는 자유롭게 놔두면서도 그들에 대항해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라케다이몬인은 단독 출병을 하지 않고 모든 동맹군과 상의한 뒤에 우리의 영토에 출병 해 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 이웃 영토에 침입하거나, 외지에서 본거지를 지키는 자와 TK워 대부분 쉽게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적이든 우리의 전 세력에 한 번도 직면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해군을 증강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육상 부대를 각지에 파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군의 일부와 교전해 승리를 얻으면 그 부분적인 승리를 가지고 우리 전체를 격파했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EH 격파당하면 우리의 전 세력에 정복되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훈련이나 군기에 번거롭게 시달리지도 또 서두르지도 않고 태연하며, 용기를 갖고 혼연히 위험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곤경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더욱이 일단 전열(戰列)에 서면 평소 훈련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보다 훨씬 용감하게 행동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만으로도 우리 도시는 가히 경탄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또 이것만이 아닙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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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의 바탕으로 삼을 뿐이며,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자 모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전사(戰士)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FONT color=#ff0000>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 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오직 우리뿐입니다.</FONT> 우리는 문제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촉진시킵니다. 비판이 실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판으로만 흘러 해야 할 행동을 소홀히 하는 일도 없습니다. </FONT>또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우리는 남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목적을 신중히 검토하는 자세와 그것을 과감하게 단행하는 능력을 아울러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남들을 보면 무지가 만용을 불러일으키고, 신중한 생각은 망설이는 태도를 가져옵니다. 공포도 환희도 잘 알고, 게다가 또 위험에 겁을 먹지 않는 자야말로 참된 용자(勇者)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말하는 착한 일도 남들과 달리 그 뜻이 은혜를 받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베풀어 친구를 만드는 데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자는 그 고마워하는 뜻을 잃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점점 더 신뢰받지만, 의리상 은혜를 갚으려는 자는 감사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성의를 잃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의 또 다른 특질은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해를 따지지 않으며 자유를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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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말하자면 전시(全市)가 헬라스의 규범인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독립해서 각각 넓은 분야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장례 때문에 말을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이로 인해 우리가 얻은 이 나라의 국력이 실증해주고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 명성을 능가하는 힘을 보여준 것은 오늘날 오직 우리뿐입니다. 우리에게 패한 적도 우리에게만은 한을 품지 않으며, 따르는 속국도 우리 이외에는 그 권력에 적합한 맹주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그 힘을 보여준 우리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경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실이 진실을 말한다면 호메로스의 찬가(讚歌)도, 잠시 귀를 즐겁게 하는 멋진 표현도 우리에겐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용기 앞에 굴복한 모든 바다와 육지는 함께 길을 열어 우리를 받아들였고, 세상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쇠(盛衰)의 기념비를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이토록 위대한 아테네를 위해 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고귀하게 싸우며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도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고난을 헤쳐 나가는 것이야말로 남은 사람들의 의무인 것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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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 도시에 관해 이토록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첫 째, 비교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도시와 우리와의 싸움에서는 그 목적이 자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이제 말씀드릴 전몰자들에 대한 예찬에 확실한 논거를 부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이 전몰자 예찬의 주된 목적도 이미 달성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FONT color=#0000ff>내가 찬양한 이 도시를 빛낸 것은 오로지 여기에 잠든 사람들의 수훈이기 때문입니다. 이 수훈과 예찬이 여기에서 산화한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예는 헬라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편안히 쉬게 될 사람들의 최후는 먼저 그 덕(德)에 명성을 주고, 이어서 그것을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FONT>조국을 위해 싸운 무용(武勇)이야말로 사람의 단점을 상쇄한다는 주장은 타당합니다. 