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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3주 연속 통역 임무를 마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놀러 다닌 것도 아니건만 오랜만에 돌아온 사무실에서는 눈치가 보이고, 접수해야 할 문서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국방일보에는 또 내 사진이 실렸다. 정작 내 이름은 언급도 안 되지만, 사진만 보면 주인공이다.

지난 1년,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공군 간 교류의 현장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물론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대신해서 일을 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안건의 발표가, 연회에서의 환영사가, 친선과 우의를 다지자는 결의가 모두 내 입을 통해 전달됐다. 물론 나의 이런 역할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도 단기 위관 장교로서는 부대 동정 사진에 가장 많이 얼굴을 내비치는 사람일 거다. 하지만 사진 아래에는 내 이름이 적히는 법이 없다. 대부분 사진의 정 중앙에 떡하니 서있지만,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내가 어느 부대의 누구인지 알 길도 없다. 국방일보 기사에, 각종 교류회의의 결과보고서에, 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지만, 그 기사와 회의록 안에 삽입된 인용구들은 대부분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다. 내가 이해하고 해석하고 때로는 의미가 잘 전달되도록 가다듬은 문장들 말이다.

끊어질듯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하는 심정으로 통역에 임하던 1년 전에 비하면, 이제는 졸면서도 통역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배짱도, 요령도 생겼지만, 여전히 통역 임무가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얼마나 많은 부담이 되는지는 통역 임무가 끝난 뒤에 밀려오는 피로로 짐작할 수 있다. 3주간의 통역을 끝낸 지금, 나는 한 달 동안 잠만 잘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 통역은 시간이 긴 만큼 이동한 거리도 길었고, 방문한 지역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에피소드들도 여럿 있었다. 군인은 언제 피를 흘려야 할까? 전장에서 척의 총탄에 맞았을 때? 아니다. 술에 만취해서 제 몸도 못 가누면서 기어이 2차로 유흥주점에 기어들어가 토하려고 화장실 찾다가 문에 머리를 들이받았을 때이다. 1년이나 2년, 또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과 술잔에 코를 박고 마시는 ‘물레방아 주’ 사이에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기막힌 꼴도 보지만, 실제 초음속으로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가 제작되고 있는 현장을 견학하고, 한국의 육, 해, 공 삼군이 보유한 모든 공중 전력이 총 출동하여 공중 퍼레이드를 펼치는 장관을 구경하기도 했다. 마음으로부터 감탄하게 되는 훌륭한 인물도 만나게 되고, 반면교사도 본다.

물론 통역을 할 때에는, 내가 제법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생기고, 군 생활 중 가장 빛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일상에서 벗어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생활하다보면 다시금 생활의 안정을 바라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상으로 복귀하면 그 따분한 책상 앞에서 금세 일탈을 꿈꾸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란.

통역이 남긴 후유증의 하나는 체중의 급격한 증가다. 거의 움직임이 없는(이것도 힘들다) 상태에서, 힘겨운 정신노동. 저녁에는 호화스러운 만찬을 함께하고, 때로는 술도 마신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음식 섭취량에 대한 절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주말에 집에서 쉴 때에는 과자와 음료를 끼고, 환자처럼 누워서 생활했다.

오늘 체육관에서 문자가 왔다. 재등록일이란다. 9월에 등록하고 첫 주 5일 운동하러 나간 뒤 차 엔진 폭발과 연이은 통역 업무 때문에 한 번도 운동을 나가지 못 했다. 바이올린도 사정은 마찬가지. 9월 달에는 연습실 대여료만 지불해놓고 거의 연습실을 찾지 못 했다.

이제 일상으로 복귀한다. 오늘, 머리도 깎고 모처럼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책도 읽었다. 그리고 밤에는 거의 한 달 만에 체육관을 찾았다. 그 사이 월 회비가 2만원 올라서 10만원이 되어 있었다. 줄넘기와 잽 연습을 십 여 라운드 하니, 다리는 후들거리고 온 몸이 땀으로 범벅된다. 살을 빼고 말고를 떠나서 이렇게 땀을 흘리는 자체가 기분 좋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지난 주말에 새로 구입한 카메라로 술병 사진을 찍어본다. 썩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아직 어떻게 찍으면 좋을지 방법을 모르겠다. 하지만 조만간 술 관련 포스팅은 재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이런 소소한 일들이, 평범한 일상의 즐거움이다.

