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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Joseph Noel Paton (1821?1901) The Reconciliation of Titania and Oberon. Oil on canvas, size 30 x 48.5 inches,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부수음악(附隨音樂)이라는 장르가 있다. 영어로는 Incidental Music이라고 한다. ‘부수’라는 단어는 흔히 우리가 ‘무엇에 따라오는’이라는 의미로 쓰는 ‘부수적인’이라는 표현의 그 부수가 맞다. 그러므로 ‘부수음악’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무언가에 붙어서 따라오는 음악’이 된다. 그렇다면 부수음악은 본래 독립적인 연주를 목적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란 얘기가 된다. 부수음악의 본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흔히 연주회용 서곡으로 알고 있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은 원래 부수음악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그몬트 서곡’은 베토벤이 작곡한 극음악(劇音樂) ‘Egmont Op. 84’의 첫 번째 곡인 ‘서곡Overture’에 해당한다. 본래 이 곡은 서곡 외에 9개의 곡 등 총 10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토벤은 괴테의 동명 희곡(戱曲) ‘에그몬트’에 크게 감명 받았고, 이 희곡을 무대에 올릴 때 연극에 삽입시킬 목적으로 이 곡을 작곡했다.

이처럼 부수음악이란 보통 연극을 공연할 때에 서곡, 막간곡, 배경음악, 혹은 멜로드라마(마치 오페라나 뮤지컬처럼 연극 도중에 배우가 노래로 대사를 표현하는 부분)로 사용할 목적으로 작곡된 일련의 모음곡을 말한다. 부수음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그리그 작곡의 ‘페르귄트 모음곡’이 있는데, 본래 이 페르귄트 모음곡은 ‘인형의 집’을 쓴 입센의 희곡 ‘페르귄트’를 위해 작곡된 극음악이었다. 그러나 연극 자체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 했고, 자신의 곡들을 아깝게 여긴 그리그가 추후에 전곡 중 일부를 추려 모음곡 1과 2로 출판한 것이 오늘날까지 연주회용 ‘페르귄트 모음곡’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오늘 소개할 곡 역시 부수음악이다. 이 장르의 음악 중 페르귄트 모음곡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곡이며, 전 세계에서 매일 수 백 번씩은 연주되고 있는 곡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바로 밤을 헤매는 유쾌한 방랑자다.

네 눈에 마술의 꽃물을 발라주마. 네가 깨어나면, 그 때부터는 다시는 잠들 수 없는 상사병에 걸릴 거야! 그때까지는 잠재워 두도록 하지.


-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中 요정 퍼크의 대사 -

한여름 밤의 꿈. 셰익스피어의 희극(喜劇)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 작품을 꼽겠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희곡은 개연성이 엉망이고,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너무나 달콤하다. 수많은 명대사들로 가득하며, 제목처럼 몽환적이다. 일단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꿈을 꾸기 시작하여 요정 퍼크의 인사와 함께 다시 막이 내릴 때는 오직 달달한 여운만이 남은 채 기분 좋게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꿈의 내용이 제아무리 뒤죽박죽이고 유치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한여름 밤의 꿈을 집필한 지 200여년이 흐른 뒤인 1826년 독일. 방금 독일어 번역판 ‘한여름 밤의 꿈’ 마지막 장을 읽고는 책을 덮은 17세의 청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내일부터 ‘한여름 밤의 꿈’을 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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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x Mendelssohn Bartholdy(1809-1847)

이는 15세 때 이미 첫 교향곡을 작곡하고, 16세 때에 현악 8중주를 작곡한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Felix Mendelssohn Bartholdy)의 야심찬 선언이었다. 곡을 빨리 써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던 멘델스존은, 해를 넘기지 않고 가장 뜨거운 계절인 8월에 곡을 완성했다. 그것은 연주 시간이 11분 남짓 되는 짤막한 하나의 곡이었으며, 악장 구분도 없고 소나타 형식을 갖추었으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띠는 곡이었다. 이 곡은 이듬해인 1827년에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며, 멘델스존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이 연주회에서였다. 이 연주회에서 연주된 곡들은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과 역시 멘델스존의 작곡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었는데, 이런 구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연주회 구성과 완벽히 일치한다.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은, 본래 극음악(劇音樂)이 아닌, 연주회용 서곡(Concert Overture)로 작곡 된 것이다. 18세기 말엽부터 오페라의 유명한 서곡들이 기악 음악회에서 독립적으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19세기 초반까지도 연주회용 서곡이 독립적으로 작곡된 예는 흔하지 않았다. 멘델스존은 ‘핑갈의 동굴 서곡’이나 ‘고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서곡 등 훌륭한 연주회용 서곡을 많이 남겨서 이 장르의 선구자로 여겨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연주회용 서곡이라는 장르의 시금석으로 평가 받는 곡이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통해 달궈진 천재 청년의 가슴은, 이 훌륭한 한 곡의 서곡을 작곡함으로써 진정이 되었던 듯하다. 그가 다시 이 작품을 되돌아보게 된 것은, 천재성에 원숙미가 더해진 33세 때의 일이었다.

1842년.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한 지 16년이 흐른 뒤, 그는 왕립음악원의 음악 감독이 되어있었다. 당시 프러시아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멘델스존이 작곡한 음악과 함께 상연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공연에 크게 만족하고 비슷한 작품들을 더 쓸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멘델스존은 이번에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자신의 곡을 덧붙여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무려 16년 전, 셰익스피어의 달콤한 시어로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을 달래고자 일필화의 기세로 써버린 ‘서곡’을 다시 꺼냈다. 그는 청년 시절의 앳되고 낭만적인 감성이 서린 그 서곡을 그대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에는 서곡 외에 14개의 곡들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 날에는 이들 중 일부만 추려서 연주되고는 하는데, 본래 부수음악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에 인물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 연주되는 행진곡이나 팡파르, 그리고 대사를 음악적으로 처리한 성악곡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독립적인 연주회에서 원곡을 전부 연주해버리면 매우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음악과 극의 진행은 대강 다음과 같다.

먼저 서곡의 연주와 함께 극은 시작되는데, 마치 우리를 꿈속으로 인도하는 듯한 목관의 화음이 네 번 연주되고, 이어서 현들은 마법의 숲 속에서 조곤조곤 요정들이 움직임을 묘사한다. 이어서 금관이 당나귀의 큰 울음소리를 내면서 이제 우리는 현실에서 벗어나 완전히 환상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1장은 별다른 음악의 연주 없이 진행이 되고, 1장과 2장 사이에 간주곡으로 스케르초가 연주된다.


연이어서 2장은 음악을 반주로 까는 멜로드라마로 시작되고, 오베론은 ‘요정의 행진곡’과 함께 등장한다. 2장의 2막은 성악곡 ‘얼룩무늬 뱀’으로 시작하고, 2막과 3막 사이에 다시 간주곡이 들어간다.


솔로 호른과 이를 뒷받침하는 바순의 조화가 아름다운 녹턴은 3막과 4막에서 연인들이 숲 속을 헤매다가 단잠에 빠졌을 때 연주된다.

4막과 5막 사이의 간주곡은 바로 그 유명한 ‘결혼 행진곡’이다. 이 한곡으로 인해 멘델스존의 부수음악 ‘한여름 밤의 꿈’은 불명의 생명력을 누리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동네에서는 이 곡이 울려 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는 다시 당나귀의 울음을 묘사한 서곡의 주제를 그대로 살린 베르가마스크 무곡으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여기에 에필로그가 따라붙는데, 퍼크의 저 유명한 마무리 대사에 반주를 붙이고, 무대를 열었던 네 개의 코드가 다시 한 번 반복되면서 이번에는 밤의 그림자를 서서히 걷어내고 우리를 현실의 세계로 되돌려놓는다.

멘델스존은 서곡을 완성한 지 16년이나 지나서 나머지 곡들을 썼지만, 그 기나긴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완전한 통일성을 지닌 아름다운 극음악을 완성시켰다. 멘델스존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천재성에 원숙미를 더하기는 했지만, 평생 청년의 쾌활함을 유지했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밝은 작품이 멘델스존의 작풍과 아주 잘 어울렸기에, 16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짧은 시간 동안 작곡 되었음에도 이토록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2010/11/03 23:01 2010/11/0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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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내 지갑은 좀 더 가벼워졌지만, 11월은 조금 더 즐거울 겁니다.

2010/10/23 03:21 2010/10/23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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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 전

휴일도 아니고 근무 오프도 아닌 평일. 여느 때라면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10시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출장 2일차. 오늘은 서울에서 일이 있다. 26일부터 시작되는 공군전우회 주관 한일교류 행사 통역 업무에 대비해서 사전 업무 협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도록, 말러 2번 3악장을 크게 틀어놓았다.

1층으로 내려가 냉장고 문을 여니, 지난 일요일에 사온 맥도날드 머핀이 그대로 남아있다. 차가운 머핀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작년 여름 맥도날드에서 받아 온 커다란 콜라 컵에 어름을 가득 채우고 콜라를 따랐다. 가사 도와주는 아주머니를 아주 오랜만에 봤다.

12시 반, 최대한 말쑥한 느낌으로 차려입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한낮의 도로는 대체로 한산했다. 그러나 서울 도심으로 갈수록 교통 사정은 좀 복잡해졌다. 대방동 공군회관에 도착하니, 이곳 역시 정문에서 헌병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증을 받았다.

4층 공군전우회 사무실 문을 두드리기 전 충주의 선임에게 전화 한 통을 넣었다. 선임은, 일이 일찍 끝나거든 충주로 내려와서 사무실에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라고 했지만, 저녁 7시 반 연주회를 예약해 놓은 상태라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일단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은 해 두었다.

