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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 중에 훌륭한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기보다 열 살 어린 사람 앞에서 현인(賢人)이 아닌 사람도 없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 것 같다. 내가 중학생 때 읊조릴 수 있었던 주문을,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외우고 있다. 나는 이미 믿음을 잃었기에 사람들의 지리멸렬한 훈계에 대해 귀를 닫고 나의 황폐한 삶을 끌어안은 채 은거하기로 했다.

대낮에 태양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없지만, 태양을 등지는 것은 간단하지. 결국 마음속 동굴이 우주에서 가장 후미진 곳이다.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그 동굴 속에서 차갑고 쓸쓸한 내면을 관조하는 칩거의 생활에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도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나는 세상의 관습에 따라 동굴 벽에 하루하루를 새겼다. 혹시 나의 달력에는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동굴 속 생활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길었을 수도 있고, 혹은 아주 짧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헤아린 시간에 오류가 있다 하여도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차피 내가 느낀 시간이, 내가 살아온 시간이다.

한 번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지났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을 잤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이틀에 한 번 잤을 수도 있다. 일주일이나 한 달 같은 시간의 단위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동굴 속에도 1년이란 시간의 주기는 존재했다. 그것은 희미한 빛이다. 어떤 우주의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꿈쩍도 않고 있어도, 어느 순간엔가 동굴 입구에서부터 희미한 빛줄기가 들어오는 일이 있다. 태양의 잔광인지 아니면 또 다른 별의 흔적인지, 어쩌면 그것은 반딧불 같은 작은 불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우연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필연에 의한 것이든 그 조광(照光)은 내 마음 속 동굴로 뚫고 들어오는, 외부로부터의 유일한 침범이었다. 어떤 때는 1년이 700일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날수를 제대로 헤아렸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섯 번의 조우, 나의 셈법에 따라 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굴 속 인간은 새로운 신화를 창작했다. 그것은 나의 삶을 들쳐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그대. 나는 당신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세상과 달라지기로 했다. 그것이 나를 특별한, ‘읽을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앞으로 몇 년 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이 동굴을 비우게 될 때에, 벽에 빼곡히 적힌 글들은 너에게 남겨주겠다. 그것은 낭비되고 잘못 사용된, 그러나 겸허하고 진실 된 인생의 기록이 될 것이다.

깊고 어두우며 적막한 동굴에, 빛을 들고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너를, 나는 상상했다.

2011/05/30 22:25 2011/05/30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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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셀을 밟자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계기판의 바늘이 올라간다. 밤이슬에 덮여 뿌옇던 차창이 히터의 더운 바람을 맞아 차차 선명해진다. 스피커에서는 라벨의 ‘거울 모음곡’의 제1 곡이 흘러나온다. 도로는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 하다. 그러나 속도를 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가능하다면 이 음악과 함께 언제까지나 달려가고 싶다.

새벽 1시 반을 넘겨, 충주의 숙소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했지만, 들뜬 마음은 쉬 가라앉지 않는다.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한 곡만 더’, ‘한 번만 더’를 번갈아 외치는 사이, 어느 덧 시계는 새벽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밤에는 채 3시간도 자지 못 했다. 그리고 오늘은 밤 10시를 넘겨서야 간신히 퇴근했다. 그야말로 ‘베개에 머리만 갖다 대면 그대로 잠들어버릴’ 만큼 피곤하지만, 무언가에 들뜬 이 마음은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 뜨거운 덩어리를 어떤 식으로든 토해내지 않는다면,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도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를 헤매며 또 하루 나를 더 지치게 만드는 밤을 보내리라. 하지만 내게는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예리해진 정신을, 정확히 과녁의 중심으로 인도할 만큼의 집중력이 없다. 이런 때에 중요한 것에 대해 쓰는 것은, 또 다른 꿈을 꾸는 것과 같으리라. 나는 달려가려고 하지만 힘차게 발을 구를수록 더욱 뒤로 밀려날 뿐이다.

우회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에 대해 쓰는 것으로 잠시 이 불안한 분출의 기미를 보이는 욕구를 달래놓는 것이다.