2011/10/06 01:14 2011/10/0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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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 우, 일본 항공자위대 서부항공방면대 사령관)

충주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첫 출근을 앞둔 긴장 상태에서 바닥에 얇은 이불 하나 깔아놓고 누워서 애써 잠을 청하던 1년 전이 떠오르는군. 첫 출근을 알리는 알람 소리는 이질적이었지. 그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 자체가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그 증거로 나는 중위가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버린 지금, 내 생활에는 다시 한 번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통역을 했다. 이번에 방한한 일본 항공자위대 서부방면대 사령관은 작년에 한일 정보교류회의차 방한하였던 사람이고, 그때도 내가 통역을 맡았다. 이번에 다시 한국을 찾으면서 통역으로 나를 지명했다고 하니, 작년 내 통역이 썩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3박 4일의 공식 일정 중 2박 3일 동안 동행했는데, 11비 단장, 남부전투사령관, 군수사령관, 참모총장 등을 차례로 만났다. 지금까지의 통역 중 가장 화려한 일정이었다. 내가 통역하는 장면은 국방일보 기사에도 실렸고, 공군 홈페이지에도 떴다. 덕분에 부대 복귀하니 알아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다른 부대의 동기들로부터 연락도 좀 받고.

그리고 나는 부대 복귀와 함께 전출 신고를 했다. 7월 11일부로, 나는 공군본부의 항공정보과로 전속된다. 나의 보직은 “통역/정보교류지원담당”으로, 제2외국어 어학 장교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역 관련 보직이다.

나는 운이 좋다. 이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2008년도에, 난 조기졸업을 신청하려고 했다. 필요 학점을 채우고 성적이 3.75 이상이면 조기 졸업 신청을 할 수 있다. 나는 조건을 충족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무처에서 조기졸업 관련 상담을 받았는데, 직원이 내 교과 이수 현황을 살펴보더니 문제점을 지적했다. 단위가 높은 고급 과목을 덜 이수해서 졸업 요건을 충족하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한 학기를 더 다닐 수박에 없었는데, 만일 그때 조기 졸업을 했더라면 유포니아에 들어가 내 대학 생활의 마지막을 그렇게 즐겁게 보낼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만약 1년 일찍 입대했다면 이번 전속과 같은 기회는 얻지 못 했을 것이다.

2009년 6월,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일본어 어학장교 선발 시험을 치렀는데, 응시자는 나를 포함해서 겨우 세 명이었다. 이것은 아마 역대 최저 지원이었을 것이다. 경쟁자들 중 한 사람은 홋카이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다른 한 명은 교토대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다. 일본에서의 거주 경험이라고는 오사카 대학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한 1년이 전부였던 나는, 이 둘을 이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한 달쯤 후, 여행 중이던 나는 이스탄불에서 합격 소식을 통보 받았다.

같은 해 8월, 나는 결국 8학기를 모두 채우고 졸업했고, 9월에 바로 입대했다. 하지만 입대 1주일 만에 정밀신체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귀가 조치를 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겪었다. 대학 병원에서 검사를 통해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재입대까지는 6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6개월의 유예는,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행운으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6개월의 지연 덕분에, 내가 임관함과 동시에 당시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일어 통역 장교가 전역을 했고, 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6개월 동안 나는 무위도식하며 즐거운 백수 생활을 만끽했고, 유포니아 연주회에 참여하여 차이코프스키 5번을 연주하는 감동의 순간을 함께했다.

2010년 3월이 되어서야 재입대를 했고, 미리 의사의 소견서까지 준비하는 치밀한 준비로 이번에는 건강검진도 무사히 통과하여 3개월 반 동안의 지겨운 훈련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교육사령부 연병장에서 정모를 던지며 임관을 자축하던 그 시간은, 한 인간의 평생 동안 모두 합쳐 약 3분 정도에 불과하다는 지극한 환희의 순간에 포함될 것이다.