요컨대 선행(善行)은 악행을 덮어주고, 시민으로서의 장점이 개인으로서의 단점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미래에 지닐 수 있는 부(富)의 쾌락에 마음이 끌려 기가 꺾이거나,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나 잘살 수 있다는 희망에 죽음을 망설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유함 보다는 적에게 복수하길 희구하고,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내던질 만한 비길 데 없는 영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적을 죽이기로 결심을 굳히고, 부나 쾌락을 초월해 이 결의가 성취되길 기원했던 것입니다. 확실치 않은 전운(戰運)에 희망을 걸고, 목전에 둔 임우를 자신을 믿고 대담하게 수행해 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고, 그리하여 퇴각해 생명을 보존하기보다는 대항해 싸우다 죽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불명예스런 이해타산을 피하고 자신의 온몸을 바쳐 전열(戰列)을 고수한 그들은, 천재일우의 호기를 이용해 공포보다 영광스럽기 그지 없는 상태에서 죽어갔던 것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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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리하여 그들은 아테네에 어울리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뒤에 남은 사람들의 위험이 보다 적어지길 기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전장에 나서면 이 용사들 못지않은 대담무쌍함을 보일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국방의 의의를 말하고, 주지하는 바 보국론을 되풀이해 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나날이 아테네의 힘을 실제로 체험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이 위대한 것을 느낄 때마다, 그것을 획득한 용사들은 전장에서 무엇이 수치스런 일인지 알고,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결코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았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또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이들 용사가 아테네에 준 비길 데 없는 무상의 보물은 설사 시도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아테네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한 마음가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몸을 나라에 바쳐 불멸의 찬사와 영광 외에 보다 나은 분묘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FONT color=#0000ff>그들은 지하에 묻히고 만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명(英名)은 영원히 기억되고,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언동(言動) 속에서 영원히 기념될 것입니다. 요컨대 대지는 모두 영웅들의 묘지가 되어, 모국에서 묘석의 비문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이 없는 땅에서도 무형 무언의 기념비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자유가 없는 곳에 행복이 없고, 용기가 없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쟁의 위험 앞에서 망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FONT>바라는 행복조차 지니지 못 한 비참한 자가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무엇을 위해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행운도 지나치면 역전되어 큰 변화가 초래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명을 걸로 행복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긍지 있는 사람은 겁을 내고 살면서 수치를 당하기보다 모국을 위해 힘을 다하고 희망에 불타면서 홀연히 죽어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입니다.</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그러므로 여기에 모인 전몰자의 부모가 되는 여러분께 애도의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보다 나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건을 경험하며 성인이 된 그들은 지금 저 피안(彼岸)에서 초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전몰자들처럼 최상의 영광으로 가득 찬 최후를 맞이하고, 여러분이 바치는 것과 같은 애도를 받을 수 있으며, 게다가 그 풍요로운 생애의 종말도 충실했던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의 깊은 슬픔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전의 자신들의 기쁨을 오늘 이후로는 남들의 손안에서 찾아내야 할 때, 여러분은 수없이 그 추억에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도 쓰라리지 않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행복을 빼앗기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아직 낳을 수 있는 연령에 있는 사람들은 그 대신 태어날 자식에 대한 희망 속에서 견뎌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날 자식들은 가정에서 죽은 자식을 잊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국가에는 인구와 방위 양면에서 유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내 자식의 생명을 나라에 바치지 않고 평등과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이가 든 분들은 행복했던 인생을 인과응보로 보고, 슬픈 날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죽은 사람들의 명예에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만이 늙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도 말했듯이 은퇴 연령에 있는 사람은 사리사욕을 따르지 않고 존경 받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그리고 여기에 모여 있는 전몰자의 형제나 유자녀 여러분, 내게는 여러분의 장래에 격렬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즉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칭송하는 것은 세상의 관습이고, 공적인 면에서 여러분은 도저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고 약간 모자람이 있다고 간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모두 살아 있을 동안에는 서로 경쟁의식에서 질투하지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게는 순순히 경의를 표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오늘 이후 미망인이 되는 분들의 부덕(婦德)에 대해 한 마디 언급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짧은 권고에 담겨 있습니다. 즉 여성의 본분에서 벗어나지 말며, 좋든 나쁘든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무엇보다 긍지로 삼으라는 것입니다.