얼마 전에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사요나라, 사요나라』에 대해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어째서 이런 작가에게 아쿠타가와 상을 수여했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혹평을 했는데, 아무래도 한 명의 작가를 단 하나의 작품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심정으로 골라본 것이 바로 단편집 『도시여행자』이다. 사실 책날개나 띠지에 적힌 화려한 선전문, 책 뒤편에 실린 호들갑스런 서평 따위는 이 책을 고르는 데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단지 『도시여행자』라는 제목이 지닌 매력에 이끌렸을 뿐이다. 더불어 도시의 지도를 책표지로 넣고, 그 위에 편지 봉투 모양의 커버를 씌운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거리,’ 도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야근을 하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온 샐러리맨이 밝힌 전등, 퇴근길 운전자가 밝히는 자동차 미등,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는 음식점, 술집들의 화려한 간판 조명 따위가 뒤섞여 빚어내는 도시의 야경. 아름다운 모자이크의 한 조각이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발밑을 밝혔을 뿐인 불빛이 모여 의도하지 않은 풍경을 만든다. 걸쭉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러나 제법 먼 거리의 공간이 가로놓여있다. 멀리서는 찰싹 붙어서 마치 하나처럼 보이던 건물들 사이에 반드시 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시여행자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의 거리를 여행하는 사람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제목이 나에게 품게 한 높은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 했다. 만약 이 단편집의 제목이 원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원제는 이 단편집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의 제목과 같은 『캔슬된 거리의 안내』이다.) 출판사나 역자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면, 작가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다. 대체 이 소설 어디에서 “작가가 늘 관심을 가지는 ‘공간’, 즉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삶의 양상을 표현한다는 기본적인 모티브”가 존재하는 것인가? 모든 일들이 실은 어떤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야기가 배경과 좀 더 밀접한 관련성을 갖지 못 한다면, 위의 주장은 그저 삶의 양상을 표현한다는 소설의 ‘기본’을 두고 ‘모티브’라고 표현하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10년간의 성장을 보여주는 10편의 소설이라고 하지만, 성장의 결과가 『사요나라, 사요나라』 정도였다면 그 과정이라는 것도 어쩌면 뻔한 것이겠지. 장기간에 걸쳐 서로 큰 연관성 없이 쓰인 소설인 만큼 각 작품마다의 퀄리티도 제각각이다.

『나날의 봄』은 매우 통속적인 작품이다. 연애소설의 가장 단순한 패턴을 토대로 심리 묘사의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딱히 인상적인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영하 5도』는 즉흥적인 착상이 충분한 고려나 고심 없이 성급하게 작품화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배경을 ‘서울’이 아니라 ‘상하이’로 바꾼다 한들 뭐가 문제될 것인가. 그만큼 배경이라는 요소를 작품 속에서 적절히 활용하고 있지 못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독자로서는 이해할 길 없이 허공에 떠버린 주제다. 작가의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의 핵심이 태동했을 때에는, 그 핵심적인 생각이 독자에게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전후의 맥락을 빈틈없이 구성해야 한다. 모든 소설이 반드시 독자에게 친절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성을 갖춘다’고 하는 작업은 뜬금없는 생각을 성급하게 작품화시켜버리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다.

『24 Pieces』는 실험정신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만큼 ‘어떻게 쓸 것인가’ 역시 소설을 쓸 때에 끊임없이 고민되고 연구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쓰기의 방법을 새로 개척하는 만큼 소설의 영역은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24 Pieces』는 이미 동시대의 젊은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그의 단편집들에서 시도한 것들이 비하면 얼마나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 물론 작가가, 이 작품을 두고 쓰는 방식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의도 없이, 단순히 단절적인 문단의 나열을 통해 복잡한 심리를 생생하게, 또한 상징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반면 비교적 마음에 드는 작품들도 있었다. 가령 『젖니』와 『캔슬된 거리의 안내』가 그렇다. 이 두 작품은 적절한 배경의 설정과 이야기와의 융화가 소설의 완성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젖니』는 어떤 거창한 현실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부재, 스스로 서서히 침몰하고 마는 인간의 기울어진 인생, 탈출구 없는 부조리의 느낌을 상당히 잘 전달하고 있다. 여기서 마치 『사요나라, 사요나라』의 가난한 단지를 연상시키는 동네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와 더불어 이 소설의 분위기를 완성하고 있다.

