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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쉴 틈도 허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이따금 손에서 책을 내려놓으면, 쓸데없는 상념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입맛이 없다. 그러나 때가 되면 허기가 진다.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입으로 가져간다. 마음이 밝았더라면 모래알을 씹어 먹어도 더 맛있으리라.

체련의 날이었다. 백 수 십 명에 이르는 부(部)의 인원을 전부 호출하여 연병장에서 축구를 시켰다. 나는 그런 미친 짓에 참여할 마음도, 구경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도서관으로 갔다. 어제 공자의 생애를 본 것에 이어 오늘은 학이(學而)편을 공부했다.

머리를 짧게 깎았다. 오늘은 레슨이 있는 날이었기에, 연습실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며 바이올린을 켰다. 악기에서 쇠가 긁히는 듯한 이음이 들린다. 아무래도 현을 갈 때가 된 것 같다. 연습량에 비하면 악기 관리에 너무 소홀했던 듯싶다.

바흐의 사라방드를 중심으로 레슨을 받았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온통 화음으로 이루어진 이 난곡을 연습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선생님은 내게 음정이 정말 정확해졌다며 이제 어느 정도 귀가 트인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조만간 날을 잡고 유학 상담을 받기로 했다.

복싱을 배우는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여자들도 많다. 아마 연예인들의 복싱 다이어트가 불러온 바람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은 오래 지속하지 못 하고 그만 둔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대단히 인상적인 여성 한 명이 보였다. 운동을 꽤 오래한 듯 실력이 뛰어났는데, 며칠 전에는 생활인체육대회에 출전하기도 했고, 지금은 프로 입단 테스트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신분이 군인이다. 계급도 중위다. 게다가 연세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공통점이 많은 사람과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지라, 조만간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2012/07/12 00:52 2012/07/1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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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젠가 이런 일이 다시 한 번 있을 것이라고, 그대는 예감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생은 짧지 않고, 그대는 아직 젊었으니까. 7월의 강렬한 햇살에 그대의 명랑하던 낯빛이 쇠하여 우울해지고, 걸어갈 수 있을 것처럼 평평한 수면 아래로 거세게 휘도는 소용돌이를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가 오늘 목을 맬 나뭇가지를 찾아 떠나면 사람들은 내일에 가서야 그대에게 심병(心病)이 있었음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그대 인생의 방관자를 한 사람 세워두고서 그대 가슴을 갈라 병든 마음을 꺼내 하늘 높이 쳐들고 미친 듯이 춤을 추어라. 이윽고 다 짓물러 악취 나는 그것을 내 발 아래에 내려놓고서, 그대는 때마침 내리는 비에 차갑게 식어가는 저 땅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나는 한 장의 흰 종이가 되어, 그대가 버리고 간 것을 감싸 함께 불타버리리라.

2.

어제 주문한 논어 한 질이 도착했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가 도올 김용옥 교수에게서 얻어다 준 ‘도올 논어’의 속지에는, 교수님 친필로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논어는 최소한 백독은 해야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백독은커녕 삼독도 하지 못 했다. 게다가 이렇게 한 구절 한 구절을 원문으로 읽어 나가는 시도는 처음이다. 오늘 받은 책 첫 머리에는 공자의 생애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말로만 떠들다가, 너무 자주 떠든 나머지 결국에는 자기가 정말 그런 사람이고, 그런 일을 했다고 믿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가슴에 품고 죽은 웅대한 꿈으로 평가 받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오직 실천을 통해 무언가를 이룰 수 있고, 그 업적을 가지고서만 평가를 받는다. 날카로운 역사의 펜 끝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실한 사람뿐!

2012/07/11 01:27 2012/07/11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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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민사에『논어』 한 질을 주문했다. 지난번에는 실수로 구결현토가 없는 책을 주문했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백문으로 된 책을 주문했다. 굳이 구결토가 없는 백문으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역서 등을 참조하며 구결토를 직접 달아보는 것도 많은 공부가 된다. 이제 겨우 『대학』 한 권을 떼었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적지 않은 문장들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튼 오늘부터는 도서관에서 대학 복습과 함께 논어 예습에 들어갔다. 물론 중국어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는 사무실에서 눈치보고 뭐하고 할 여유도 없다. 나는 당당하게 책을 펴놓고 아주 집중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

오늘은 바이올린 연습, 복싱 대신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었다. 두부조림과 깻잎절임. 내일 메인 반찬을 만들기 위해 고등어도 사왔다. 어쨌든 좀 넉넉한 기간을 두고 먹을 수 있는 깻잎절임을 만들어 놔서 마음이 놓인다. 가뜩이나 날씨도 더워서 음식 보관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장아찌 종류의 음식을 몇 가지 더 만들어 놔야겠다.

