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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천 만 원의 돈으로도 하루 저녁의 행복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훨씬 더 적은 돈으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지혜다. 그 지혜는 지식과 경험의 산물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샤인Shine이라는 영화가 있다. 한 남자의 두서없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 그 남자는 유태계이고,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병자이고,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이름은 데이빗 헬프갓David Helfgott. ‘신의 도움Help of God’을 연상시키는 자기 성(姓)을 스스로 비웃는 그는, 라흐마니노프 3번을 연주하다가 미쳐버렸다.

라흐마니노프가 젊은 시절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야심차게 작곡한 교향곡 1번을 공개한 뒤 절망적인 혹평에 직면했고, 이후 우울증에 걸려 수 년 간 작곡에는 손도 대지 못 했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겨우 심리적으로 재기한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여 단번에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얻지만, 본래 귀족 가문의 태생이었던 그는 트로츠키의 붉은 군대가 동토를 피로 적실 때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부터 자신을 평생 따라다닐 새로운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다. 바로 향수병. 40년 가까운 미국 생활 동안 연주자로서는 평판이 좋았고 공연도 많이 했지만, 작곡가로서는 변변찮은 곡 몇 개를 쓰는 것에 그쳤다.

격동의 20세기. 라흐마니노프는 드뷔시,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가장한 농민들의 2월 혁명과 타이타닉 호, 우아한 레이스 부채를 든 귀부인들이 얌전히 앉아있는 살롱 대신 천재를 ‘소비’하려는 호기로운 대중들로 가득 들어찬 연주회장, 리코딩 기술과 재즈 밴드의 시대를 살기도 했다. 한 예술가의 업적은 어떻게 평가 받아야 할까. 그 어떤 예술가도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모든 예술가는 어떤 식으로든 과거에 빚을 지고 있는 시대의 산물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9세기 낭만주의와 20세기 자유자본주의의 결정(結晶)이지만, 안타깝게도 새 시대의 개척자는 되지 못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최후의 낭만주의 작곡가.’ 그러나 구닥다리 과학이론은 폐기되거나 잊히고 최초의 발명품은 더 나은 발명품에게 자리를 내주지만, 예술은 그 대체 불가능함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력을 누린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대체 불가능한 그만의 색채로 그 가치를 평가받아 마땅하다(그리고 드뷔시,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 새 시대를 열어젖히고자 노력한 많은 이들 중 감히 그 누가 라흐마니노프의 ‘인기’를 이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에 서린 짙은 러시아 냄새와 차이코프스키가 물려준 정신적 유물, 20세기에 이미 당대의 현인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던 ‘뜨거운 혹은 미칠 듯한 열정’을 즐기면 된다. 한 세기 전의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아니스트 백건우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별명이다. 이런 멋진 별명은 누가 생각해서 붙여준 것일까.

“그것은 가망 없는 질문이다. 모두가 작품에 대한 충실성을 이야기하며 ‘나는 작곡가의 영혼이 되어 연주해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작곡가의 혼을 담아 하는 우리의 연주는 어떠한가. 같은 피아노로 시작했을지라도 지휘자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오고 만다. 결국 ‘이것이 진실이다’라는 말은 음악에서 사라져야 한다. 다만 설득력에 대해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지휘자 므라빈스키의 말이다. ‘진리’의 부재가 곧 진리. ‘답이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걸어야 하는 가혹한 구도(求道)의 여정. 이것만큼 모순에 들어차 있으며, 철학자를, 예술가를, 과학자를 절망에 빠뜨리는 ‘진실’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진실이다’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라는 말 자체는 어린 아이라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도의 인생이 무엇을 남겼나? 이제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깊게 파인 60대의 노(老) 연주자가, 성실했던 자신의 인생을 걸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흔적, 그가 험난한 길을 직접 걸었다고 하는 증거뿐이다. ‘나만의 연주를 추구한다.’는 젊은 연주자들의 말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은 연주자가 있었던가? 지휘자를 향해 달려가든 혹은 그로부터 멀어지든 결국 자기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 한다. 한 시점에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많은 걸음을 걸었는지는, ‘들을 귀가 있는’ 청중이라면 들을 일이다.

말러 1번

내가 유포니아에서 처음으로 연주했던 교향곡. 신입 환영회 때 어떤 곡을 연주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농담조로 ‘브루크너’라고 대답했는데 돌아온 곡은 말러였다. 변변한 연습 공간이 없어 손끝이 얼어붙을 만큼 추운 복도에서 연습했던 기억.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늦은 밤이면 동아리 방에서 전기난로를 켜놓고 연습하기도 했다. 거대한 호숫가에 서서 조약돌 하나씩을 집어던지는 듯한 막막함을 선사해준 곡. 하루 한 번씩은 들었고, 보잘것없는 결과 앞에 멋쩍게 웃음 짓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결국 지킬 수 없었던, 찌릿찌릿한 연주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곡.

태고의 신비라고 하든 아직 잠들어있는 대자연이라고 하든 불가사의한 현악기의 하모닉스 소리, 곧 소리가 만들어내는 정적. 그 정적을 뚫고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트럼펫 소리. 아! 정말 대기의 질량마저 느껴지는 원근법이로군! 그러나 트럼펫 주자를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조금 있으니까 무대 왼쪽에서 세 명의 트럼펫 주자가 쪼르르 들어온다. 그렇다, 그 트럼펫 소리는 ‘멀리서 들여오는 듯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 ‘멀리서 들려온’ 소리였던 것이다.

완벽한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한 음반 작업 중이라면 모를까, 일회성이고 관객과의 호흡이 중요한 실황에서 굳이 연주에 대한 집중의 방해까지 감수 해 가면서 ‘멀리서 들려오는 트럼펫 소리’를 연출해야 했을까? 게다가 한 트럼펫 연주자는 자기 자리를 찾아 앉던 도중 악보인지 뭔지를 떨어뜨려서 큰 소음까지 만드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1악장은 반복이 생략되었고, 2악장 이전에는 ‘꽃의 악장’이 연주되었다. 이 모든 변수들이 집중을 방해했다. 요즘은 무엇이든 ‘최초의 의도’가 중시된다. 나는 대개 ‘최초의 의도’보다는 ‘최후의 의도’를 더 중요시한다. 물론 어떤 철학자는 죽기 직전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다고 평생 반종교적 신념으로 산 그 인생이 한순간에 재평가 받는 일은 없어야한다고 말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지경이 아니라면, ‘나중의 생각’을 존중 더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확고한 신념에 따라 인생을 산 사람도, 그가 산 삶으로 말미암아 생각에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니까(간디가 젊은 시절 비폭력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이 그의 원 사상에 더 가깝다는 주장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말러가 본래 2악장이었던 ‘꽃의 악장’을 나중에 삭제했다면,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결정은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적어도 수정 이전의 곡을 ‘본의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주위 사람들의 입김에 너무 자주 휘둘린 브루크너의 경우는 예외로 하더라도).

주빈 메타 그리고 이스라엘 필하모닉

파르시 지휘자와 키파를 쓴 연주자들. 그들 사이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다.

영상으로 봤을 때는 흡사 실베스터 스탤론을 연상시키는 외모에, 위압적인 거구를 상상했지만. 실제로 보니 체구가 그리 커보이지는 않았다(이건 내가 무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를 장악하는 그의 힘은 ‘거인’ 같았고 가히 ‘불의 숭배자’다운 화끈함을 보여줬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이스라엘 필하모닉은, 그에게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완벽한 악기이리라.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라면 음악의 힘을 사용하겠다는 주빈 메타. 순수한 예술지상주의자들에게는 이 생각이 타락으로 보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오히려 너무 순진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논평 할 생각은 없다. 그 역시 현 시점에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보여줄 뿐. 판단은 역시 들을 귀 있는 청중들의 몫.