나는 어학 장교로 선발되었지만, 제2외국어 어학 장교로서 차별 아닌 차별을 받아 ‘정보 특기’로 분류되었고, 여느 정보 장교들과 다름없이, 어학과는 무관한 정보 관련 보직을 받게 되었다. 훈련단 성적도 나쁘고, 특기교육 성적도 형편없었던 나는, 배속지를 고를 때에 남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 몇 개의 남은 지역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충주라고 하는 애매한 도시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통역 장교의 꿈이 서서히 멀어져가는 게 느껴지던 임관 3개월 차에, 첫 통역 의뢰가 들어왔다. 일본 CSC 과정생들의 비행단 견학 때 대담과 현황 보고, 그리고 비행단 안내 등을 통역하는 역할이었다. 첫 통역이었던 만큼 긴장했고, 발표 자료를 번역하느라 밤도 샜다. 지금 생각하면 실수도 많았고 요령도 없었던 부끄러운 통역이지만, 당시에는 ‘할만하다’는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첫 통역의 물꼬가 트이자 금방 다음 의뢰도 들어왔다. 내가 일어 통역 장교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공군전우회 행사 통역이 두 번째 의뢰였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 자위대 전역자들과 동행하며 통역하는 것이었는데, 방문단 중에 항공 막료장(한국의 참모총장)을 역임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서울과 평택, 서산과 판문점 등을 오가며 3박 4일 동안 정신없이 통역을 했다. 사전에 자료도 받지 못 한 상태에서 브리핑을 즉시 통역하는가 하면, 사찰을 방문해서는 스님의 불교 역사와 철학에 대한 장광설을 통역해야 하기도 했다. 난이도 높은 통역이었지만, 덕분에 일본 방문단은 나의 능력에 대해 크게 만족했고, 나의 존재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쪽에도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참모총장을 지낸 사람이 대여섯명이나 앉아있는 만찬장에서, 나는 일본 방문단장으로부터 “단기 장교로 제대시키기에는 아까운 인재”라는 극찬도 들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곧바로 공군 제1의 일본어 통역장교가 되었다. 전우회 통역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당일,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네가 전우회 통역을 했다며? 대단한 통역이라고 평이 자자하던데. 이번에 내가 널 좀 데려다 써야겠다.”

이때의 통역 일이 정보교류회의건이었는데, 본부 주관 행사의 첫 통역이었다. 방문단장은 부인과 동행했는데, 사모님의 관광에 동행하는 서브 통역은 오히려 선배에게 돌아가고, 나에게는 방문단장과 동행하며 공식적인 예방과 회의시에 통역을 하는 메인의 자리가 주어졌다. 나는 서브 경험이 없이 곧바로 메인으로 데뷔했다.

통역 때는 약간의 묘기 같은 능력도 선보였다. 나는 통역 때 메모를 거의 하지 않는데, 아무리 긴 문장도(심지어 횡설수설도) 메모 없이 거의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었다. 마침 방문단장과 사모님이 모두 한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내가 통역하는 내용을 거의 다 알아들을 수가 있어서, 이런 나의 능력이 훨씬 빛을 발했다. 방문단장은 마치 내가 어느 정도까지 기억할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점점 한 번에 많은 말을 했다. 다행히 그 시험에서 나는 합격 한 모양이었다.

공군본부에 제2외국어 어학장교가 갈 수 있는 통역 관련된 자리가 있다는 건 정보교류회의 통역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자리가 내 자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중국어 통역 장교였는데, 2011년 6월 제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후임으로는 나 혹은 내 동기인 중국어 통역 장교가 유력했다.

정보교류회의 통역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본부에서 나에 대한 평가는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에, 전속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았다. 심지어는 정기 인사이동 기간 전에 미리 옮기려는 움직임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훌륭한 통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도, 그건 단발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고, 위관 장교의 전속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지속적으로 고민해 줄 사람은 없었다.