사전 협의는 20분 만에 어이없으리만큼 빨리 끝나버렸다. 너무 빨리 끝나서 어쩌면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그쪽에서는 상관 안 할 테니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시간이 너무 남아서, 최근에 국내 개봉했다는 노다메 칸타빌레 극장판이라도 볼까 싶어 가까운 영등포 롯데시네마를 찾았지만, 낮 시간에는 상영 스케줄이 없었다. 결국 다시 차를 몰고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세종문화회관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으니 오후 4시였다. 그제야 나는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업무가 끝났다는 보고를 올렸다. 기왕이니 서점도 들르고 저녁도 해결하고 천천히 출발하겠다는 얘기도 했다. 일단 이것으로 행동에 제약은 없어졌다. 광화문 교보문고로 갔다. 연주회 시작 전까지 무료함을 달래 줄 소설책도 한 권 사고, 좀 이른 저녁도 먹었다. 그 뒤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 옆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소설책을 읽었다. 연주회에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15분 정도 눈을 붙이기도 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스테판 피 재키브,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회. 원래 이 연주회를 볼 수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임지 배속을 받은 후, 평일에는 꼼짝없이 충주에 갇혀 지내야 했다. 8월 한 달 동안이야 매일 같이 야근을 했으니 더욱 그랬지만, 비교적 정시 퇴근을 보장 받은 9월에도 평일 저녁 서울로 올라가 공연을 보는 건 근무 오프라도 받지 않는 한 불가능한 얘기였다. 나는 주말 저녁 열리는 저렴한 연주회들을 찾아다니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데 런던필의 공연일인 9월 16일, 출장 의뢰가 들어왔다. 아니, 실은 그 언저리 평일 아무 때나 골라 가면 되는 것이었지만, 내가 16일로 확정지었다. 15일 수원 출장과 함께 처리하면 편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출장지는 서울, 업무가 일찍 끝나면 그대도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가 런던필과 스테판 재키브의 협연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위험 부담은 있었지만, S석 자리를 예매 해 두었다(R석은 매진이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었다. 16일 출장 허락을 받았고, 업무는 일찍 끝났다. 일이 일찍 끝나거든 사무실로 돌아와 얼굴이라도 비추라는 지시는 적당한 얼버무림으로 넘겼다.

연주회

연주회 시작 30분 전에 세종홀로 들어갔다. 로비에서 주차권부터 샀다. 공연관람객에게 한해서 7시간 주차권을 5천원에 판매하고 있다. 이 주차권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10분에 500원씩의 주차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프로그램북을 구입하면서 같은 테이블에 진열 해 놓고 팔고 있는 리코딩을 봤는데, 용재 오닐은 <노래>라는 타이틀로 또 다른 소품집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스테판 재키브의 앨범은 이미 구입한 브람스 소나타 앨범이었다.

내가 예매한 자리는 2층 D블럭 143번 석. 솔리스트들의 생생한 표정이나 연주를 감상하거나 그들의 소리를 듣기에는 그리 좋은 자린 아니었지만, 오케스트라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또 홀을 가득 채우는 사운드를 듣기에는 괜찮은 자리였다.

모차르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그들은 참 즐겁게 연주를 했다. 스테판 피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은 마치 실내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먼발치에서도 그들의 표정이 생생히 읽히는 듯 했다. 스테판의 2악장 연주는 기대했던 것만큼 멋졌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바이올린의 소리를 넉넉하게 받쳐준 비올라의 연주도 훌륭했다. 아직 젊은 만큼, 주위의 다른 것들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자신들의 시간을 음악을 위해 온전히 할애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배타성이 그들로 하여금 음악을 순수하게 연주하게 하며, 오직 음악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터득하도록 하고 있는 것인 모양이다.

고전파 협주곡답게 곡은 오케스트라의 긴 제시부 연주로 시작된다. 여느 협주곡이라면 이 때 솔리스트들이 손 놓고 쉬고 있겠지만, 이 협주곡은 다르다. 두 사람은 각각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의 선율을 함께 연주했다. 3악장에서도 보통의 경우 솔리스트의 부분이 끝나면 오케스트라가 종결구를 연주하며 곡을 끝맺지만, 이때도 두 솔리스트는 마무리까지 함께 연주했다. 생각해보면 솔리스트가 주인공인 협주곡인데, 오케스트라만 덩그러니 종결구를 연주하고 곡을 끝맺는 것은 어딘가 민망하다.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매우 좋아하지만, 3악장은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모차르트 특유의 유쾌하고 발랄한 느낌이 묻어나는 1악장에 이어, 너무나 강렬한 인상의 2악장이 연주된 뒤에 이어지는 3악장은, 어딘가 1악장의 재탕 같고 개성이 없이 밋밋한 느낌이다. 2악장에서 한껏 고조된 감정이, 3악장에서 전환되고 발산되었다면 좋을 텐데, 뭔가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선택을 앞두고는 그냥 옆길로 새버린 느낌이랄까. 그래도 두 솔리스트의 훌륭한 앙상블을 끝까지 관람하는 것만으로 흡족한 연주였다.

차이코프스키 5번

좋은 연주라는 것은 어떤 연주일까.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즐거운 연주’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어떤 연주가 즐거운 연주인가 하면, 일단 연주자들이 즐겁게 연주해야 한다. 나는 이따금 국내 오케스트라들의 연주에서, 마치 내가 사무 보듯 그저 직업적, 기계적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놀랍지만 솔리스트 중에도 그런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문 연주자에게 항상 감상자의 수준을 뛰어넘는 열정과 지적 수준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주회장을 찾는 관객은, 분명 연주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음악과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연주자의 맥없고 사무적인 태도로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관객이 그토록 동경하는 세계에 앉아있으면, 프로는 설령 그것이 자신의 밥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더라도 관객이 기대하는 바에 맞춰 열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케스트라 구석구석을 눈여겨 보다보면, 연주회의 기분을 완전히 망치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 사람들의 연주가 아름다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할 수 없다.

악장부터 맨 뒷자리의 연주자까지, 적어도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만큼은 음악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다는 듯한 적극적인 태도. 그것은 연주회를 관람하는 관객에게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연주회에 빠져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먼저 연주자들이 그런 기회를 제공할 마음자세가 갖추어져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런던필의 클라리넷 연주자. 마치 메트로놈처럼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온 몸으로 연주를 했다. 머리가 희어진, 나이 지극한 바이올리니스트는 풍채는 거의 지휘자급이었는데, 그저 음악이 너무 좋다는 어린애 같은 천진한 태도로 연주를 했다. 플루트의 음색은 반짝였다. 금관 쪽에서는 큰 실수가 한 번 있었다(트럼펫인지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의욕이 앞선 결과였을 뿐이다.

자신들의 연주를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또 보여주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굉장히 피곤한 일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연주자들에게서 순간을 즐기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자연히 관객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1악장의 연주는 상당히 템포가 빨랐다. 클라리넷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악장인데, 연주자의 액션이 정말 컸다.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온몸으로 표현 해 주는 게 결코 나쁘지 않다고 본다. 2층의 먼 객석에서도 연주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2악장의 호른 솔로는 너무 아름다웠고, 한 바탕 운명의 동기가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에 이어진 바이올린의 노래는 황홀했다.

4악장 알레그로 비바체에서는 내 귀가 틀리지 않았다면 한 차례 큰 실수가 있었는데, 금관 쪽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빰’이 들렸던 것이다. 실수는, 곡에 대한 집중도를 한 순간 완전히 깨뜨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기본이 잘 갖추어진 탄탄한 연주에서라면 한 번의 실수 정도는 연주회의 전체적인 만족도를 크게 저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가슴속에서 찌릿하는 전율을 느끼며, 무언가 격렬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연주회였다.

앙코르 곡으로는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세레나데 2악장 왈츠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3악장을 연주했다. 메인이 교향곡 5번이었는데, 4번의 한 악장을 통째로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것은 의외였지만, 4번의 3악장은 길이도 5분 남짓으로 짧을 뿐만 아니라 현악기군 전체가 활을 내려놓고 피치카토로만 연주하는 대단히 재미있는 악장이라 앙코르 연주로서 효과는 만점이었다.

연주회 후

응어리져 있던 것을 후련하게 발산하고, 개운한 상태에서 연주회장을 빠져나왔다. 멋진 저녁.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빼려는데, 출구 쪽으로 길게 늘어선 차들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있었다. 15분가량을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차를 다시 주차시켜놓고 연주회 전에 사둔 소설책을 들고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세종문화회관 로비는 아직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슬쩍 보니 스테판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이 사인회를 열고 있었다. 나는 두 연주자의 사인은 일전에 받아 두었으므로, 대기열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심야까지 영업을 하는 커피 빈에 들어가 티라미스 케이크 한 조각과 바닐라 라테 한 잔을 주문해서 소설책을 읽으며 먹었다. 11시 반이 다 되어서야 주차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도 서울 시내에는 많은 차들이 돌아다녀서 예상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었지만, 이 날 만큼은 짜증이 나지 않았다. 플레이 리스트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 5, 6번을 올려놓고 재생시켰다. 느긋하게 주유를 하고, 혼잡한 서울 시내를 인내심을 가지고 빠져나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내일은 다시 출근.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 이 꿈같은 하루는, 그 반복적인 하루하루와의 부대낌을 몇 달은 더 지속할 수 있는 활기를 부여해 주었다.

2010/09/19 22:54 2010/09/1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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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피 재키브

내가 요즘 가장 주목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유독 한국에서 그의 미들 네임을 꼭 표기하는 것은, 그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에게 ‘피’라는 이름을 물려준 사람이 한국 수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피천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천득의 수필에는 그의 딸 서영이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스테판 재키브는 바로 그 ‘서영이’의 아들이다. 사람들은 피천득의 수필에서 느껴지는 그 따스함을 스테판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 속에서 찾으려 하는 듯하다. 문학과 음악은 언연히 다르지만, 한국이 자랑스러워하는 문인의 감성이 그 외손자에게로 이어져서 이제 그가 세계인의 마음을 움켜쥐는 음악을 들려주기를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피천득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호와 이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관심은 별 관계가 없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장면을 보았고, 그에게 청중을 집중시키는 재능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의 리사이틀 소식이 들렸을 때, 주저 않고 표를 샀다. 그 리사이틀에서 그는 브람스의 FAE 소나타와 3번 소나타, 그리고 베토벤 5번과 생상스의 카프리스를 연주했다. 브람스 소나타 전곡 녹음을 마친 후인만큼, 그의 연주는 여유로우며 확신에 차 있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들뜨거나 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중후하다고 느껴질 만큼 침착하게 연주했다. 내공이 있다고나 할까. 생상스의 카프리스는, 아마도 테크닉적으로도 전혀 밀릴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곡이었던 것 같다. 브람스도 생상스도 좋았지만, 청중을 가장 매료시킨 것은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쇼팽의 녹턴 20번이었다. 이 연주자가, 청중의 심장을 서서히,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움켜쥐었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다시 피가 돌도록 놓아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완벽한 연주였다.