</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나는 관례대로 해야 할 말을 다했고, 여기에 안치된 사람들을 위해 거행되어야 할 의식도 이미 순조롭게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 전몰자들과 그 유족에게 나라가 주는 그들에 대한 승리의 관으로서 그들의 자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양육비를 아테네가 국고를 통해 오늘부터 보증합니다. 즉 덕행에 지상의 명예를 주는 나라야말로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각자 이곳을 떠나기 전에 연고가 있는 전몰자들에 대한 한탄을 충분히 풀고 가시기 바랍니다.</P></div><p><strong><a href="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25?commentInput=true#entry25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文選] 2. 사마천, 사기 열전편 제1 <백이열전>김민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142009-05-23T16:21:52+09:002009-05-23T16:10:23+09:00<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size=2>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힘없는 한 개인으로 와서 시대의 격류에 휩쓸리다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혹은 그 흐름에 저항하고 물줄기를 돌려보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혹은 저 고소(高所)의 바위 위에 정좌하고 앉아 골짜기의 탁류를 관조하는 것일까?</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size=2>세상에 정의가 흐려지고 소의가 대의에 앞서며 비열함이 떳떳함을 목 조르는 일은 흔히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정의를 잃은 지 너무 오래되어 간사함의 뿌리가 온 땅에 깊이 내렸다. 그러니 의로움이 싹 틀 한 줌의 땅이라도 남아 있을런가.</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size=2>사마천에게 신(神)은 곧 인간의 역사(歷史)였다. 의로운 사람들이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굶어 죽었고,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던 도척은 부귀와 천수를 모두 누렸다. 이것을 두고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가 그릇된 것 같다. 그러나 훗날 공자와 같은 성인이 나타나, 백이와 숙제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 의로움을 제시하니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니 백이와 숙제는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그 위로를 받을 것이고, 도척은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size=2>실천적인 정의로움은 죽은 뒤 하늘에서 작은 안락함으로 보상받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후세의 정당한 평가 속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즉 인간의 역사에서 결국 그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size=2>오늘 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어떤 울분이 들끓게 만들었다. 그는 정의를 상실한 사회에서 무언가 변화를 주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방편의 세련되지 못 함이나 작은 흠결들을 말하길 좋아하지만, 나는 다만 그 대의를 따르고자 한다. 젊은 사람들의 사명은 현실 운운하기 이전에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모범을 따라 이 시대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BR><BR></P>
<p id="more14_0" class="moreless_fold"><span style="cursor: pointer;" onclick="toggleMoreLess(this, '14_0','백이열전','less..'); return false;">백이열전</span></p><div id="content14_0" class="moreless_content" style="display: none;"><!--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전략)<BR><BR>무왕(武王)이 은나라를 평정해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게 되었는데, 백이, 숙제 형제만은 이를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 신의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였다. 그리하여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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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지금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무왕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고도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더라.</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신농(神農), 우(虞), 하(夏)는 어느 사이엔가 이미 사라져버렸으니,</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내 어디로 돌아가리? 아, 가리라, 목숨도 이미 지쳤거니.</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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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이 노래에서와 같이 백이,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 노래를 두고서 생각해 본다면, 과연 백이, 숙제는 사람을 원망하는 뜻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 이렇게도 말한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하늘의 도리(天道)는 사사로움이 없으며,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이 된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그렇다고 하면, 백이와 숙제 같은 이들은 과연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이 소박하기를 이와 같이 하고도 마침내 굶어 죽었으니 말이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이런 예는 또 있다. 공자의 문하에 있던 70여 제자 중에 공자는 오직 안회만을 가리켜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회는 자주 끼니를 잇지 못 하였고, 지게미와 쌀겨로조차 배를 채우기가 어려워 마침내는 요절하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은 이런 것인가?</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인명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쳐먹고 포악 방종한 수천 명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끝내 아무 천벌도 없이 제 목숨을 온전히 누리고 살았다. 이것은 대체 무슨 덕에 의해 그렇게 되었는가?