정보교류회의의 주최자가 진급하여 자리를 옮기고, 그 밑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인사이동을 하고 나니, 본부에서 나의 능력을 인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 11월에는 연평도 사건이, 이듬해 3월에는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예정 되어있던 통역 건들이 줄줄이 취소되어버렸다. 확고해 보였던 나의 입지는 졸지에 위태로워졌다. 이제는 가만히 기다린다고 내게 그 자리가 거저 돌아오게 될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본부 통역장교의 자리에 있던 선배와 연락하여 내 의지를 분명히 피력하는 한편, 나와 함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던 동기와는 평소 친분을 이용해 설득을 시도했다. 다행히 중국어 통역 장교였던 그 동기는 통역 경험이 없었고, 본부로 움직이는 것에 큰 뜻이 없었다. 3월 말경에 나는 이미 본부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당시까지 사무실 사람들은 아무도 나의 이런 의지와 행동을 알지 못 했는데, 나는 이 일을 무려 6개월 이상이나 비밀로 간직하며 은밀하게 행동했다.

4월 말쯤 하여 긍정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적절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나의 전속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소식이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 사태가 터지면서 지옥 같은 5월은 시작되었다.

평소 부대 생활에 잘 적응을 못 하고, 나에 대해 열등감까지 품고 있던 룸메이트가 돌연 전속 신청을 냈다. 사무실 사람들이 설득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막무가내였고, 결국 뜻이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한 사무실에서 동시에 두 명이 전속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본부에서도 곤혹스러워했고, 내 전속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날마다 서로 다른 전망이 나왔고, 갈 수 있다, 없다란 의견이 몇 번씩이나 뒤집혔다. 여간해서는 정신의 건전함을 잃지 않는 나도, 잠 못 이루는 한 달을 보내야 했다.

6월이 되어서야 결론이 났는데, 나를 데려가고자 하는 본부 정보과의 확고한 의지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처장님의 관대한 결정 덕분에 전속이 결정되었다.

앞으로 나는 전투복이 아닌 약복을 입고, 외부의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벙커가 아니라 삼군이 모두 모여 있는 본부 건물의 빛 잘 드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다. 본부의 숙소는 너무 열악해서, 계룡대와 대전 시내의 중간 지점에 월세 원룸 하나를 얻었다. 어제는 사무실 사람들과, 오늘은 음악학원 사람들과 송별회를 했다. 우체국 택배 박스에 짐을 우겨 넣고, 내일 1톤 트럭을 불러 이사를 할 예정이다.

공군본부 항공정보과 통역/정보교류지원담당, 중위 김민.

어떤 것은 노력으로, 어떤 것은 운으로 이루어졌다.

2011/07/09 02:39 2011/07/09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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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貢)은 나눌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간사함이지. 차라리 베풀 수는 있지만…….

광주 제1전비 정문에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대략 289km. 중간에 휴게소도 들르고, 교통 체증에도 잠시 걸리니 꼬박 네 시간 걸리는군. 일정은 오후 1시를 조금 넘겨 끝났는데, 처음에는 기지지원전대장님이, 그 다음에는 계획처장님이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붙잡고 안 놔줘서 결국 3시 반이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지난 번 방문했을 때와는 지휘관 참모들이 싹 바뀌었더군. 나를 기억하고 있는 분은 단장님뿐이었다. 지난 번 통역 때 워낙 극찬을 해주셨기 때문에 부담이 많았는데(게다가 워낙 일본어를 잘 하시니…….), 별 탈 없이 잘 끝났다.

오랜만의 통역 일. 매번 통역 일이 엄청난 스트레스와 피로를 동반하지만, 끝났을 때의 이 개운함이란. 보고서 쪼가리 쓰는 것 따위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희열이지. 통역 일의 묘미라면 인간 구경. 이번에도 참모차장, 인사참모부장, 일본 항공자위대 인사교육부장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줄을 대고 있는 수많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도. 야심 없는 사람은 사심 없이 바라볼 수 있지. 그러면 재밌는 구경거리다.

집에 오니 아빠가 헤네시 X.O.를 개봉해 놨기에 한 잔 마셨다. 향이 그윽하군. 그러고 보니 헤네시코리아가 한국에서 철수했다는데, 그럼 헤네시는 국내 시장에서 사라지는 건가?