피천득과 닮은 점? 글쎄. 돌이켜보면 피천득의 수필이 마냥 따스한 정감이 넘쳐흐르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필은 가장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것이 사람의 눈 아니던가. 그 담담한 필체로 본 것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때,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스테판 재키브가 때론 감성이 넘쳐흐르는 연주를 하지만, 그는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브람스를 잘 연주하는 젊은이라니, 생각해보면 소름끼치는 구석이 있다.

리처드 용재 오닐

리처드 용재 오닐. 그는 이미 비올라계의 슈퍼스타이며,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인 중의 한 명이다. 나는 그의 연주회를 직접 보러 간 일이 없다. 다만 딱 한 번, 무라지 카오리의 기타 연주회를 보러 갔을 때, 게스트로 등장하여 무라지 카오리와 그 날의 메인곡이었던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한 것을 들은 적은 있다. 솔직히 그와 무라지 카오리의 연주가 잘 어우러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연주회의 주인공은 무라지 카오리였지만, 이 곡을 연주할 때 만큼은 리처드 용재 오닐 쪽이 훨씬 여유롭고 확신에 차 보였으며, 리드해 나가는 느낌이었다.

순박해 보이는 인상, 다소 어눌한 말투(아마 이건 한국어가 서툰 데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협주곡이나 소나타 같은 대곡의 녹음 보다는 소품집으로 인기 몰이를 한 탓도 있어서 그가 광고하는 커피 향만큼이나 부드럽고 유들유들한 이미지를 풍기는 그이지만, 나는 그의 연주가 마냥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것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정열적이며 가차 없는 연주력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협주곡이라는 장르는 고전파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서 초인적인 기교를 자랑하는 솔리스트들과 비현실적 열정을 불사르고 싶어 했던 작곡가들이 만난 낭만파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고전파 시대부터 낭만파, 이후 국민악파 시대까지 많은 협주곡들이 작곡되었지만, ‘이중 협주곡’이라는 형식의 곡은 그리 자주 작곡되지 않았다. 이런 형식은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에서 발견되는데, 여러 악기군에 돌아가며 솔로 부분을 연주하도록 하는 콘체르토 그로소가 그런 양식이다. 콘체르토 그로소 형식 안에서 솔로 부분을 연주하는 그룹을 솔로 그룹 혹은 콘체르티노라고 부른다. 이들은 오케스트라 반주를 할 동안 손을 놓고 쉬는 게 아니라, 함께 합주를 하다가 자기의 솔로 부분이 있을 때에만 솔리스트로 변신을 한다.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에서도 이런 콘체르토 그로소 양식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원래 악보상에는 협주자도 솔로 파트 외의 부분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합주하도록 되어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조합은, 이중 협주곡 중에서도 그 예를 찾기가 힘든 희귀한 조합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바이올린족의 악기 중에서 서로 가장 가까운 친족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바이올린과 첼로의 대비만큼 드라마틱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차르트는 왜 하필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조합을 택했을까. 모차르트가 이 곡을 작곡한 해는 1779년. 이 시기는 모차르트가 1777년부터 시작한 유럽 여행의 끝무렵이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만하임 궁정 오케스트라도 방문했는데, 당시 만하임 오케스트라는 새로운 연주 테크닉을 선도하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오케스트라였다. 즉각적인 영감을 워낙 순식간에 곡으로 구체화시켜버리는 모차르트이니만큼, 이 기간의 여행을 통해 새삼 비올라의 매력에 눈을 뜬 것일 수도 있다.

3악장 구성이며 연주 시간이 30분에 이르는 대곡이다. 1악장과 3악장은 모차르트 특유의 경쾌함이 묻어나지만, 2악장은 처절하리만큼 애처롭고 쓸쓸하다. 1악장에서는 두 솔로 악기에 완전히 균등하게 비중이 분배되었다. 하나가 달려가면 다른 하나가 쫓는 숨바꼭질 같은 느낌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따라 잡으면, 이번에는 좀 전과는 또 다른 호흡, 다른 보폭으로 새롭게 뜀박질을 시작한다. 시종 즐거운 분위기에서 놀이하듯 곡은 흘러간다.

2악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1악장이 마냥 즐거운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면, 2악장은 잔혹한 운명 앞에 놓인 두 남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바이올린은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것 같고, 비올라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른 채 떨리는 목소리로 타이르는 것 같다. 이 2악장의 슬픈 대화를, 스테판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이 과연 어떻게 표현 해 줄지, 기대된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하면 베를린 필을, ‘오스트리아’하면 빈 필을 떠올린다. 음악의 본고장 유럽이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각 나라의 왕이며 제후들은 각자의 궁정 오케스트라를 거느렸고, 수많은 작곡가와 전문 연주자들을 배출했다. 독일의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어디 베를린 필뿐이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고, ‘지존의 존재’를 바라는 법이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최고 오케스트라는? LSO인가? LPO인가? RPO인가? 아니면 BBC? 당최 구분도 가지 않는 이름들이다. LSO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LPO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다. 덤으로 RPO는 요즘 위상이 많이 추락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말하고, BBC는 물론 방송국 BBC의 교향악단이다(KBS나 NHK 교향악단을 생각하면 된다).

20세기에 비틀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 음악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다는 자괴감에 젖어있던 영국은, 역설적으로 유럽 대륙 음악의 가장 열성적인 수요자였다. 그런 만큼 영국 내에는 굴지의 오케스트라들이 많지만, 그 어느 하나도 베를린 필이나 빈 필처럼 세계인을 압도할 명성을 지니고 있지 못 하다는 것은(한 마디로 ‘고만고만’하다는 것은) 조금 서글픈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오케스트라의 대중적 인지도나 잡지에 오르내리는 순위표는 호사가들이나 집착하고 좋아하는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의 오케스트라들은 깊은 역사를 지녔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잘 계승해 오고 있다(LPO는 다소 파격의 길을 걷고 있긴 하다). 문제는 그들의 유명세가 아니다. 지휘자의 이름도 아니다. 그들 공연의 티켓 값도 아니다. 오직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며 또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오케스트라를 평가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하룻밤에 20만원 돈을 지불해가며 듣기에는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나 역시 비싼 티켓 값이 황홀한 감동을 선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끔 기만적인 감동을 부르짖으며 연주회장을 빠져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아무리 돈의 위력이 막강하더라도 감동을 억지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티켓 값이 비싸든 싸든, 그건 하나의 가능성을 구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LPO가 좋은 오케스트라인지 어떤지, 나는 알 수 없다. 설령 그 명성을 믿는다 하더라도, 연주회 날 정작 감동적인 연주를 선사할지 어떨지는 또 알 수 없는 일이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몇 번의 무대에 섰고, 꽤 여러 곡과 만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회라면 역시 첫 연주회를 꼽을 수밖에 없겠지만, 가장 즐거웠던 연주회를 꼽자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한 마지막 연주회가 아닐까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한심할 정도로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악기 연주 실력이 늘지 않는데, 그래도 마지막 연주회 때는 첫 연주회 때보다야 실력이 향상 된 상태였다. 부분부분 스스로도 연주하는 기쁨을 조금씩 느끼며 참여했다.

한 번이라도 연주를 해 본 곡은, 언제 들어도 남다르게 들리는 법이다. 그게 음악의 재미겠지만, 알 면 알수록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멋진 연주를 기대해 본다.

2010/09/14 01:07 2010/09/14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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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니아 캠프에 놀러갔다. 도착한 게 새벽 1시 반. 여름 성수기라 이 ‘누추한’ 리조트에도 꽤 사람들이 많이 묵고 있는 듯, 지하 주차장에 주차 공간이 없었다. 이럴 때 마티즈의 ‘사이즈’가 빛을 발하지. 거대한 SUV 두 대 사이, 주차장 시멘트 기둥 뒤편 좁은 공간에 살며시 주차. 마티즈는 가능하다.

보통 캠프는 월요일에 시작해서 토요일 아침 해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번 캠프는 일정이 이상하게 잡혀서 금요일에 시작하여 다음 주 수요일에 끝난다. 주말이 낀 덕분에 내가 놀러갈 기회도 생겼지만. 그리고 교회 나가야 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요일 오전 연습은 생략. 덕분에 부담 없는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늦게까지, 아니 이른 아침까지? 술 마시며 잘들 놀았다.

난 선물로 군납용 면세주 스카치 블루와 J&B를 사갔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깨어있을 줄 알았더라면 몇 병 더 들고 갔을 텐데.

술 못 먹겠다. 안주도 안 든 빈속에 소주와 설중매를 들이붓고 거기에 스카치를 스트레이트로 마셨으니 무리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수개월 알코올 청정 상태였던 때문인지 아침에 꽤 힘들었다.

연습 부담이 없는 나는 늦게까지 자다가, 오후 생상스 연습 때 연습실로 내려가서 참관을 했다. 지휘자 선생님도 계시니까 다리도 꼬지 않고 나름 바른 자세로 관람. 여느 공연 볼 때보다도 진지하게 봤다.

오케스트라의 튜닝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자동차 마니아들이 엔진 시동 거는 소리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과 비슷하달까. 공연이 끝났을 때 느껴지는 벅찬 감동을 경험하기 위해서 만큼이나, 공연 시작 전 오케스트라 튜닝 순간의 설렘을 느끼기 위해 공연장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습 때 튜닝은 훨씬 귀엽고 재밌다. 관악기들은 어쩔 때는 음이 잘 맞춰져서 튜닝에 몇 분씩 걸리기도 한다. 악장이 악기 별로 친절히 튜닝을 해 준다. 원래 오케스트라 튜닝 시에는 오보에로부터 A를 받아 관을 먼저 튜닝, 그다음에 현을 튜닝한다. 일일이 클라리넷, 트럼펫, 호른 등등을 지적해서 맞춰주거나 하지 않는다.

튜닝이 끝나면 연습 시작이다. 지휘자 선생님이 지휘봉을 들어 올리면(근데 지휘봉을 썼던가?) 단원들도 일제히 악기를 들어올린다. 그 일사 분란함이 좋다. 첫 타점을 찍기 전까지의 정적. 그 적막이 또한 무지 매력적이다.

음악을 만든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작업이다. 음악은 작곡가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오케스트라의 역할은 그저 악보에 적힌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악보를 ‘참고’하여 작곡가의 머릿속에 들어있었을 그 음악을 가능한 한 재현 해 보는 것이다. 그 음악은 다시 지휘자의 머릿속에 있고, 오랜 기간 연습을 통해 단원들의 머리와 가슴에도 전달이 된다.