『캔슬된 거리의 안내』는 이 단편집 안에서 단연 가장 읽을 만한 작품이다. 현재의 나, 과거에 대한 회상 속의 나,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속의 나라는 세 자아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구성도 상당히 탄탄하다.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세 이야기의 분위는 모두 암울한 분위기를 띠는데, 단지 우울한 회상으로 닫힌 채 끝날 것 같은 이야기들은 각각의 시점을 기준으로 미래에 대해서(또는 현재의 시점에서 같은 사건을 재해석함에 있어서) 모종의 가능성의 존재를 열어둔 채 종결되면서 이 세 이야기들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캔슬된 거리’가 의미하는 ‘군함도’란 배경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2011/03/09 00:39 2011/03/09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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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Perez Rulfo(1917~1986)


인간이 간직한 영원의 신비, 꿈. 제아무리 현실과 닮은 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딘가 뒤틀려있다. 사실 꿈에는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정밀한 현실의 모사를 추구하지도, 현실 너머의 어떤 이상을 모색하지도 않는다. 꿈은 무한한 상징과 은유, 알레고리의 결합일 수도 있고 그저 무의미한 환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맥락 없이 피어오르는 이런 신기루는 사람을 홀리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꿈에 빠져들면 눈을 찌르는 아침의 햇살에도 아랑곳 않고 침대 위에서 몸을 움츠린 채 그 맥락도 없는 이야기, 결말이 없이 무한히 표류하는 꿈의 자락을 붙잡고서 헤어 나오지 못 하는 것이다.

라틴 문학은 어쩐지 ‘꿈’과 비슷하다. 꿈이 아니라면, 확정된 시간과 공간을 점하는 ‘위계’가 뒤섞일 수 없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 허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미 가상의 한 층위를 형성하지만, 아무리 환상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현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는 한 시간은 인과적 순서에 따라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고(원인 이전에 결과가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 자아는 하나의 차원(次元)에 속해있다. 주인공은 깨어있거나, 꿈을 꾸고 있거나, 천국에 있거나 혹은 분열된 자아끼리의 다툼 중에 있다. 꿈에서는 이런 원칙이 무시된다. 다른 시간 속의 여러 공간이 중첩되며, 하나의 자아는 여러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혹은 완전히 부재하기도 한다. 라틴 문학은 마치 논리적 인식 구조에 심각한 오류를 초래하는 이러한 꿈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꿈을 꿀 때와 마찬가지로 그 소설 안에서 모든 기호들을 해석할 수도 있고, 완전히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공적으로 쓰인 소설들은 꿈이 갖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매력, 즉 아침을 거부하고 꿈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줄거리



나는 이 소설의 꿈을 모사한 듯한 속성, 다층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혹은 그렇게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하다는 것을 언급 해 둔다. 이를테면 이 소설은 하나의 혁명 소설로 분류될 수 있으며, 유일한 생산 수단인 토지를 독점하는 토호(土豪)와 민중들의 갈등, 저항, 그리고 혁명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의 내용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혁명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는 역시 ‘모호’하다. 이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2010/11/29 23:15 2010/11/2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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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요시다 슈이치. 일본 소설 코너에서 자주 발견하는 이름이다. 권위와 대중성을 모두 갖춘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가로 널리 홍보되는데, 몇 권의 책 서평을 읽어본 결과 상당히 기발하면서 반전이 있는 소설을 잘 쓰는 모양이다. 이번에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해 보았는데, 이 한 권으로 미루어 그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지만, 솔직히 이런 작가에게까지 아쿠타가와 상을 시상해야 할 바에야 매년 수상자를 내지 않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요시다 슈이치 본인인이 ‘두 번 다시 이런 연애소설은 쓰지 못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확실히 연애소설은 두 번 다시 쓰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소설 대강의 플롯은 전체의 3분의 1도 읽기 전에 그려졌고, 전개는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 소설이, 어떤 반전을 준비하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소재는 확실히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일 수도 있겠지만, 소재의 독특함이 결코 소설 자체의 독창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 대한 시시콜콜한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 한 것에 비해, 인간의 심리에 대한 고찰은 어딘가 작가 자신의 시각에 매몰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대체 어디가 ‘작가 자신과 작품 간의 거리감’을 느끼게 한단 말인가?

