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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하고도 반 개월 만에 레슨을 받았다. 올해 들어서 겨우 두 번째나 세 번째 레슨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간 개인 연습을 열심히 해둔 덕택으로, 소리가 많이 좋아졌다는 칭찬을 들었다.

감히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대곡을 건드려 보기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감격스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대체 왜 이 지난(至難)한 곡을 연습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악기 연주가 지금처럼 취미 수준에 머무르는 이상 여기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너무 제한되어 있고, 결국 성취의 한계도 너무 빤하다. 그런데 브루흐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 아닌가.

2012/02/23 01:10 2012/02/23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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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초까지만 해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활력에 넘쳤다. 하루 5시간을 자면서 퇴근 후에 바이올린 연습과 복싱을 병행하고, 매일 도시락을 만들고, 점심시간과 잠 잘 시간을 쪼개 책을 읽고, 자투리 시간에 키케로 서간집 번역에 착수하는 등 정말 쉴 틈이 없을 만큼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다가 수요일 눈 휘몰아치는 날씨 속에 트래킹을 하고 몸살이 났는데, 그와 함께 모든 기력을 잃어버렸다. 감기는 주말까지 날 괴롭혔다. 약을 먹으면 잠시 상태가 호전되었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열이 오르기를 반복. 결국 며칠을 약에 의지한 채, 약에 취해 보냈다.

지금은 저 모든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나 싶다. 1주일 째 운동을 가지 않았다. 오늘 간신히 바이올린 연습을 재개했지만, 두 시간 연습은 상당히 고됐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퇴근 후에 방에 돌아오면 몸은 저절로 침대로 향한다. 생각해 보면 근 몇 달 사이에 이렇게 게으르게 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생산적인 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하루라는 시간이 의외로 참 길다.

쉬는 동안, 도올 김용옥의 ‘대한독립운동사’라는 몇 년 전 다큐멘터리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역사에 대한 나의 애호는 어디까지나 취미 수준에서 억눌러 두고 있지만, 이렇게 ‘인간의 이야기’를 마주할 때 나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결국 나의 사명은 학업에 있는 것일까? 온통 학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집안에서 나 혼자만은 큰돈을 벌어보겠다고 경영학과로 진로를 택했건만, 지금 내게는 돈이며 집이며 차며 온갖 부귀와 영화보다도 저 연해주 벌판에 내버려져있는 연자방아의 화강암 맷돌에 얽힌 한 조각 이야기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페르시아의 왕이 되는 것보다 진리를 알고 싶다고 했던 그리스의 한 철학자가 생각이 난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다. 군대에서 어깨에 단 계급장과 남을 부리는 권력을 인생 성공의 척도로 삼는 저 졸렬하고 멍청한 인간들을 너무 많이 보고 살기 때문일까. 하지만 바깥세상이라고 해서 무엇이 다를까. 자본주의 사회라고, 자본에 그렇게 거대한 힘을 쥐어주면서 정작 그 자본의 획득이나 사용에 있어서는 아무런 도덕적인 책임도 묻지 않는 이 폭력적인 사회를 보라. 힘 있으면 깡패 짓을 하고 살아도 된다는 조직 폭력배들의 생각과 무엇이 다른가?

그 옛날 일본은 대동아공영이니 탈아니 하는 논리를 펴면서 주변국들을 침탈하고 인민을 학살하고 가혹하게 수탈했다. 그것은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서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 자본,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 ‘경쟁’과 ‘생존’을 기치로 내걸고 중소기업과 중소 상인들을 다 잡아먹으면서 전 국민을 자기 노동력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하는 대기업들의 행태는 과거 그 악랄했던 약탈자들의 행위와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잘 살기 위함이라는 그들의 말을 믿는다. 그 옛날 일본의 제국주의가 농업 사회였던 이 땅에 백화점, 카페를 세우며 허망한 근대화의 환영을 퍼뜨렸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재벌들이 사람들에게 금융이니 부동산이니 유통이니 하는 말들과 함께 자본주의의 환상을 심고 있다. 빵 한 조각, 전구 하나라도 만들어내는 일은 비천하게만 생각하면서 큰돈을 굴려서 투자 수익을 내는 것은 능력이라고 칭송한다.

