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봤다. 한국 개봉 소식이 들려올 때부터 보러 가고 싶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마침 근무 때문에 서울에 올라간 수요일이 개봉일이었고, 게다가 ‘문화의 날’이라고 해서 영화 티켓을 반값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브리의 작품이라면 제값을 주고 봐도 아깝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할인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혼자서 영화관에 가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한때, 통신사 VIP 특전으로 다달이 영화 티켓 2장을 제공해 주던 ‘좋았던 시절’에는, 이렇게 근무차 서울에 갔을 때나, 혹은 와이프가 특별히(?) 허락해 주었을 때 혼자 영화관에서 가서 영화를 보는 게 취미이자 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통신사에서 제공해 주던 영화표가 한 달에 1장으로 줄어들더니,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는 그나마도 사라져 버렸다. 그 사이 영화 티켓 값도 2배 가까이 올라버렸다. 2시간 남짓 즐기는 취미생활 비용으로 1만 5천원이라는 가격이 ‘객관적’으로도 비싼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심리적 한계선은 확실히 넘어버린 것 같다. 이제 나는 어지간해서는 혼자 영화관 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영화관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은퇴 번복을 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지만, 이제는 그의 변덕과는 무관하게 그의 육체적 나이 때문에 이 작품이 정말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봉 첫날이고, 게다가 영화 티켓도 할인했기 때문인지 영화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보통 영화관에 가면 맨 뒷줄에 앉는 것을 선호하는데, 이날은 자리를 고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극장 왼쪽에 치우친 자리에, 앞 뒷줄로 나눠 앉은 가족들 사이에 뻘쭘하게 끼어 앉게 되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작화가 특히 아름다웠고, 음악이 좋았다. 이야기 자체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큰 실망도 없었다.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이라고 거창하게 말해놓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하지만, 사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 대한 만족도, 특히 이야기 측면에서의 만족도는 <모노노케 히메>를 정점으로 그 이후부터 작품이 거듭될수록 꾸준히 낮아져 왔기에, 이번에도 스토리 면에서는 이빨이 몇 개가 빠지고 얼개가 성긴 혼잣말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딱 그대로였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모호하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불친절하다 못해 무성의하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최고의 작품은 <모노노케 히메>라고 생각한다. <모노노케 히메>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걸작이다. 물론 나는 모든 영화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메시지를 반드시 친절하게 전달하는 것이 영화의 미덕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때때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없는 것이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다. 또 어떤 메시지는 굳이 어렵고 복잡한 방식을 통해서만 그 전달력이 배가 되기도 한다.

내가 <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을 보았을 때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자연의 세계와 문명의 세계의 대립,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 길을 고민하는 인간이라는 주제가 그야말로 ‘초딩이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물론 이렇게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머리는 없었지만)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캐릭터들도 주인공급뿐만 아니라 조연급들까지 탄탄하게 디자인되어서 굳이 너저분한 서사를 덕지덕지 붙이지 않더라도 겉모습이라든가 목소리, 짧게 내뱉는 대사만으로 그 캐릭터가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 것인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이 넘쳤다.

한편, <모노노케 히메> 다음 작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메시지가 아주 중요한 작품은 아니었다. 약간의 교훈을 담은 단순한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흥미로운 소재들과 그 소재들을 엮어내는 뛰어난 연출이다. 터무니없는 오해일 수도 있으나 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전 작품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보겠다.”라는 강한 의지를 읽었는데,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역량은 그 의도를 달성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썩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으나, 명작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80세를 넘긴 고령의 거장은 더 이상 관객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또 그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만년에 인생을 반추하는 현자에게는 무심한 듯 내뱉는 한 줄의 대사에서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자동적으로 환기되며, 텅 빈 서사의 틈새가 온갖 경험과 추억들로 자동적으로 메워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객은, 관객의 눈에 긴 대롱을 갖다 대놓고 그 좁은 틈으로 앵무새 부리만 보여주면, 잘해야 앵무새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메시지의 측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엔터테인먼트의 측면에서도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일본에서는 일절 홍보하지 않았다지만, 한국에서는 그래도 최소한의 홍보는 했다. 그런데 메인 예고편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작품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다크 버전쯤 되는 <판타지 모험 활극>이라고 예상하게 될 것이다. 작품을 배급하는 배급사로서는 이렇게 홍보해야 팔릴 수 있으니 부득이하게 그렇게 포장한 것이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의 셀링 포인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아예 대중들에게 소구할 셀링 포인트가 없다고나 할까.