</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여기에 든 것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들이다. 그 밖에 근세에 이르러서는 그 하는 짓이 방종하여 남에게 못 할 짓을 마음대로 하고도 종신토록 호강하며 살고 부귀가 자손에까지 이어지는 예도 적지 않다. 이런 일에 비해 걸음 한 번을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밟고, 말 한 마디를 하는 데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만 말하고, 길을 가는 데도 지름길을 가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분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재앙을 만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일은 나를 아주 당혹스럽게 한다. 이른바 하늘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공자는 이렇게 말한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사람은 실천하는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는 것도 같이 하지를 않는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이것은 각기 자기 의사를 좇아서 할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이렇게도 말한다. </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만약에 부귀가 뜻하는 바와 같이 얻어질 수 있다면, 천한 직업인 경마잡이 하인일지라도 나는 이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내 즐기는 바를 좇을 것이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다시 이렇게도 말한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겨울 추운 때를 당해서야 비로소 송백(松柏)이 푸르른 것을 알 수 있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세상이 혼탁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청렴한 사람이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부귀를 중히 여기는 속인들과 의를 중히 여기는 인사들은 뚜렷이 대조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하듯 군자는 죽은 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가자(賈子, 賈誼)는 말한다.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 때문에 죽고 열사는 이름을 위해 죽고 권세를 부리고자 하는 자는 권세 때문에 목숨을 잃고 평범한 서민은 그저 생활에 급급하다.”</FONT></P>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00>같은 광명은 서로 비추어 주고 같은 무리는 서로 어울리기를 마치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는 것과 같이,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타나고서야 만물도 빛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백이, 숙제는 현인이지만 공자의 붓을 통해서 비로소 그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고, 안연(顔淵, 顔回)은 학문에 충실하였지만 공자의 기미(驥尾)에 붙음으로써 그 조촐한 품행이 더욱 더 돋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함께 동굴에 숨어 사는 선비라도 나가고 들어감에 때의 이로움과 이롭지 못 한 것이 있으니, 허유나 무광 같은 분의 이름이 높이 나지 않은 것은 슬픈 일이라고 하겠다. 촌구석에 살면서 품행을 닦고 이름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덕 있는 명사를 만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가 있겠는가.</FONT></P></div>
<P class=바탕글><BR></FONT></P><p><strong><a href="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14?commentInput=true#entry1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文選] 1. 몰리에르, <타르튀프 서문>김민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42009-11-10T03:44:41+09:002009-05-11T18:55:25+09:00<p id="more4_0" class="moreless_fold"><span style="cursor: pointer;" onclick="toggleMoreLess(this, '4_0','타르튀프 서문','몰리에르, 1669년'); return false;">타르튀프 서문</span></p><div id="content4_0" class="moreless_content" style="display: none;">타르튀프 서문<BR>몰레이르, 1669년<BR><BR>이 작품은 말도 많았고 오랫동안 박해받았던 희극이다. 이 희극이 다루는 사람들은 내가 지금껏 다루었던 그 모든 사람들보다 프랑스에서 힘 있는 자들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후작들, 귀부인들, 오쟁이진 남편들, 의사들은 자신들이 극화된 사실을 그럭저럭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희화적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처럼 재미있어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 위선자들은 조금도 농담을 받아넘기지 못 했다. 처음에는 그들은 질겁했고, 내가 무례하게도 그들의 갖가지 표정을 농락하고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개입된 직업을 비방하려 든 것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로서는 결코 용서 못 할 범죄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격분하여 내 희극에 맞서 무장했다. 그리고 그들을 아프게 한 부분으로 공격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도 정치적이었고, 자신들 영혼의 밑바닥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도 처세에 밝았던 것이다. 그들은 훌륭한 관습에 따라 하나님을 내세워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치장했다. 그들은 <타르튀프>가 신앙을 모독하는 연극이라고 말한다.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경한 말로 그득하며, 지옥불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불경하며, 제스처 또한 죄악이라고 한다. 눈짓 한 번, 머리직 한 번에도, 또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한 발짝 옮기는 것에도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보고 그들은 그걸 내게 불리한 쪽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이 연극을 친구들의 해석에 맡겨 보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의 검열에 맡겨 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이 연극에 가할 수 있었던 수정들, 이 연극을 본 국왕과 왕후의 판단, 대중 앞에서 이 연극을 칭찬한 지체 높은 대공들과 대신들의 찬양, 이 연극을 유익하다고 판단한 선량한 사람들의 증언, 이 모든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조금도 단념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들은 떠벌이기 좋아하는 열성분자들을 시켜 공개적으로 떠들어대게 하였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욕설을 퍼붓고, 자선하듯 나를 지탄하는 것이다.