나는 저 빌어먹을 사회주의도 싫고 공산주의도 싫다. 하여튼 ‘주의’랍시고 무언가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그런 광신적인 태도가 역겹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자본주의가 종교인가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믿고, 불교는 불(佛)을 섬긴다는데, 자본주의는 자본교로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나. 맹신자는 신앙의 대상에 대해 도덕적 검증을 하지 않는데, 자본교의 많은 신자들도 그렇게 자본을 믿고 있을 것이다.

2012/02/16 00:57 2012/02/16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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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났다. 군인이 되기 전에는 잔병치레 없었는데, 군인이 되고나서는 뭐만 하면 감기 몸살이다. 훈련소 병사들 연병장의 사열대에 내걸려 있던 구호 “정예신병”을 우리는 종종 거꾸로 읽고는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몸살의 원인은, 어제 눈보라 휘몰아치는 그 험한 날씨 속에 무리해서 감행한 체련 활동 때문. 트래킹이랍시고 약 1시간 반 정도를 눈 맞으며 걸어 다녔다. 그리고는 밤 9시까지 이어진 회식. 방에 돌아온 순간부터 몸살을 예감케 하는 오한이 시작됐다. 새벽에는 열까지 올라, 아침에 결국 사무실에 전화하고 하루 휴가를 냈다. 한낮까지 자고, 병원 가서 주사 한 대 맞고 약 지어 와서 먹고는 또 잤다. 그랬더니 지금은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요즘은 도시락을 싸서 출근한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주위의 반응들이 가히 폭발적이다. 졸지에 부지런한 사람, 1등 신랑감 따위로 칭송되고 있다. 평생 혼자 살 각오를 하고 배운 요리인데, 이걸로 1등 신랑감 소리를 듣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도시락을 싸는 이유로는 다이어트도 있었지만, 어째 도시락을 싸면서 더 잘 먹게 되는 것 같다. 반찬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만드니. 그래도 밥은 건강을 생각해서 현미밥으로 하고, 반찬도 고기에만 편중되지 않도록 생선, 두부 등 밸런스를 고려 해 구성하고 있다. 이번 주말에 집에 올라가면 몇 가지 밑반찬을 더 만들어야겠다.

요즘은 엄마 차인 미니 쿠퍼를 내가 쓰고 있는데, 오늘 뉴스에 미니 쿠퍼를 리콜 한다는 소식이 실렸다. 혹시 이 차도 리콜 대상인가. 냉각 펌프에 문제가 있어서 잘못하면 화재가 날 수도 있다는데 불안하다. 고물 마티즈를 타고 다니면서 도로에서 몇 번 죽을 뻔했던 나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

어제 오늘 운동도 바이올린 연습도 못 했다. 몸 상태가 호전된 것 같으니, 내일은 컨디션 봐서 운동이라도 하고 서울 올라가야겠다.

2012/02/10 00:22 2012/02/10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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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런 창조에 대한 열망이야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열정이 아닌가 싶다. 비록 바이올린 연주가 내 마음처럼 되지는 않을지라도 끝내 악기를 손에서 놓지 못 하는 것은 나날의 연습이 이러한 욕구를 어느 정도 달래주기 때문이겠지.

