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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Oil on Canvas 94.8 x 74.8cm
Kunsthalle, Hamburg

카스파르는 독일 출신의 낭만파 화가로, 낭만파 화가들 중에서 들라크루아나 고야만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웬만한 서양미술사 개설서에는 대개 이름을 올리고 있을 만큼 중요성을 인정받는 화가이다. 그리고 위의 그림이 흔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 일컬어지는, 카스파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낭만주의(Romanticism)’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특히 하나의 예술 사조로서 ‘낭만파 미술’이 지니는 본질이 무엇인지 늘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낭만주의 이전의 시대, 그러니까 중세는 물론이고 르네상스 시대나 바로크 시대의 미술작품 전반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식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림의 주제, 구도, 색체, 빛의 활용, 필법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낭만주의의 본질은 이런 양식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양식’의 이면에는 그것을 낳은 ‘철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낭만주의의 본질은 보다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그렇다면 낭만주의의 본질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지배한 ‘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인간의 역사에서 언제나 아폴론의 질서와 디오니소스의 광분이 번갈아 등장했던 것처럼, ‘혁명’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낳은 계몽주의는 다름 아닌 그 혁명 이후로 사람들에게서 환멸을 샀으며, 시대는 순리에 따라 감정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살았던 많은 예술가들은 계몽주의가 낳은 세상을 결국 정신의 공동(空洞)쯤으로 보았고, 자아에 대한 탐색에 들어갔다. 합리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했으며, 어떤 이상에 대해서 그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다만 동경하는 쪽을 택했다. 대체로 이정도가, 우리가 낭만주의 시대의 지배적 분위기였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설령 낭만주의 시대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가지고 바라보더라도, 이 시대에 활약한 화가들, 이를테면 고야, 제리코, 들라크루아, 터너, 블레이크, 컨스터블, 카스파르의 작업이 하나의 통일된 정신 아래에서 수행된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화가들은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확연히 개개인의 화가들에 대한 개별적인 접근, 특히 화가의 개성적인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를 관람자에게 요청하고 있는 듯 생각된다. 한때 우첼로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그림의 탁월한 원근법에 주목 해 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카스파르가 관람자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어떤 특별한 기법에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바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결국 카스파르의 그림에서 남는 것은 ‘분위기’다.

카스파르는 풍경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는 종교적 상징이 가득하며, 많은 경우에 그의 그림은 신비주의적 분위기에 치우쳐 있다. 만일 그의 그림이 그의 사상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카스파르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때로는 신과 동일한 위치에 놓이는 위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무력감과 철저한 고독을 곱씹은 사람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카스파르의 그림 속 풍경은 아름답기보다는 무거우며, 설령 사물이 캔버스를 빼곡히 채우고 있더라도 그 안에는 적요(寂寥)함만이 가득하다. 카스파르의 풍경화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사람이 등장할 때는 대체로 위대한 자연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그려진다. 압도적인 자연과 나약하고 고립된 인간의 대비가 외경심과 숭고미를 자아낸다는 것이, 카스파르의 화풍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그런데 정작 카스파르를 대변하는 그림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어떤가? 풀 한 포기 없는 거친 암반을 딛고 서서, 한 남자가 안개에 휩싸인 풍경을 굽어보고 있다. 봉우리들만 간신히 안개를 뚫고 나와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을 뿐, 안개에 가린 바위 골짜기가 얼마나 깊은지, 산맥이 얼마나 광활히 뻗어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분명 이 그림에는 적요함이 감돌고, 가슴 아릴 정도의 고독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카스파르의 여느 그림보다 크게 그려진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을 중심에 배치한 구도, 무엇보다도 풍경을 굽어다보는 시점 묘사 때문일까, 이 그림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다만 티끌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무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그림에서는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서도 체념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어떤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것은 이 그림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요, 카스파르의 정신세계에 대한 완전한 곡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림이 카스파르의 그 어떤 그림보다도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사랑받는 까닭은, 그 오해의 여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Frei Aber Einsam.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낭만주의 시대의 또 다른 예술가 그룹이 모토로 삼았던 이 말을 떠올리고는 한다.

그들은 말했다. 예술가의 삶이란 자유롭지만 고독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결국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이 아니겠느냐고.

2009/11/11 04:20 2009/11/11 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