이야기의 구조만 놓고 보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비슷하다.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이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가족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소위 ‘팔아먹기 위한’ 작품을 만든다면, 판타지 세계로 진입하는 시점을 최대한 작품의 앞쪽에 배치할 것이다. 거기에 관객들이 보고싶어하는 모든 볼거리가 모여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런닝타임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했는지 떠올려 보자. 주인공 치히로가 판타지 세계로 진입하기 이전의 이야기는 매우 짧다. 치히로는 이사 갈 새집을 향해 가는 차의 뒷좌석에 누운 채로 등장하는데, 그 드러누운 자세와 심드렁한 표정만으로도 이 캐릭터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매우 압축적으로, 그러면서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렇게 캐릭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은 과감히 생략한 채, 주인공을 태운 차량은 이세계로 거의 직행(물론 차에서 내려서 터널을 통과한다는 단계가 있지만) 해버린다. 그 뒤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야말로 신비의 집합체.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노련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판타지 세계로 진입하는 시점을 최대한 뒤로 미룬다. 그리고 그 앞에 주인공 ‘마히토’의 온갖 서사들을 구질구질하다 싶을 정도로 너절하게 늘어놓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그것이 해결되는 것도 판타지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인공 치히로는 분명 판타지 세계에서 큰 교훈을 얻고 성장을 하지만, 그 성장의 경험이 현실에서 어떻게 반영될 것인지에 대해서 관객들은 알 수도 없고,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이미 판타지 세계에서의 모험 자체가 기승전결이 완벽해서, 관객들이 다른 곳에서 ‘해결’을 갈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인공 마히토는 이미 현실 세계에서 온갖 문제들과 마주하고 있다.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마히토보다 먼저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는 새엄마 나쓰코도, 자세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무언가 가혹한 삶이 무게와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작중 현실 세계에서의 서사를 길게 늘여놓았으니, 판타지 세계가 현실 세계와 단절된 어떤 독립된 세계로 존재할 수가 없다. 필연적으로 현실 세계와 강하게 조응하는, 사실상 현실 세계의 그림자 같은 세계로 그려진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번민과 고뇌를 짊어진 캐릭터들이 들어가는 ‘판타지 세계’는 그 자체로 독립된 모험과 활극의 무대가 아니라, 어쩌면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이거나(나쓰코의 경우) 혹은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장소(마히토의 경우)가 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으니,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니 이것은 명백히 ‘판타지 모험 활극’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그토록 기대하는 판타지 세계로의 진입 시점까지 가능한 뒤로 미루고 현실 세계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면서까지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을 포함하여 지브리의 대부분의 작품을 감상한 나이기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담긴 작품들의 인용, 미야자키 감독 본인의 가치관 및 인생 경험에 대한 은유를,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눈치 못 채도 어쩔 수 없지 뭐”라는 듯한 감독의 태만도 느껴졌다. 감독의 태도가 그러할진대, 일개 관객인 내가 이 작품에 숨겨진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관객들을 향해 감독을 대신하여 그 비유를 열심히 풀이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해석해 주어야 할 의무는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나 자신도 소위 지브리 마니아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광팬에 비하면, 한 알의 겨자씨에 새겨진 그 태산준령을 절반도 헤아리지 못할 것 같다.

너무 작품에 대해서 혹평만 한 것 같은데, 마무리는 칭찬으로 해야겠다. 우선 작화는 정말 아름다웠다. 미려한 그림체, 아름다운 색감, 그리고 몇몇 장면에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여줬다. 꼭 초당 프레임이 높은 부드러운 화면이 그렇지 못한 것에 비해 훌륭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동적인 움직임이 연출과 잘 어우러져서 감탄스럽기도 했다. 단, 캐릭터 디자인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인물 캐릭터들은 모두 몰개성. 최악은 ‘와라와라’인데, 디자인에 아무런 성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우스꽝스러운 앵무새 캐릭터는 고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면모라도 있었지만 말이다.

음악도 훌륭했다.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음악이 너무 튀어서 작품의 내용을 가려버리지 않고, 작품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조성하는 데 기능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는 역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 그가 창조 해내는 세계는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든 없든, 설득력이 있든 없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세계의 공기로 숨을 쉬어보고 싶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이 정말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면 좀 아쉬울 것 같다. 그러나 혹여 앞으로 한 두 작품을 더 만든다고 하더라도 창작자로서 절정의 시기에 만들어 낸 그런 빼어난 작품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그 아쉬움이 아주 크지는 않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쉽고 재밌으면서, 오직 전 생애를 창작자로 산 예술가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의 편린을, 많이도 말고 딱 한 조각 정도 담은 그런 동화같은 작품을 하나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과한 바람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