생상스 3번. 참 좋더라. 그 뛰어난 능력, 그리고 그가 남긴 많은 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는 매우 낮은 생상스. 생상스는 5곡의 교향곡을 썼는데, 3번을 제외한 곡들은 거의 연주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인기가 있는 3번은 부제인 ‘오르간’만 봐도 알 수 있듯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야만 연주를 할 수 있는데, 국내에는 그런 연주 환경이 거의 없다. 예당에도 파이프 오르간이 없어서 전자 오르간을 놓고 쓸 지경이니. 세종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왜 몰랐지. 아무튼 ‘오르간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과장이다 싶긴 해도 그만큼 오르간의 임팩트는 강하다. ‘오르간 필수’ 딱지가 붙었으니, 좀처럼 쉽게 공연이 될 수가 없지.

생상스 3번은 엄밀히 말하면 4악장 구성이 아니라 2파트 구성이다. 그러나 2파트가 각각 2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결국 4개의 부분이 일반적인 4악장짜리 교향곡의 각 악장과 비슷해서 그냥 각 부분을 악장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두 시간 정도에 전 악장 연습을 다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난 세컨드 바이올린 파트보를 받아 참고하며 들었다.

정말 연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억누를 길 없을 만큼 솟구쳤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어. OJT고 야근이고 뭐고 간에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부터 물색 해 봐야겠다. 여건상 내가 유포니아에서 다시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러나 ‘기회’란 어느 정도 내가 만드는 것이기도 하니까,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부분은 준비해야지. 언제 어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연습 구경을 마치고 다시 차를 달려 충주의 숙소로 돌아왔다. 늦은 저녁을 먹고 상쾌하게 샤워를 마치고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적당한 공연을 물색한다. 마침 이번 달에는 가족음악축제라는 기획 공연이 매주 주말마다 열린다. 코리안 심포니, 수원 시향 등 괜찮은 단체들의 연주를 단돈 15,000원에 관람할 수 있는 기회. 이걸 마다해서 되겠나. 토요일 프로그램은 시벨리우스 2번이 메인. 일요일 프로그램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가 메인이다. 어느 쪽도 다 듣고 싶지만, 이번에는 시벨리우스로 결정. 한 주를 즐겁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블로그 스킨을 바꿨다. 커스터마이징을 안 해서 메뉴 구성이 엉망인데, 수정을 해야 하지만 귀찮아서……. 조만간 손을

2010/08/02 00:00 2010/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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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듬해 1월. 교토의 콘서트홀에서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제88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이들이 연주한 곡은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곡’, 그리고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이었다. 나는 이때 연주자가 아닌 스태프로 참가하여, 로비의 데스크를 지키며 연주회장을 찾은 관객들이 연주자들 앞으로 보내는 선물을 위탁받는 일을 했다. 연주회가 중반을 넘어가면 어차피 할 일이 없는 역할이라, 나는 로비 안에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었다. 브람스 2번 4악장의 격정적인 피날레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교토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다. 나 역시 로비에서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대기실에 돌아가니 여기 저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그 눈물을 비웃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아직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 3월 초, 89회 정기 연주회를 넉 달 정도 남기고 아미야로부터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서곡의 제2 바이올린 파트로 들어와 주지 않겠느냐고, 아미야 다운 매우 정중한 어조로 쓰인 글이었다. 초대의 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연주회에 설 수 있다는 ‘승낙’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정중한 글에는 그러나, “힘들게 연습 시킬 것이니 각오 하고 대답을 주십시오.”라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저히 못 따라간다 싶으면 쫓아내도 좋으니, 같이 하고 싶습니다. 물론 쫓겨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명실공이 한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네 달의 기간은 결코 신나지만은 않았다. 네 달 동안 단 한곡의 곡을 붙잡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네 달의 시간을 온전히 쏟아 부어도 한 곡을 제대로 연주하기 힘들만큼, 나의 기초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120일간 하루 평균 세 시간씩 연습했는데, 악기를 잡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매주 주말에 있던 전체 연습은 한두 번 빠진 일이 있었지만, 매주 목요일 저녁 파트 연습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물론 바이올린 레슨도 계속 받았다.

2007년 7월 7일. 행운의 숫자 7이 세 번 겹쳤다 하여 길일이라던 그 날,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제89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연주회의 문을 연 곡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서곡. 아마가사키 홀에서 천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또 천 명의 관객 중 한 사람, 백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의 나를 보기 위해 찾아와 준 친구를 두고, 나는 이 곡을 연주했다. 연주 시간은 10분 남짓. 그 10분 남짓의 연주를 위해 나는 300시간 이상을 연습했다. 아니 어쩌면 그 10분을 경험하기 위해 나는 일본에 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주가 끝났을 때, 나는 굳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노력의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케스트라 단원. 실현 불가능한 공상으로 치부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다음 달, 바이올린 파트의 동료들이 나를 위한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그렇게 내 유학 생활은 마감되었다. 동료들은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연주 생활을 이어가게 될 터였지만, 내 경우는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오케스트라 활동을 지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만은 확고했다. 그때 오랫동안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바이올린 시작한지 한 달 남짓인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이름,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유포니아. 새로운 길은 의외로 빨리 발견될 것 같았다.

7.

2007년 8월 20일. 나는 1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대부분의 짐은 배편으로 미리 부쳤으므로, 산더미 같은 짐을 들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어깨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1년 동안 실력이 조금 향상된 것에 우쭐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도전할 용기가 있고, 어떤 힘든 길도 걸어갈 성실함과 인내심이 있다고 믿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거의 2년 만에 돌아간 학교는 완전히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벌써 3학년생이 되어있었지만, 기분은 흡사 새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개강 직후, 유포니아 동아리 방을 찾았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의 문을 처음 두드릴 때만큼의 각오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오케스트라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유포니아의 동아리 방은, 채플을 들으러 다니던 대강당 1층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찾아갔을 때, 나는 그게 오케스트라 동아리의 방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비록 주말이면 전체 연습 할 공간을 찾아 시내 여기저기의 홀들을 전전해야 하긴 했어도 학교 안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상시 연습할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는 거의 1년 내내 누군가가 악기 연습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유포니아의 동아리방은 너무 비좁아 열 사람만 들어가도 가득 찰 것 같았다. 푹신푹신한 소파와 컴퓨터가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악기 연습을 할 수는 없어 보였다. 마침 동아리 방에 단원들이 몇 명 있어서 나는 입단 절차를 물어보다가 슬그머니 연습 장소에 대한 것도 물어보았다. 혹시 따로 연습할 공간이 있느냐고. 그러자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평소에 개인 연습은 대강당 양 옆의 복도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복도에서 연습을? 오케스트라마다 여건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며칠 후, 나는 유포니아의 정기 연주회를 관람하러 갔다. 서곡은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관람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서곡이었던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두 번째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는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것도 나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메인 곡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이었다.

단원들이 개인 연습을 할 변변한 공간도 갖지 못한 오케스트라가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일본의 대학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들 중에서도 실력이 좋기로 평판이 나있다. 도쿄대나 교토대처럼 엄격한 기준으로 단원들을 선발하는 입단 절차 같은 것이 없으면서도 ‘되는 대로’ 받은 신입들로 그처럼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개개인들이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원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개인 연습을 할 수 있는 ‘학관’의 존재야 말로 그 여건의 핵심일 터였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선배 중에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있었는데, 연주회 후 연설 때 자신은 마음속에 늘 학관과 같은 장소를 품고 앞으로 건축 설계를 해 나가고 싶다고 했다. 물론 학관과 같은 난잡한 장소를 설계의 모델로 잡으면 낭패겠지만, ‘정이 깃드는 공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건축의 철학을 얘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학관은 의미가 큰 장소였다. 학교를 떠나기 전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학관을 들러 구석구석 찬찬히 살펴보았던 기억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 늘 찾아갔던 장소. 사람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에 나도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이상적인 공간. 어쩌면 오케스트라를 생각할 때 무대보다도 더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장소일 것이다. 그런 장소의 부재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유포니아의 연주는 훌륭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악기를 시작한 지 2년. 클래식 음악을 들은 기간도 그 정도. 연주의 질을 논할 만큼의 안목이 생겼다고는 아직 자부할 수 없었지만, 2년 전 그저 무심히 연주를 바라보아야 했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무언가 다른 바가 있었다. 이날 유포니아의 연주는 나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오케스트라마다 문화가 다른 것이겠지. 아마도 유포니아는 처음부터 연주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만을 뽑기 때문에, 개인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정도의 연주를 해내는 모양이로구나.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단 지원서를 제출했다. 이미 적지 않은 나이. 그러나 나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력. 유포니아는 2년 전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저 공상의 대상일 뿐일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직접 확인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오디션을 통해 신입을 선발하는 것은 어쩌면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디션이 없는, 그러면서도 성공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를 먼저 경험한 나에게는, 이 오디션의 존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오디션을 통한 선발은 실력 있는 단원의 유입을 담보하긴 하지만, 반드시 열정과 의지가 있는 단원의 유입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와 유포니아의 문화와 전통이 엄연히 다른 만큼,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디션은 미리 준비한 자유곡 1곡, 즉석에서 공개되는 초견곡 1곡의 연주를 통해 연주력을 검증하는 단계와 면접관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지원자의 성격을 파악하는 구술 면접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자유곡으로 파가니니의 기타와 바이올린을 위한 이중주곡 중에서 쉬운 악장 하나를 골랐다. 원래 친구와 합주를 하려고 찾은 곡인데, 덜 알려져 신선하면서 어렵지 않은 곡이라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최악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오디션을 본 후 며칠이 지나 유포니아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만 바이올린 파트에는 불합격 하셨습니다. 대신 호른을 불어볼 의향은 없으신가요?”

오디션의 벽. 그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던 내가 다시 오케스트라 생활을 그저 공상으로 여기게끔 만들기에 충분하리만큼 높은 것이었다. 다른 악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제의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호른은 제게 맞는 악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유포니아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군요. 아쉽습니다.”

8.

2007년 10월부터 나는 신촌에 있는 음악 학원에 등록하여 바이올린 레슨을 재개했다. 일본 시절부터 쉬지 않고 달려와 들끓은 열정은 쉽게 식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고독한 연습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늘 학원을 찾아가 하루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유포니아와 인연이 없는 것 같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당시의 내 학년과 실력을 고려할 때, 또 다시 유포니아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나의 애정과 의지와 성실함과 진지함이 실력의 한계 앞에 평가 받지 못 한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분하기도 했다.

