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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는 한때 밀라노 공국을 지배했던 스포르차 가문의 웅장한 성채가 있다. 포(砲) 이전 전쟁의 유물인 이 성은, 어중간한 기백은 압도해버리는 높은 성벽이 인상적이다. 벽돌로 탄탄하게 쌓아올린 성벽 둘레에는 해자(垓字)가 깊게 파여 있다. 그 성채 앞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대체 이러한 성채는 왜 만든 것일까?

성벽의 목적은 당연히 방어이다. 그러나 웅장한 성채라고는 해도, 전투를 몇 번 치러낼 수 있을지언정 전쟁을 치러낼 수는 없는 규모다. 성채를 이만큼 확장하고 개축한 스포르차 가문은 프랑스의 공격에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런 ‘하찮은’ 방벽은 전쟁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러한 성채는 외적, 즉 적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외적을 생각하고 세운 것이 아니라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지배 가문이 내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내부의 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신과 국민이다. 이토록 튼튼해 보이는 성체는 사실 불안한 정치 기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20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약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한다면, 그는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해야만 하는 형편에 처한다면, 그 지배자의 미래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

‘로마사 논고’ 제2권 24장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통치자)의 사악한 행동은 강제로 백성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나 통치자로서 그가 지닌 경솔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강제로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원인들 중 하나는 그가 백성들을 제압할 수 있는 성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설령 당신이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어도 약탈당한 백성들에게 무기는 남겨져 있을 것이고 만약 당신이 그들의 무기마저 빼앗는다면 분노가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계속해서 다른 나머지 사람들도 해친다면, 마치 히드라의 머리처럼 그들의 머리가 또다시 생겨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군주에게 최선의 요새는 그의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군주론)”라고.



시청 앞 광장은 내가 학교 가는 길에 언제나 지나치는 장소이다. 현 정부 들어서 이 광장이 철옹성으로 변모한 것을 목격한 것만 몇 번이었던가. 저 성벽은 누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일까.

분명 민의(民意)라는 것은 항상 옳지만은 않다. 다수의 판단이란 흐름과도 같은 것이며, 집단 지성이라는 것은 때론 중우(衆愚)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공포에 질려 절벽으로 뛰어드는 소떼들처럼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해 걸었다.

따라서 치자(治者)는 항상 민의(民意)에 따라서만 통치를 할 수 없다. 때로는 다수의 뜻에 반하여 의지를 관철시키고, 방향을 새로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민은 다스림의 대상이며, 민은 국가 그 자체이다. 민과 싸우는 ‘정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소수의 권익만이 보호되는 성벽의 안쪽, 한 줌의 땅 위에 민은 살지 않는다. 그것을 어찌 나라라 부를 수 있을까? 설령 그 안에 무장한 이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남면(南面)한 채 앉아있는 이가 있다고 한들, 그가 어찌 치자(治者)일 수 있겠는가?

나라 안의 작은 성채는 언제나 사(私)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 안에서 언제나 사사로운 이익만을 생각하는 무리들이 바로 한비자가 말하는 ‘나라를 좀먹는 벌레의 무리들’인 것이다.

2009/05/28 03:48 2009/05/28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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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으로 성장한 테세우스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 무렵 아테네까지의 육로는 흉포한 도적떼들이 들끓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힘세고 걸음이 빠르고 체력이 좋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둑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의와 공정심, 자비심 같은 것들은 힘이 약한 자들이나 하는 소리이며, 힘을 가진 자신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당시의 아테네는 부족 연합 수준의 나라에 불과했으며, 도시의 지배권은 넓지 않았다. 정치체제는 왕정(王政)이었는데, 장자 계승도 담보하지 못 할 정도로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아테네가 폴리스들의 모국(母國)이 된 것은, 테세우스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는 도적떼와 무법자들을 힘으로 처벌하는 한편,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러 부족들을 설득하여 통일된 법질서 아래 복속시킴으로써 국가와 질서를 세웠다.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여, 이 땅에 오라.”는 그의 호소에, 평민과 가난한 자들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권세 있는 자들은 꺼렸다. 그러나 결국 아테네가 폴리스의 으뜸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힘의 논리만이 존재하는 무질서보다는 아테네의 질서를 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루소는 “권리의 조정이 없는 곳에는 오직 선점(先占)과 강점(强占)만이 존재한다.”고 썼다. ‘힘이 세고 걸음이 빠르며 체력이 좋은’ 이들은 마음껏 몽둥이를 휘두를 수 있는 세상을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와 같은 더욱 힘센 자들에 의해, 자신들이 약자에게 행했던 바를 그대로 되돌려 받고 말았다.