앙코르

티켓 값이 얼만데, 그냥 보낼 수 없어! 협박의 기운마저 느껴진 관중들의 끈질긴 박수에 응해 연주한 곡.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Wiener Blut. 앙코르보다는 차라리 서곡을 챙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대곡을 마주하기 전에 집중력을 가다듬을 여유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반면 무게감 있는 메인 곡이 끝난 뒤의 가벼운 앙코르는, 오히려 연주회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감도 없지 않다.

2010/11/29 01:15 2010/11/29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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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Joseph Noel Paton (1821?1901) The Reconciliation of Titania and Oberon. Oil on canvas, size 30 x 48.5 inches,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부수음악(附隨音樂)이라는 장르가 있다. 영어로는 Incidental Music이라고 한다. ‘부수’라는 단어는 흔히 우리가 ‘무엇에 따라오는’이라는 의미로 쓰는 ‘부수적인’이라는 표현의 그 부수가 맞다. 그러므로 ‘부수음악’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무언가에 붙어서 따라오는 음악’이 된다. 그렇다면 부수음악은 본래 독립적인 연주를 목적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란 얘기가 된다. 부수음악의 본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흔히 연주회용 서곡으로 알고 있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은 원래 부수음악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그몬트 서곡’은 베토벤이 작곡한 극음악(劇音樂) ‘Egmont Op. 84’의 첫 번째 곡인 ‘서곡Overture’에 해당한다. 본래 이 곡은 서곡 외에 9개의 곡 등 총 10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토벤은 괴테의 동명 희곡(戱曲) ‘에그몬트’에 크게 감명 받았고, 이 희곡을 무대에 올릴 때 연극에 삽입시킬 목적으로 이 곡을 작곡했다.

이처럼 부수음악이란 보통 연극을 공연할 때에 서곡, 막간곡, 배경음악, 혹은 멜로드라마(마치 오페라나 뮤지컬처럼 연극 도중에 배우가 노래로 대사를 표현하는 부분)로 사용할 목적으로 작곡된 일련의 모음곡을 말한다. 부수음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그리그 작곡의 ‘페르귄트 모음곡’이 있는데, 본래 이 페르귄트 모음곡은 ‘인형의 집’을 쓴 입센의 희곡 ‘페르귄트’를 위해 작곡된 극음악이었다. 그러나 연극 자체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 했고, 자신의 곡들을 아깝게 여긴 그리그가 추후에 전곡 중 일부를 추려 모음곡 1과 2로 출판한 것이 오늘날까지 연주회용 ‘페르귄트 모음곡’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오늘 소개할 곡 역시 부수음악이다. 이 장르의 음악 중 페르귄트 모음곡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곡이며, 전 세계에서 매일 수 백 번씩은 연주되고 있는 곡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바로 밤을 헤매는 유쾌한 방랑자다.

네 눈에 마술의 꽃물을 발라주마. 네가 깨어나면, 그 때부터는 다시는 잠들 수 없는 상사병에 걸릴 거야! 그때까지는 잠재워 두도록 하지.


-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中 요정 퍼크의 대사 -

한여름 밤의 꿈. 셰익스피어의 희극(喜劇)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 작품을 꼽겠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희곡은 개연성이 엉망이고,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너무나 달콤하다. 수많은 명대사들로 가득하며, 제목처럼 몽환적이다. 일단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꿈을 꾸기 시작하여 요정 퍼크의 인사와 함께 다시 막이 내릴 때는 오직 달달한 여운만이 남은 채 기분 좋게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꿈의 내용이 제아무리 뒤죽박죽이고 유치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한여름 밤의 꿈을 집필한 지 200여년이 흐른 뒤인 1826년 독일. 방금 독일어 번역판 ‘한여름 밤의 꿈’ 마지막 장을 읽고는 책을 덮은 17세의 청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내일부터 ‘한여름 밤의 꿈’을 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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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x Mendelssohn Bartholdy(1809-1847)

이는 15세 때 이미 첫 교향곡을 작곡하고, 16세 때에 현악 8중주를 작곡한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Felix Mendelssohn Bartholdy)의 야심찬 선언이었다. 곡을 빨리 써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던 멘델스존은, 해를 넘기지 않고 가장 뜨거운 계절인 8월에 곡을 완성했다. 그것은 연주 시간이 11분 남짓 되는 짤막한 하나의 곡이었으며, 악장 구분도 없고 소나타 형식을 갖추었으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띠는 곡이었다. 이 곡은 이듬해인 1827년에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며, 멘델스존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이 연주회에서였다. 이 연주회에서 연주된 곡들은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과 역시 멘델스존의 작곡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었는데, 이런 구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연주회 구성과 완벽히 일치한다.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은, 본래 극음악(劇音樂)이 아닌, 연주회용 서곡(Concert Overture)로 작곡 된 것이다. 18세기 말엽부터 오페라의 유명한 서곡들이 기악 음악회에서 독립적으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19세기 초반까지도 연주회용 서곡이 독립적으로 작곡된 예는 흔하지 않았다. 멘델스존은 ‘핑갈의 동굴 서곡’이나 ‘고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서곡 등 훌륭한 연주회용 서곡을 많이 남겨서 이 장르의 선구자로 여겨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연주회용 서곡이라는 장르의 시금석으로 평가 받는 곡이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통해 달궈진 천재 청년의 가슴은, 이 훌륭한 한 곡의 서곡을 작곡함으로써 진정이 되었던 듯하다. 그가 다시 이 작품을 되돌아보게 된 것은, 천재성에 원숙미가 더해진 33세 때의 일이었다.

1842년.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한 지 16년이 흐른 뒤, 그는 왕립음악원의 음악 감독이 되어있었다. 당시 프러시아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멘델스존이 작곡한 음악과 함께 상연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공연에 크게 만족하고 비슷한 작품들을 더 쓸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멘델스존은 이번에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자신의 곡을 덧붙여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무려 16년 전, 셰익스피어의 달콤한 시어로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을 달래고자 일필화의 기세로 써버린 ‘서곡’을 다시 꺼냈다. 그는 청년 시절의 앳되고 낭만적인 감성이 서린 그 서곡을 그대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에는 서곡 외에 14개의 곡들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 날에는 이들 중 일부만 추려서 연주되고는 하는데, 본래 부수음악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에 인물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 연주되는 행진곡이나 팡파르, 그리고 대사를 음악적으로 처리한 성악곡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독립적인 연주회에서 원곡을 전부 연주해버리면 매우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음악과 극의 진행은 대강 다음과 같다.

먼저 서곡의 연주와 함께 극은 시작되는데, 마치 우리를 꿈속으로 인도하는 듯한 목관의 화음이 네 번 연주되고, 이어서 현들은 마법의 숲 속에서 조곤조곤 요정들이 움직임을 묘사한다. 이어서 금관이 당나귀의 큰 울음소리를 내면서 이제 우리는 현실에서 벗어나 완전히 환상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1장은 별다른 음악의 연주 없이 진행이 되고, 1장과 2장 사이에 간주곡으로 스케르초가 연주된다.