다시 1년. 뚜렷한 목표도 없지만, 10년 동안 레슨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지키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오케스트라 입단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 2008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학기 시작과 함께 조기 졸업 신청을 위해 학적과 사무실을 찾았다. 조기 졸업을 위해 나는 닥치는 대로 전공 수업을 들었고, 방학에도 계절 학기를 들었다. 덕분에 4점대 이상이었던 학점은 3점대로 주저앉았지만, 그래도 조기 졸업 가능 학점은 유지하면서 3학기 만에 필요한 전공 학점을 모두 이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졸업 요건에 고급 과목을 몇 학점 이상 이수해야 한다는 제한에 걸렸다. 불과 6학점이 부족해, 나는 조기 졸업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대학을 한 학기 더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남은 학교생활이 반년에서 1년으로 늘어났다.

며칠 후, 나는 유포니아에 다시 입단 지원서를 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내가 생각했던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심지어 레슨 선생님에게도 비밀로 하고, 오디션 준비를 했다. 스즈키 교재에 수록된 헨델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한 악장을 골라 악보를 복사하고, 문구점에서 검은색 색지와 풀을 사서 정성스럽게 악보를 정리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며 마지막 시도였다.

며칠 후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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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5 06:00 2010/04/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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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 입국 첫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무거운 짐들은 공항 안의 택배 회사를 찾아 당일 배송 서비스로 부치고, 기숙사 주소와 약도가 그려진 안내장 한 장과 바이올린을 들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서는 대담하게 택시를 탔다. 일본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어의 억양에는 아무래도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얼마 후 당도한 오사카 대학의 국제학생 기숙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름한 건물이어서 첫 인상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관리실로 들어가 일본어로 내 소개를 하려는데, 상대방이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국제학생 기숙사인 만큼 관리실을 지키는 사람들도 유학생들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108호 A. 내가 1년 동안 생활하게 될 방으로 안내되었다. 좁은 방 안에 책상, 책꽂이, 옷장, 냉장고, 침대, 에어컨 등 시설이 빼곡히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허전해 보였다. 관리인이 돌아가고, 나는 침대에 홀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외국에서 홀로 시작하는 유학생활. 내가 바랐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건만,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억누를 길이 없었다.

며칠 후, 오사카 대학에서 나의 지도 교수로 지정된 교수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1년 동안 공부할 캠퍼스에 가 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면담을 끝내고, 나는 캠퍼스 안을 산책하며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금관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소리의 근원에 다가갈수록, 금관악기뿐만 아니라 목관악기, 현악기 등 다양한 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끄러운 소음은 어떤 허름한 건물의 1층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구의 유리문에는 “초심자도 환영. 사양하지 말고 들어오세요.”라고 적힌 빛바랜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곳은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이었던 것이다.

10월. 학기가 시작되었다. 간혹 한국인 유학생 선배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조심스럽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보통 그런 것에는 무심한 사람들이어서, ‘항상 시끄럽다’거나 ‘조금 소리가 들을만해지면 또 신입생들이 들어와 시끄럽다’란 얘기들뿐이었다. 10월 6일. 아마도 그날은 추석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아갔다. 문을 열려는데, 마침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한 사람이 너무나 멋지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어서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혹시 입단 신청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악기를 내려놓고 물었다. “무슨 악기로 지원하시려고요?”

“바이올린이요.”

온통 어지러운 연습실 안에는, 대충 책꽂이라든가 책상 따위로 각 파트의 구역을 나눠놓고 있었다. 나는 바이올린 구역으로 안내되었다. 즉석에서 일종의 입단 테스트가 치러졌다. 입단 테스트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오케스트라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식이어서, 연주를 못 한다고 입단을 거부당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해 보려는 것이었다. 한 단원이 내게 악기를 빌려주고, 단지 1년 정도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나의 말을 참고해 적당히 쉬운 곡들이 실린 악보집 하나를 건네줬다. 그 안에서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레슨 받았던 곡을 찾아내어 연주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려 좀처럼 고개를 똑바로 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날 나는 추석날 밤의 보름달이 뽐내는 아름다운 달빛을 흐뭇하게 즐기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추석을 맞아 한밤중에 한국인들끼리 모여 연 가벼운 주연(酒宴)에서, 나는 내가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밝혔고, 사람들의 성화에 바이올린을 꺼내 또 얼토당토않은 연주 실력을 피로했다. 그렇게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나의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5.

입단 둘째 날, 나는 악기를 들고 연습실로 찾아가 정식으로 입단 원서를 작성했다. 바이올린 파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내 악기 지판에 붙어있는 운지 테이프가 부끄러워, 나는 이 날은 끝끝내 악기를 꺼내보지 못 했다. 눈치껏 살펴보았으나 지판에 테이프를 붙여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 지판의 테이프를 떼어버렸다. 그리고 음정을 잡아보려 했지만, 항상 눈으로 손 짚을 자리를 확인하던 습관 때문에 영 어색하고 음정이 정확하지가 않았다. 무작정 오케스트라에 지원은 했지만, 점점 마음은 초조해져만 가고 있었다.

2학기 신입 모집은 거의 하지 않는 일본의 동아리. 여름 방학이 지나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환영식 같은 것도 물론 없었고, 동아리 안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내가 단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해주는 것은, 3000엔의 단원 회비와 얼마 후 떠나게 될 합숙 훈련비를 내야한다는 회계의 전달 사항뿐이었다. 나는 아주 고독하게 오케스트라 생활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연습실로 가서 보면대 위에 악보를 펼쳐놓고, 저녁 8시 학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주로 호만이나 스즈키 교재에 실린 것들을 지루하게 반복해서 연주했다. 며칠 후 ‘아미야’란 단원이 내게 악보를 건넸다. 합숙 훈련을 가면, 오케스트라 1년차들끼리 모여 연주할 곡이라고 했다. 생각이 있으면 연주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예스’라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살펴본 악보는, 내 수준에서 도저히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악보는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 제2 바이올린 파트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월 초, 오사카 대학의 축제가 한창일 때, 오케스트라는 정기 연주회 대비 합숙 훈련을 떠났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합숙 훈련을 본격적인 연습의 시발점으로 본다. 물론 실력 미달의 신입 단원인 나는, 정기 연주회 참여 대상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견습 단원이라고 할까. 합숙 때 나는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소개되었고, 저녁 술자리에서 드디어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사용을 고집하던 경어(존댓말)를 버렸다.

합숙 훈련 중에 나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습 과정을 지켜보았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널찍한 방안의 냉랭한 공기도 단원들이 연습만 시작하면 금방 달아올랐다. 현과 목관과 금관과 타악기가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함께 소리를 낸다. 뭔가 어그러지고 맞지 않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엔가 하나의 소리로 모아진다. 음악 감상의 경력도, 연주 경력도 짧은 내게 그 모습은 하나의 경이였다.

실력 미달의 신입인 나는 아직 정기 연주회에 참여할 수 없어, 몇 명의 다른 초심자들과 함께 ‘피델리오’ 연습에 매진했다. 이 연주는 오케스트라 1년차들이 모여서 합숙 기간에 한 번 재미로 연주해 보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과 생애 처음으로 앙상블을 맞추는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아미야는 성심껏 지도를 해주었지만, 실력의 한계를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리듬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처음 깨쳤다. 혼자서 연습할 때 늘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은 음정이었다. 그러나 앙상블을 맞출 때는 리듬을 틀리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16분 음표와 4분 음표, 온음표의 음가, 그리고 부점이나 트릴, 꾸밈음의 음가에 대한 이해와 정립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몸으로 익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너무 어려웠다. 어려운 부분에서 느려지지 않기, 쉬운 부분에서 빨라지지 않기, 여린 부분에서 크게 연주하지 않기, 포르테에서 작게 연주하지 않기, 쉼표 잘 지키기 등 평소 내가 악기를 연습하며 등한히 했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음악을 만들어 나감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이었는지를 ‘혼나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합숙 훈련에서 돌아온 후, 나는 바로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발견한 음악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고, 레슨을 견학한 뒤 바로 등록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잠깐 도서관에 들렀다가 늘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았고, 거의 매일 저녁 8시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마침 귀갓길 방향이 같았던 ‘고토’와는 매일 함께 하교를 하다 보니 제법 친해졌다. 더군다나 고토와는 바이올린 초보의 애환도 공유하고 있었다. 레슨 받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늘지 않는 실력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해의 겨울을, 오케스트라에 대해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열정으로, 타지(他地)에서도 외롭지 않게 이겨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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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9 06:00 2010/03/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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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년 8월. 한여름 밤의 습습한 공기를 가르며, 학교 대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대강당에서는 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강당 앞은 연주회를 관람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구에서 프로그램 북을 하나 사서 대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해 강당 안을 쓱 둘러보았다. 아직 연주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은 탓도 있었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빈자리가 많았다.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관객들의 표정은 그저 여유로울 뿐이었지만, 강당 안에는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저 무대 뒤편에서 연주 시작을 초초하게 기다리는 연주자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었을까.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고서, 프로그램 북을 펄럭였다.

시간이 되고, 연주자들이 입장했다. 나는 그 무리를 눈길로 더듬어 지인(知人)의 얼굴을 찾았다. 무대가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너를 보러 왔지.’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간 첫 오케스트라 연주회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날 연주될 곡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곡 해설은 꼼꼼히 읽어봐도 이해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날 연주된 곡들의 제목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첫 곡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내가 이 연주회를 보러간 유일한 이유였던 지인(知人)은, 연주 경력이 길지 않았던 때문인지 이 한 곡만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이어서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과 (인터미션이 있은 후에) 슈만의 ‘교향곡 4번’이 연주 될 때는 한층 더 무심히 연주를 지켜보았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머물며, 나는 관조(觀照)했다. 시선은 고정하고 천 갈래 만 갈래의 생각을 상대를 향해 뻗어보았지만 그 본질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 했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박수를 쳤고, 연주자들은 뿌듯해 했다. 어떤 연주자는 눈물을 흘렸고, 나는 그것을 비웃었다. 작위(作爲)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흘리는 눈물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 흘리는 눈물도 작위다. 그리고 나는 작위를 경멸한다.