오늘날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머리 좋고, 셈이 빠르고, 배짱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사기꾼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정의와 평등보다는 편법과 특혜를 더 선호하는 법이다. 그 부정 속에서만 그들의 권세가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 테세우스 같은 이가 나타나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해도, 반드시 격렬히 저항하는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는 항상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나온다.

이런 무리들을 이겨내지 못 하면 사회는 발전하지 못 하고 정체한다. 정체가 오래되면 고인 물처럼 썩는다. 썩은 물에서는 무엇도 살지 못 해 사회는 망하고 만다. 사실 많은 나라들이 이렇게 망하여 없어졌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스러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국가가 채 못 다 핀 수많은 청년들의 꿈과 함께 요절하고 말 것인지 혹은 좀 더 오래 건강한 삶을 누릴 것인지는, 오직 제때 수술을 받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무지와 무관심은 병을 키우는 일이요, 체념은 목숨을 버리는 짓이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를 무어라 변호하든 간에, 현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다.



 

2009/05/27 05:31 2009/05/27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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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힘없는 한 개인으로 와서 시대의 격류에 휩쓸리다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혹은 그 흐름에 저항하고 물줄기를 돌려보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혹은 저 고소(高所)의 바위 위에 정좌하고 앉아 골짜기의 탁류를 관조하는 것일까?

세상에 정의가 흐려지고 소의가 대의에 앞서며 비열함이 떳떳함을 목 조르는 일은 흔히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정의를 잃은 지 너무 오래되어 간사함의 뿌리가 온 땅에 깊이 내렸다. 그러니 의로움이 싹 틀 한 줌의 땅이라도 남아 있을런가.

사마천에게 신(神)은 곧 인간의 역사(歷史)였다. 의로운 사람들이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굶어 죽었고,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던 도척은 부귀와 천수를 모두 누렸다. 이것을 두고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가 그릇된 것 같다. 그러나 훗날 공자와 같은 성인이 나타나, 백이와 숙제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 의로움을 제시하니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니 백이와 숙제는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그 위로를 받을 것이고, 도척은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실천적인 정의로움은 죽은 뒤 하늘에서 작은 안락함으로 보상받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후세의 정당한 평가 속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즉 인간의 역사에서 결국 그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어떤 울분이 들끓게 만들었다. 그는 정의를 상실한 사회에서 무언가 변화를 주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방편의 세련되지 못 함이나 작은 흠결들을 말하길 좋아하지만, 나는 다만 그 대의를 따르고자 한다. 젊은 사람들의 사명은 현실 운운하기 이전에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모범을 따라 이 시대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백이열전


2009/05/23 16:10 2009/05/2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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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튀프 서문


2009/05/11 18:55 2009/05/11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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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이 세상을 비추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오만한 착각일지도 모르나, 그렇다면 태양은 침묵만이 영원한 시간을 지배하는 저 차디찬 공간 속에서 다만 홀로 빛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풀잎에 맺힌 작은 이슬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아침이면 하루 일과를 시작할 준비와 함께 동쪽으로 기지개를 펴는
만물의 경배를 받고, 곧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소란한 소리를 듣다가, 저녁이면 금빛으로 물든 만안의 물결의 찰랑거림과 함께 서서히 잠들어가는 세상의 영송을 받는 태양은, 다만 무한한 공간 속에서 차갑고 고요한 돌들 위에 외롭게 빛나고 있을 뿐인 별들보다 어쩌면 조금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상상인 것일까?

아티쿠스여, 우리 인간의 오만함은 어쩌면 이와 같은 엉뚱한 상상이 빚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태양처럼, 마치 이 세상을 전부 포괄하고 있는 듯이 여겨지는 하나의 운명 앞에서 빛나기 위해 스스로 불덩어리가 되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 자신이 텅 빈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의 벌통에 꿀을 가득 채워주고 싶어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가련한 인간의 인생을 떠올릴 때면 나는 서글퍼져서 이를 비웃을 수조차 없다.

아티쿠스여, 운명은 얄궂은 것이다. 나는 일찍이 어느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매료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의 인도자는 그 무엇에도 매료되지 않는다더군. 자기 내부의 연료로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 삶 앞에서, 나는 왜소하고 희미해졌다. 그렇다면 아티쿠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지난 몇 년간의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떤 자유는 씁쓸한 것이다.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보다, 내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지. 자신을 옭아매는 고통의 사슬을 끊어버리려고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가진 단 하나의, 너무 허황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황홀한 행복의 환상까지 함께 놓아버려야 하니까.