연이어서 2장은 음악을 반주로 까는 멜로드라마로 시작되고, 오베론은 ‘요정의 행진곡’과 함께 등장한다. 2장의 2막은 성악곡 ‘얼룩무늬 뱀’으로 시작하고, 2막과 3막 사이에 다시 간주곡이 들어간다.


솔로 호른과 이를 뒷받침하는 바순의 조화가 아름다운 녹턴은 3막과 4막에서 연인들이 숲 속을 헤매다가 단잠에 빠졌을 때 연주된다.

4막과 5막 사이의 간주곡은 바로 그 유명한 ‘결혼 행진곡’이다. 이 한곡으로 인해 멘델스존의 부수음악 ‘한여름 밤의 꿈’은 불명의 생명력을 누리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동네에서는 이 곡이 울려 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는 다시 당나귀의 울음을 묘사한 서곡의 주제를 그대로 살린 베르가마스크 무곡으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여기에 에필로그가 따라붙는데, 퍼크의 저 유명한 마무리 대사에 반주를 붙이고, 무대를 열었던 네 개의 코드가 다시 한 번 반복되면서 이번에는 밤의 그림자를 서서히 걷어내고 우리를 현실의 세계로 되돌려놓는다.

멘델스존은 서곡을 완성한 지 16년이나 지나서 나머지 곡들을 썼지만, 그 기나긴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완전한 통일성을 지닌 아름다운 극음악을 완성시켰다. 멘델스존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천재성에 원숙미를 더하기는 했지만, 평생 청년의 쾌활함을 유지했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밝은 작품이 멘델스존의 작풍과 아주 잘 어울렸기에, 16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짧은 시간 동안 작곡 되었음에도 이토록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2010/11/03 23:01 2010/11/0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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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내 지갑은 좀 더 가벼워졌지만, 11월은 조금 더 즐거울 겁니다.

2010/10/23 03:21 2010/10/23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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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 전

휴일도 아니고 근무 오프도 아닌 평일. 여느 때라면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10시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출장 2일차. 오늘은 서울에서 일이 있다. 26일부터 시작되는 공군전우회 주관 한일교류 행사 통역 업무에 대비해서 사전 업무 협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도록, 말러 2번 3악장을 크게 틀어놓았다.

1층으로 내려가 냉장고 문을 여니, 지난 일요일에 사온 맥도날드 머핀이 그대로 남아있다. 차가운 머핀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작년 여름 맥도날드에서 받아 온 커다란 콜라 컵에 어름을 가득 채우고 콜라를 따랐다. 가사 도와주는 아주머니를 아주 오랜만에 봤다.

12시 반, 최대한 말쑥한 느낌으로 차려입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한낮의 도로는 대체로 한산했다. 그러나 서울 도심으로 갈수록 교통 사정은 좀 복잡해졌다. 대방동 공군회관에 도착하니, 이곳 역시 정문에서 헌병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증을 받았다.

4층 공군전우회 사무실 문을 두드리기 전 충주의 선임에게 전화 한 통을 넣었다. 선임은, 일이 일찍 끝나거든 충주로 내려와서 사무실에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라고 했지만, 저녁 7시 반 연주회를 예약해 놓은 상태라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일단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은 해 두었다.

사전 협의는 20분 만에 어이없으리만큼 빨리 끝나버렸다. 너무 빨리 끝나서 어쩌면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그쪽에서는 상관 안 할 테니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시간이 너무 남아서, 최근에 국내 개봉했다는 노다메 칸타빌레 극장판이라도 볼까 싶어 가까운 영등포 롯데시네마를 찾았지만, 낮 시간에는 상영 스케줄이 없었다. 결국 다시 차를 몰고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세종문화회관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으니 오후 4시였다. 그제야 나는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업무가 끝났다는 보고를 올렸다. 기왕이니 서점도 들르고 저녁도 해결하고 천천히 출발하겠다는 얘기도 했다. 일단 이것으로 행동에 제약은 없어졌다. 광화문 교보문고로 갔다. 연주회 시작 전까지 무료함을 달래 줄 소설책도 한 권 사고, 좀 이른 저녁도 먹었다. 그 뒤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 옆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소설책을 읽었다. 연주회에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15분 정도 눈을 붙이기도 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스테판 피 재키브,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회. 원래 이 연주회를 볼 수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임지 배속을 받은 후, 평일에는 꼼짝없이 충주에 갇혀 지내야 했다. 8월 한 달 동안이야 매일 같이 야근을 했으니 더욱 그랬지만, 비교적 정시 퇴근을 보장 받은 9월에도 평일 저녁 서울로 올라가 공연을 보는 건 근무 오프라도 받지 않는 한 불가능한 얘기였다. 나는 주말 저녁 열리는 저렴한 연주회들을 찾아다니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데 런던필의 공연일인 9월 16일, 출장 의뢰가 들어왔다. 아니, 실은 그 언저리 평일 아무 때나 골라 가면 되는 것이었지만, 내가 16일로 확정지었다. 15일 수원 출장과 함께 처리하면 편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출장지는 서울, 업무가 일찍 끝나면 그대도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가 런던필과 스테판 재키브의 협연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위험 부담은 있었지만, S석 자리를 예매 해 두었다(R석은 매진이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었다. 16일 출장 허락을 받았고, 업무는 일찍 끝났다. 일이 일찍 끝나거든 사무실로 돌아와 얼굴이라도 비추라는 지시는 적당한 얼버무림으로 넘겼다.

연주회

연주회 시작 30분 전에 세종홀로 들어갔다. 로비에서 주차권부터 샀다. 공연관람객에게 한해서 7시간 주차권을 5천원에 판매하고 있다. 이 주차권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10분에 500원씩의 주차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프로그램북을 구입하면서 같은 테이블에 진열 해 놓고 팔고 있는 리코딩을 봤는데, 용재 오닐은 <노래>라는 타이틀로 또 다른 소품집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스테판 재키브의 앨범은 이미 구입한 브람스 소나타 앨범이었다.

내가 예매한 자리는 2층 D블럭 143번 석. 솔리스트들의 생생한 표정이나 연주를 감상하거나 그들의 소리를 듣기에는 그리 좋은 자린 아니었지만, 오케스트라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또 홀을 가득 채우는 사운드를 듣기에는 괜찮은 자리였다.

모차르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그들은 참 즐겁게 연주를 했다. 스테판 피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은 마치 실내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먼발치에서도 그들의 표정이 생생히 읽히는 듯 했다. 스테판의 2악장 연주는 기대했던 것만큼 멋졌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바이올린의 소리를 넉넉하게 받쳐준 비올라의 연주도 훌륭했다. 아직 젊은 만큼, 주위의 다른 것들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자신들의 시간을 음악을 위해 온전히 할애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배타성이 그들로 하여금 음악을 순수하게 연주하게 하며, 오직 음악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터득하도록 하고 있는 것인 모양이다.