내일부터는 다시 도서관, 연습실, 체육관의 패턴으로 돌아갈 것 같다.

2012/07/10 00:36 2012/07/1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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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초, 당시 교환학생으로서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나는 겨울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했다. 이 때 평생 일본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는 오케스트라 친구 고토도 함께 데리고 들어왔다. 고토에게 생애 첫 해외여행의 기회를 제공 해 주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철저하게 무계획적인 여행이었고, 더군다나 당시에는 나 자신이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이탈리아보다도 아는 게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여행은 그날그날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좀 미련스런 여행이 되어버렸다(여행 첫 날의 코스는 연세대학교와 실탄 사격장이었다).

그래도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반드시 그 나라의 유명한 박물관은 꼭 가봐야 한다는 나의 신조에 따라, 하루는 고토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막상 박물관에 도착하니, 상설전시 외에 특별전시로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 루브르 박물관전’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애 첫 해외여행을 하는 고토에게 한국의 문화와 미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 미술품들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한글도 읽을 줄도 모르는 고토에게 “너는 상설전시를 보고 와, 나는 특별전시를 보고 올 테니.”라는 말을 하고 말았고, 결국은 고개를 젓는 고토를 데리고 같이 ‘루브르전’을 관람하게 되었다.

고토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나는 그곳에 내걸려 있는 회화들을 감상하며 내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해 고토에게 열심히 해설을 해 주었다. 지금 와서는 그때 어떤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전시회 메인 작품으로 선전되었던 프랑수와 제라르의 ‘에로스와 푸쉬케’나 외젠 들라크루아의 ‘성난 메데이아’, 그리고 부셰의 ‘목욕하는 다이아나’ 같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 몇 점은 기억이 난다. 특히 낭만파 화가 중에서는 드물게 좋아하는 들라크루아의 작품 앞에서는 그 거친 붓 터치를 감상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약 5년여의 시간이 흘렀는데, 요즘 다시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루브르 박물관전’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주제를 선정하여, 관련 작품들을 모았다고 한다. 사실 지난 2007년도의 전시회는 통일된 주제 없이 이 작가 저 작가의 그림들을 가져다 놓아 결과적으로 어지러운 ‘B급 회화들의 집합’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그에 비해서 이렇게 명료한 주제를 제시 해 놓으면 각 예술품을 창작한 작가의 명성에 구애받는 것도 덜하고, 무엇보다 관람에도 확실한 맥이 생긴다.

게다가 그리스 로마 신화다.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제 ‘아르센 뤼팽 전집’이나 ‘셜록 홈즈 명작선’ 같은 추리 소설에서도 졸업 할 때라면서, “진짜 독서를 시작해라”라며 부모님이 사준 책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였다. 대학 시절에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밤을 새워가며 읽기도 했다. 또 중학생 이래로 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을 동경했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를 특히 사랑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르네상스가 가장 찬란하게 꽃피웠던 예술 분야인 미술(회화, 조각,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내가 주로 읽던 책들은 역사책 아니면 서양 미술에 대한 교양서적들이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축약본으로나마 구해 읽은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가면 하루 온종일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보낼 정도로 회화나 조형 미술을 감상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서양의 미술사에서 성서의 이야기와 더불어 가장 많이 작품화 된 소재이다. 내가 ‘단군 신화’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더 친숙하게 느낀다고 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살짝 구름이 낮게 깔린 일요일 오후,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각오하고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으로 향했다. 관람객이 너무 많으면 순차 입장 방식으로 입장 인원을 통제한다고 들어서 걱정했지만 다행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대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입구 근처에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 주는 곳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오디오 가이드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도 나와 있어서 이미 그걸 다운 받은 우리는 그 긴 대기줄에 합류 할 필요가 없었다.