소설의 전개도 뭔가 중간중간 잘라먹은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힘이 부족하다. 캐릭터들도 생동감이 떨어진다. 그 중에서도 와타나베란 캐릭터는 최악이다. 기자답게 집요함으로 꽉 찬 캐릭터로 그릴 것이 아니었다면, 아예 텅 비어서 완벽한 관찰자로 만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소설 전반에 와타나베의 의식이 상당히 많이 흐르고 있는 것에 비해 알맹이가 없다. 이건 뭔가 독자가 소설 속 사건과 배경을 자신의 의식 속으로 온전히 흡수하는 것을 방해하면서도, 역으로 독자가 충실하게 따라갈 길은 깔아주지 않는 불친절함이다.

덧붙이자면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가 과연 여성, 여성의 심리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이건 나로서도 뭐라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건 여성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야겠다.

기억에 남는 구절

상상 속에서 그녀는 사내 남자직원에게 교제하자는 요청을 받고 거절했다. 자기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이 머릿속에서 고스란히 그녀의 이야기로 변해갔다. 자기가 누군가와 사귀면, 상상 속의 그녀도 누군가와 사귀기 시작했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십 수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터무니없이 긴 세월이 아니다. 무언가를 십 수 년간 계속 생각하는 것쯤은 인간에게는 간단한 일인 것이다.

2010/09/23 01:49 2010/09/23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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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으로 인하여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지만, 역설적이게도 약쟁이에게는 약에 취해있는 동안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버린 세계에서,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쾌락을 맛보고, 모든 감각을 뒤덮어버리는 지극한 환희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궁극적인 ‘생(生)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누군지는 잊었지만, 어떤 유명인 혹은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섹스를 해.”라고.

그러나 포식자가 되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뱃속에 집어넣는 것이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 주는 충족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 마리 양이 되어,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가 으스러질 때에,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살아있다! 대체 생의 증거를 찾아 헤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침마다 피로와 싸워 눈을 뜨고, 두 다리로 온몸의 무게를 느끼면서 터벅터벅 걸으며, 힘겹게 숨을 쉬는 그 자체보다 더 신물 나고 지긋지긋한 삶의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지겨운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는 게 재미가 없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나는 앞으로 60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하고, 의학 기술이 지금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면 어쩌면 100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야 할 그 긴 시간을 생각하면, 때로는 절망감마저 느낄 지경이다.

내겐 음악이 때로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음악을 들을 때면, 작곡가들이 현실에 대해 품었던 강한 불만족 같은 것을 느낀다. 그들은 단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자연이 허락한 이상의 것을 꿈꿨던 것이다. 실체가 없는 음악 안에서는 여전히 하늘로 닿으려는 탑을 쌓고 있다. 그 환상을 보며, 나는 잠시 살아있음을 잊는다.

사무실의 일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지금과 비슷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뒤죽박죽 뒤엉킨 거미줄 같은 것이고, 우리들은 그 위에 곤충의 시체처럼 내걸려 있다. 포식자의 뒷다리가 움찔거릴 때마다 우리의 삶은 요동친다. 잔바람에도 전 존재가 휩쓸려가 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느끼며, 그러나 이 고착된 삶의 형태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도태되는 것조차 그리 쉽게 되지는 않는 일임을 서글퍼한다. 우리는 그렇게 사회라고 하는 것에 거추장스럽게 들러붙어 있다.