고전파 협주곡답게 곡은 오케스트라의 긴 제시부 연주로 시작된다. 여느 협주곡이라면 이 때 솔리스트들이 손 놓고 쉬고 있겠지만, 이 협주곡은 다르다. 두 사람은 각각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의 선율을 함께 연주했다. 3악장에서도 보통의 경우 솔리스트의 부분이 끝나면 오케스트라가 종결구를 연주하며 곡을 끝맺지만, 이때도 두 솔리스트는 마무리까지 함께 연주했다. 생각해보면 솔리스트가 주인공인 협주곡인데, 오케스트라만 덩그러니 종결구를 연주하고 곡을 끝맺는 것은 어딘가 민망하다.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매우 좋아하지만, 3악장은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모차르트 특유의 유쾌하고 발랄한 느낌이 묻어나는 1악장에 이어, 너무나 강렬한 인상의 2악장이 연주된 뒤에 이어지는 3악장은, 어딘가 1악장의 재탕 같고 개성이 없이 밋밋한 느낌이다. 2악장에서 한껏 고조된 감정이, 3악장에서 전환되고 발산되었다면 좋을 텐데, 뭔가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선택을 앞두고는 그냥 옆길로 새버린 느낌이랄까. 그래도 두 솔리스트의 훌륭한 앙상블을 끝까지 관람하는 것만으로 흡족한 연주였다.

차이코프스키 5번

좋은 연주라는 것은 어떤 연주일까.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즐거운 연주’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어떤 연주가 즐거운 연주인가 하면, 일단 연주자들이 즐겁게 연주해야 한다. 나는 이따금 국내 오케스트라들의 연주에서, 마치 내가 사무 보듯 그저 직업적, 기계적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놀랍지만 솔리스트 중에도 그런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문 연주자에게 항상 감상자의 수준을 뛰어넘는 열정과 지적 수준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주회장을 찾는 관객은, 분명 연주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음악과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연주자의 맥없고 사무적인 태도로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관객이 그토록 동경하는 세계에 앉아있으면, 프로는 설령 그것이 자신의 밥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더라도 관객이 기대하는 바에 맞춰 열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케스트라 구석구석을 눈여겨 보다보면, 연주회의 기분을 완전히 망치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 사람들의 연주가 아름다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할 수 없다.

악장부터 맨 뒷자리의 연주자까지, 적어도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만큼은 음악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다는 듯한 적극적인 태도. 그것은 연주회를 관람하는 관객에게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연주회에 빠져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먼저 연주자들이 그런 기회를 제공할 마음자세가 갖추어져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런던필의 클라리넷 연주자. 마치 메트로놈처럼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온 몸으로 연주를 했다. 머리가 희어진, 나이 지극한 바이올리니스트는 풍채는 거의 지휘자급이었는데, 그저 음악이 너무 좋다는 어린애 같은 천진한 태도로 연주를 했다. 플루트의 음색은 반짝였다. 금관 쪽에서는 큰 실수가 한 번 있었다(트럼펫인지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의욕이 앞선 결과였을 뿐이다.

자신들의 연주를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또 보여주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굉장히 피곤한 일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연주자들에게서 순간을 즐기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자연히 관객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1악장의 연주는 상당히 템포가 빨랐다. 클라리넷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악장인데, 연주자의 액션이 정말 컸다.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온몸으로 표현 해 주는 게 결코 나쁘지 않다고 본다. 2층의 먼 객석에서도 연주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2악장의 호른 솔로는 너무 아름다웠고, 한 바탕 운명의 동기가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에 이어진 바이올린의 노래는 황홀했다.

4악장 알레그로 비바체에서는 내 귀가 틀리지 않았다면 한 차례 큰 실수가 있었는데, 금관 쪽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빰’이 들렸던 것이다. 실수는, 곡에 대한 집중도를 한 순간 완전히 깨뜨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기본이 잘 갖추어진 탄탄한 연주에서라면 한 번의 실수 정도는 연주회의 전체적인 만족도를 크게 저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가슴속에서 찌릿하는 전율을 느끼며, 무언가 격렬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연주회였다.

앙코르 곡으로는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세레나데 2악장 왈츠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3악장을 연주했다. 메인이 교향곡 5번이었는데, 4번의 한 악장을 통째로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것은 의외였지만, 4번의 3악장은 길이도 5분 남짓으로 짧을 뿐만 아니라 현악기군 전체가 활을 내려놓고 피치카토로만 연주하는 대단히 재미있는 악장이라 앙코르 연주로서 효과는 만점이었다.

연주회 후

응어리져 있던 것을 후련하게 발산하고, 개운한 상태에서 연주회장을 빠져나왔다. 멋진 저녁.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빼려는데, 출구 쪽으로 길게 늘어선 차들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있었다. 15분가량을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차를 다시 주차시켜놓고 연주회 전에 사둔 소설책을 들고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세종문화회관 로비는 아직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슬쩍 보니 스테판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이 사인회를 열고 있었다. 나는 두 연주자의 사인은 일전에 받아 두었으므로, 대기열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심야까지 영업을 하는 커피 빈에 들어가 티라미스 케이크 한 조각과 바닐라 라테 한 잔을 주문해서 소설책을 읽으며 먹었다. 11시 반이 다 되어서야 주차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도 서울 시내에는 많은 차들이 돌아다녀서 예상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었지만, 이 날 만큼은 짜증이 나지 않았다. 플레이 리스트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 5, 6번을 올려놓고 재생시켰다. 느긋하게 주유를 하고, 혼잡한 서울 시내를 인내심을 가지고 빠져나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내일은 다시 출근.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 이 꿈같은 하루는, 그 반복적인 하루하루와의 부대낌을 몇 달은 더 지속할 수 있는 활기를 부여해 주었다.

2010/09/19 22:54 2010/09/1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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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한화와 함께하는 가족음악축제

오래되어서 이미 리뷰를 쓰는 의미는 퇴색되어버렸지만, 일단 기록으로 남겨둔다는 의미에서 쓴다.

8월. 덥거나 비 내리거나. 아니 숨 막힐 듯 더우면서 항상 비는 내리고 있었다. 새해 벽두를 강타한 전국 대폭설부터 시작해서 유난히 기상 변덕이 심한 올해. 지긋지긋한 장맛비와 뜨거운 공기에 만물이 힘겨운 여름나기를 하고 있을 무렵, 나는 아침 6시에 출근해서 밤 10시 가까워서야 퇴근을 하는 버거운 교육 스케줄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 지칠 뿐인 8월, 위안거리가 되어준 것이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한 가족음악축제. 8월 한 달 동안 매주 주말마다 오케스트라 공연 하나씩을 무대에 올렸는데, 전석 1만 5천원으로 가격이 매우 저렴했다. 주중에는 수면도 제대로 못 취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지만, 주말이면 모든 것을 잊고 연주회장을 찾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가졌다.

물론 연주회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방송인 유정아라는 사람이 서곡 연주가 끝나면 등장해서 당일 프로그램에 대해 약간의 해설을 했는데, 프로그램 북에 적혀있는 내용 이상의 것을 언급한 게 거의 없다. 그럴 거라면 굳이 이 사람을 등장시켜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리고 해설 중에는 무대 뒤편에 빔 프로젝터로 화면을 띄워놓았는데, 작곡가 생몰 연대 등이 엉망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가령 베토벤의 사망 시기를 1820년으로 적어 놓는다든가, 베버의 경우에는 전혀 엉뚱한 연대를 적어 놓기도 했다(아마 막스 브루흐와 혼동을 한 것 같았는데). 연주와는 무관하지만 이런 실수 하나하나가 전반적인 연주회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연주 시작 전, 해당 곡의 작곡가 생몰 연대부터 틀려버리는데, 대체 관객에게 어떤 진지한 감상의 자세를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1. 8월 8일 충남교향악단

지휘/구모영 바이올린/유시연

모차르트-오페라 <코지 판 투테> 서곡

브루흐-바이올린 협주곡 1번

베토벤-교향곡 8번

지휘자 구모영. 내가 유포니아에서 첫 연주회를 섰을 때 지휘를 맡아주었던 분이다. 시종 진지하고, 연습 중에는 웃음기가 거의 없었다. 일본 오케스트라에 있을 때 그 숨 막힐 정도로 긴장감 넘치는 연습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당시 나는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지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로서는 훨씬 부드럽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연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고 보니, 이 지휘자 선생님이 그리 재밌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진지한 만큼 꼼꼼했다. 전체 연습이 없는 날에도 일부러 학교로 찾아와 파트 연습을 지도해 주는 등, 그 성실함이 돋보였다.