요즘은 요리에 빠져있다. 일본으로 교환학생 가서 써먹으려고 익혀 둔 요리 실력을 설마 한국에서 쓰게 되다니. 지난 주 토요일에는 이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토요일 저녁의 이마트는 아비규환. 나도 대기업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고 어떤 문제의식을 품거나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진중권 같은 사이비 지식인이야 대통령과 해적 방송 진행자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꼬는 등 가십 거리 따위나 물어뜯지만, 정말 배웠다 하는 대학 교수들은 대체 뭘 하고 있나. 정치인이며 언론이며 재벌 손녀들이 운영하는 한낱 빵집이나 물고 늘어질 줄 알았지, 이 기형적인 경제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과 비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진정한 지식인들이 단지 함구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애당초 그런 자들은 이 나라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인터넷 세상에서 초등학생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교수처럼 나불거리는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진 것은 바로 지식인들의 오랜 부재, 역할의 상실로 인하여 지성의 권위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샤브샤브를 해 먹을 생각이었지만, 샤브샤브 1인분 재료를 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서 그냥 닭볶음탕을 하기 위해 닭 한 마리를 샀다. 밑반찬 재료도 좀 사서 장조림, 두부오뎅조림, 계란말이 같은 간단한 반찬도 만들었다. 내친김에 맛없는 식당 밥을 먹는 대신, 당분간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오늘은 갈치 한 토막도 구워 놨다. 밥은 백미에다가 현미를 좀 섞어서 지었다.

2012/02/07 01:27 2012/02/07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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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연휴. 그리고 수요일에 하루 휴가를 써서 총 5일을 쉬게 되었다. 최소 반년 정도 되지 않으면 휴가로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천성이 백수인 나에겐 고작 5일짜리 휴가 따위 성에도 차지 않지만.

연휴 기간 동안, 나는 이 거대한 2층짜리 단독주택을 홀로 지켜야 한다. 엄마는 뉴질랜드로 파견을 갔고, 아빠는 안식년을 받아 엄마를 따라갔다. 동생은 작년 말에 미국의 대학으로 복학했다. 집안일을 봐주던 아줌마가 이 집의 관리인으로 들어오기로 했지만, 다음 일요일에나 이사를 들어 올 예정이다.

내가 가족을 떠나서 외국에서 생활한 적은 있지만, 가족들이 모두 외국으로 떠나고 홀로 한국에 남겨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말이다. 마당의 개들은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덤덤하다. 하지만 14년이란 시간 동안 온 가족과 북적이며 함께 살아 온 아지는 좀 기운이 없어 보인다.

TV나 오디오라도 크게 틀어놓지 않으면 집 안은 적막하다. 평소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비행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누군가 찾아올 사람도 없다. 당연히 누군가를 기다릴 일도 없다. 의자에 가만히 등을 기대고 앉아 이 고요 속에 몸을 묻고 있으면, 마치 시간마저 정지해 버린 것 같다.

주중에는 대전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으니, 집 안에 홀로 있는 게 어색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달랑 방 한 칸짜리 대전 원룸은 구석구석이 모두 내 관할 하의 영역이지만, 이 커다란 집은 누군가의 부재가 느껴지는 공간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나는 1층 거실과 부엌, 그리고 2층의 내 방을 왔다 갔다 할 뿐, 다른 방문들은 열어보지도 않는다. 세삼 이 집이 내가 사는 집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문득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기회에 한 번 차분히 생각을 해봐야겠다. 지금의 이 상황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언젠가는 정말 내 생활상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2012/01/22 21:31 2012/01/22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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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스파링.

말이 스파링이지 복싱 숙련자에게서 ‘몸으로 배우는 레슨.’

엄청 푹신푹신한 글러브를 주기에 이 정도면 맞아도 안 아프겠다 싶었는데, 한 대 맞는 순간,

“아, 이건 아니다.”

그래도 처음 한 두 대 맞았을 땐 “그래, 맞더라도 들어가서 나도 때리자!”했지만, 세 대, 네 대 쌓일수록 움츠러들고 움츠러들수록 더 맞고, 얼굴 막으면 몸 맞고 몸 막으면 얼굴 맞고, 맞고, 맞고, 맞고…….

그야말로 ‘지옥에서 보낸 한철’ 아니, ‘지옥에서 보낸 2라운드.’

아, 관장님, 저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시려고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오늘 스파링(?)은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나, 앞으로 이 트라우마를 극복해 낼 수 있을까. 평생 싸움질 안 하고 살아와서 다행이다. 누군가한테 맞는다는 거, 이거 엄청 슬픈 일이다. 강자에게 짓밟히는 약자의 심정이란…….

