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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 전

휴일도 아니고 근무 오프도 아닌 평일. 여느 때라면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10시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출장 2일차. 오늘은 서울에서 일이 있다. 26일부터 시작되는 공군전우회 주관 한일교류 행사 통역 업무에 대비해서 사전 업무 협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도록, 말러 2번 3악장을 크게 틀어놓았다.

1층으로 내려가 냉장고 문을 여니, 지난 일요일에 사온 맥도날드 머핀이 그대로 남아있다. 차가운 머핀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작년 여름 맥도날드에서 받아 온 커다란 콜라 컵에 어름을 가득 채우고 콜라를 따랐다. 가사 도와주는 아주머니를 아주 오랜만에 봤다.

12시 반, 최대한 말쑥한 느낌으로 차려입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한낮의 도로는 대체로 한산했다. 그러나 서울 도심으로 갈수록 교통 사정은 좀 복잡해졌다. 대방동 공군회관에 도착하니, 이곳 역시 정문에서 헌병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증을 받았다.

4층 공군전우회 사무실 문을 두드리기 전 충주의 선임에게 전화 한 통을 넣었다. 선임은, 일이 일찍 끝나거든 충주로 내려와서 사무실에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라고 했지만, 저녁 7시 반 연주회를 예약해 놓은 상태라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일단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은 해 두었다.

사전 협의는 20분 만에 어이없으리만큼 빨리 끝나버렸다. 너무 빨리 끝나서 어쩌면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그쪽에서는 상관 안 할 테니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시간이 너무 남아서, 최근에 국내 개봉했다는 노다메 칸타빌레 극장판이라도 볼까 싶어 가까운 영등포 롯데시네마를 찾았지만, 낮 시간에는 상영 스케줄이 없었다. 결국 다시 차를 몰고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세종문화회관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으니 오후 4시였다. 그제야 나는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업무가 끝났다는 보고를 올렸다. 기왕이니 서점도 들르고 저녁도 해결하고 천천히 출발하겠다는 얘기도 했다. 일단 이것으로 행동에 제약은 없어졌다. 광화문 교보문고로 갔다. 연주회 시작 전까지 무료함을 달래 줄 소설책도 한 권 사고, 좀 이른 저녁도 먹었다. 그 뒤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 옆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소설책을 읽었다. 연주회에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15분 정도 눈을 붙이기도 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스테판 피 재키브,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회. 원래 이 연주회를 볼 수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임지 배속을 받은 후, 평일에는 꼼짝없이 충주에 갇혀 지내야 했다. 8월 한 달 동안이야 매일 같이 야근을 했으니 더욱 그랬지만, 비교적 정시 퇴근을 보장 받은 9월에도 평일 저녁 서울로 올라가 공연을 보는 건 근무 오프라도 받지 않는 한 불가능한 얘기였다. 나는 주말 저녁 열리는 저렴한 연주회들을 찾아다니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데 런던필의 공연일인 9월 16일, 출장 의뢰가 들어왔다. 아니, 실은 그 언저리 평일 아무 때나 골라 가면 되는 것이었지만, 내가 16일로 확정지었다. 15일 수원 출장과 함께 처리하면 편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출장지는 서울, 업무가 일찍 끝나면 그대도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가 런던필과 스테판 재키브의 협연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위험 부담은 있었지만, S석 자리를 예매 해 두었다(R석은 매진이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었다. 16일 출장 허락을 받았고, 업무는 일찍 끝났다. 일이 일찍 끝나거든 사무실로 돌아와 얼굴이라도 비추라는 지시는 적당한 얼버무림으로 넘겼다.

연주회

연주회 시작 30분 전에 세종홀로 들어갔다. 로비에서 주차권부터 샀다. 공연관람객에게 한해서 7시간 주차권을 5천원에 판매하고 있다. 이 주차권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10분에 500원씩의 주차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프로그램북을 구입하면서 같은 테이블에 진열 해 놓고 팔고 있는 리코딩을 봤는데, 용재 오닐은 <노래>라는 타이틀로 또 다른 소품집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스테판 재키브의 앨범은 이미 구입한 브람스 소나타 앨범이었다.