인생은 한 줄, 아니 어쩌면 한 점. 무한한 공간을 목적도 없이 표류하다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지금껏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법칙이 어그러지는 곳으로 휩쓸려가게 되는 것인가 보다. 그리하여 한 번 넘어서면 결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

격류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털어버렸다. 꼭 내 삶을 위한 무게와 부피만을 남겨두고서.

이윽고 언젠가 내가 별이 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내가 무엇을 위해 빛나야 하는지 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08/06/13 15:27 2008/06/1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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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가 햇빛을 도시의 구석구석까지 실어 나르는 그 아름다운 곳에서 깊이 생각해 보려무나. 참된 자유란 무엇인지, 자유로운 삶이란 대체 어떤 형태의 삶을 말하는 것인지를. 혹시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 더 많은 자유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싶어 샅샅이 살펴보면, 종국에는 이전에 모르고 있던 새로운 빚 증서만이 손에 쥐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더냐.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했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권을 부여받는다고.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은 여기에다 여러 가지 권리들을 덧붙였다.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 좋은 권리들을 누리는 데에는 그만한 대가도 따르는 게 이치 아니겠니. 어쩌면 우리가 탄생하는 그 순간, 우리의 인생에는 차압 딱지가 나붙는 것일지도 몰라.

사회라는 울타리가 언제나 우리의 좋은 것들을 지켜주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란다. 이 울타리는 제도니 문화니 하는 다양한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는데, 어떤 때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욕구와 의문들을 반사회적이라 규정짓고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 버리곤 한단다. 너는 인간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도덕을 익히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 정의(正義)라는 것이 인간에게 내재된 본연의 속성이라면, 사람들은 대체로 옳은 판단을 내릴 것이고, 그 결정에 의심을 품을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들의 군집은 단순한 합산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거대한 하나의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 괴물이 어떤 규범의 몽둥이를 폭력적으로 휘두르면, 나약한 개인은 그것에 맞고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

네가 어떤 사람과 마주할 때 느끼는 대화의 단절, 설득의 불가능함,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소통의 장벽은 단지 너와 그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대체로 자유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이 어떤 구속 속에 놓여있는지를 몰라. 혹 언제든 체면치레를 위해 교양 있는 척하려 애쓰는 가련한 인간들을 보거든 시험 해 보려무나. 그들을 가혹한 구속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시켜주려고 약간의 조언이라도 하려하면, 곧바로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지를 격앙된 태도로 역설하고 나설 것이다.

자연의 법칙 이외에는 아무런 구속도 존재하지 않는 야만의 상태에서라면,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나는 네가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머나먼 타국에 있다는 것이 흡족하구나. 대개 사람들의 지식이나 규범의식이란 그들이 살고 있는 고장의 면적보다 넓지 않단다. 네가 그 배타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이방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다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고독은, 역시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대가이겠지.
2008/06/10 15:26 2008/06/1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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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모든 일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때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미쳐 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런 때에, 시계의 저 가느다란 바늘이 매초마다 정확히 정해진 간격만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무 그늘에 숨은 채 우렁차게 울어대던 매미가 어느 날 바짝 마른 시체가 되어 내 발 아래 나뒹굴었다. 여름은 여전한가? 나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상징은 그렇게 감상적 시간의 흐름을 농락하지만, 그러나 나는 아직도 들끓어 오르는 한여름 속에 있다.

일본 열도는 이상 고온에 시달리고 있다. 며칠 전에는 일본 기상 관측 사상 최고 기온이 기록되기도 했다. 달아오른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니, 실제로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그들은 살해당한 것이다. 바로 태양에게 말이다!
아스팔트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만 같은 한낮의 열기 속에 서 있으면, 목덜미로 태양 광선의 무게가 실리는 것만 같다. 신체는 열기를 날숨에 실어 통해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자 하지만, 입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그저 뜨겁고 습습할 뿐이다.

생명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물체가, 이 가혹한 날씨에 대항할 어떤 뾰족한 방법도 없이,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끈기 있는 인내심이야 말로 최상의 해결책이 아닐까. 그렇다, 어떤 것들은 내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인내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위에 밀려 아득히 멀어졌던 정신이 어느 순간 돌아오면, 다른 차원으로 산산이 흩어졌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덮쳐오는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이 긴 하루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에, 이 여름이 아직도 건재함에, 내가 아직도 이 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나는 왜 여전히 스물한 살이란 말인가?