운동 더 열심히 해야겠다. 요즘 좀 몸에 익었다고 설렁설렁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체력도 근력도 민첩성도 더 길러야지. 아, 이 저주받은 육체.

어쩌다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삐끗했다. 힘이 안 들어간다. 내일 바이올린 레슨인데, 활을 지탱할 수 있으려나. 가뜩이나 파워 보잉이 필요한 브루흐인데.

아, 아직도 골이 울리는 것 같다.

2012/01/18 00:44 2012/01/18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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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해변

부산에 다녀왔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게 될까?
2012/01/16 00:54 2012/01/16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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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쯤 동기 한 명이 이쪽으로 전속을 왔는데, 오늘에서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물론 계산은 동기 녀석이 했다. 전 소속 부대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온 것이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으라는 의미로 ‘전속 턱’을 받아낸 거다. 메뉴는 피자. 오랜만에 미스터 피자에 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자는 토마토소스와 치즈 토핑만으로 만든 마르가리타. 어렸을 때는 그냥 ‘치즈 피자’라고 불렀다. 요즘 메뉴판에 올라와있는 호화 현란한 피자들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이것저것 되는 대로 아무 재료나 쌓아 올려놔서 한 입 베어 먹으면 만 가지 잡스러운 맛이 난다. 뭐든지 비벼 먹고 섞어 먹고 쌈 싸 먹는 한국의 음식 문화에 반대한다. 피자를 보쌈처럼 만들지 말아줘.

결국 개인 오더를 내기로 했다. 토핑은 페퍼로니에 블랙 올리브, 버섯 그리고 치즈 추가. 결과적으로는 피자 한 쪽에 페퍼로니 한 조각, 올리브 한 쪽이라는 처참한 결과물이 등장했지만, 풍성한 치즈 토핑은 괜찮았다.

식사 후에는 바이올린 연습을 했다. 이번 주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실에 나갔다. 낭만파 음악은 지루할 새가 없어서 좋다. 연습 후에는 운동. 어깨에 힘이 빠지지 않는다. 왼손 잽은 여전히 말썽이다. 역시 운동에는 영 소질이 없다.

내일은 오후 반가를 냈다. 동기 세 명과 함께 부산에 놀러가기로 한 것. 특별한 계획은 세워놓은 게 없다. 다만 내일 저녁 스시 뷔페를 예약 해 뒀다. 저녁 식사 가격이 3만 5천원. 뷔페로는 평범한 가격이다. 스시 종류가 다양하고 맛도 괜찮다니 일단은 기대를 해본다.

위스키와 드람뷔 한 병씩을 가져갈 생각이다. 식후주로 러스티 네일을 만들어 마셔야지.

2012/01/13 01:55 2012/01/13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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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면서 외식을 10번을 했다면, 그 중 5번은 돈가스를 먹었을 것이다. 저녁을 뭘 먹을까 어슬렁거리다가 새로운 돈가스 집을 발견하게 되면 꼭 들어가서 먹어보는데, 물론 대부분은 실망을 하고 만다.

얼마 전에 방 근처에 ‘우마이’라는 돈가스집이 새로 생겼는데, 이 집이 개중 괜찮다. ‘저온에 은은하게 튀겨내어 깊은 맛을 내는’이라는 문구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지만, 맛도 훌륭하고 메뉴 구성도 마음에 든다. 돈가스가 튀겨지는 동안 작은 컵에 담긴 수프와 샐러드가 나온다. 샐러드드레싱은 땅콩과 키위 두 종류가 제공된다. 메인 메뉴인 돈가스에는 공기밥과 함께 비록 한 젓가락의 양이긴 해도 우동이 딸려 나온다. 후식은 딸기 잼 한 티스푼을 넣은 요구르트. 이런 훌륭한 구성에 가격은 (빌어먹을)미소야의 정식 세트메뉴보다 저렴하다.