<BR><BR>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나의 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들의 책략,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인해 사람들이 보여 주는 대로 쉽게 받아들이는 정말로 선량한 사람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그들의 선의에 선입견을 주입하는 그들의 책략만 아니었다면, 난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책략들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방어하게끔 만들었다. 내 희극의 구성에 대해 내가 해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진짜 신자들이다. 나는 그들이 보기도 전에 비난하지 말기를,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그 찌푸린 표정 대문에 체면이 말이 아닌 자들의 격정에 이용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간청한다.<BR><BR>내 희극을 선의를 가지고 검토해 본다면, 내 의도들이 순수하며 숭배해야 마땅한 것을 우롱하려는 것이 조금도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미묘한 문제이기에 최대한 조심을 해서 다루었으며, 위선자와 진짜 신자를 구분짓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술과 정성을 기울였음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그 간악한 인물의 등장을 준비하는 데만 두 막을 통째로 활용했다. 그자는 단 한순간도 관객을 애매한 상태에 두지 않는다. 처음에 관객은 내가 그자에게 부여한 특징을 통해 그를 알아본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악인의 성격을 관객들에게 드러내 주고, 그에 맞서는 진정한 선인의 성격이 드러나게 하지 않을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도 하지 않는다.<BR><BR>그러면 그 높으신 분들은 이렇게 넌지시 답하려 들 것이다. 이러한 사안은 연극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지만 나는 그 훌륭한 기준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그분들에게 묻고 싶다. 그것은 그들이 그저 추측할 뿐이고, 어떤 방법으로도 중명하지 못 하는 하나의 제안에 불과하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희극이 그 기원을 종교에 두고 있었으며, 신비스런 종교 의식의 일부였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웃 스페인인들의 축제에는 언제나 희극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네에서도 희극은 오늘날까지도 오텔 드 부르고뉴가 소속되어 있는 극회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곳은 우리의 중요한 성사극들을 올리기 위해 제공되었던 장소이다. 거기서는 소르본 박사라는 이름 아래 고딕체로 새겨진 희극들을 아직도 볼 수 있으며, 멀리 갈 것도 없이 코르네이유의 성스런 작품들이 공연되었으며, 온 프랑스가 그 공연들을 찬양했다.<BR><BR><FONT color=#0000ff>만약 희극의 역할이 인간들의 악덕을 교화하는 데 있다면, 어떤 이유로 그에 대해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에 한층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극이 교화를 위한 큰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진지한 도덕적 표현들은 대개 풍자적 표현들보다 그 효과가 덜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꾸짖는 데는 그들의 잘못들을 묘사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그 잘못들을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도록 공개한다는 것은 악덕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다. 사람들은 질책은 쉽게 묵인한다. 하지만 조소는 좀처럼 묵인하지 않는다. 고약한 사람이 되는 건 원할 수 있어도,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조금도 원하지 않는 법이다.<BR></FONT><BR>주인공 사기꾼의 입에서 신앙의 말들이 나오게끔 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날 비난한다. 하지만 위선자의 특징을 잘 표현하기 위해 그러지 않고 달리 어쩌겠는가? 내가 보기엔 그자로 하여금 그런 말들을 하게끔 만드는 나쁜 동기들을 드러내고, 그자가 나쁘게 사용하는 걸 듣게 된다면 참기 힘들 것 같은 신성한 용어들만 배제하면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그는 제4막에서 유해한 훈계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 훈계는 우리 모두가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내 희극에서는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는가? 어떻게 그처럼 모두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들이 사람들의 머리에 어떤 인상을 남길까봐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것들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그것들이 위험한 것이 될까봐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것들이 한 극악한 자의 입을 통해 어떤 위엄을 얻기라도 할까봐서? 그 같은 기미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희극 <타르튀프>를 인정하든가, 아니면 모든 희극을 통틀어 처단해야 할 것이다.<BR><BR>얼마 전부터 사람들이 맹렬히 집착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지금껏 한 번도 사람들이 연극에 대해 이처럼 격분했던 적이 없다. 교회 주교들 가운데 희극을 금지시킨 분들이 있었음을 난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연극을 좀 더 유연하게 다루었던 분들도 몇몇 있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렇듯 이 같은 분열로 인해 검열이 가지는 권위가 훼손되었다. 동일한 신앙을 가진 견식 있는 지성들이 보이는 견해의 다양성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그들이 희극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희극을 그 순수성 안에서 고찰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희극을 그 타락성 안에서 고려함으로써 추잡한 공연이라 부를 만한 그 모든 상스런 공연들과 혼동한 것이다.