연주회는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서곡으로 발랄하게 문을 열었다. 지난 5월 훈련 중 특별외박 나와 본 연주회 이후 약 석 달 만의 연주회라, 단지 오케스트라의 연주 모습을 보고 있는 자체만으로 황홀했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나중에 ‘딱 한 곡만 유명한 작곡가’란 주제로 글이라도 써 보면 어떨까 싶은데, 실현된다면 브루흐를 그 안에 넣어야 할지 말지 고민된다. 사실 브루흐라면 스코틀랜드 환상곡이나 콜 니드라이 같은 유명한 곡들이 있지만, 널리 알려지고 연주되는 그의 대표작이라면 이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꼽을 수밖에 없다. 스코틀랜드 환상곡은 3악장만의 선율만이 너무 유명하고, 콜 니드라이는 아무래도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하기에는 지명도가 약하다. 그러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만큼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단골 레퍼토리로 상당히 자주 연주되는 만큼, 바이올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곧 접하게 되는 음악이다.

1악장은 상당히 장중하면서도 바이올린의 매우 서정적인 선율이 돋보이는 구성이다.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예견케 하는 다소 민요적인 느낌의 선율이 간간히 들려오는 아름다운 2악장. 그리고 절로 어깨들 들썩이게 만드는 신나는 3악장. 이제 와서 연주가 어땠는지 논하는 게 의미가 없겠지만, 약간 거친 면은 있어도 흡족한 연주로 기억한다.

이 날의 메인 곡은 베토벤 8번이었다. 6번과 같은 F major로 작곡된 곡. 6번에 비해 길이가 짧다는 의미인지, 베토벤은 친히 “My little Symphony in F”라고 언급한 바 있다. 모차르트 풍의 익살스럽고 장난스러운, 한 마디로 유쾌한 음악의 베토벤 판이라고나 할까, 심각하지 않고 흥겨우면서 베토벤다운 강렬한 리듬과 힘이 깃들어있는 음악이다. 비록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5번, 6번, 7번 다음 9번으로 이어지고 말지만…….

앙코르 곡은 따로 준비되지 않았다. 대신 8번의 4악장 일부를 다시 연주했는데, 다시 들려줘도 좋을 만큼 준비가 잘 됐다는 뜻일까. 구모영의 지휘는 상당히 깔끔했고, 오케스트라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2. 8월 14일 수원시립교향악단

지휘/최수열 피아노/박수진

베버-오베론 서곡

베토벤-피아노 협주곡 4번

시벨리우스-교향곡 2번

가족음악축제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음악 연주로 클래식에 대한 흥미 유발”을 기치로 내걸고 있었는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나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이 명곡임에는 틀림없지만 과연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음악일까?

연주회에 집중하기에는 나는 격무로 너무 지쳐있었고, 수면 부족으로 인해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결국 연주회에서 졸아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오베론 서곡부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까지는 거의 제대로 듣지를 못 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도 집중해서 듣다가 간간히 정신이 다른 차원의 세계를 탐험하고 돌아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연주회장의 분위기도 안 좋았다. 본격적인 여름방학 시즌이라 예술의 전당에는 주차할 공간조차 부족했고, 연주회장 안에는 초등학생들이 넘쳐났다. 세상을 온통 자기중심적으로 밖에는 바라볼 줄 모르는 어린 녀석들. 연주회장에서 버젓이 휴대전화를 꺼내놓고 만지작거린다. 그 불빛은 정말 거슬린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놓는 것이 싫증이 나면 연주를 조금 듣는 척하다 이내 잠들어버린다. 자는 것에 관한 한, 이날만큼은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4악장이 연주될 때만큼은, 이 하나로 초점이 모아지지 않던 부사한 객석에도 순간 통일된 평화의 순간이 찾아오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위대한 예술 작품이 지적 감수성의 수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뿌리는 그 감동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 놀라운 집중의 시간은 아주 잠시 뿐이었지만.

3. 8월 22일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이종진 첼로/홍성은

코다이-갈란타 무곡

드보르작-첼로 협주곡

라흐마니노프-심포닉 댄스

코다이의 갈란타 무곡은 나도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코다이라는 작곡가 자체가 일반에는 생소한데, 좀 규모가 있는 음반 가게를 가더라도 코다의 녹음으로는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바르톡과 함께 헝가리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지만, 사실 작곡가로서보다는 음악 교육자로서 더 유명했고,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역사상 모든 첼로 협주곡들 중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곡. 그러나 연주는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라흐마니노프. 생각해보면 그는 상당한 대작곡가였다. 장기인 피아노 협주곡 분야에서 걸작 2번과 3번을 비롯하여 네 개의 작품을 남기고 있고, 교향곡도 세 곡이나 썼다. 심포닉 댄스는 교향곡 3번 이후에 작곡된, 그의 마지막 교향악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서 영향 받아 독특한 리듬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낭만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 한 것 같다. 뭔가 쿵쾅거리다가도 항상 음악 같은 음악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게 라흐마니노프다운 것이지만.

편성에 알토 색소폰이 있어서,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색소폰이 연주되는 색다른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이상 음악축제 기간에 열린 여섯 번의 공연 중 세 번의 공연을 관람했다. 저렴한 가격에, 기분 전환하기에는 적절한 기회였다.

2010/09/19 00:06 2010/09/1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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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피 재키브

내가 요즘 가장 주목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유독 한국에서 그의 미들 네임을 꼭 표기하는 것은, 그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에게 ‘피’라는 이름을 물려준 사람이 한국 수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피천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천득의 수필에는 그의 딸 서영이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스테판 재키브는 바로 그 ‘서영이’의 아들이다. 사람들은 피천득의 수필에서 느껴지는 그 따스함을 스테판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 속에서 찾으려 하는 듯하다. 문학과 음악은 언연히 다르지만, 한국이 자랑스러워하는 문인의 감성이 그 외손자에게로 이어져서 이제 그가 세계인의 마음을 움켜쥐는 음악을 들려주기를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피천득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호와 이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관심은 별 관계가 없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장면을 보았고, 그에게 청중을 집중시키는 재능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의 리사이틀 소식이 들렸을 때, 주저 않고 표를 샀다. 그 리사이틀에서 그는 브람스의 FAE 소나타와 3번 소나타, 그리고 베토벤 5번과 생상스의 카프리스를 연주했다. 브람스 소나타 전곡 녹음을 마친 후인만큼, 그의 연주는 여유로우며 확신에 차 있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들뜨거나 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중후하다고 느껴질 만큼 침착하게 연주했다. 내공이 있다고나 할까. 생상스의 카프리스는, 아마도 테크닉적으로도 전혀 밀릴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곡이었던 것 같다. 브람스도 생상스도 좋았지만, 청중을 가장 매료시킨 것은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쇼팽의 녹턴 20번이었다. 이 연주자가, 청중의 심장을 서서히,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움켜쥐었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다시 피가 돌도록 놓아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완벽한 연주였다.

