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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두 동강 나도 나는 내 할 일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늘이 두 동강 나는 일은 없었다. 오직 내 마음이 두 동강 날 수 있을 뿐.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아니요, 바람도 아니요, 오직 그대의 마음이나니.”

그래도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혼자 세상 살아가는 거 아니니, 무슨 일에도 요란은 떨지 않으련다. 정신 수양을 위해, 대학교 1학년 때 살며시 집어 들었다가 거칠게 집어던진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세계사적 성찰’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보니 수 년 전에 내가 왜 ‘입문’ 챕터에서 책을 집어던졌는지 기억났다.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부르크하르트가 원래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쓰는 사람인가?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는 이 정도로 난해하진 않았는데! 번역이 이상한 건가? 하긴 서문에다가 자신의 수년 전 번역은 중도 해임을 당한 황당함으로 급히 내놓은 거라 개판이었고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 해 몇 년 만에 다시 수정 운운 하는 걸로 봐서 역자가 보통 똘아이는 아닌 것 같다. 무엇에서 해임 당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교수나 강사였겠지. 학문을 하는 사람이 해임 당했다고 황당함과 분노에 눈이 멀어 명저를 개판으로 번역해놓고 그걸 출판까지 했다니(혹은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다니), 이제 와 무슨 애프터서비스를 어떻게 한다고 해도 사양이다. 젠장 서문 정도는 읽어보고 구입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 아니다. 문제는 부르크하르트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이름은 까먹은 역자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내게 있는 것이나니. 주자의 사서집주를 해독하는 그 집중력과 탐구심을 가지고서 국문을 꼼꼼하게 해체해서 읽으면, 난해하게 번역된 칸트의 개떡 같은 도덕론도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더냐. 그저 지금 내게는 그 정도의 집중력이 없는 게지.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그래 그렇다.

2012/06/18 01:01 2012/06/18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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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수필

게으름을 찬양할 줄 아는 사람은 사실 전혀 게으르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게으름’이란 뭇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가치나 기준에 초연하여서 자기중심을 확고하게 잡고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여유’를 일컫는다. 이런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성실하지만 결코 바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마라톤은 종종 공통의 목적지를 향해 모두가 우르르 달려가는 ‘경기’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목적지를 두고서 달리기를 하면 당연히 순위가 매겨질 수밖에 없다. 패자에게도 박수를 쳐주는 것이 올림픽 정신이기는 하지만, 금, 은, 동메달 수상자만이 시상대에 오르고, 그 중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에게만 월계관이 씌워지는 것이 또한 올림픽의 실체다. 이런 경쟁 속에 자신을 내맡겨버린 사람은 이번 마라톤에서 헉헉대며 뛰고 나서 아무런 소득이 없으면 또 다른 마라톤에 참여한다. 또 늘 숨 가쁘게 뛰어다니는 자신을 무척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며, 게으름을, 정확히는 ‘게으름을 찬양하는 사람’을 몹시도 증오한다. 그리고 72등을 한 사람은 98등인 사람에게는 우월감을 느끼면서 56등인 사람 앞에서는 열등감에 사로잡힌다.

메이저급 마라톤 대회는 매년 세계 도처에서 열리고, 올림픽도 4년에 한 번씩은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여기에서 순위 경쟁, 저기에서 순위 경쟁 하며 그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골인 지점을 향해 쉼 없이 뛰는 몇 번의 마라톤을 반복하다 결국 진짜 자기 인생의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실제로는 단 한 번뿐이었던 그 마라톤의 성적은 누가, 어떻게 매겨준단 말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관계’에 집착하다 그것에 매몰되어 신세를 망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식에게 훌륭한 부모이고, 자기 배우자에게 훌륭한 남편이자 부인이며, 자기 부모에게 훌륭한 자식이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관계가 부모와 나, 나와 배우자, 나와 자식 간의 직접적인 소통으로서만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집단 속에서 자신의 등수를 확인해야만 자존감을 느끼는 불행한 마라톤 선수들은, 반드시 소박하고 직접적이어야만 하는 이런 관계들마저도 한없이 집단적인 관계로 가져가버린다. ‘훌륭한 엄마’는 ‘학교운영위원장 김 여사보다 훌륭한 엄마’가 되고, ‘훌륭한 남편’은 ‘고등학교 동창 의사 남편보다 훌륭한 남편’이 되고, ‘훌륭한 아들’은 ‘같은 반 똘똘이보다 훌륭한 아들’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비교 평가에 눈이 멀어버리면 정작 관계의 본질을 못 보게 된다.