내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 역시 이 해 8월의 일이었다.

2.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음악사 강의를 신청했다. 이 당시에 나는 음악보다는 차라리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림이나 조각이 더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시각적으로 현현(顯現)된 예술품의 미(美)를,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서점에서 아무 미술사 책이나 골라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지(無知) 그리고 무감(無感)의 벽을 넘어서면, 책의 저자들이 그토록 경탄하고 숭배하는 예술품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악사 강의를 신청한 것은, 미술사와 병행해서 공부하면 예술을 감상하는 총체적인 심미안을 기를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음악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둘 있었다. 두 교수 모두 같은 교과서를 채택했는데, 그 중 한 교수가 해당 교과서의 저자였다. 기왕이면 저자직강을 듣고 싶었으나, 시간표 여건을 고려 해 다른 교수의 강의를 신청했다. ‘윤혜준.’ 나이 40세 정도의 여자 교수였다. 음악사는 수업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고, 시험 문제는 세세하게 출제되는 까다로운 과목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혹시 수업 진행도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교수는 의외로 시원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러나 교수의 시원스런 성격이 음악사 공부의 모든 난제를 해결 해 줄 수는 없었다. 수업은 오늘날에는 그 음악 원형의 파편조차 알 길이 없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이론부터 시작하여 반주도 없고 박자도 없고 조성은 모호하고 심지어 가사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세의 성가(聖歌)를 배우는 데에만 거의 한 달의 시간을 할애했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점차 옅어졌고, 수업 시간을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삼는 빈도가 늘어났다. 쪽지 시험 같은 것을 보기도 했는데, 대충 책의 내용을 암기하고 보면 점수는 잘 나왔지만, 결국 음악을 글로만 배우게 되었구나 싶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과가 있었던 터라 피곤해서, 오후에 음악사 수업을 들어가서는 또 금방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졸았을까. 귓가에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CF에서 들어본 적이 있음직한 음악이었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빔 프로젝터가 하얀 스크린 위에 영상을 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첼로를 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담백한 연주. 그러나 풍부한 소리. 성당을 하나의 거대한 울림통으로 삼아 연주를 하는 듯 했다.

로스트로포비치. ‘거장’이라는 칭송이 어울리는 마지막 연주자. 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은, 음악사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음악이었다. 나는 로스트로포비치란 이름도 이날 처음 들었고, 우아한 선율로 시작하는 저 익숙한 첼로 음악이 바흐가 첼로 솔로를 위해 작곡한 6개의 모음곡 중 첫 번째 모음곡의 서곡(프렐류드)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얼마 후 나는 처음으로 음대 도서관을 찾았고, 거기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리코딩을 대여해, 전곡을 들었다. 무지(無知)가 지(知)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음악사 수업 시간에 조는 일은 없어졌다.

윤혜준 교수는 자신이 창단했다는 ‘유포니아’라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또 어려운 곡에 도전하고 그것을 소화해내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한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유포니아에만 특별히 적용되는 관대함 속에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대학생들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이야기는 학생들의 동경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 가능성 없는 공상일 뿐이었다. 유포니아의 존재를 알았을 당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으니까. 내 인생은 대학생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는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담담한 수긍이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서글픔을 남겨놓았다.

3.

이듬 해, 나는 일찌감치 2학년 1학기 등록을 하는 대신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동아리 활동을 비롯하여 학교생활 일체를 접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호주와 이탈리아, 그리스를 여행했다. 요리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외출을 하지 않는 날에는 방 안에서 소설을 읽었다. 바이올린 레슨도 계속 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과 친해져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바이올린 음악이었다. 바이올린은 내가 배우고 있는 악기인 만큼 친해지기 쉬웠다. 내가 최초로 구입한 클래식 음반은 헨릭 셰링이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였다. 며칠 동안 이 음반을 계속 들었다. 그렇게 셰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비발디의 사계, 비탈리의 샤콘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소품들. 유명한 곡들 위주로 하나 둘 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을 듣고 나니 사라사테, 비에냐프스키, 비오티 등 이전에 몰랐던 작곡가의 곡들까지 찾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클래식 음악의 벽은 높게 느껴졌다. 특히 교향곡을 듣는 것이 어려웠다. 교향곡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베토벤부터 도전했지만, 단 한 곡도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쉬지 않고 듣지 못 했다. 그는 이런 장대한 교향곡을 무려 9곡이나 작곡했다.

인터넷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 추천 리스트에는 숨 막힐 정도로 많은 곡이 소개되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쉽게 말해왔지만, 천 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클래식의 세계에는, 내가 밤하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별의 숫자보다도 많은 곡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하나하나의 곡들을 예술품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음악을 진지하게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에게 음악은 ‘배경’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작업을 한다든가, 공부하다 지쳤을 때 신나는 음악으로 기분 전환을 하는 정도의 기능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왜 음악에서 그 이상의 것을 구해야 할까? 음악은 즐거운 것, 즐거워야만 하는 것, 반드시 인간의 감성과 호응하는 것이라 배웠다.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과 친한 듯이 보이지만, 평소 우리가 음악에 대해 생각하는 것, 알고 있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음악의 전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의 지평이, 조금은 넓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2006년 9월, 교환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가져갔다. 10년은 레슨 받기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한 바이올린이다. 교환학생을 이유로 배움을 중단하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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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2 06:00 2010/03/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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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大家)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대중의 환호와 갈채로? 선배 세대의 거창한 찬사를 받아서? 언론과 비평가들의 호평 속에? 기획사들의 홍보 전략에 힘입어서? 대가라 칭해지는 이들은 무엇이 다른가? 보다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대체 무엇에 환호하는가?

내가 궁극적으로 체득하고자 하는 예술적 감수성의 경지는 대중의 환호와 갈채에 현혹되지 않고, 언론과 비평가들의 그럴듯한 말들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 어떤 정통성과 권위보다도 나의 눈과 나의 귀에 의지하고 나의 지성으로 판단하여 진정한 미(美)의 가치를 꿰뚫어보고 즐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취미 생활’을 남들이 마련 해 놓은 해석과 비평을 취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미리 설명 해 놓은 대로 감정까지 느끼는, 편의적이고 양식화된 행위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스스로 이해하고 느낀 것이 아니면 나의 감정으로 인정할 수가 없고, 그런 기만적인 감정의 모사품들을 정기적으로 구매하는 행위를 취미 생활로 인정 할 수도 없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이상론이다. 무감동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무지의 벽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나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어쩌면 평생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 한 채 다만 과정에 머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쉽지 않은 과정에 기꺼이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야말로 끊임없이 창작을 거듭해온 예술가들에 대한 예의이며, 사실상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는 진정한 취미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즐거움은 현란한 수사어로 장식된 예술가의 이름에 있지 않고, 좋은 자리를 점하기 위해 쏟아 부은 티켓 값에 있지 않으며, 애써 상상으로 그린 하룻밤의 낭만 속에 있지 않다. 더욱이 내가 진정으로 느끼지 못 한 바를 꾸며 쓰느라 애처롭게 늘어져버린 감상문 속에는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즐거움이 있다면, 겸허하게 나의 무지를 인정하여 내가 모르는 무한히 넓은 영역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스스로 이해해보고자 기울이는 서툴지만 진지한 노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을 결실로 선사한다. 주의 깊고 세심한 관찰은 피곤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가만히 넋 놓고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건져 내준다.

첼리스트 장한나. 그녀에게 쏟아지는 갖가지 찬사는 내게 별 의미가 없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부풀려졌다거나 칭찬 일색인 리뷰가 못 마땅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위대함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 위대함을 직접 느끼고 싶을 뿐이다. 이때에, 프로그램 북에 인용된 노(老) 대가들의 거창한 칭찬은 별 도움이 안 된다. 미리 계획했던 기립박수를 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무엇에게 그토록 열렬한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무엇에 환호해야 할까?

토요일 저녁, 지난 성남시향 연주회 때의 악몽을 되살리기 싫어서, 이번에는 양재역을 거쳐 남부터미널역으로 간 다음 버스를 타는 길을 택했다. 연주회 시작 30분전쯤 콘서트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비에서는 1,000원짜리 프로그램 북과 함께 장한나의 리코딩을 팔고 있었다. 가격은 한 장에 14,000원이었는데, 프로그램 북과 함께 구입하면 포스터를 증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이런 상술에 잘 넘어가주는 편이다. 그러나 판매중인 CD는 대중들의 입맛을 고려했는지 소품집이거나 유명 첼로 협주곡들의 일부 악장들만 모아놓은 것으로 별로 구매욕을 자극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CD와 증정용 포스터는 포기하고, 프로그램 북만 하나 달랑 구입하여 연주회장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1층 C블록 11열 5번. 무대와 너무 가깝지 않으면서도 연주자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자리다. 연주회장은 만원이었다. 합창석 자리에도 관객들이 앉아 있었다. 과연 장한나란 이름이 갖는 관객 동원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저녁 8시. 연주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객석 쪽 조명이 어두워졌다. 무대 쪽 천정에서 내려오는 밝은 빛은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단상 위에 놓인 빈 의자를 비추고 있었다. 이윽고 무대 왼쪽의 연주자 출입구가 열리고, 오늘의 주인공 첼리스트 장한나와 피아니스트 피닌 콜린즈가 등장했다(물론 반주자의 악보를 넘겨줄 넘순이도 함께).

장한나는, 벌써 기억이 모호하지만 짙은 회색 톤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 손으로 들고 나온 첼로는 각봉이 끝까지 뽑혀 있었는데, 그 길이가 장한나의 키와 비슷해 보였다. 키는 작았지만, 왜소해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단단해 보였다. 한편 피아니스트 피닌 콜린즈는 매우 늘씬한 미남이었다.

연주회 첫 곡은 슈만의 피아노와 호른을 위한 아다지오와 알레그로Adagio and Allegro for Piano and Horn Ab Major, Op.70이었다. 이 곡은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본래 피아노와 호른의 듀오로 연주되는 곡이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호른 부분을 다른 악기가 맡아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평소 슈만의 곡들과 친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더군다나 호른 레퍼토리라니, 존재조차 몰랐던 곡이다. 인터넷에서 확인한 프로그램에는 이 곡이 빠져있어서, 미리 예습 할 기회도 없었다.