어째서 인간은 과거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는 쇠하고 희미해져버린 가능성에 애석해하고,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면서는 너무나 작아져버린 희망에 절망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과거에서도 또 미래 그 어디에서도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도, 그려보지도 못 한 채 현재의 시간을 의미 없이 흐르는 과거의 강으로 흘려보내며, 모든 불가측성을 배제한 가장 형편없는 미래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아티쿠스여, 장기 놀이를 기억하는가? 네모반듯한 모양의 세계위에 갖가지 말들이 늘어서서, 그 작은 천하를 얻기 위해 싸운다. 장기 놀이를 하는 선수는 가급적 자신의 말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지만, 결국 죽이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 작은 세상은 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혼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마치 신처럼 세상을 관조하고 모든 말들을 멋대로 움직이던 선수도 모든 앞길을 꿰뚫어보지는 못 한다.

이 혼전 속에서 어떤 말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어 세상의 형세에 변모를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말은 그저 의미 없이 죽어버리기도 한다. 선수가 미처 깨닫지 못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빈번하다.

아티쿠스여,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이, 즉 어디에선가 날쌘 자객이 날아들어 순식간에 의미도 없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장기판 위에서 오직 한 걸음, 앞으로만 전진하도록 숙명 지어진 졸병은, 지금의 나와 닮아있지는 않은지?

아니, 죽음은 어쩌면 더 나은 결과이며, 어쩌면 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미 없이 죽는 것보다 의미 없이 사는 것이, 언제나 더 두렵고 끔찍한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다. 내일이 밝으면, 나는 딱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장기판의 새로운 칸에서, 나를 싣고 갈 운명의 흐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에 넘치지만 애정이 없고,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모래사장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외줄 위를 위험천만하게 걸게 하면서, 그 위태로운 목숨을 더욱 위협하며 어떤 나락으로 전락시켜버리려는 음흉함, 파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유혹의 망령이, 오늘밤 나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낮은 곳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높은 곳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밤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떨어뜨려 놓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 불빛 하나하나가 실은 한때 사람들이 하늘에 걸었던 소원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새벽녘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어딘가 먼 곳으로 사라져가는 자동차의 저 희미한 미등은, 한없이 약한 불꽃, 한줌의 온기에 불과하지만, 분명 거대한 화염의 불씨가 되기 위한 여정에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본다.

아티쿠스여, 그렇다! 어쩌면 현실은 비루한 것이다. 상상만큼 멋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연에게 기대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의해 움직이며, 존재를 넘어서는 신기루를 갈망하여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믿고 있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 한다. 나는 어느 때고, 그 여로의 어디쯤에선가 반드시 쓰러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등을 떠미는, 거역할 수 없는 세속의 운명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야만 하는 병졸의 숙명에 따라,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내 앞으로 닥쳐오는 어떤 가혹한 운명의 홍수에도, 저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서 있는 나무처럼 우직하게 버티어낼 것이다.

다음 편지는 신선한 바람에 실어 보내도록 하겠다.
2007/08/20 15:23 2007/08/2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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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묻노니, 휘황한 빛이 밤하늘을 물들이던 만월(滿月)의 밤, 어느 객이 낯선 땅을 딛고 서서 가슴을 부풀리던 그 때로부터, 그대 그 뾰족한 뿔을 세우고, 이지러지고, 다시 차기를 몇 회나 반복하였는가?

닿을 수 없는 빛을 향하여 손을 내뻗어 허공만 움켜쥔다. 미지근한 공기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렇다, 아티쿠스여! 시간이 흘렀다. 하루하루 조금씩 식어가는 공기가 초목의 낯빛을 바꾸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의 창백한 태양빛을 보았다. 약간의 관찰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봄날의 서서한, 그러나 너무나도 확실한 변화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항상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날이었고, 한때 잠들어갔던 모든 것들이 일제히 다시 깨어 돌아오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 새 나를 성하(盛夏)의 폭발하는 절정 속으로 밀어 넣었다.

며칠 전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름달을 목격하였을 때 깨달았다. 저 보름달이 이지러지고 다시 차올랐을 때에는, 나는 이미 이곳에는 없을 것이라고. 사계절의 순환을 지켜본 이 공간과 나는, 머지않아 분리될 것이다. 그 달이, 나에게 분명한 과제를 내려주었다. 그 짧은 주기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전부라면, 그 안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렇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단 한 가지 작업은, 글을 쓰는 것일 것이다.

바라건대 어디에서나 같은 달을 바라볼 수 있기를! 표현이 이곳에서의 삶을 하나의 형태로 완성시키면, 나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그 의미를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영원의 보름달로서 간직하게 될 것이다.

아티쿠스여, 이것이 정녕 내가 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07/08/07 15:21 2007/08/0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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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닿지 않는 마음의 저변에 깔린 어둠, 그 한 구석에 불안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깊은 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며칠 째 우울함을 벗어버리지 못 하는 하늘이, 습기에 가득 찬 공기가, 무엇보다도 마음을 차갑게 적시는 빗물이 나를 깨친다. 절정의 나날이 지나가고, 나를 가두어버린 이 음울한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갈 것이라고.