물론 언제나 경쟁에서 앞서는 빛나는 존재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의 어깨까지 으쓱거리게 만든다. 반에서 성적 1등을 하는 자식을 둔 부모는, 학부모 모임에 나갈 때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하지만 세월이 흘러 부모가 80대가 되고 자식의 또나이가 50줄을 넘었을 때에도 그 옛날 중, 고등학생 시절 반 등수가 자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남아있을까? 물론 그 자식이 여전히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앞서나가고 있고, 사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부모는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설에도 아들로부터 바빠서 못 올 것 같다는 전화를 받거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을 한자로 적을 줄도 모르는 손자, 손녀들의 모습을 본다면, 가슴에 스미는 그 고통이 자식의 화려한 성공으로 보상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때쯤에는 자녀가 여전히 건강하고, 인격적으로 흠결 없이 곧고, 그리고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다른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평생을 함께 산 부부에게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일까.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그 사실 한 가지 아닐까. 또 자식에게 부모는, 나를 낳아주었고 길러주었고 내가 따라 걸을 수 있을만한 모범적인 족적을 남겨주었다면, 그것으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족한 것이다.

어려서는 몇 등짜리 자식이 되기 위해, 사랑하면서는 몇 등짜리 배우자가 되기 위해, 부모가 되어서는 몇 등짜리 부모가 되기 위해 달리기 경쟁하는 짓은 그만두자.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등수를 매긴다는 것이다. 서로 등수가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묶였다는 생각은 고통의 근원이다. 또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과 나 자신, 그리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등수를 매겨 비교하는 것은 열등감과 질시, 허세와 분쟁의 씨앗이다.

보라.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오직 양자일 뿐이다. 오직 둘 뿐인 관계에서 등수를 매길 수 있는가? 지금 눈앞에 있는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을 졸지에 56등짜리로 만들어버리지 말자. 소중한 존재 앞에서 나는 1등이 아니라, 유일무이(唯一無二)다.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가치를 한없이 떨어뜨리는 그런 존재들은 지워버리자. 진짜 인생의 마라톤에서는, 나와 똑같은 목표를 향해 나보다 앞서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반전

2012/06/15 01:50 2012/06/15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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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긴 휴가의 여파가 남아있었지만 오늘로써 일상으로 완벽하게 복귀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012/06/13 00:49 2012/06/13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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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고통 속에서 끝날 뻔한 하루였다. 마지막에 겨우 한 줄기 희망을 찾아 끌어안고 잠자리에 든다. 아, 마음의 노곤함이여.
2012/06/12 00:44 2012/06/12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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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누군가를 위하고 싶다면, 먼저 그 사람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덧붙임

2012/06/08 01:17 2012/06/0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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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한마디

지식의 지평을 넓히려 하지 않고 오직 알고 있는 것만을 지극히 하려 한다면 위태로워진다. 그것은 마치 충분히 넓은 토대를 마련하지 않고 그저 높이 쌓아올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탑을 세우는 것과 같다.

2012/05/30 00:21 2012/05/3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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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or : Ian Bostridge

Piano : Julius Drake
 
Recording Date : March, 1996, at No.1 studio, in Abbey Road of London

가사

2012/05/29 00:42 2012/05/2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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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너를 위해 쓰고 여유가 되거든 세상을 위해서도 쓰겠다.
2012/05/21 01:59 2012/05/21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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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지지하는 것에 대해 가장 날 선 비판을 하는 것이야말로 지성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지.

2012/05/16 00:26 2012/05/1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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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일기장

통역도 무사히 끝나고, 토요일에는 오랜만에 학교를 찾아가 유포니아 멤버들과 함께 연주도 했다. 물론 나는 당일 악보를 받고 초견으로 연주한 거라 사실 연주라기보다는 자리 채우기에 가까웠지만.

이제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2012/05/14 00:47 2012/05/14 0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