2011/02/19 02:57 2011/02/19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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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통역이다. 지금은 짐을 싸고 있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사는 역마살 인생은 내가 원하고 선택한 삶이지만,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는 늘 두려움을 느낀다. 이상하게 슈트케이스에 짐을 꾸릴 때면 외롭다는 느낌이 든다.

때로는 헬기와 롤스로이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누비며 통역을 하고, 때로는 내 고물 자동차를 털털 몰아 지방을 돌며 통역을 한다. 때로는 호화로운 저녁 만찬에 입도 호강시키고 두둑한 수고비를 챙기는가 하면, 어떤 때는 달랑 비타민 음료 한 병 받아 마시고 나오기도 한다. 내 숙소는 여느 호텔 부럽지 않은 방일 때도 있고, 하루 숙박비가 2천 원인 BOQ일 때도 있다. 형편없는 대우를 받을 때는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젊으니까. 스스로에게 충실한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게 젊음의 특권 아닐까. 이번에도 힘내야지.

2011/02/15 02:03 2011/02/15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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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71次 韓?日 情報交流?議

10. 27 ~ 10. 30


韓?日情報交流?議 ?謀?長表敬

大韓民?空軍?謀?長(左) & 日本航空自衛隊運用支援情報部長(右)

and…….


끝났다!

2010/10/31 00:01 2010/10/3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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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공군회관 501호. 오늘부터 일본 공군 예비역 단체인 츠바사회 방한 행사 통역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공군회관에 내 방을 잡아줬다(무려 트윈이다). 무선 인터넷도 잘 잡힌다.

이미 진 별이긴 하지만, 이번 행사 기간 동안 내가 볼 별의 숫자만 50개가 넘는다. 살다보니…….

최장 9일이라 호들갑이던 추석 연휴인데, 평시보다 피곤하다. 내일부터는 하루 종일 통역. 쉽지 않겠군.

2010/09/26 18:52 2010/09/2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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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화창한 날이었다. 새벽 4시 무렵에 일어나 브리핑 스크립트를 일어로 작성하느라 잠을 설친 나는, 쏟아지는 햇살을 감당하기에는 좀 몽롱한 상태였다. 7시 반, 시동을 걸고 수원으로 출발했다. 수원은 분당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주말 저녁 귀가 때마다 극심한 정체로 짜증을 돋우던 영동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었다. 이대로 달려 집으로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수원 비행단은 수원 화성의 명성을 의식한 탓인지 정문 주변 방책이 석재로 쌓아올린 꽤 근사한 성벽으로 되어있었다. 헌병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공무용 출입증을 받아서 비행단 단본부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본부 2층의 계획처 문을 두드렸다.

오늘의 업무 내용을 전달 받았는데, 15분 정도의 브리핑만 간단히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일단 방문하는 사람들이 55명. 그 중 고위급 몇몇은 단장과 접견실에서 회담을 하는데, 그때 단장과 방문단 수장 사이에서 통역을 해야 한다고 했다. 또 브리핑이 끝나면 55인을 대동하고 비행단을 견학하면서 시설 안내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전은 브리핑 자료 수정과 브리핑 리허설을 하며 보냈다. 점심을 먹고 코코아 한 잔 마시며 휴식을 취한 후, 1시 30반 정도 되어 손님들을 맞이했다. 손님들의 정체는 일본 항공자위대 간부학교 지휘막료과정(CSC)의 학생들 및 인솔자 55명으로, 계급은 3좌(소령)부터 1좌(대령)까지였다.

단본부 앞에서 기념 촬영 후 인솔자들을 대동하고 접견실로 이동했다. 접견실 안쪽에는 단장과 방문단의 수장이 앉을 자리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그 사이 약간 뒤로 물러선 위치에 통역관, 즉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1:1 통역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화자의 말을 키워드 중심으로 간단히 요약정리 해 두면, 다시 문장으로 만들어 읊으면 되었다. 초반의 긴장이 풀리고 나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술술 통역이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대충 얼버무려버린 말이나 반대로 너무 매끄럽게 내 스타일로 뽑아버린 문장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했다.