우산을 비스듬히 받쳐 들고 바짓단을 적셔가며 내딛은 무신경한 한 걸음에, 의도하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소모(消耗)의 피로와 정체(停滯)의 불안이 실린, 한숨과도 같은 한 걸음을 축축한 땅 위로 내딛어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고개를 들고 온통 젖어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했던 것이다.

어느 한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또한 눈여겨보아야만 했던 많은 것들에는 주위를 기울이지 못 하고 지나쳐버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후회를 막아주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 천분을 배반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끌어안으려 했던 유쾌함은 나의 품 안에서 산산이 부수어져 무수한 유리 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인간은 늘 절정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시간의 흐름은 사람의 등을 떠밀어 산의 꼭대기에서 밀어내고, 다시 등줄기를 타게 만든다. 정점도 아니고 계곡도 아닌 등성이 어느 곳에서 멈추어 바위에 걸터앉아 안개로 눈을 흐리고 위도 아래도 바라보지 아니하며, 다만 어린애처럼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겠노라고 생떼를 부려보려 해도, 붙잡은 고목의 앙상한 가지는 나를 당기지도 밀치지도 않는데.

아, 아티쿠스여, 나는 내려가야겠다. 가장 낮은 밑바닥으로, 모든 하찮은 것들이 흘러드는 계곡으로 내려가야겠다. 그리고 구름으로 뒤덮인 어두운 하늘을 마주하고 서서, 떨어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빗물까지 전부 맞아야겠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새벽의 빛을 건져 올리듯, 심중심연(心中深淵)으로 가라앉아 방향을 더듬는다. 그렇다, 아티쿠스여! 오직 글을 쓰는 자만이 자기 내부의 모순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한 구석에서부터 여명이 밝아올 때, 퀭한 눈을 가진 불안의 짐승이 다시 마음의 그늘로 몸을 숨기면, 나는 비할 데 없이 무거운 한 장의 종이를 올려놓아 형편없이 기울어버린 저울에 균형을 되찾아 줄 것이다.
2007/07/29 15:19 2007/07/2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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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편지
아티쿠스여, 나는 길을 잃었다.

사람의 인생은 한 단락을 맺고 그것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같은 곳을 맴돌 뿐이 아닌가 싶어. 나는 언제나 책의 어느 한 페이지로 돌아와, 낯익은 풍경 속에서 길을 잃고 똑같은 이야기 안에서 갈등에 빠진다. 어쩌면 나는 광활한 초원의 한복판에 서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막막함 속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날아든 희미한 불씨 하나뿐이지.

생각해 봐, 무언가가 나를 붙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들고 있는 거야. 하지만 어느 날 늦잠을 자서 머리가 멍해진다든가 등굣길 전차 안에서 잠시 생각에 골몰하느라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두 눈이 초점을 잃어버리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 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일생을 온전히 내받칠 어떤 영웅적이고 원대한 뜻이 아닌, 그저 하루하루를 지탱해 줄 소소한 행복의 근원조차도 어째서 이렇게 늘 긴장한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수호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강렬한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을 때였다. 우연히 내 눈에 어떤 유충의 시체가 보였지. 잠시 후 개미 한 마리가 그 유충의 시체에 다가갔다. 개미는 유충의 시체를 어떻게든 옮겨보려고 했지. 그러나 자신의 몸보다 수십 배는 더 큰 시체를 움직일 수는 없었어. 나는 한참동안이나 자리를 뜨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30분이 흘러도 개미는 포기하지 않고 안간힘을 쓰며 유충의 시체에 매달렸어. 개미는 온 힘을 소진한 듯 움직임도 점차 적어졌지만,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이렇게 말하겠지,

“보아라! 인간보다도 훨씬 짧은 수명밖에는 지니지 못 했으면서도 그 짧은 생을 벌레의 시체나 썩어가는 과일 조각, 혹은 과자 부스러기 따위나 밀고 끄는 데 소모해야하는 개미의 삶을!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한평생 의미 없이 돌덩이나 굴려야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일 것이다.”라고.

하지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유충의 시체다!”라고 말이야.

공교롭게도 강물에 반사된 5월의 화사한 햇살이 우울증에 빠진 한 남자를 투신하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어떤 사소한 사건 하나가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을 찌르는 송곳의 끝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소한 기쁨이 이 지나친 상념을 거두어 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은 단지 침묵 속에서 기다려 볼 뿐이다.
2007/05/11 15:17 2007/05/11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