입장 자체는 원활했지만 막상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동행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떠밀리듯 관람하는 것이 싫다며 전시장 끝에서부터 관람을 하자고 제안했다. 초반부에는 미술품 하나하나를 잡아먹을 듯 감상하던 사람들도 전시 후반부가 되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설렁설렁 보고 지나가는 것인지, 확실히 뒤로 갈수록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이런 방법도 나쁘지는 않지만, 만약 전시장이 심하게 붐비지 않거나 뭇 사람들 틈에 끼인 채라도 전시물과 마주할 때는 온전히 일대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감상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면, 가급적 전시회장 입구부터 출구까지 순차적으로 관람하기를 권장한다. 살펴보니 이번 전시회는 기획자가 나름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서 신화의 서사적 구조에 따라 미술품들을 전시했다. 전시회 자체가 하나의 서사시가 된 셈이다. 그러니 뒤에서부터 관람을 하면 서사시를 뒤에서부터 읽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전시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기획자의 의도를 잘 이해할 기회는 잃는 셈이다.

1. 혼돈의 시대와 올림포스의 탄생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손잡이 두 개가 목 부분에 마치 귀(耳)처럼 달려있는, 적회식의 암포라가 눈에 들어온다. 표면에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인 거인족들과 올림포스의 신들 간의 전쟁, 이른바 ‘기간토마키아’가 묘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쪽만 뚫어져라 살피지 말고,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거기에는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인 제우스가,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번개를 집어 던지려고 하는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우스가 자유자제로 다루었던 번개와 권위를 상징하는 왕홀은 제우스의 상징이다. 또 제우스는 종종 그를 상징하는 동물인 독수리와 함께 그려진다. 이처럼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 속에는 묘사되어 있는 신이 누군가를 알려주는 상징적 도상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예비지식이 있다면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안타깝게도 너무 간략한 설명만 제공하는 오디오 가이드에는 이런 중요한 감상 포인트들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다. 오디오 가이드보다는 내가 훨씬 더 알찬 설명을 해줄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

2. 올림포스의 신들

안타깝게도 천지창조나 기간토마키아 같은 매력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은 더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이야기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안에서도 서사(序詞)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들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올림포스 신들이 인간들과 얽히면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다룬 것들이다. 전시회의 두 번째 코너에서는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을 하나씩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고대와 근대의 작가들을 통해 묘사된 신들의 모습은 저마다 개성이 넘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 신을 상징하는 도상들은 항상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의 시선을 잡아 끈 작품은 프랑수아 뤼드의 조각 두 점이었다. 청동으로 제작된, 아주 크지는 않은 규모의 조각은 내 취향에 잘 들어맞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은 바르젤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나텔로의 역작, 청동 다비드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다비드보다도 애정이 간다.

프랑수아 뤼드作 헤르메스


조각과 회화 사이의 우월논쟁은 고래로부터의 해묵은 논쟁거리인데,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내 경우, 지금껏 보아온 작품의 수는 회화 쪽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가슴을 더 뜨겁게 달구어놓은 작품은 대개 조각이었다. 평면 위에 그려지는 회화는 표현할 수 없는 입체감, 근육의 꿈틀거림까지 느껴지는 것만 같은 섬세함, 무엇보다도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 속에 정지시켜놓은 듯한, 역동성과 영속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조각의 매력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에 특히 프랑수아 뤼드의 작품 ‘신발을 고쳐 신는 헤르메스’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제 막 비행을 위해 도약하려는 듯, 몸은 솟구쳐 오르고 있다. 특히 카두케우스를 든 왼손은 하늘을 향해 쭉 뻗어있다. 펄럭거리는 망토는 벌써 바람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순간, 헤르메스는 절묘하게 몸을 틀어 오른 손으로 날개 달린 샌들을 고쳐 신는다. 그야말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한 정지’의 상태에 가두어 놓은, 긴장감 넘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참고로 헤르메스는 올림포스 신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전령으로 활동한 신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비롯한 신화집 속에서 가장 활달하면서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신이다. 전령의 신일뿐만 아니라, 나그네와 상인, 심지어 도둑들의 신이기까지 했던 헤르메스는, 역시 관장하는 영역이 넓은 만큼 예술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며, 대체로 젊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헤르메스를 상징하는 도상은 몇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날개가 달린 샌들과 두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지팡이 카두케우스다. 날개 달린 샌들은 물론 발 빠른 전령이었던 헤르메스의 능력을 상징한다. 카두케우스는 헤르메스뿐만 아니라 아폴론, 이스클레이피오스의 지물이기도 한데, 아폴론과 이스클레이피오스가 모두 의술의 신이었던 까닭으로 오늘날에는 서로 몸을 꼰 채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이 의료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신화 속에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지만 헤라의 질투로 눈 백 개 달린 괴물 ‘아르고스’의 감시를 받게 된 이오를 구하기 위해서 헤르메스가 활약하는 이야기에서, 아르고스를 이 지팡이로 두드려서 잠재우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본 작품에서도 잘 살펴보면, 헤르메스의 발밑에 놓여있는 아르고스의 잘린 머리를 확인할 수 있다.