피천득과 닮은 점? 글쎄. 돌이켜보면 피천득의 수필이 마냥 따스한 정감이 넘쳐흐르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필은 가장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것이 사람의 눈 아니던가. 그 담담한 필체로 본 것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때,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스테판 재키브가 때론 감성이 넘쳐흐르는 연주를 하지만, 그는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브람스를 잘 연주하는 젊은이라니, 생각해보면 소름끼치는 구석이 있다.

리처드 용재 오닐

리처드 용재 오닐. 그는 이미 비올라계의 슈퍼스타이며,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인 중의 한 명이다. 나는 그의 연주회를 직접 보러 간 일이 없다. 다만 딱 한 번, 무라지 카오리의 기타 연주회를 보러 갔을 때, 게스트로 등장하여 무라지 카오리와 그 날의 메인곡이었던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한 것을 들은 적은 있다. 솔직히 그와 무라지 카오리의 연주가 잘 어우러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연주회의 주인공은 무라지 카오리였지만, 이 곡을 연주할 때 만큼은 리처드 용재 오닐 쪽이 훨씬 여유롭고 확신에 차 보였으며, 리드해 나가는 느낌이었다.

순박해 보이는 인상, 다소 어눌한 말투(아마 이건 한국어가 서툰 데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협주곡이나 소나타 같은 대곡의 녹음 보다는 소품집으로 인기 몰이를 한 탓도 있어서 그가 광고하는 커피 향만큼이나 부드럽고 유들유들한 이미지를 풍기는 그이지만, 나는 그의 연주가 마냥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것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정열적이며 가차 없는 연주력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협주곡이라는 장르는 고전파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서 초인적인 기교를 자랑하는 솔리스트들과 비현실적 열정을 불사르고 싶어 했던 작곡가들이 만난 낭만파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고전파 시대부터 낭만파, 이후 국민악파 시대까지 많은 협주곡들이 작곡되었지만, ‘이중 협주곡’이라는 형식의 곡은 그리 자주 작곡되지 않았다. 이런 형식은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에서 발견되는데, 여러 악기군에 돌아가며 솔로 부분을 연주하도록 하는 콘체르토 그로소가 그런 양식이다. 콘체르토 그로소 형식 안에서 솔로 부분을 연주하는 그룹을 솔로 그룹 혹은 콘체르티노라고 부른다. 이들은 오케스트라 반주를 할 동안 손을 놓고 쉬는 게 아니라, 함께 합주를 하다가 자기의 솔로 부분이 있을 때에만 솔리스트로 변신을 한다.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에서도 이런 콘체르토 그로소 양식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원래 악보상에는 협주자도 솔로 파트 외의 부분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합주하도록 되어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조합은, 이중 협주곡 중에서도 그 예를 찾기가 힘든 희귀한 조합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바이올린족의 악기 중에서 서로 가장 가까운 친족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바이올린과 첼로의 대비만큼 드라마틱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차르트는 왜 하필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조합을 택했을까. 모차르트가 이 곡을 작곡한 해는 1779년. 이 시기는 모차르트가 1777년부터 시작한 유럽 여행의 끝무렵이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만하임 궁정 오케스트라도 방문했는데, 당시 만하임 오케스트라는 새로운 연주 테크닉을 선도하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오케스트라였다. 즉각적인 영감을 워낙 순식간에 곡으로 구체화시켜버리는 모차르트이니만큼, 이 기간의 여행을 통해 새삼 비올라의 매력에 눈을 뜬 것일 수도 있다.

3악장 구성이며 연주 시간이 30분에 이르는 대곡이다. 1악장과 3악장은 모차르트 특유의 경쾌함이 묻어나지만, 2악장은 처절하리만큼 애처롭고 쓸쓸하다. 1악장에서는 두 솔로 악기에 완전히 균등하게 비중이 분배되었다. 하나가 달려가면 다른 하나가 쫓는 숨바꼭질 같은 느낌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따라 잡으면, 이번에는 좀 전과는 또 다른 호흡, 다른 보폭으로 새롭게 뜀박질을 시작한다. 시종 즐거운 분위기에서 놀이하듯 곡은 흘러간다.

2악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1악장이 마냥 즐거운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면, 2악장은 잔혹한 운명 앞에 놓인 두 남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바이올린은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것 같고, 비올라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른 채 떨리는 목소리로 타이르는 것 같다. 이 2악장의 슬픈 대화를, 스테판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이 과연 어떻게 표현 해 줄지, 기대된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하면 베를린 필을, ‘오스트리아’하면 빈 필을 떠올린다. 음악의 본고장 유럽이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각 나라의 왕이며 제후들은 각자의 궁정 오케스트라를 거느렸고, 수많은 작곡가와 전문 연주자들을 배출했다. 독일의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어디 베를린 필뿐이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고, ‘지존의 존재’를 바라는 법이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최고 오케스트라는? LSO인가? LPO인가? RPO인가? 아니면 BBC? 당최 구분도 가지 않는 이름들이다. LSO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LPO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다. 덤으로 RPO는 요즘 위상이 많이 추락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말하고, BBC는 물론 방송국 BBC의 교향악단이다(KBS나 NHK 교향악단을 생각하면 된다).

20세기에 비틀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 음악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다는 자괴감에 젖어있던 영국은, 역설적으로 유럽 대륙 음악의 가장 열성적인 수요자였다. 그런 만큼 영국 내에는 굴지의 오케스트라들이 많지만, 그 어느 하나도 베를린 필이나 빈 필처럼 세계인을 압도할 명성을 지니고 있지 못 하다는 것은(한 마디로 ‘고만고만’하다는 것은) 조금 서글픈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오케스트라의 대중적 인지도나 잡지에 오르내리는 순위표는 호사가들이나 집착하고 좋아하는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의 오케스트라들은 깊은 역사를 지녔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잘 계승해 오고 있다(LPO는 다소 파격의 길을 걷고 있긴 하다). 문제는 그들의 유명세가 아니다. 지휘자의 이름도 아니다. 그들 공연의 티켓 값도 아니다. 오직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며 또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오케스트라를 평가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하룻밤에 20만원 돈을 지불해가며 듣기에는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나 역시 비싼 티켓 값이 황홀한 감동을 선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끔 기만적인 감동을 부르짖으며 연주회장을 빠져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아무리 돈의 위력이 막강하더라도 감동을 억지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티켓 값이 비싸든 싸든, 그건 하나의 가능성을 구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LPO가 좋은 오케스트라인지 어떤지, 나는 알 수 없다. 설령 그 명성을 믿는다 하더라도, 연주회 날 정작 감동적인 연주를 선사할지 어떨지는 또 알 수 없는 일이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몇 번의 무대에 섰고, 꽤 여러 곡과 만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회라면 역시 첫 연주회를 꼽을 수밖에 없겠지만, 가장 즐거웠던 연주회를 꼽자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한 마지막 연주회가 아닐까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한심할 정도로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악기 연주 실력이 늘지 않는데, 그래도 마지막 연주회 때는 첫 연주회 때보다야 실력이 향상 된 상태였다. 부분부분 스스로도 연주하는 기쁨을 조금씩 느끼며 참여했다.

한 번이라도 연주를 해 본 곡은, 언제 들어도 남다르게 들리는 법이다. 그게 음악의 재미겠지만, 알 면 알수록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멋진 연주를 기대해 본다.