연주회장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나는 내가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 지긋지긋한 현실에 똑같이 구속받는 사람들을 본다. 내가 시시한 문서 작성을 위해 타이핑하듯 무표정하게 음표 하나하나를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을 볼 때면, 매춘은 아마도 이런 기분일 것이라고 깨닫는다. 혼자 열정을 불사르고 땀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이지만 끝내 매춘부의 차가운 시선, 그 직업적인 딱딱한 태도와 마주하게 되고, 그 순간 덧없는 환상은 깨어지며 너무나도 재빠르게 비루한 현실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그저 인내할 뿐인 삶에 대한 씁쓸한 환기. 너도 나도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저 역겨움을 참으며, 인생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2010/09/19 17:31 2010/09/1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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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해가 뜨는 것을, 저녁이면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깨닫고 있었다. 내 시간은 태양 주위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무한히 도는 그 반복적인 하루 속에 갇혀있음을. 잠시 등을 돌렸다가 언제나 같은 태양 앞으로 돌아갔다. 밤이면 하늘은 무수한 별들로 뒤덮이고, 거대한 천체들의 움직임은 우주를 가득 채우지만, 땅 위에 두 다리를 딛고 선 작은 존재의 가슴에 고독이 스미는 것을 막을 길은 없었기에. 오늘을 어제로 밀어 낼 새로운 시간이 새겨지지 않는 기나긴 하루 속에서, 사랑하지 않으며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젊음이 잠식되고, 나는 조금씩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내가 웃어넘기지 못 할 일은 없다. 나의 실존을 의심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내가 경험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현실, 내가 영위하고 있는 단 한 번뿐인 삶 구석구석을 들쳐보려고 하면 무엇 하나 안개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었다. 삶이, 어딘가 사실적이지 않다. 죽어도 죽을 것 같지 않은 느낌, 혹은 죽어도 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또는 이미 죽어있는 느낌. 그 비현실적인 세계에서는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기에조차 내게 이 세상은 너무나 공허하다.

그렇다면 내 최선의 것을 너에게 주겠다. 사랑 받지 못 하는 외로움이 아니라, 사랑 하지 않는 고독. 내겐 먼저 사랑할 대상이 없었고, 이제는 쏟아 부을 마음이 없어졌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말라버린 우물처럼 텅텅 소리를 내는 공동이 되어버렸다. 그 밑바닥에서 찾아낸 마지막 한 줌의 것을, 이제 자유롭게 날려 보낸다. 그 검불 같이 가벼운 생이 무한의 속도로 질주하여 단지 공기에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무수한 파편을 흩뿌리다가 이내 유성의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진다. 그 흔적이 내가 이 세상에서 흘린 단 한 방울의 눈물이며, 나의 모든 상상력을 다하여 만들어낸 유일한 감각이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텅 비어버린 나는, 너로부터 분리된다. 처음으로 나의 태양이 저무는 것을 바라본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거무스름한 산자락 위에서 최후의 빛이 명멸한다. 나는 등을 돌려 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하루로부터 떨어져 나와, 빛과 온기를 어제의 것으로 밀어내면서 어두우며 차가운 공간 속으로 멀어져간다.

2010/09/12 15:30 2010/09/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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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뿌리는 빗줄기에도 여러분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이 ... 불굴의 의지로 ... 조국을 수호 ... ”

바람이 분다.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진다. 쌓아올린 타이어 표면을 때린 빗방울은 부셔져 파편을 날린다. 전투복은 축축하다.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다. 삐져나온 타이어에 엉거주춤 기대고 앉아있다. 가로등은 철조망을 비추고 있다. 인공 광원에 이끌린 곤충들이 전혀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광분한 나방의 무리가 민들레 꽃씨처럼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 또렷이 보인다. 억세 보이는 잡목의 줄기가 나방의 날개에 닿아 아래위로 흔들린다. 나방은 넓은 잎의 뒷면에서 잎줄기를 여섯 개의 다리로 단단히 잡고 젖은 날개를 파르르 떤다. 귓가에 모기 앵앵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산모기의 가느다랗고 예리한 침은 전투복을 우습게 뚫어버린다. 병사는 진지 아래 도로를 주시하고 있다. 이따금 모기 물린 곳이 가려운 듯 몸을 긁는다.