뤼드의 또 다른 작품인 ‘헤베’는, 아마도 제우스가 변신한 듯한 독수리가 자신과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 헤베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헤르메스와 비교하면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신들과 관련된 작품이 한두 점 소개되고 있는 것에 비해, 어떤 신은 탄생부터 성장까지의 이야기를 여러 작품들을 통해 시간적 순서에 따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특히 바쿠스는 이번 코너에서 꽤 비중이 높게 다루어지고 있는 신이다. 바쿠스는 올림푸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였던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원래는 온전한 신이 아니라 반신(半神)이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세멜레가 바쿠스를 아직 잉태하고 있을 때에,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를 눈치 챈 헤라가 세멜레를 벌하기 위해 계략을 쓴다. 헤라는 세멜레의 유모로 변신하여 그녀 앞에 나타나, 당신을 매일 찾아오는 그 남자가 정말 제우스신인지, 또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으니 증명을 위해 신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 것을 요구해 보라고 부추긴다. 헤라의 꼬임에 넘어간 세멜레는 베갯머리에서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맹세하는 제우스를 향해 본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조른다. 신조차도 맹세를 깰 수는 없었기에, 제우스는 이것이 세멜레를 죽음으로 이끌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본래의 모습인 번개로 변신하고,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이가 발하는 빛에 타 죽는다. 세멜레는 재가 되어버렸지만 그 안에서 신의 기운을 받은 바쿠스가 아직 죽지 않고 발견되었다. 제우스는 바쿠스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가르고 그 안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바쿠스를 넣어 자신의 몸 안에서 기른다. 완전한 신인 제우스의 몸 안에서 성장하고 태어난 덕분에 바쿠스는 반신이 아닌 온전한 신이 될 수 있었다.

바쿠스가 다시 제우스로부터 태어나자, 제우스는 헤라의 눈을 피해 바쿠스를 니사 산의 님프들에게 맡겼다. 그곳은 님프들, 사티로스들, 푸토(아기 모습의 요정)들이 늘 잔치를 벌이는 향락적인 곳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바쿠스는 향락의 신이 되었고, 포도주를 발명했다. 훗날 바쿠스는 낙소스 섬에서 테세우스에게 버림 받은 아리아드네와 만나 결혼했다. 향락의 신으로 손꼽히는 바쿠스지만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의 아내는 아리아드네 한 사람 뿐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은 이날 전시회에도 한 점이 전시되어 있고, 역사상 많은 예술가들이 다루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티치아노가 그린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

참고로 바쿠스를 상징하는 도상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포도넝쿨이며, 그를 상징하는 동물은 표범이다. 또 바쿠스는 혼자서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고 항상 님프, 사티로스, 푸토들을 잔뜩 거느린 채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날 전시회에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성대하고 떠들썩한 결혼식 장면을 대단히 화려하게 묘사한 은제 물병도 전시되어 있다.

3. 신들의 사랑

전시회 세 번째 주제는 사랑이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그 주제처럼 달콤한 분위기를 띄고 있지는 않다. 사실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사랑은, 행복뿐만이 아니라 고통과 다툼, 증오, 심지어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코너에는 제우스의 사랑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이오, 또 그 미모로 인해 제우스에게 납치당한 미소년 가니메데스,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군신 아레스의 질투를 받아 목숨을 잃은 아도니스, 원치 않는 사랑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청해 월계수로 변해버린 다프네 등 사랑으로 인해 비극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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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폴로作 아폴론과 다프네