2010/09/14 01:07 2010/09/14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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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렇게 되도록, 운명을 관장하는 누군가의 종이 위에 쓰여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개인의 처신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가측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은, 항상 이중적인 면을 지니고 있어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전날, 선임이 몰고 가던 내 차가 도로 위에 서버렸다. 만일 차가 말썽을 일이키지 않아서, 차를 찾으러 가기 위해 40~50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2부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을까? 혹은 목요일 저녁의 우연한 회식이 아니었더라면 내 고물 차는 주말 저녁 정체를 빚는 고속도로 위에 떡하니 멈춰 서서 정체를 더욱 극심하게 만들며 57분 교통정보에 ‘고장 차량’ 소식을 띄우게 되었을까?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주행 중에 목숨을 걸고 카드를 물린 하이패스 단말기. 한 번 충전하면 두세 달은 끄떡없다던 녀석이, 잭을 제거한 지 1주일도 안 되어 방전되어버렸는지 침묵이다. 수리를 받았지만 여전히 상태 불량인 차. 오르막길에서는 아무리 액셀을 힘껏 밟아도 속도가 80km를 넘지 못 한다. 정체 구간에 들어서니 그나마도 속도를 낼 수 없다. 해가 기운다. 하늘은 눈부신 주홍빛에서 점차 깊은 바다의 어두운 푸른색으로 변해간다. 이윽고 잿빛이다. 내 마음도 그렇게 어두워져간다.

서울은 변함이 없다. 주말 저녁의 극심한 시내 교통 체증까지도. 1부 공연이 이미 끝났을 시간이다. 기름 게이지가 바닥을 친다.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본다.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인공의 불빛들만 환하다.

생상스 3번 2악장이 들려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단히 닫혀있다. 나는 우측 복도를 통해 무대 뒤편 연주자 대기장소로 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악기 케이스. 조금 전까지 이곳을 가득 메웠을 긴장의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음악이 잠시 멎었다. 그리고 3악장, 시작이다.

무대 옆벽의 뒤편에 서서, 작은 틈새로 무대를 엿보았다. 힘차게 타점을 내리찍는 지휘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지휘자의 모션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지휘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악장의 모습도.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활이 상하로 춤춘다. 뒤에서 바라보니 그 높이가 제각각인 것이 좀 많이 티가 난다. 피아노 소리도 들려온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전자 오르간은 바로 눈앞에 있다. 연주자는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풍부한 C 코드의 울림! 4악장 Maestoso(사실은 2악장의 두 번째 파트) 시작이다.

도취를 걷어내고 바라보면, 현실의 모든 것들이 하찮아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저 안에 있을 때, 함께 땀을 흘리고 연주하며 동경에 가득 차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던 때와 교하면, 이 날 이 자리에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예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솔직하게 살아가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 ‘실체’를 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이고, 추억과 상상력이 부여하는 환상은 연주장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어떤 감동의 파장을 더한다. 그래, 당신들에게 열정이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가득 찬 무대, 숨죽인 객석, 그리고 텅 빈 연주자 대기실에서 무대 벽에 기댄 채 좁은 틈으로 다른 세상을 엿보는 관객 한 사람. 이것은 썩 괜찮은 그림이다. 나는 취하기 위해 왔으니, 잔을 들어 올리겠어. 이것은 편파적이지만, 술 취한 사람은 오직 감정에만 솔직하니까.

브라보!

2010/09/05 01:44 2010/09/05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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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0년 9월 3일(금) 저녁 7시 30분

장소 : 연세대학교 대강당

연주 :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유포니아'

지휘 : 이병욱

협연 : 이주현

프로그램 :

E. Elga - Pomp and Circumstance Op. 39 No.1

F. Mendelssohn -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C. Saint-Saens - Symphony No.3 in C Minor Op. 78 'Organ'

뭐 이렇다더군. 포스터의 오르간은 멋지지만…….

2010/08/31 23:12 2010/08/31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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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니아 21회 봄 연주회

일시: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연세대학교 대강당

프로그램

-1부-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Op.46 8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벌써 세 번째 연주인가. 유포니아 사람들은 곧잘 유포니아에 대한 감정을 ‘애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던데, 나의 감정은 훨씬 소박한 것이다. 감사한 마음. 그뿐이다.



 

2010/03/05 03:00 2010/03/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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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위대한 작곡가의 시대가 있었다. 흡사 신들로부터 창조의 임무를 일부 나누어 받은 것처럼, 그들은 이 세상에 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을 탄생시켰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시대가 지나가고 위대한 지휘자들의 시대가 왔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는 못 했지만, 해석의 지평을 무한히 확대해 나가는 과업을 수행하며 대중을 신들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위대한 지휘자들의 시대가 저물고 위대한 연주자들의 시대가 되었다. 그들은 성화(聖畵)의 알록달록한 색채처럼 저마다의 개성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매료시켰다. 그리고 이윽고 위대한 연주자들의 시대도 지나갔다.

그러자 최후에 미녀 연주자들의 시대가 왔다. 그들은, 아무튼 예쁘다.



무라지 카오리(村治佳織) Plays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of 류이치 사카모토


무라지 카오리의 콘서트에 다녀왔다. 그녀의 위명(?)은 익히 들어왔다. 신주쿠 타워 레코드의 클래식 앨범 매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무라지 카오리의 리코딩만을 따로 모아두고 있는 것을 본 일도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동양의 어떤 나라보다도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 접해온 역사가 긴 만큼, 지금까지 훌륭한 음악가들도 많이 배출했는데, 클래식 기타의 영역에서도 그러했다. 무라지 카오리는 그 계보를 잇는 훌륭한 연주자일 뿐만 아니라, 전에 없던 사랑과 숭앙을 받는 스타다. 사람들은 훌륭한 기타리스트를 좋아하지만, 예쁜 기타리스트는 사랑한다.

이 날은 내가 집에서부터 직접 운전을 해서 예술의 전당까지 갔다. 내비게이션의 스피커가 고장 나는 바람에 차선 변경해서 진입하거나 진출해야 할 것을 몇 개 놓쳐서 터무니없이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대중교통을 이용 할 때보다는 이동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콘서트홀로 갔다.

연주 시작 30분 전, 로비는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관객들에게서 느껴지는 열의가 어제 저녁 장한나 첼로 리사이틀 때 못지않았다. 인터넷으로 예매해 둔 티켓을 먼저 찾고, 프로그램 북 판매대 앞으로 갔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무라지 카오리의 리코딩 두 종을 진열해놓고 함께 팔고 있었다. 또 오늘 특별 게스트로 함께 무대에 오르는 용재 오닐의 리코딩도 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 북과 CD를 함께 사면 포스터를 증정하는, 어제와 같은 이벤트는 없었다.

3,000원짜리 프로그램 북은 화보 같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족족 무라지 카오리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무라지 카오리에 대한 갖은 찬사를 읽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 사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뛰어난 기타리스트라 믿고 의심치 않으리라.

홀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예매한 자리는 1층 C블록 9열 4번. 무대에서 그리 멀지 않고, 연주자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이다. 정각 8시를 조금 넘겨 연주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객석 쪽은 암전이 되었다. 이윽고 무라지 카오리가 여신의 풍모를 뽐내며 입장하였다. 채도가 낮은 살구빛의 집시 풍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팔꿈치부터 팔목까지는 연주 시에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통이 없게 조였고, 팔꿈치 위로는 통이 넓었다. 의자에 앉아, 발 받침대에 한쪽 발을 올리고 기타를 허벅지 위에 올려 고정했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날의 레퍼토리는 류이치 사카모토나 레너드 번스타인 등 현대 작곡가들이 작곡한 대중적인 곡에서부터 클래식까지 다양했다. 첫 곡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거나 해서 제법 잘 알려진 곡이다.

