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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는 한때 밀라노 공국을 지배했던 스포르차 가문의 웅장한 성채가 있다. 포(砲) 이전 전쟁의 유물인 이 성은, 어중간한 기백은 압도해버리는 높은 성벽이 인상적이다. 벽돌로 탄탄하게 쌓아올린 성벽 둘레에는 해자(垓字)가 깊게 파여 있다. 그 성채 앞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대체 이러한 성채는 왜 만든 것일까?

성벽의 목적은 당연히 방어이다. 그러나 웅장한 성채라고는 해도, 전투를 몇 번 치러낼 수 있을지언정 전쟁을 치러낼 수는 없는 규모다. 성채를 이만큼 확장하고 개축한 스포르차 가문은 프랑스의 공격에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런 ‘하찮은’ 방벽은 전쟁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러한 성채는 외적, 즉 적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외적을 생각하고 세운 것이 아니라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지배 가문이 내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내부의 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신과 국민이다. 이토록 튼튼해 보이는 성체는 사실 불안한 정치 기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20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약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한다면, 그는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해야만 하는 형편에 처한다면, 그 지배자의 미래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

‘로마사 논고’ 제2권 24장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통치자)의 사악한 행동은 강제로 백성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나 통치자로서 그가 지닌 경솔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강제로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원인들 중 하나는 그가 백성들을 제압할 수 있는 성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설령 당신이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어도 약탈당한 백성들에게 무기는 남겨져 있을 것이고 만약 당신이 그들의 무기마저 빼앗는다면 분노가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계속해서 다른 나머지 사람들도 해친다면, 마치 히드라의 머리처럼 그들의 머리가 또다시 생겨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군주에게 최선의 요새는 그의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군주론)”라고.



시청 앞 광장은 내가 학교 가는 길에 언제나 지나치는 장소이다. 현 정부 들어서 이 광장이 철옹성으로 변모한 것을 목격한 것만 몇 번이었던가. 저 성벽은 누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일까.

분명 민의(民意)라는 것은 항상 옳지만은 않다. 다수의 판단이란 흐름과도 같은 것이며, 집단 지성이라는 것은 때론 중우(衆愚)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공포에 질려 절벽으로 뛰어드는 소떼들처럼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해 걸었다.

따라서 치자(治者)는 항상 민의(民意)에 따라서만 통치를 할 수 없다. 때로는 다수의 뜻에 반하여 의지를 관철시키고, 방향을 새로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민은 다스림의 대상이며, 민은 국가 그 자체이다. 민과 싸우는 ‘정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소수의 권익만이 보호되는 성벽의 안쪽, 한 줌의 땅 위에 민은 살지 않는다. 그것을 어찌 나라라 부를 수 있을까? 설령 그 안에 무장한 이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남면(南面)한 채 앉아있는 이가 있다고 한들, 그가 어찌 치자(治者)일 수 있겠는가?

나라 안의 작은 성채는 언제나 사(私)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 안에서 언제나 사사로운 이익만을 생각하는 무리들이 바로 한비자가 말하는 ‘나라를 좀먹는 벌레의 무리들’인 것이다.

2009/05/28 03:48 2009/05/28 0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