이 중에서도 특히 티에폴로가 그린 ‘아폴론과 다프네’는 눈길을 끈다. 아폴론에게 잡힌 다프네가 손끝에서부터 점차 월계수로 변해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폴론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역력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아폴론이 사랑의 신 에로스를 경솔하게 놀린 사건에서 비롯됐다.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다. 그는 금촉이 달린 화살을 쏘아 사람들을 맹목적인 사랑에 빠뜨린다. 하지만 때로는 납촉으로 된 화살을 쏘아 사랑이 아닌 증오로 마음을 물들여버리기도 한다. 어느 날 아폴론은 활을 매고 다니는 에로스를 보고 말했다. “애송이야, 활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단다. 활은, 무엇이든 쏘아 잡을 수 있는 나 같은 신에게 어울리지.” 그러자 기분이 상한 에로스가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의 화살은 아무 것이나 다 맞힐 수 있겠지만, 내 화살은 바로 당신을 맞힐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높이 날아올라 아폴론을 겨눠 금촉의 화살을 쏘고, 다프네를 향하여 납촉의 화살을 쏘았다. 아폴론은 그 즉시 다프네를 향한 맹렬한 사랑에 빠졌지만, 다프네는 반대로 아폴론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둘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되풀이하게 되었다는데, 결국 아폴론은 어느 날 다프네를 잡는 데에 성공하지만, 다프네는 그 순간 아버지에게 소원을 빌어 스스로 월계수가 되어버렸다. 이후 아폴론은 언제나 월계수로 자신을 치장하고 다녔다고 한다. 참고로 월계수는 하프와 함께 태양과 음악의 신 아폴론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자주 등장한다.

4. 고대 신화속의 영웅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태초의 혼돈과 신들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그 묘사의 대상이 올림포스의 신들로부터 반신, 그리고 인간들에게로 옮겨간다. 이번 전시회도 이런 서사적 구조에 충실히 따라, 후반부에는 신들이 아닌 인간들의 이야기들을 다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번 코너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야기는 바로 트로이 전쟁이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이 둘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부모) 때 초대 받지 못 한 불화의 여신이,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 사과를 결혼식장에 보낸다. 각자 자신의 아름다움이 최고라 여겼던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는 이 사과의 소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였고, 결국 이 셋은 판결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이 세 여신은 각자 파리스를 회유하기 위해 보상을 제시했는데, 헤라는 높은 지위를, 아테네는 최고의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약속했다. 결국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파리스의 짝으로 구해주지만, 그녀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결혼한 유부녀, 헬레네였다. 파리스가 헬레네를 몰래 납치하여 고국인 트로이로 도망간 것에서 그리스 국가들과 트로이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바로 이 트로이 전쟁을, 전쟁 10년째에 접어든 시점에서부터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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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제라르作 다프니스와 클로에