연주회장에서 처음 만나는 곡이 신선한 즐거움으로만 다가오면 좋겠지만, 내 경우엔 사실 잘 모르는 곡의 선율은 귀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망각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곡을 들으면서 뒷부분을 예측할 수도 없기 때문에, 곡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진다. 그러니까 종종 딴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다. 그래도 곡을 들으면서 문득 든 매우 즉각적인 생각은, “이걸 호른더러 불라고 작곡했단 거야?”란 것이었다. 물론 난 호른을 불어 본 경험은 없다. 하마터면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니라 호른 연주자로 들어갈 뻔했지만, 아무튼 그 운명은 나를 빗겨갔다. 그래도 호른이 불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첼로로 연주하는 것이 테크닉을 구사하기에는 호른보다 훨씬 유리하겠지만, 그래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알레그로 부분에서는 스트로크로 강렬하게 연주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과연 호른으로도 이런 강렬함이 표현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호른 레퍼토리는 거의 모르지만, 언젠가 세브란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호른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러 간 일이 있었는데, 호른은 독주 악기로 쓰이기에는 좀 밋밋하다고 느꼈다. 물론 아마추어의 연주에다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었으니까 더욱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슈만의 곡이 서곡 역할을 해주어, 들떴던 마음도 차분히 정리되고 연주에 집중할 자세가 갖추어졌다. 연주회장에 늦게 도착하여 미처 입장하지 못 했던 사람들도 첫 곡이 끝난 틈에 들어와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오늘의 본 공연이 시작되었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1번과 2번. 어제는 분당에 첫눈이 내렸다. 첫눈은 겨울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다. 벌써 가을은 저만치 물러가고 있지만, 브람스의 음악은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향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공한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1번은 애수로 가득 차 있다. 3개의 악장이 모두 단조로 작곡되어 있어서 한층 쓸쓸한 정취를 풍기는 것 같다. 첼로는 낮은 음역에서 때로는 읊조리는 듯이, 때로는 애달프게 노래하는 듯이 자기 목소리로 감정을 담아 표현한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첼로 소나타 1번의 1악장은 브람스의 여러 음악들 중에서도 특히 첼로가 노래를 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첼로와 피아노의 대위법적인 진행은 참 아름답다. 음악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솔로 악기와 피아노로 구성된 듀오 소나타는 편성이 단출해서인지 비교적 음악의 짜임을 파악하는 것이 쉽다.

이날 첼로의 음색과 피아노의 음색이 잘 어우러졌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에는 피아노의 소리가 조금 먹먹했다. 첼로가 단호하게 베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니까 피아노도 좀 더 단단한 소리가 났으면 좋았을 텐데, 약간 뭉글했다. 연주자의 터치가 그런 소리를 낸 것 같지는 않고, 피아노 자체의 소리가 좀 멍한 편이었던 같다. 대위법을 잘 구사한 브람스고, 3악장은 아예 푸가로 작곡되었으니까 첼로가 선율을 연주하면 피아노가 모방하고, 또 피아노가 선율을 연주하면 첼로가 뒤따라 모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만큼 두 악기의 음색이 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소나타 1번의 연주가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이 되었다. 인터미션 시간이면 으레 로비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해놓고 프로그램 북이라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이날은 이미 카페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그냥 자판기 커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판기는 리사이틀 홀 출입구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는데, 출입구 앞에 놓인 프로그램 북을 슬쩍 보니까 이날 같은 시각 리사이틀 홀에서는 첼로 독주회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각 9시쯤 2부 연주가 시작되었다. 장한나는 정열적인 붉은색의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고 등장했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2번. 첼로 소나타 1번과는 20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작곡된 곡. 그만큼 원숙미가 돋보인다고 해야 할까. 브람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유지되면서도, 1번 때와는 그 표현의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3악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악장이 모두 장조로 작곡되어 있는 만큼 곡의 표정은 한결 밝아진 느낌이지만, 그 속에서도 애수가 간직되어 있다.

“연주를 하는 도중 실수로 악보가 두 장 넘어갔을 때, 연주를 멈추어야 한다면 좋은 연주자가 아닙니다.”

졸탄 코다이의 말이다. 이날 장한나는 전곡을 암보로 연주했지만, 피닌 콜린즈는 악보를 보고 연주를 했다. 물론 악보를 넘겨주는 넘순이가 있었다. 넘순이는 악보를 넘기기 전, 악보를 위에서 아래로 거의 반쯤 내려 접어 연주자가 악보의 마지막 줄까지 다 볼 수 있도록 배려 한 다음 연주자의 신호를 받아 악보를 넘긴다. 그런데 1악장 연주 중의 일이었다. 넘순이가 넘기려고 접었던 악보를 놓치는 바람에, 황급히 악보를 다시 잡아서 넘기느라 그만 두 장을 넘겨버렸다. 연주는 어떻게 됐을까? 물론 피닌 콜린즈는 좋은 연주자였다. 연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고, 1악장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2악장 첼로의 피치카토는 가슴을 쳤다. 이 곡의 2악장은 결코 유약하지 않다. 장한나의 피치카토 연주는 그야말로 박력이 넘쳤다. 현을 뜯으면서 악기를 그토록 풍부하게 울릴 수 있다니, 놀랍다. 그 소리가 연주회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2악장이 끝나자 또다시 여기저기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대체 이 사람들이 연주 중에는 어떻게 기침을 참고 있었나 싶을 정도다. 연신 기침을 해대다가도 장한나가 활을 들어 올리면 신기하게도 기침을 멈춘다. 실황 연주 녹음을 들어보면 악장과 악장 사이에 기침은 세계 공통인 듯도 하지만, 때로는 이 기침 소리가 악장 사이의 눈치 없는 박수 소리보다도 더 거슬린다. 3악장은 피아노의 연주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장한나에게만 집중을 하며,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그때 갑자기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 덕분에 미처 기침을 멈추지 못 한 여러 사람 숨넘어갔다.

장한나는 액션이 큰 연주자다. 표정도 다양하다. 그만큼 음악을 온 몸으로 표현한다. 또한 장한나는 힘이 있다. 그래서 두터운 소리를 요구하는 브람스의 음악도 무리 없이 잘 연주 해 내는 것 같다. 분명한 건, 관객을 몰입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별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떠드는 짓은 삼가도록 하자. 새삼 그녀의 열정이나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몇몇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2부 프로그램이 조금 짧았기 때문에, 몇 곡의 앙코르 곡을 예상하긴 했지만, 관객들의 열광 속에 무려 다섯 곡의 앙코르 곡을 연주했다. 연주된 곡은 차례로 포레의 ‘꿈꾸고 난 후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뒝벌?)의 비행’,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 구노의 ‘아베마리아’, 그리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였다.

장한나의 첼로 스승 미샤 마이스키가 내한 중이라고 한다. 먼저 첼로 독주회를 열었고, 며칠 후에는 하이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한나는 스승님과 같은 시기에 한국에 있게 되어 기쁘다며 구노의 ‘아베마리아’ 연주를 스승님께 바치고 싶다고 했다. 왜 하필이면 구노의 ‘아베마리아’인지 모르겠다.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앙코르 곡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늘어서, 막바지에는 홀 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조’의 연주가 끝나고 연주자들이 퇴장한 후 출입문이 닫혔는데도 사람들의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실내의 조명이 환하게 밝히자 그제야 사람들은 퇴장하기 시작했다. 나도 무언가가 발산된 듯한 후련한 마음으로 콘서트홀을 빠져나왔다. 예술의 전당 정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기다란 줄에 합류했다. 첫 번째 버스를 보내고, 두 번째 버스에 겨우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강남역까지 가서, 분당으로 직행하는 버스를 탔다. 외투 주머니에는 mp3 플레이어가 들어 있었지만, 이 날은 귀갓길에 음악을 듣지 않았다. 애써 잠을 청하지도 않았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첼로의 선율이 흘렀다. 11시를 훌쩍 넘겨 분당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밤공기가 무척이나 차가웠다. 그러나 이제 저물어버린 가을에 더 이상 미련은 남지 않는다. 겨울을 맞을 준비가 된 것이다.

2009/11/23 17:06 2009/11/2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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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해지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불행해지지 않는 확실한 방법은 알고 있다. 그것은 남의 행복을 나의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하루 행복했던 사람에게는 축복을.

아침에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벌써 네 번째 레슨이다. 스케일을 먼저 체크하고, 카이저 10번, 이어서 하이든 바이올린 협주곡 2번. ‘힘차게, 애절하게, 간결하게.’ 하이든 악보 군데군데 선생님이 적어놓은 것들이다. 음악에도 표정이 있다. 그걸 몰라서 표현 못 하는 것이라면, 개선의 여지는 없어도 마음은 덜 답답할 것이다.

점심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나가 외식을 하고 왔다. 간밤에 통 잠을 못 자서 연주회 가기 전에 눈 좀 붙일 요량으로 소파에 누워 TV를 켜니, 마침 Arte TV에서 대한민국 국제음악제의 연주회를 재방송 해 주고 있었다. 음악이나 듣다가 서서히 잠들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연주곡이 오늘 저녁 성남시향 연주회 프로그램에도 들어있는 브람스의 이중협주곡이 아닌가. 원래 연주회에 가기 전에 곡을 복습(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라면 예습)하는 습관이 있어, 잘 됐다 싶어 졸음을 잠시 참고 연주를 감상했다. 협연자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게데,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였다. 오케스트라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율리우스 베르거라는 첼리스트가 사용하는 첼로, 수령이 400년도 넘은 아마티의 작품이라던가.

브람스의 이중협주곡이 끝나니, 이번에는 지난 9월 유포니아 정기 연주회 때 연주했던 베토벤의 삼중협주곡을 연주했다. 계속 보다가는 연주회장에 가서 졸 것 같아서, 적당히 볼륨을 낮춰놓고 일단 눈을 감아버렸다.

연주 시작 2시간 전쯤 집을 나섰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조금 일찍 도착하면 간단히 뭐라도 사먹을 요량이었다. 차는 버스 정류장 근처 무료 주차장에 세워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먼저 강남으로 가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서초역으로 갈지, 아니면 양재로 가서 3호선 남부터미널역으로 갈지 잠깐 고민했다. 결국 고속도로를 타는 강남역 직행 버스를 타기로 했는데, 이 선택이 잠시 후 예상치 못 했던 엄청난 결과를 몰고 왔다.