<BR><BR>사실 말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태들에 대해 논해야 하기 때문에, 또 대부분의 대립들이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상반되는 것들을 같은 말로 포장하기 때문에 애매한 표현의 베일을 벗겨야 하고, 희극이 비난받아야 할지를 알기 위해 희극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직시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희극이 유쾌한 교훈을 통해 사람들의 단점을 꾸짖는 독창적인 시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부당하게 금지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점에 대해 고대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본다면, 너무도 엄격한 지혜를 주장하고 그 시대의 악습들에 대해 부단히 규탄하던 그 시대의 가장 이름난 철학자들이 희극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듣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밤을 새워가며 연극을 연구했으며, 희극을 만드는 법을 법칙으로 정리하는 일에 전념했던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과 최고위층 고관들이 직접 희극들을 만들었으며, 대중 앞에서 자신들이 만든 희극들을 낭송하기를 개의치 않았던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스가 영예로운 상을 제정해 이 예술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리고 로마에서는 이 예술이 극도의 존중을 받았음도 알게 될 것이다. 방탕한 로마에서 황제의 허락하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규율 잡힌 로마에서 집정관들의 지혜로운 판단하에, 그것도 로마의 위력이 가장 왕성하던 때에 그랬던 것이다.<BR><BR>고백하건데, 희극이 타락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우리가 매일 같이 타락시키지 않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들이 죄를 범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그 무엇도 없고, 인간들이 그 의도를 뒤집을 수 없을 만큼 이로운 학문도 없다. 그 자체로 너무도 선해 인간들이 나쁘게 이용할 수가 없는 그런 이로운 학문은 없는 것이다. 의학은 유익한 학문으로, 모두가 그것을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한 학문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이 추악해졌던 때가 있었고, 종종 인간들을 독살하는 기술이 되기도 했다. 철학은 하늘의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자연의 경이를 관조함으로써 신을 인지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학문을 종종 왜곡해서 사용했으며, 드러내 놓고 무신앙을 옹호하는 데 이용했다는 사실을 안다. 가장 신성한 것조차도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 하다. 우리는 신앙을 악용하여 가장 흉악한 죄악을 저지르는 데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악한 자들을 매일같이 본다. 그런데도 그런 면에 대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구분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타락시키는 학문의 선한 면을, 타락시키는 자들의 악의와 더불어 잘못된 결과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학문의 의도와 그것의 잘못된 사용을 항상 구별해야 한다.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추방되었기에 의학을 금할 수 없고, 아테네에서 공개적으로 규탄 받았기에 철학을 금지할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시기에 규제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희극을 금지하려고 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 규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존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규제는 그것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 갇힌 것이기에 스스로 부여한 한계로부터 지금 그것을 끌어내려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멀리까지 확장시켜는 안 되며, 비난 받아 마땅한 것과 무고한 것을 그 규제 안에 포괄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규제가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희극은 오늘날 우리가 옹호하려는 희극이 전혀 아니다. 그 둘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 둘은 품행이 정반대인 두 사람과 같다. 이름의 유사성 외에는 서로 아무런 단계도 없는 것이다. 방탕했던 올렝프가 있었다는 이유로 선량한 여자 올렝프를 지탄하려 든다는 건 끔찍한 불의일 것이다. 그와 유사한 압류들은 이 세상에 큰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규제받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같이 이용하는 많은 분야에 있어 이와 같은 엄격성을 지키기 못 하고 있으므로 희극에도 그와 같은 은총을 베풀어야 하고, 교화와 예의범절이 돋보이는 연극 작품들을 인정해야만 한다.<BR><BR>까다로운 정신의 소유자로서 그 어떤 희극도 묵인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안다. 그들은 가장 정숙한 작품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희극에서 묘사되는 정열이 덕성으로 넘쳐날 때 그만큼 더 감동적이고, 그런 종류의 극작품이야말로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숙한 정영을 보고 감동하는 것이 무슨 큰 죄악이란 말인가. 그들은 우리 영혼을 무감각한 상태로 끌어올리려는데, 나로서는 그것이 어떤 높은 수준의 덕인지 알지 못 한다. 그 같은 완벽함이 인간 본성의 능력 안에 있다고는 난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들의 정열을 교화시키고 누그러뜨리는 데 힘쓰는 게 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극장보다 드나들면 훨씬 좋은 장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비난하려 든다면, 희극도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는 게 분명하다. 나 또한 희극이 나머지 것들과 함께 규탄받는 것에는 조금도 나쁘게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듯이 신상의 실천에도 일정한 뜸이 있는 법이고, 인간은 오락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가정한다면, 희극보다 더 순수한 오락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고 나는 주장한다. 내 말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희극 <타르튀프>에 대해 한 지체 높은 대공이 한 말을 끝으로 인용하기로 하자.<BR><BR><타르튀프>가 금지된 지 8일 후, <은둔자 스카라무슈>라는 제목의 희극을 왕궁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국왕께서 나오면서 내가 인용하려는 그 대공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몰리에르의 희극에는 그처럼 분개하면서, 어째서 스카라무슈의 것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정말 궁금하오.” 이에 대공이 이렇게 대답한다. “그 이유야 희극 <스카라무슈>는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다루는데 저 양반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지요. 하지만 몰리에르의 희극은 바로 저 양반들을 다루지요. 그러니 봐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div><BR><p><strong><a href="http://www.imperatorium.com/textcube/4?commentInput=true#entry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