2007년도에 루브르 전에서는 프랑수아 제라르의 작품 ‘에로스와 푸시케’가 광고 전단에 실리더니, 이번에도 그의 작품이 광고 전면에 실렸다. 바로 ‘다프니스와 클로에’다. 이 작품 역시 4번 코너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사실 이번 전시회의 주된 맥락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로 느껴진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서기 2~3세기 무렵에 그리스 작가 롱고스가 지은 소설이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모두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였는데, 한 목장 주인이 이 두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다. 둘은 성장하면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온갖 역경을 겪게 되는데, 결국은 둘 모두 부모도 찾고 사랑도 이루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작곡가 라벨은, 이 소설을 주제로 대단히 아름다운 발레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림은 다프니스의 무릎에 살며시 기대 잠든 클로에와, 그녀의 머리 위에 화관을 씌워주려는 듯 보이는 다프니스의 모습을 너무나도 평화롭게 잘 묘사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통틀어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장 고요하고 온화하게 표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전시회의 마지막 코너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 주제들을 모티프로 하여 새롭게 창작된 신화적 이야기들을 다룬 작품 몇 개를 보여주는데, 전시회의 전체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에 크게 의미 있는 시도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번 전시회에는 비록 루브르의 명성을 실감하게 하는 명성 높은 작가들의 수작이 잔뜩 온 것은 아니지만, 카라바조, 와토, 부셰, 티에폴로, 자크 루이 다비드 등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화가들의 작품도 몇 점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관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서 전시회를 짜임새 있게 기획했기 때문에, 감상의 맥을 잡기가 쉽다. 딱히 서양 미술에 대한 애호가 없더라도, 어린 시절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그 신화 속 이야기들을 시각화 한 작품들 통해 옛 기억을 되살려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인파, 빈약한 오디오 해설 등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예비지식이 완비된 식견 있는 감상자라면 이런 것들을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2012/07/08 18:35 2012/07/0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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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대학(大學)』 수업이 끝났다. 다음 시간부터는 『논어(論語)』를 시작하게 된다. 틀에 박힌 일상을 살면서도 나의 세계는 끊임없이 넓어지고 있다. 말로만 멋진 인생을 사는 척 떠드는 인간들을 보며, 삶은 치장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삶은 없다.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2012/07/06 01:21 2012/07/06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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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뇌출혈이다.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지신 이후론 간병인들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요양원에서 생활 해 오고 계셨지만, 밤중에 일어난 일이어서 그 누구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아침에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곧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이미 머릿속에 피가 고여 있는 상태라고 한다. 연세가 많아 수술은 어렵고 약물 치료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 해 주는 의사는 없었던 모양이다.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크게 앓으신 이후로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며 점차로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기에, 이번 일은 내게 충격이라기보다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물론 아직은 현실감이 없기에 이렇게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막상 중환자실에 의식을 잃고 누워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다면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2009년 초에, 중병을 겨우 이겨내고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하신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그해 2월, 할아버지와 함께 일주일 동안 홋카이도에서부터 큐슈까지, 일본 열도를 종단하는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할아버지는 홋카이도 상공에서 눈 덮인 산하를 보는 순간부터 눈이 많이 내렸던 북녘의 자기 고향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호텔에 들어가 함께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누우면 잠들기 전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얘기를 들려주셨다. 자신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그렇게 자세하게 들려주신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그때 이미 자신의 생을 정리하기 시작하며, 자기 삶의 기억 중 일부라도 손자에게 전달 해 주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나대로, 그것을 할아버지와의 이별 여행으로 받아들였다. 홋카이도의 최북단 항구 마을에서 얼어붙은 오호츠크 해를 신기하게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그 쓸쓸한 바다와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어딘가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았고, 그래서 서글펐다. 그때 나는 어쩌면 눈물을 흘렸던 것 같기도 하다.

여행은 기어코 술을 계속 마셔야겠다는 할아버지와 맥주 한 캔 이상은 안 된다는 손자 사이의 잦은 다툼의 연속이었지만,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 홋카이도에서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눈 터널을 뚫고 달리는 기차를 탔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니이가타 현을 지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향으로 일본어를 배운 손자가 대학 시절 1년을 보낸 오사카를 거쳐 무탈하게 이어졌고, 큐슈의 후쿠오카에 이르러 끝이 났다.

나는 어디에서나 밝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며,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고, 또 집안에 내가 존경하고 본받을 만한 어른들이 계셨던 덕분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직접 말씀 드린 적은 없지만, 아마 할아버지는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하신다면, 그때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직접 말씀 드리고 싶다.

“당신께서는 제게 행복한 삶을 선물 해 주셨습니다. 제가 할아버지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결실이 될 수 있도록, 제 인생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안심하고 따라 걸을 수 있는 발자국

2012/06/29 02:03 2012/06/29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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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련활동으로 등산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게 내 일과에 두 개의 구멍을 냈는데, 도서관에 가지 못 했고, 복싱도 하지 못 했다. 그래도 바이올린 레슨은 받았다.

6개월 째 붙잡고 있는 브루흐는 브루흐대로 놔두고, 새로운 곡 하나를 시작했다. 바흐의 무반주 중 파르티타 1번의 사라반드다. 중음 연주가 대단히 많은 어려운 곡. 다행히 템포는 느리다. 올 연말에 선생님 제자 콘서트에서 곡 하나 연주하기로 했는데, 무슨 곡을 연주할지 아직 미정이다. 이대로 브루흐를 밀고 나갈 수도 있겠지만, 사라반드 같은 느린 곡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쨌든 내 한계에 도전하는 무대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뭐 연주 자체야 이번에도 초등학생들 틈바구니에 껴서 하게 되겠지만…….