도로 사정은 이미 고속도로 상에서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일반차량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여 버스가 요금소를 빠져나와 전용 차로로 진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전용차로에 오른 뒤부터는 어느 정도 속도를 내긴 했지만, 오늘따라 버스가 많아서 여느 때처럼 빨리 달리지는 못 했다. 게다가 이따금 꽉 막힌 도로 사정에 짜증이 폭발한 일반 승용차 운전자들이 무단으로 버스 전용 차로에 진입하면서 버스의 앞길을 가로 막는 일도 생겼다.

반포 IC를 통해 강남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이미 끔찍한 정체가 시작되었다. 교보타워 앞 사거리를 돌아 신논현역 앞 정류장까지 평소라면 5분도 안 걸릴 거리를 가는데, 평소의 몇 배의 시간이 걸렸다. 이미 이 시점에서 내가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서울의 교통 혼잡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이 엄청난 낭비를 초래하는 도시 문제가 과연 언젠가 해결 될 날이 오긴 할지 의문이다. 이건 문제다. 그러나 누구나 여기에 짜증은 내면서도, 정작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래서 나는 정부 정책으로 행정 수도를 이전한다고 했을 때 쌍수를 들어서 환영을 했던 것인데, 헌재에서 관습 헌법 운운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이미 반쯤은 포기했고, 요즘 세종시를 둘러싼 유치한 논쟁을 보면서 완전히 절망했다.

강남역 인근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강남에 대체 무슨 볼거리가 있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꾸역꾸역 밀려드는지 모르겠다. 인파를 헤치고 강남역으로 걸어가, 간신히 지하철을 탔다. 그러나 여기서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다.

강남역과 예술의 전당이 가까운 서초역 사이에는 단 한 역, 교대역이 있을 뿐이다. 이동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 서초역에 도착해 출구에서 버스를 잡아타면, 적어도 연주회 시작 10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있었다. 배고픈 것은 인터미션 때 로비의 카페에서 케이크라도 한 조각 사먹으면 달랠 수 있을 터. 교통이 혼잡했지만, 지각을 면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이제 막 교대역에서 승객을 태운 열차가 다시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차례 열차의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출입문 닫겠습니다.”란 기장의 안내방송. 다시 닫히는 문. 그러나 이내 문이 다시 열렸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다시 한 번 방송. 그러나 또 닫혔다 열리는 문.

“승객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열차는 현재 출입문 고장으로 잠시 정차하고 있습니다. 조치 후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뭐든지 꼬이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강남에서 서초까지 고작 두 정거장 가는데, 하필이면 그 사이에서 열차가 고장 날 게 뭐란 말인가? 처음에는 금방 고치겠지, 했는데 5분, 10분이 지나도 열차는 출발할 생각을 안 했다. 연주회 시작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표정이 일그러지고 나도 모르는 새에 주먹을 꽉 쥐기도 했다. 가끔은 정말 있는 힘껏 발로 땅을 구르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짜증이 솟구치기 마련이다.

열차는 15분가량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열차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도로 사정은 이쪽도 별로 좋지 않았다. 첫 프로그램인 ‘대학축전서곡’은 물 건너 간 것이 확실했다. 이제는 두 번째 프로그램 전에만 입장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할 판이었다.

콘서트홀에 도착했을 때, 홀 안에는 대학축전서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서둘러 현장매표소에 가서 티켓을 구매했다. 프로그램 일부를 놓쳤지만, 그래도 R석 괜찮은 자리의 표를 샀다. 일단 화장실에 들러 땀을 좀 닦아내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로비에서 역시 지각한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입장을 기다렸다. 금방 대학축전서곡이 끝났다. 직원은 티켓에 적힌 좌석과는 상관없이 일단 가까운 빈자리로 안내를 해주었다.

다행히 협주곡을 놓치지 않아서 안도했지만, 숨 가쁘게 온 터에다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1악장 연주 때는 연주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악장 안단테가 시작되자 차분한 주제 선율에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첫 머리의 호른이 약간 불안한 것 같았지만, 무난하게 넘어갔다). 아름다운 선율을 고음부의 바이올린과 저음부의 첼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참으로 평온하게 느껴졌다. 연주회장까지 오면서 쌓인 짜증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이날의 협연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아와 첼리스트 송영훈. 송영훈은 자주 본다.

그리고 3악장. 아마 브람스의 이중협주곡 중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악장일 것이다. 시작부터 첼로가 경쾌한 주제 선율을 연주한다. 이것을 곧바로 바이올린이 받고, 이어서 전체 관현악이 포르티시모로 연주하는데, 관객들로부터 최고의 몰입을 이끌어 낸다.

입구에서 공짜로 나눠준 프로그램 북은 공짜인 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곡 해설은 책의 것을 그대로 베꼈거나 혹은 개인 일기장에나 적어두는 게 어울릴 만큼 주관적인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이 곡을 작곡할 때 브람스는 솔리스트들의 기량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고 되어있다. 이 곡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텐데, 아마 브람스가 너무 어렵게 곡을 써놔서 마치 당시의 연주자들의 기량이나 한계 따위는 아랑곳 않은 듯 여겨진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곡은 연주에 고도의 기교를 필요로 해서, 솔리스트들 개개인에게 높은 역량이 요구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뛰어난 연주자들이 워낙 많으니. 이것도 프로그램 북에 적혀있던 내용이지만,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아는 뉴욕 콘서트 리뷰로부터 “정교하고 화려한 테크닉, 맑고 영롱한 소리, 깊고 넓은 음역, 열정적이면서도 담백한 연주 스타일, 바이올리니스트로 최상의 기량과 미덕을 갖춘 연주자”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화려한데 정교하고, 열정적이지만 담백하며, 깊은데다가 넓기까지 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하지만 분명 솔리스트들의 연주는 훌륭했다. 다만 워낙 힘에 넘치는 대곡이고, 또 협주곡을 쓸 때에도 항상 오케스트라 부분을 탄탄하게 작곡해 놓는 브람스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바이올린의 경우에 프로젝션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던 건 있다.

이중협주곡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객석에서 휴대폰이 한 차례 울렸다. 그리고 1악장이 끝난 뒤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주회장 안에서 휴대폰을 꺼놓아야 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부주의에 의한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악장 사이에 박수는 좀 더 미묘한 문제다. 아마추어 연주회 때에는 별다른 주의가 없으면 십중팔구 악장 사이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지난 번 삼성필 연주회 때는 브람스 4번 1악장이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가 나오려는 것을 지휘자가 객석을 향해 손을 내저어 제지한 바 있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은 하나의 에티켓으로 여겨지지만, 이것은 물론 강제적인 사항은 아니다. 또 어떤 곡들은 정말 마음껏 박수를 쳐보라는 식으로 1악장을 끝맺는다. 가령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이 끝났을 때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악장이 연주 될 동안 어떤 감정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라는 것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는 것은 무식한 행동’이라고 정의 해 버리면 간단히 끝날 일이겠지만, 오페라의 훌륭한 아리아가 끝나면 그 감동을 당장 표현하기 위해 열렬한 박수를 치는 것처럼, 종종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는 것도 허용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악장 사이의 박수보다도 이때다 하고 터져 나오는 기침이나, 마지막 악장 마지막 음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아는 체하고 브라보를 외치는 따위의 행동이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터미션 시간에는 로비의 카페에서 치즈 케이크 한 조각과 카페라테를 사서 일단 허기를 달랬다.

오늘 연주회는 브람스 스페셜로 구성되었다. 첫 프로그램인 대학축전서곡은 놓쳐버렸지만, 그렇더라도 이중협주곡과 메인 곡인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이다. 특히 오늘 성남시향의 연주로 듣는 브람스 4번에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는 국내 시향들의 연주를 직접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은 경험은 별로 없지만, 매일 같이 클래식 연주회 장면을 방송해주는 고마운 Arte TV를 통해 국내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향들의 연주를 다 감상했다. 이건 나의 솔직한 감상인데, 요즘 국내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것 같다. 과거의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듣는 바에 따르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시향조차 오늘날의 영광을 상상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정말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들을 만한 연주’를 들려준다.

매년 봄이면 전국의 시향들이 총출동하여 ‘교향악 축제’를 여는데, 각 시향들이 서로의 역량을 비교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2003년에 생긴 성남 시향도 지금까지 세 차례 교향악 축제에 참가하였다. 자기 고장에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것은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다. 앞으로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겠다.

브람스 4번.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 전체적인 짜임새도 정말 훌륭하지만, 2악장이 너무나 아름다운 곡. 이 2악장은 시작과 함께 호른과 목관이 주제 선율을 연주해 나간다. 그 사이에 현은 피치카토로 반주를 한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 프로 오케스트라를 비교하면 그 차이점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현악기의 ‘피치카토’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있어 피치카토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만일 ‘시간’을 x축에 놓고, 그 위에 현악기로 연주되는 음의 길이를 표시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다란 선분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피치카토는 시간 축 위에 점을 찍는 것이다. 연주 되는 음의 길이가 충분히 길면, 설령 첫 머리에 연주자들 간에 호흡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나중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소리로 모이게 된다. 그러나 피치카토 주법으로 연주 할 때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 한 번 소리가 어긋나면 시간 축 위에 무수한 점이 찍히게 된다. 그러면 정말 참아줄 수 없는 지저분한 소리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연주자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추어 연주자라면 누구라도 피치카토 부분에서는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혼자 엉뚱한 박자에 소리를 내면, 피치카토 부분에서는 너무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위험부담을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지저분한 소리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소리가 사라져버린다.

의미 없는 음표는 한 개도 쓰지 않는 브람스다. 반주는 화성을 채워주고, 소리를 두텁게 하며, 긴장감을 유지시켜주고, 주제 선율을 돋보이게 한다. 이 반주가 무너졌을 때, 연주는 맥이 없어지고 흐물흐물 거리며, 무게 중심 없이 그저 부유하게 되어버린다.

탄탄한 소리와 팽팽한 긴장감 끝에 아름다운 현악기의 소리로 주제 선율이 변주되어 연주될 때, 비로소 감상자는 감동으로 살짝 눈시울을 붉힐 수 있는 것이다.

앙코르 곡은 예상했던 대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었다. 다행히 5번은 아니고, 1번을 들려줬다. 브람스가 꼭 가을에만 어울리는 작곡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을이면 브람스의 곡을 많이 찾는 건 분명하다. 이제 겨울을 바라보는 늦가을, 브람스와 함께한 저녁은 즐거웠다.

2009/11/12 05:32 2009/11/12 0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