내가 예매한 자리는 2층 D블럭 143번 석. 솔리스트들의 생생한 표정이나 연주를 감상하거나 그들의 소리를 듣기에는 그리 좋은 자린 아니었지만, 오케스트라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또 홀을 가득 채우는 사운드를 듣기에는 괜찮은 자리였다.

모차르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그들은 참 즐겁게 연주를 했다. 스테판 피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은 마치 실내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먼발치에서도 그들의 표정이 생생히 읽히는 듯 했다. 스테판의 2악장 연주는 기대했던 것만큼 멋졌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바이올린의 소리를 넉넉하게 받쳐준 비올라의 연주도 훌륭했다. 아직 젊은 만큼, 주위의 다른 것들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자신들의 시간을 음악을 위해 온전히 할애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배타성이 그들로 하여금 음악을 순수하게 연주하게 하며, 오직 음악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터득하도록 하고 있는 것인 모양이다.

고전파 협주곡답게 곡은 오케스트라의 긴 제시부 연주로 시작된다. 여느 협주곡이라면 이 때 솔리스트들이 손 놓고 쉬고 있겠지만, 이 협주곡은 다르다. 두 사람은 각각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의 선율을 함께 연주했다. 3악장에서도 보통의 경우 솔리스트의 부분이 끝나면 오케스트라가 종결구를 연주하며 곡을 끝맺지만, 이때도 두 솔리스트는 마무리까지 함께 연주했다. 생각해보면 솔리스트가 주인공인 협주곡인데, 오케스트라만 덩그러니 종결구를 연주하고 곡을 끝맺는 것은 어딘가 민망하다.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매우 좋아하지만, 3악장은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모차르트 특유의 유쾌하고 발랄한 느낌이 묻어나는 1악장에 이어, 너무나 강렬한 인상의 2악장이 연주된 뒤에 이어지는 3악장은, 어딘가 1악장의 재탕 같고 개성이 없이 밋밋한 느낌이다. 2악장에서 한껏 고조된 감정이, 3악장에서 전환되고 발산되었다면 좋을 텐데, 뭔가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선택을 앞두고는 그냥 옆길로 새버린 느낌이랄까. 그래도 두 솔리스트의 훌륭한 앙상블을 끝까지 관람하는 것만으로 흡족한 연주였다.

차이코프스키 5번

좋은 연주라는 것은 어떤 연주일까.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즐거운 연주’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어떤 연주가 즐거운 연주인가 하면, 일단 연주자들이 즐겁게 연주해야 한다. 나는 이따금 국내 오케스트라들의 연주에서, 마치 내가 사무 보듯 그저 직업적, 기계적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놀랍지만 솔리스트 중에도 그런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문 연주자에게 항상 감상자의 수준을 뛰어넘는 열정과 지적 수준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주회장을 찾는 관객은, 분명 연주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음악과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연주자의 맥없고 사무적인 태도로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관객이 그토록 동경하는 세계에 앉아있으면, 프로는 설령 그것이 자신의 밥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더라도 관객이 기대하는 바에 맞춰 열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케스트라 구석구석을 눈여겨 보다보면, 연주회의 기분을 완전히 망치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 사람들의 연주가 아름다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할 수 없다.

악장부터 맨 뒷자리의 연주자까지, 적어도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만큼은 음악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다는 듯한 적극적인 태도. 그것은 연주회를 관람하는 관객에게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연주회에 빠져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먼저 연주자들이 그런 기회를 제공할 마음자세가 갖추어져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런던필의 클라리넷 연주자. 마치 메트로놈처럼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온 몸으로 연주를 했다. 머리가 희어진, 나이 지극한 바이올리니스트는 풍채는 거의 지휘자급이었는데, 그저 음악이 너무 좋다는 어린애 같은 천진한 태도로 연주를 했다. 플루트의 음색은 반짝였다. 금관 쪽에서는 큰 실수가 한 번 있었다(트럼펫인지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의욕이 앞선 결과였을 뿐이다.

자신들의 연주를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또 보여주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굉장히 피곤한 일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연주자들에게서 순간을 즐기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자연히 관객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1악장의 연주는 상당히 템포가 빨랐다. 클라리넷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악장인데, 연주자의 액션이 정말 컸다.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온몸으로 표현 해 주는 게 결코 나쁘지 않다고 본다. 2층의 먼 객석에서도 연주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2악장의 호른 솔로는 너무 아름다웠고, 한 바탕 운명의 동기가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에 이어진 바이올린의 노래는 황홀했다.