나도 바이올린 음악의 성서라 불리는 바흐의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악보를 한 권 가지고 있다. SCHOTT 출판사에서 펴낸 악보인데, 편집과 핑거링 지정을 한 것은 셰링이다. 그 옛날, 바이올린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셰링의 연주에 반해버렸던 나였기에, 셰링의 에디션이 아닌 다른 에디션을 구입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지, 셰링이 이렇게 변태적인 인간인줄. 선생님이 연주하기 쉽도록 핑거링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줬다. 연습 또 연습.

약간 탈진 상태다.

2012/06/27 23:47 2012/06/2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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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당신도 그렇겠지. 반듯한 인간은 남에게 관계나 애정을 구걸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보라, 저 화목한 가정을. 그 옛날 그리스의 한 철학자가 인간의 삶의 목적으로 제시했던 것, ‘행복’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가? 한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할 때에 행복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두 사람이 서로의 행복을 위해 함께 노력함으로써 더욱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가능하다면 더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남에게 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할 것을 요구하지 말고, 나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제물로 삼지도 말아야 한다. 행복은 시간을 두고 키우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굵어져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지만, 그 최초의 싹은 매우 연약하다. 하지만 고통이 촉발하는 불행은 담쟁이처럼 빨리 자라고 모든 것을 덮어서 이내 질식시켜버린다. 그러니 어느 한 사람에게 불편부당한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관계는 지속하면 안 된다.

누군가가 내게 이로운 사람이라면, 나 역시 그에게 이로운 사람일 것이다. 이것은 같은 양(量)을 주고받는 계산적인 관계가 아니다. 공통의 밭을 일구며 함께 소출을 늘려가는 것이다. 마음의 밭이 황량한 사람, 그래서 누군가를 그 안으로 받아들여 함께 경작할 여지가 없는 사람과는 오래 같이 할 수 없다.

2012/06/27 01:58 2012/06/27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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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대전시립교향악단 공식 홈페이지의 악단 소개 코너에 게재되어 있는 것이다. 대개 어떤 단체든 그들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 페이지에는 해당 조직의 설립 취지나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윗글에서 비록 ‘비전’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으나 아마도 이 자못 장대한 기상이 느껴지는 글은, 대전시향이 스스로 설정한 비전이며, 정체성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전시향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조직과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바람직한 구상이다. 비전이 너무 구체적일 필요는 없지만(어떤 기업도 매출 100억 달성! 따위의 목표를 그들의 ‘비전’으로 삼지는 않는다), 조직원들이 애써 달성하고자 하는 어떤 목표를 넌지시 암시하고는 있어야 한다. 요는 그저 좋은 말들을 모조리 가져다 나열한다고 해서 좋은 비전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심지어 위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미래에 대한 방향 제시라기보다는 이미 달성한 과업의 선전에 가깝다. 이런 훌륭한 치적과 실력을 가지고서 시민 사회에 기여하는 놀라운 오케스트라를 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내 고장에 있는 오케스트라라고 하니 감격에 겨워 허파에 바람이 찰 지경이다.

내가 지금까지 세 번의 연주회를 감상하면서 이 조직에 대해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평균적인 실력을 가진 월급쟁이 음악가들의 집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오케스트라’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을 매우 딱딱한 태도로 대하는 샐러리맨들에게 부정적 함의를 담아 ‘직업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바로 그 직업적 태도를 대전시향의 연주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엔터테인먼트를 제공(이건 그들이 주장하는 비전 중의 하나이다)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가서 일을 하고 내려간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사무 공간에 불려가 그들이 일과 중에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나오는 것이다. 아니 대체 내가 왜?

이건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고 많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사실을 적시(摘示)하자면 한국의 연주자들은 대체로 지성이 부족하다. 나는 그들에게 ‘연주란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을 때 ‘뭐긴 뭐야, 밥벌이 수단이지!’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두렵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을까? 그 곡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껴본 적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연주로 관객들에게 곡을 이해시키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느끼는 인간의 속성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시인 보들레르는 어린 소년과 예술가의 공통점은 바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소년의 감수성과 예술가의 감수성은 분명 다른 것이다. 소년의 감수성은 무엇에든 쉽게 자극을 받고 과잉 정서를 생산 해 내며 종종 그 감정 과잉 상태에 중독되는 감상주의에 빠져들지만, 예술가의 감수성은 훨씬 분별력이 있어서 아무 것에나 감동 받지 않고, 또 절제 없이 과잉된 감정들을 배설해내지도 않는다. 이런 감수성이야말로 진정한 ‘심미적 감수성’인데, 심미적 감수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감성(感性)보다는 지성(知性)의 역할이다.