예정에도 없던 시간 외 근무를 하고 방에 들를 새도 없이 바로 연습실로 직행해서 역시 뭐로 저녁을 때울까 하며 돌아다니다가 허름한 돈가스집을 발견했는데, 속을 줄 알면서도 결국 들어가고 말았다. 결과는 대실패. 돈가스에 사이드 메뉴로 ‘쫄면’을 제공하는 이상한 시스템이었는데, 나는 쫄면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주인아줌마에게 쫄면이 딸려 나오지 않는 메뉴는 없냐고 물었더니 ‘감자튀김’이 대신 딸려 나오는 메뉴를 추천 해 줬다. 양은 푸짐했지만, ‘꾸역꾸역’ 먹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아무튼 먹어야 사니까. 문득 사보텐의 돈가스가 그리워진다. 대전에는 없으려나.

바이올린 연습은 여전히 난항. 브루흐로 끙끙 앓고 있다. 10시쯤 연습을 접고 운동으로 하러 갔다. 시간 외 근무 탓인가 몸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마침 스파링이 있어서 구경하면서 한 숨 돌렸다. 나는 언제쯤 링 위에 오르게 될까. 사실 별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다. 누구에게 맞고 싶은 생각도, 누구를 때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나, 복싱은 왜 배우는 거지.

내일은 2주만에 레슨.

2012/01/11 00:59 2012/01/1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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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생체 시계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심박 수나 체온, 호르몬의 분비 등은 일정한 주기를 따라 변한다고 한다. 그에 따라 우리의 생활 리듬도 일정한 주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생체 시계는 밤과 낮의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자전 주기(24시간)가 인간의 생체 시계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한편 밤과 낮의 구분이 없는 동굴 속에서는 인간의 생체 시계가 혼란을 일으켜서 그 주기가 한없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동굴 속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의 생활 주기는 약 50시간까지 늘어났다. 즉 피실험자가 동굴 안에서 하루라고 느끼고 생활한 시간은, 실제로는 이틀정도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자연의 힘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처럼 대단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위적인 힘들이 얼마든지 자연의 지배력을 물리칠 수 있다. 가령 알람은 확실히 인간의 생체 시계를 지배할 수 있다. 그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계를 봤을 때 알람 울리기 불과 1분 전이었던 적은 꽤 많다. 내 생체 시계는 지구의 자전이라는 우주적 현상이 빚어내는 낮과 밤의 변화와는 무관한, ‘알람 타이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내 방은 채광이 나쁘다. 반 지하는 아니고, 지상 2층이지만 창 밖에는 건물 벽이 버티고 있어서 한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방 안은 어둑어둑하다. 이게 나에게 딱히 나쁜 점인지는 모르겠다. 화창한 햇살이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홀한 시간대에는, 애당초 내가 이 방에 있을 일이 없다.

불충분한 채광의 거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새벽녘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대체 몇 시쯤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더더욱. 이럴 때는 항상 시계를 확인하기가 두려워진다. 알람 울리기 1분 전에 깨는 것은, 차라리 더 이상 숙면을 취하기는 글렀을지언정 알람 울릴 때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맘 편히 눈을 감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다.

알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알람은 지금이 생체 리듬 상 활동해야 할 때인지, 혹은 낮인지, 밤인지, 오전 7시인지, 오후 8시인지 상관없이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을 고지한다. 내 경우, 대게는 출근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잔혹한 경고다.

겨울 철 출근은 힘들다. 외투에 목도리, 장갑까지 완전 무장을 갖추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이, 아마 알람 울리는 순간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하루 중 가장 끔찍한 순간일 것이다. 간밤에 꽁꽁 언 차가 녹고 히터가 내뱉는 공기가 따뜻해 질 때까지는, 음악을 들어도 듣는 것 같지가 않다.

여름에는 에어컨에 인색한 사무실이지만, 겨울 히터 인심은 넉넉한 편이다. 옷을 사복에서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일종의 체념 같은 것에서 오는 안락인 듯하다.