“발견 즉시 ... 사살하라.”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댄다. 묵직한 철 덩어리의 촉감이 느껴진다. 손잡이를 꽉 쥔다. 번개가 번쩍인다. 여러 개 천둥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또 한 차례 빗줄기가 지나간다. 다시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도로를 바라본다. 서치라이트를 밝힌 차들이 오간다. 이따금 경비대의 차량이 큰 소음과 함께 지나간다. 사복 차림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 웃음소리가 습한 공기를 가르고 이곳까지 또렷이 들려온다. 방독면을 쓴다. 안경을 벗어서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다. 내뱉은 숨이 삼분의 일쯤은 되돌아오는 것 같다. 위장크림을 바른 피부가 끈적인다. 땀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흘러내려 코끝에 맺힌다. 다시 방독면을 벗을 수 없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어 떨어뜨려버린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방비 ... 너희의 작전은 실패 ... 이제 그만 투항하라, 투항하라!”

“... 그러니까 병들은, 6주에 한 번인 외박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똑같지, 장교들은 주말만 바라보고 살고 있으니까.”

진지 안쪽에서 나방들이 날아오른다. 병사의 헬멧에 나방이 앉았다. 마치 장식 같다. 전투화에도 몇 마리 나방이 앉아있다. 모기가 목덜미를 물었다. 불편해진 자세를 뒤바꿔 보지만, 마뜩치 않다. 진지 바닥 물웅덩이는 더 커졌다. 조심스럽게 디딘 땅에서는 물기가 배어나온다. 모기가 문다. 나방이 날아오른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몇 차례 하늘이 번쩍인다. 이어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빗줄기가 오락가락.

“훈련소에서 말입니다 ... ”

“훈련소에서 말이지 ... ”

상황종료.

2010/08/18 23:23 2010/08/18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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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8년도 ‘근대 유럽의 세계’ 강의를 들으며 리포트로 작성하여 제출한 글이다. 르네상스부터 68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사 중에서 자유롭게 주제를 선정하여 리포트를 작성하는 과제였는데, 나는 이 글에서 한 인물의 생애를 이야기함으로써 르네상스의 종언과 종교 개혁의 효시를 동시에 다루고 싶었다. 지난번에 공개한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다룬 글과 유사한 형식이지만, 글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달라진 점들이 많다. 나로서는 이걸 진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만…….

역시 이미지와 각주들은 생략되었다(나중에 보충할 예정이다).

more..

2010/05/03 06:00 2010/05/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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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4년도 하반기에 쓴 것이다. 당시 나는 연세대학교에 수시로 합격하고, 대학 체험 강의로 ‘독서와 토론’ 수업을 신청하여 들었는데, 이 글은 그 수업에서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을 주제로 발표를 하기 위해 작성한 발표 자료이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그것이 그의 정치사상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발표를 맡았기 때문에, 군주론의 내용에 대한 고찰은 빠져있다. 이따금 내가 과거에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재미있다. 한창 군주론, 로마사 논고, 만드라골라 등을 읽으며 마키아벨리에 심취 해 있을 당시의 모습이 본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거의 요약 해 놓았고, 거기에 리돌피가 쓴 마키아벨리 평전에서 약간 내용을 가져왔을 따름이다. 문장도 지금 읽어보면 영 어색하기 짝이 없는데, 의식적으로 마키아벨리를 흉내 내려고 한 면도 있다. 수년 후, 수도사 사보나롤라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인물의 생애와 사상 형성의 과정을 고찰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슷한 유형의 글이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글을 풀어나가는 방법이나 문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 재미있다. 다음 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원래 이 글에는 이미지도 첨부되어 있고, 각주도 여럿 달려있는데, 옮기는 과정에서 생략했다.

마키아벨리와 군주론

2010/04/26 06:00 2010/04/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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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영원히

Dante Gabriel Rossetti. Beata Beatrix. 1864-1870. Oil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 UK

                                     괴테


이 지상의 울타리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이

신(神)들의 이름으로 부르는 고귀한 행복이란 것은

흔들리지 않는 성실한 화합(和合)과

의심할 줄 모르는 우정(友情), 그리고

고독하게 사색에 잠겨있는 현자(賢者)나

아름다운 심상(心像)에 잠긴 시인에게서만

불타오르는 빛이거늘-

그 모든 것을 내 최선(最善)의 시간에

그녀에게서 발견하여 나는 내 것으로 했으니.

2009/11/13 05:54 2009/11/13 0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