4악장 알레그로 비바체에서는 내 귀가 틀리지 않았다면 한 차례 큰 실수가 있었는데, 금관 쪽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빰’이 들렸던 것이다. 실수는, 곡에 대한 집중도를 한 순간 완전히 깨뜨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기본이 잘 갖추어진 탄탄한 연주에서라면 한 번의 실수 정도는 연주회의 전체적인 만족도를 크게 저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가슴속에서 찌릿하는 전율을 느끼며, 무언가 격렬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연주회였다.

앙코르 곡으로는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세레나데 2악장 왈츠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3악장을 연주했다. 메인이 교향곡 5번이었는데, 4번의 한 악장을 통째로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것은 의외였지만, 4번의 3악장은 길이도 5분 남짓으로 짧을 뿐만 아니라 현악기군 전체가 활을 내려놓고 피치카토로만 연주하는 대단히 재미있는 악장이라 앙코르 연주로서 효과는 만점이었다.

연주회 후

응어리져 있던 것을 후련하게 발산하고, 개운한 상태에서 연주회장을 빠져나왔다. 멋진 저녁.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빼려는데, 출구 쪽으로 길게 늘어선 차들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있었다. 15분가량을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차를 다시 주차시켜놓고 연주회 전에 사둔 소설책을 들고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세종문화회관 로비는 아직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슬쩍 보니 스테판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이 사인회를 열고 있었다. 나는 두 연주자의 사인은 일전에 받아 두었으므로, 대기열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심야까지 영업을 하는 커피 빈에 들어가 티라미스 케이크 한 조각과 바닐라 라테 한 잔을 주문해서 소설책을 읽으며 먹었다. 11시 반이 다 되어서야 주차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도 서울 시내에는 많은 차들이 돌아다녀서 예상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었지만, 이 날 만큼은 짜증이 나지 않았다. 플레이 리스트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 5, 6번을 올려놓고 재생시켰다. 느긋하게 주유를 하고, 혼잡한 서울 시내를 인내심을 가지고 빠져나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내일은 다시 출근.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 이 꿈같은 하루는, 그 반복적인 하루하루와의 부대낌을 몇 달은 더 지속할 수 있는 활기를 부여해 주었다.

2010/09/19 22:54 2010/09/1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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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관련하여 기억하고 있는 연도(年度)는 둘. 하나는 1797년. 남자라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따위의 멋들어진 대사를 내뱉으며 한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버리는 불굴의 무인에 대한 동경을 품는 바보 같은 시기를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하면 인간이 되는 거고, 그렇지 못 하면 짐승이 되는 거지. 그건 그렇고, 나폴레옹이 왜 알프스 산맥을 넘었는지, 사람들은 관심이나 있나?

나는 ‘나폴레옹 멋져’란 생각 때문에 이 연도를 외우고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1797년은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해도 아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방면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은 그 전 일이니까 처음 알프스를 넘은 것은 1797년 이전일 것이고, 저 유명한 일화는 오스트리아와의 전투를 위해 한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을 때의 일이라니까 좀 더 후의 일일 것이다.

1797년은, 바로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킨 해이다. 이로써 1200년 존속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진부한 표현을 빌자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때 유럽 제일이었던 국가의 부와 젊은이들의 피를 바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파상 공격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까지 생존했던 이 국가는, 결국 유럽 국가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산 마르코 광장을 보고서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고 평할 줄 알았던 나폴레옹이, ‘바다와의 결혼식’ 행사 때 베네치아 통령이 타던 선박인 ‘부르키엘로’는 호화롭다고 바다 위에서 불살라버렸다. 참고로 이 부르키엘로의 아주 작은 모형이, 이탈리아 해군 기지인 아르세날레 남쪽에 위치한 해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혹 베네치아에 관광 가는 사람이 있거든, 한 번 쯤 들러보라.

나폴레옹과 관련하여 기억하고 있는 또 하나의 연도는 1812년으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해이다. 사실 이 사이에 나폴레옹의 대관식도 있고 한데……. 이 1812년이라는 해를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다음에 소개할 곡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1840-1893)


차이코프스키 작곡 ‘1812년 서곡’ 작품 번호 49번.