내 경우, 기타는 고등학교 때 음악 수업 실기 평가로 잠깐 쳐본 것 외에는 전혀 이 악기를 다룬 경험이 없기 때문에, 기타 연주의 테크닉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다. 그러니 무라지 카오리의 연주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그렇다고 ‘생긴 것만큼 아름답게 연주하더라(사실 이게 이 날 공연을 관람한 상당수 관객들의 솔직한 평이었다)’라고 하고 넘어가버리기에는, 내가 까다로운 인간이라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솔직한 감상은, 기타의 음량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연주자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앉은 나도 음량이 작다고 느끼는데, 대체 이 소리가 2층 저 구석에 앉은 청중에게까지 잘 전달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큰 음량을 갖는 바이올린에 너무 익숙해져서 상대적으로 기타의 섬세한 다이내믹 변화에 둔감해져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큰 홀에서 들을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조금 건너뛰게 되지만, 연주회가 끝나고 이 날 연주회 때 연주된 곡들이 많이 수록된 앨범을 사서 집에 와 들었는데, 같은 곡이지만 오히려 실황보다 훨씬 곡이 맛깔스럽게 들렸다. 라이브에 미숙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기타라는 악기는 콘서트 홀 같은 큰 홀에서 독주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소리가 훨씬 잘 모이는 작고 아담한 홀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연주를 하면 기타의 매력을 훨씬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공연 전반부에만 다섯 작곡가의 여섯 곡을 연주했다. 그 중 두 곡은 각각 세 곡과 네 곡을 묶은 모음곡이었다. 화려한 기교를 선보인 ‘헝가리 환상곡’의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전반부 공연이 너무 다양한 레퍼토리로 조금 정신이 없었다면, 인터미션 후에 이어진 2부 공연은 단 두 개의 대곡(大曲)을 연주 해 자못 진중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무라지 카오리 역시 2부 때 옷을 갈아입고 등장했다. 흡사 남성 연주자처럼 상하로 깔끔한 정장을 입었는데, 특이하게 오른쪽 다리에만 붉은 색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섞인 듯 야누스 적인 매력을 뽐내었다고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별로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연주하기에는 편한 복장이었을지 모르겠지만.

2부 첫 곡은 바흐의 샤콘느의 기타 편곡 버전. 본래 지난(至難)한 바이올린 곡이다. 같은 현악기군에 속하지만, 현을 활로 문질러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인 바이올린과 현을 손으로 튕겨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인 기타는 여러 면에서 성격이 대조적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라면, 바이올린은 중음(重音)을 연주할 때 구조상 분산화음으로 연주할 수밖에 없지만, 기타는 한 번에 여러 현을 동시에 튕겨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샤콘느에는 워낙에 화음 연주가 많아서, 이 때문에 바이올린 연주와 기타 연주의 차이가 더 도드라진다. 또 한 가지 바이올린과 기타의 중요한 차이점은, 원하는 만큼 활을 배분하여 한 음을 얼마든지 길게 연주할 수 있는 바이올린에 비해 단 한 차례 현을 튕기는 행위로 소리를 내는 기타는 한 음을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타로 연주된 샤콘느는 전체적으로 비애감과 장중함이 넘치기보다는 영롱한 화음 연주, 통통 튀는 스케일 연주로 인해 매우 투명하고 간결하였다.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마지막 곡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였다. ‘아르페지오네’는 이 날 연주회의 제목이기도 한 만큼, 메인 곡에 해당하는 곡이었다. 본래 ‘아르페지오네’는 악기의 이름이다. 이 악기는 첼로와 기타를 섞어놓은 것 같이 생겼는데, 현이 6개 달려있고 조율은 기타와 마찬가지로 ‘미, 라, 레, 솔, 시, 미’로 한다. 그리고 활로 문질러 소리를 낸다. 외형상의 특징 때문에 비올라 다 감바의 후손쯤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사실 이 악기는 1820년대에 만들어졌으니까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난 뒤로도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서 탄생한 악기이다. 이 악기는 사람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고, 처음 제작된 지 10년쯤 지나서는 연주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인기 없는 악기를 위해 소나타를 작곡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슈베르트다. 물론 자발적으로 쓴 게 아니라, 의뢰를 받아서 작곡한 것이다. 그 시대에도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도 해 보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르페지오네를 곧잘 연주했던 어떤 귀족의 의뢰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귀족 이후로 아르페지오네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이 소나타는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 했는데, 20세기 들어서 아르페지오네가 아닌 첼로나 비올라로 활발히 연주되고 있다. 오늘은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이 특별 게스트로 초대되어 무라지 카오리와 함께 이 곡을 연주했다. 아무래도 비올라와 함께 연주하면 기타의 소리가 묻힐 거라 여겼는지, 무대 위에 마이크를 설치했다.

용재 오닐은 이 곡을 앨범에 실었을 정도라니까 상당히 익숙해 보였다. 간간히 무라지 카오리 쪽을 쳐다보며 앙상블을 맞추려고도 했다. 한편 무라지 카오리는 보다 악보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연주회 끝난 후 무라지 카오리가 한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연주회 바로 전날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래도 연주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먼저 무라지 카오리가 앙코르 곡을 한 곡 연주하고, 오늘 연주회 소감을 간략히 밝혔다. ‘안녕하세요’란 첫 인사는 한국어로 준비했고, 그 다음부터는 영어로 말을 했는데 영어가 그리 능숙하지는 않았다. 대충 한국에서 연주할 때마다 즐겁다는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스페셜 게스트 용재 오닐과 함께 한 소감을 말했는데, 연주회 전날에야 처음으로 만났고 그 전에는 커피 광고에서만 봤었다고 했다. 한편 무라지 카오리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은 용재 오닐은, 쑥스러움 타는 것인지 쭈뼛쭈뼛하여 별 말을 못 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함께 앙코르 곡을 연주했고, 이렇게 이 날의 연주회는 막을 내렸다.

연주회 끝난 후 두 사람이 로비에서 사인회를 열었다. 내가 로비에 나왔을 때는 이미 사인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나도 무라지 카오리의 앨범 두 장을 사서 줄에 합류했다. 두 장의 앨범 중 하나의 앨범에는 이날 연주된 곡들이 상당히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앨범 홍보에는 더없이 훌륭한 연주회가 되었을 것이다.

사인은 원칙적으로 1인 1매. 그러나 기껏 앨범을 두 장이나 샀는데, 한 장에만 사인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원래는 예당 측 직원을 통해서 사인 받을 종이를 건네주지만, 한 장은 그렇게 해서 받고, 나머지 한 장은 무라지 카오리 앞에 직접 내밀었다. 일본어 배워서 어따 쓰겠어. 사인 해 달라니까 친절하게 사인 해 주었다. 그런데 그만 사인 받은 종이 두 장을 겹치는 바람에 밑에 깔린 사인 하나가 번졌어. 용재 오닐의 사인은 그냥 프로그램 북의 용재 오닐 사진 위에다가 받았다.

사인 CD를 챙겨 들고 콘서트홀을 나섰다. 차에 시동을 걸고, CD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오늘 첫 곡으로 연주되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의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밤의 도로는 한산했다. 아름다운 기타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시원하게 뚫린 도로 위를 달렸다.

2009/11/26 05:27 2009/11/26 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