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후쿠자와 유키치_학문의 권장 제6편, 제7편

제6편 ‘국법의 귀함(貴き)을 논함’과 제7편 ‘국민의 직분을 논함’은 이어지는 하나의 논설로써, 주로 국민과 정부의 관계, 국민과 정부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이 어째서 ‘국법’을 존중하고 따라야하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우선 제6편에서는 “죄인을 벌하는 것”(P.56), 즉 ‘사법(司法)‘의 권한은 오직 “정부에 한정된 권”(p.56)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사법권을 독점하는 까닭은, “한 사람의 힘으로 다세(多勢)의 나쁜 사람들을 상대로 삼아서, 그를 막으려 하더라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p.54)라는 사정에 말미암아 국민들이 자신들의 명대(名代, 대리인)로서 정부(政府)를 세워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직분”(p.54)을 위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총명대”로서 일을 하는 것이므로, “정부가 하는 일은 곧 국민이 하는 일”(p.54)이기 때문에, 국법을 따라는 것은 곧 “스스로 만든 법에 따르는 것”(p.55)이다.    

후쿠자와가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부와 국민의 약속을 무시하고 개인이 사사로이 죄인을 벌하는 사재(私裁) 행위다. 현대 사회에서도 공권력에 의한 정당한 법의 집행이 아닌, 이른바 타인에 대한 사적제재(私的制裁)는 엄중한 심판의 대상이다. 제7편에서 후쿠자와는 “정부의 정사에 관계없는 자는 결코 그 일을 평의해서는 안 된다.”(p.65)라고 말하고 있는데, 얼핏 모든 법리적인 판단의 권한은 정부에게 있으므로, 국민들은 그저 그 결정에 묵묵히 따라야한다는 권위적인 해석으로도 비칠 수 있으나, 후쿠자와가 진정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사로이 시비를 판결하고, 그에 대한 무분별한 처벌을 자행하더라도 이것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는커녕,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칭송해 마지않는 일본 사회의 전통이 아닌가 싶다.    

후쿠자와는 적토(敵討)나 천주(天誅)를 비판한다. 적을 토벌하는 것이나, 하늘이 벌을 주는 것은 말만 들어서는 어느 것이나 정당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국민의 총대리인인 정부가 ‘공무(公務)’로서 집행하는 형벌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회에 극심한 해악을 기치는 ‘암살(暗殺)’ 행위에 불과하다. 저마다의 사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여 놓고서, 그 명분을 공의(公義)에 가탁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사회의 질서는 확보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후쿠자와에게 사법행형의 분한은 정부에게 위임하고, 국민들은 “운죠오(세금)를 지불하고 정부의 보호를 사는 것”(p.68)이,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는 현실적이고도 올바른 방법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부도 자기 분한을 지키지 못 하고 폭정(暴政)을 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p.68) 그와 같은 경우에 국민들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사법의 정의를 오직 정부에게 일임한 이상에는, 정부가 공권력을 정당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이것을 견제하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선거’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견제를 할 수 있으나, 후쿠자와는 분명 여기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 하고 있는 듯하다. 리(理)를 져버린 정부의 명령에 그대로 따르는 것도 신념에 어긋나고, 그렇다고 정부에 무력으로 들이받는 것도 지금까지 주장해 온 바와 배치된다. 결국 후쿠자와가 제시한 마지막 길은 숭고한 죽음, 즉 순사(殉死)다. 사적인 제재는 그르고 공적인 사법행형은 정당한 것처럼, 자기 주인을 위한 사사로운 죽음은 어리석고 무가치하며, 국민이 곧 객(客)인 동시에 주인(主人)인 정부에 다가가 “인민의 권의를 주장하고 정리를 주창”(p.74)하며 목숨을 버리는  ‘마루티르돔(순교, 순사)’은 “천만 명을 죽이고 천만 량을 허비하는 내란의 군사보다도 훨씬 더 낫다.”(p.72)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법이, 1970년 자기 한 몸을 불사른 전태일이라는 개인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을 상기하면 후쿠자와의 논설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마르티르돔’ 운운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사회의 불의를 일일이 광정(匡正)하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의 목숨이 필요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