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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생체 시계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심박 수나 체온, 호르몬의 분비 등은 일정한 주기를 따라 변한다고 한다. 그에 따라 우리의 생활 리듬도 일정한 주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생체 시계는 밤과 낮의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자전 주기(24시간)가 인간의 생체 시계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한편 밤과 낮의 구분이 없는 동굴 속에서는 인간의 생체 시계가 혼란을 일으켜서 그 주기가 한없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동굴 속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의 생활 주기는 약 50시간까지 늘어났다. 즉 피실험자가 동굴 안에서 하루라고 느끼고 생활한 시간은, 실제로는 이틀정도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자연의 힘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처럼 대단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위적인 힘들이 얼마든지 자연의 지배력을 물리칠 수 있다. 가령 알람은 확실히 인간의 생체 시계를 지배할 수 있다. 그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계를 봤을 때 알람 울리기 불과 1분 전이었던 적은 꽤 많다. 내 생체 시계는 지구의 자전이라는 우주적 현상이 빚어내는 낮과 밤의 변화와는 무관한, ‘알람 타이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내 방은 채광이 나쁘다. 반 지하는 아니고, 지상 2층이지만 창 밖에는 건물 벽이 버티고 있어서 한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방 안은 어둑어둑하다. 이게 나에게 딱히 나쁜 점인지는 모르겠다. 화창한 햇살이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홀한 시간대에는, 애당초 내가 이 방에 있을 일이 없다.

불충분한 채광의 거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새벽녘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대체 몇 시쯤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더더욱. 이럴 때는 항상 시계를 확인하기가 두려워진다. 알람 울리기 1분 전에 깨는 것은, 차라리 더 이상 숙면을 취하기는 글렀을지언정 알람 울릴 때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맘 편히 눈을 감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다.

알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알람은 지금이 생체 리듬 상 활동해야 할 때인지, 혹은 낮인지, 밤인지, 오전 7시인지, 오후 8시인지 상관없이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을 고지한다. 내 경우, 대게는 출근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잔혹한 경고다.

겨울 철 출근은 힘들다. 외투에 목도리, 장갑까지 완전 무장을 갖추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이, 아마 알람 울리는 순간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하루 중 가장 끔찍한 순간일 것이다. 간밤에 꽁꽁 언 차가 녹고 히터가 내뱉는 공기가 따뜻해 질 때까지는, 음악을 들어도 듣는 것 같지가 않다.

여름에는 에어컨에 인색한 사무실이지만, 겨울 히터 인심은 넉넉한 편이다. 옷을 사복에서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일종의 체념 같은 것에서 오는 안락인 듯하다.

컴퓨터를 켜고 커뮤니케이터(군 내에서 쓰는 메신저)에 접속하니, 곧 메시지가 쇄도한다. 이번 주말 부산 여행을 함께 가기로 한 사라들로부터다. 땅 덩어리가 좁은 이 나라의 장점이라면 어디든 저렴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이지만, 단점이라면 이 땅을 지배하는 계절로부터 도망 칠 구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부산이라면 조금은 따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총대를 메고 부산 해운대에 있는 군 휴양시설인 그린나래 콘도를 예약했다. 이 정도면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보는데, 사람들은 이제 여행 계획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뻔뻔스럽기는.

추운 겨울에 남쪽 바다로 떠나는 여행이다. 무슨 계획이 필요한가. 맛있는 회나 먹고, 쓸쓸한 바닷가 풍경이나 카메라에 담으면 그만이다. 밤에는 광안 대교를 배경으로 야경을 찍어야지. 사람들의 관심은 결국 ‘어디를 갈까’와 ‘무얼 먹을까’에 집중됐다. 고급 스시 뷔페와 수산시장 바닥의 광어회 혹은 시장 뒷골목의 돼지국밥이 서로 상충했다. 나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지만.

퇴근 후 잠깐 방에 들렀다가 악기를 챙겨서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이 있는 건물은 좀 비정상적으로 춥다. 다행이 연습실에는 전기난로가 있는데, 전기를 많이 먹게 생겼다. 악기만 놓아두고 일단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이 먹고 싶어지는 날씨였다. 근처에 ‘아리가토 마마’라는 일식집이 있어서 들어갔다. 라면, 우동, 돈가스, 카레, 오코노미야키, 타코야키, 카라아게 등등 일본 요리는 거의 망라하고 있는 음식점이었다. 오사카식 카레우동과 야키교자(군만두)를 주문했다. 카레우동이 오사카 요리였던가? 오사카에서 1년을 산 나이지만, 대체 뭐가 오사카식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인스턴트 카레에 우동 사리를 담가놓은 것 같았다. 야키교자는 싸구려 냉동만두를 대충 튀겨낸 느낌. 음식의 퀄리티에 비해 값이 너무 비싸다.

다시 연습실로 돌아갔다. 바로 연습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추워서 난로를 최대로 틀어놓고 방 안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악기를 꺼냈다. 손 풀기로 생상의 백조. 그 다음 B 플랫 메이저 스케일을 연습. 이윽고 요즘 연습하고 있는 곡인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의 악보를 펼쳤다. 적당한 난이도는 의욕을 고취시키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곡은 오히려 의욕을 상실시킨다. 이건 아무래도 못 오를 산처럼 보인다. 중음이 난무한다. 8도 화음을 정확하게 짚으며 내려오는 건 정말 불가능하다.

9시 반, 연습을 마쳤다. 연습을 마무리 할 시간 즈음이면 한 음 한 음 켤 때마다 오늘은 운동을 쉴까 하는 생각이 뇌를 스쳐지나가지만 결국 체육관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사람이 좀 많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한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먼저 준비 운동으로 몸을 풀고 줄넘기 4라운드로 열을 좀 낸다. 8방향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잽, 훅, 어퍼, 바디를 적절히 섞어 세도우 복싱을 한다. 이미지 속의 내 모습은 꽤 날래고 멋지지만, 거울에 비치는 정직한 내 모습은 영 둔탁하고 어설프다. 6~7라운드 정도 숨 가쁘게 운동하고 나면 이제는 샌드백을 칠 시간이다. 오른손 잽은 괜찮은데, 왼손 잽이 영 부실하다는 지적을 거듭 받고 있는 터라, 왼손에 신경 쓰며 샌드백을 때린다. 하지만 힘이 실리는 것도 잠시, 근육의 글리코겐을 급속하게 소모해버리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내 왼팔. 아, 근력 운동을 따로 해야 할 것 같다. 마무리 운동은 역시 줄넘기.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12시가 넘어버렸다. 월요병을 앓을 새도 없이 지나가버린 월요일.

아빠는 지금쯤 뉴질랜드 행 비행기에 탑승 해 있겠지. 이제 한국에 나 혼자 남았다.

2012/01/10 01:21 2012/01/10 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