컴퓨터를 켜고 커뮤니케이터(군 내에서 쓰는 메신저)에 접속하니, 곧 메시지가 쇄도한다. 이번 주말 부산 여행을 함께 가기로 한 사라들로부터다. 땅 덩어리가 좁은 이 나라의 장점이라면 어디든 저렴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이지만, 단점이라면 이 땅을 지배하는 계절로부터 도망 칠 구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부산이라면 조금은 따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총대를 메고 부산 해운대에 있는 군 휴양시설인 그린나래 콘도를 예약했다. 이 정도면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보는데, 사람들은 이제 여행 계획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뻔뻔스럽기는.

추운 겨울에 남쪽 바다로 떠나는 여행이다. 무슨 계획이 필요한가. 맛있는 회나 먹고, 쓸쓸한 바닷가 풍경이나 카메라에 담으면 그만이다. 밤에는 광안 대교를 배경으로 야경을 찍어야지. 사람들의 관심은 결국 ‘어디를 갈까’와 ‘무얼 먹을까’에 집중됐다. 고급 스시 뷔페와 수산시장 바닥의 광어회 혹은 시장 뒷골목의 돼지국밥이 서로 상충했다. 나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지만.

퇴근 후 잠깐 방에 들렀다가 악기를 챙겨서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이 있는 건물은 좀 비정상적으로 춥다. 다행이 연습실에는 전기난로가 있는데, 전기를 많이 먹게 생겼다. 악기만 놓아두고 일단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이 먹고 싶어지는 날씨였다. 근처에 ‘아리가토 마마’라는 일식집이 있어서 들어갔다. 라면, 우동, 돈가스, 카레, 오코노미야키, 타코야키, 카라아게 등등 일본 요리는 거의 망라하고 있는 음식점이었다. 오사카식 카레우동과 야키교자(군만두)를 주문했다. 카레우동이 오사카 요리였던가? 오사카에서 1년을 산 나이지만, 대체 뭐가 오사카식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인스턴트 카레에 우동 사리를 담가놓은 것 같았다. 야키교자는 싸구려 냉동만두를 대충 튀겨낸 느낌. 음식의 퀄리티에 비해 값이 너무 비싸다.

다시 연습실로 돌아갔다. 바로 연습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추워서 난로를 최대로 틀어놓고 방 안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악기를 꺼냈다. 손 풀기로 생상의 백조. 그 다음 B 플랫 메이저 스케일을 연습. 이윽고 요즘 연습하고 있는 곡인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의 악보를 펼쳤다. 적당한 난이도는 의욕을 고취시키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곡은 오히려 의욕을 상실시킨다. 이건 아무래도 못 오를 산처럼 보인다. 중음이 난무한다. 8도 화음을 정확하게 짚으며 내려오는 건 정말 불가능하다.

9시 반, 연습을 마쳤다. 연습을 마무리 할 시간 즈음이면 한 음 한 음 켤 때마다 오늘은 운동을 쉴까 하는 생각이 뇌를 스쳐지나가지만 결국 체육관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사람이 좀 많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한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먼저 준비 운동으로 몸을 풀고 줄넘기 4라운드로 열을 좀 낸다. 8방향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잽, 훅, 어퍼, 바디를 적절히 섞어 세도우 복싱을 한다. 이미지 속의 내 모습은 꽤 날래고 멋지지만, 거울에 비치는 정직한 내 모습은 영 둔탁하고 어설프다. 6~7라운드 정도 숨 가쁘게 운동하고 나면 이제는 샌드백을 칠 시간이다. 오른손 잽은 괜찮은데, 왼손 잽이 영 부실하다는 지적을 거듭 받고 있는 터라, 왼손에 신경 쓰며 샌드백을 때린다. 하지만 힘이 실리는 것도 잠시, 근육의 글리코겐을 급속하게 소모해버리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내 왼팔. 아, 근력 운동을 따로 해야 할 것 같다. 마무리 운동은 역시 줄넘기.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12시가 넘어버렸다. 월요병을 앓을 새도 없이 지나가버린 월요일.

아빠는 지금쯤 뉴질랜드 행 비행기에 탑승 해 있겠지. 이제 한국에 나 혼자 남았다.

2012/01/10 01:21 2012/01/10 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