문제는 일대 다수의 통역이었는데, 같은 말임에도 다수를 상대할 때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일단 시점이 분산되다보니 집중력이 흐트러져 짧은 시간 안에 문장을 정리하는 순발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브리핑은 내가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읽는 것으로 족했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다. 사실 행사 주최 측에서 미리 원고를 주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읽었다가는 손님들은 내가 무슨 중국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미리 일본어 실력 있는 병사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슬라이드에는 기초적인 한자 오기만 해도 십 수 개. 이 슬라이드를 그대로 보여줬다면 정말 웃음거리가 되었겠지. 일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한국만의 한자어 표현도 많았으나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뜯어고칠 여유가 없었던 건 유감이다.

브리핑 후 단장과 학생들 사이에 질의응답도 통역을 했는데, 여기서도 살짝 진땀을 뺐다. 아무래도 질의응답 시에는 화자들도 미리 준비되지 않은 말들을 하게 되다보니, 그걸 정리해서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브리핑이 끝나고 단장이 물러간 후, 한국측에서는 부단장이 인솔자가 되어 기지 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브리퍼들이 한국어로 시설에 대해 안내하는 브리핑을 실시했는데, 번번이 내가 통역을 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가령 무장 같은 것에 대해 브리핑 할 때는, 나부터가 한국어로 들어도 이해 못 하는 내용을 통역해야 했으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어쨌든 첫 통역 임무는 큰 사건 없이 무사히 끝났다. 마지막으로 서로 선물 교환을 했는데, 나도 CSC 측으로부터 볼펜 한 자루 받았다.

4시 반, 아직 화창한 가을 햇살이 생생한 시간, 나는 퇴근했다. 첫 통역 업무였던 만큼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지만, 그러나 일단 통역에 들어가서는 의외로 침착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손님들을 다시 태우고 멀리 떠나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담배라도 한 대 펴야겠군.”

출장지에 제대로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비행단 앞의 편의점에서 음료수 한 캔 사마시고 영수증을 챙겨뒀다. 자가 차량 이용 시 출장비는 하루에 2만 원 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기름 값은 충분히 충당되는 돈이다.

임관 휴가 후 처음으로 평일에 집을 들어가 봤다. 똑같은 집인데, 어딘가 주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무거운 군복을 벗어던지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몸을 던졌다. 테이블에는 얼음을 가득 채운 맥도널드 컵에 톡톡 탄산의 기포가 올라오는 콜라가 따라져 있다.

내 군 생활은 이렇다.

2010/09/18 13:39 2010/09/1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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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본부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조만간 첫 통역 업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결심’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처장님이 하는 것이지만. 제대 할 쯤에는 “제2 외국어 어학 장교의 올바른 활용을 위한 제안”이라는 제목으로 제안서라도 하나 올릴까. 저 어디 공군 본부 높은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에게?

유용한 사업이란,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무르익었을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필요성을 예견하여 한 발 앞서 시도할 때에도 이룩될 수 있는 것인데,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의 언제나 후자의 경우가 더 성공 확률이 높다. “필요하면 그 때 가서 생각하지.”란 안일한 태도를 취하다가는, 정작 그 필요가 닥쳤을 때 허둥대다가 일은 시도도 못 해보기 십상이니까.

내 생각에는 제2 외국어 어학 장교들은 1년 내지 2년에 한 명 정도 뽑고, 각 언어별로 최소 1명은 공군 본부에 상주시키면서 관련 국가에 관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맡아보게 해야 한다. ‘전문적’이란 말을 썼지만, 실제로 단기 장교들이 각자의 특기를 가지고 사무실에서 수행하고 있는 업무의 수준을 보자면 그리 난이도 높은 일을 수행해야 할 명분도 없다. 군이 국내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24시간 YTN을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제2 외국어 장교들로 하여금 담당 국가의 언론을 주시하여 동향을 파악하게 하고, 군 관련 서적이나 홍보물을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토록만 해도 충분히 높은 생산성을 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외국에서 귀한 손님들이 방문했을 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만전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최선의 응대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사라져가던 통역 장교로써의 가능성에 희미한 희망의 불씨라도 살아난 듯하여 기쁘기는 하다. 내일로 사실상 UFG 종료. 그러나 곧바로 차출되어 다른 훈련에 투입. 일 복은 터진 것 같다.

2010/08/19 23:25 2010/08/19 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