내가 볼 때에 단원들에게는 심미적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심미적 감수성을 잉태할 ‘지성’이라는 모태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결여된 개인들의 집합은 양몰이 개의 짖음에 따라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는 양떼와 비슷하다. 목동은 그들을 잘 몰아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도 나오게 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지휘자가 긴장의 끊을 놓지 않을 때에만 의도대로 움직이며, 도무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다.

윗글에 언급된 것처럼 이 연주 단체가 수차례 해외 연주와 서울 연주를 통해 국내외의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면서도 유독 자기 고장 안에서 나 같은 일개 시민에게 이토록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해외 순회공연이나 서울 공연처럼 많은 전문가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중요한 연주가 아닌, 본고장의 어수룩한 시민들 앞에서 하는 연주회에서는 너무 쉽게 긴장을 놓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휘자도, 양몰이 개도 신경을 덜 쓰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는 양떼는 질서를 잃고 멋대로 움직인다. 나는 이 연주 단체가 보다 잘 연주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세 번의 연주회 동안 내 앞에서 그 역량을 다 발휘해서 보여준 적이 없다. 어디에서 얼마나 훌륭한 연주를 하고 무슨 칭찬을 들었든, 나는 오직 내 귀에 들리는 연주만으로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이 단체에게 무슨 충고를 한다 한들, 그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고장의 오케스트라에 대한 한 가닥 실 같은 애정 때문에 몇 마디 하자면, 우선 단원 개개인들에게 전혀 접수되지 않는 저 거창한 비전은 집어치우고, “대전의 어린이들이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기를 꿈꾸게 해 줄 수 있는 시향” 같은 소박하지만 확실히 각인되는 비전을 세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무슨 해외파/유학파 출신의 실력 있는 인재를 고용하거나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기량을 향상시키는 것을 도모할 게 아니라, 단원들에게 음악 영화와 작곡가들의 전기, 음악을 주제로 한 소설 같은 것을 보라고 권하길 바란다. 단원들이 음악의 진정한 가치와 연주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면, 양몰이 개의 윽박지름 없이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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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향을 비판하는 글을 너무 길게 써버려서, 연주 자체에 대한 평은 간략히 줄이고자 한다.

1부에서는 브람스의 곡만 두 곡이 연주되었는데, 어지간하면 국내 오케스트라는 브람스를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마 위에서 두부 썰듯 하는 브람스 연주는 듣기에 괴로운 수준을 넘어서 가슴이 참 아프다. 음악의 구간구간을 레터로 나눈다면, A 다음에 B, B 다음에 C 하는 식으로 순서대로 소리만 낸다고 ‘연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 파트간의 밸런스, 한 프레이즈 안에서 자신의 역할, 프레이즈와 프레이즈의 연결 같은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앙상블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래서야 교향곡에서도 실내악 같은 앙상블을 구현한 브람스의 음악을 어떻게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세세한 부분은 더 지적하지 않겠다.

2부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1부의 곡들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3악장 스케르초가 너무 산만했던 것을 제외하면, 1, 2, 4악장은 연습한 흔적이 꽤 보였고, 2악장 연주 때는 앙상블에도 주의하는 것이 느껴졌다(동행한 지인은 ‘여기다’하는 부분에서만 너무 호흡이 잘 맞아서 오히려 웃겼다고 했다). 최소한 이 정도의 집중력을 연주회 내내 고르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은 위에서 길게 썼으니 반복하지 않겠다.

2012/06/26 00:52 2012/06/26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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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운명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을 자극하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평생을 통해 견지해온 삶의 태도는, 그런 말장난에 휩쓸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서관에 나가 꾸준히 공부하겠다고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에도 꾸준히 도서관에 나가 공부를 하는 사람은 나 혼자다. 이런 게 내 삶의 방식이다. 나의 심미적 감수성은 변덕보다는 꾸준함을, 운명보다는 성실함을 더 아름답다고 여긴다.

내가 스스로 성실한 인간임을 자부할 수 있는 한, 긍지를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홀로 서있다.

2012/06/21 01:32 2012/06/21 0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