‘1880년에 작곡된 이 장대한 오케스트라 곡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에 대한 러시아 군의 승리를 묘사한 것으로써 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를 병치시켜 양국 군대의 치열한 전투와 러시아 군의 최종적 승리를 생생하게 그려낸…….’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나? 그런데 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도 구분 못 하는 애들한테 러시아적인 선율이 어쩌고 해도 사실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란 말이다. 결국 실제 대포를 가져와 펑펑 쏴대고, 교회 종을 울려가며 연주했다더라 하는 ‘일화’ 정도나 기억하면 아는 척 거들먹거릴 수 있단 얘기지.

사실 이 곡은 정말 단순하고 유치하다. 하지만 이 곡에는, 정치적 선전이라는 의도도 어느 정도 들어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순하고 노골적이고 유치한 것만큼’ 이에 효과적인 것도 없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작부터 ‘아 차이코프스키’란 느낌의 선율이 연주되다가, 잠시 암울한 분위기가 지배하더니, 요란한 대포 소리와 함께 힘찬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선율이 연주된다. 그러다가 마치 러시아의 민족의 각성을 암시하는 듯한 서정적인 선율이 연주되더니, 이번에는 프랑스 군의 고전을 암시하는 듯 라 마르세예즈가 조각조각 해체되어 삽입된다. 마지막에는 러시아의 국가 ‘신이시여 차르를 구하소서’의 주제가 힘차게 연주되는 가운데, 승리의 팡파르로 장식된다.

혹시 여기 삽입된 멜로디가 러시아 국가가 맞는지 확인 해 보겠다고, 러시아 국가 찾아 듣는 짓은 하지 말기를. 차이코프스키 시대의 국가가 현대 러시아 국가랑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 재밌는 것은, 정작 전투가 벌어졌던 1812년엔 러시아에 국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러시아 국가는 1815년에 처음 지정되었는데, 차이코프스키의 시대에는 ‘신이시여 차르를 구하소서’가 1833년부터 새로 국가로 지정되어 불리고 있었다. 이후 소련 시대에 국가가 무려 네 차례나 바뀌었고, 소련이 해체된 직후인 1991년에 국가를 새로 정했으나, 2000년 푸틴 대통령 때 다시 한 번 바뀌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도, 분명 혁명기 때부터 널리 불렸으나 국가로 지정된 것은, 1812년 서곡이 작곡되기 불과 1년 전인 1879년이었다. 그 힘차면서도 호탕한 선율 때문에 사랑받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섬뜩하기 그지없다. 이를테면 ‘놈들의 더러운 피를 밭에다가 뿌리자’라든가…….

곡만 들으면 러시아 군의 통쾌한 승리가 연상된다. 그러나 어디 러시아 군이 이렇게 칭송할만한 기념적인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던가……. 사실 이 곡이 묘사하고 있는 ‘보르디노 전투’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맞닥뜨려 서로 비슷비슷한 피해를 입고 결국 결판을 내지 못 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쿠투조프가 퇴군을 하는 바람에 결국 나폴레옹이 모스크바까지 진격하게 됐으니, 이 싸움이 어디 이렇게 웅장한 음악으로 치장할 만하냔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사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 하고, 겨우 상대방의 실수로 목숨을 건져 ‘평화 조약’을 맺는 것으로 체면치레 했으나, 이집트 전역에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찬란하다 못 해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용의 기념 부조들로 자아도취의 향연을 펼쳐놨으니, 후대 사람들은 그를 정녕 위대한 승리자요, 이집트의 자주적 혼이라 여기지 않는가.

다섯 권짜리 ‘전쟁과 평화’로 읽는 것보다도 이렇게 15분 정도의 음악으로 듣는 이야기가 뇌리에 더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이다. 정치 선전이란 ‘단순하고 노골적이고 유치해야’하며, ‘반복적’일수록 효과가 좋다.

하지만 곡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을까, 정작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이 쓴 이 곡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 현명한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들의 두뇌에 가장 직접적이고 위력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들을 혐오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우리들은, 그저 예술 작품의 하나로서 감상하면 될 것이다.

바로 이 곡이, 유포니아의 가을 정기 연주회 서곡이며, 나는 제1 바이올린 주자로서 연주하게 된다.

2009/07/21 04:15 2009/07/21 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