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4월 28일, 일상, 오페라 감상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을 만큼 치밀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의 하루는 아침 6시, 알람 소리를 들으며 기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면 컴퓨터를 켜고 적당한 음악을 재생시킨다. 그리고 현관에 붙어있는 조그만 부엌으로 가 두 팔을 걷어붙인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프라이팬을 달궈 간밤에 해동 해 놓은 고기나 생선을 구을 준비를 한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한 끼 분량을 도시락 통에 옮겨 담는다. 밥이 다 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옷을 갈아입는다. 간밤에 널어놓은 운동복도 챙긴다. 대충 나갈 채비를 마쳤으면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30분 정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밥이 다 되었다는 신호음이 들리면 뜸이 들도록 몇 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도시락 싸기를 마무리한다. 이제 출근 준비가 끝났다. 7시 10분쯤 방을 나선다.



일과



출근을 하면 근무복으로 갈아입는다. 내 책상 위에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써온 독서대를 가져다 놓았다. 책장을 고정하는 지지대 나사가 헐거워져서 원래 나사가 있던 자리 옆에 새로 구멍을 뚫어 나사를 옮겨 박았을 정도로 이제 제법 세월이 느껴지는 독서대다. 요즘 일과 시간에는 이 독서대 위에 주로 주자의 ‘대학장구’가 올라간다. 한글은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 한문으로만 쓰인 책이다. 일과 시간 중에 틈틈이 문장을 베끼며 구조를 익히고 뜻을 새긴다. 종종 책을 중국어 어학책으로 바꾸고 중국어 문장을 외우기도 한다.



도서관



5시에 퇴근을 하면 간단히 저녁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한 시간 정도는 필요한 공부를 하고, 한 시간 정도는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골라잡고 읽는다. 8시쯤 도서관을 나선다.



바이올린



뉴질랜드 여행 후에도 한 주 더 레슨을 쉬었다. 연습에는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복귀했지만, 브루흐를 연습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생상스의 ‘백조’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차이코스프키의 ‘칸초네타(협주곡 2악장)’ 같은 소품들을 주로 연습했다. 이번 주에 오랜만에 레슨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여행의 여파가 좀 느껴진다는 핀잔을 들었다. 다음 주에는 브루흐 연습에 더욱 매진해야겠다. 요즘에는 9시 50분쯤 연습을 마무리한다.



운동



최소 6시간의 수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운동은 10시 10분부터 11시 10분까지 딱 1시간만 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운동을 하다보면 시간이 좀 오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잽과 스트레이트 시에 어깨에 잔뜩 들어가던 힘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나니, 관장님께서 이제는 훅과 바디도 열심히 연습해야 할 때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서예



매주 목요일에는 공주의 한문 교실을 찾아 한문과 서예를 배우고 있다. 주자의 대학장구를 텍스트로 선정했는데, 나는 벌써 대학의 본문을 5장까지 외웠건만 진도는 ‘대학장구서(주자가 대학을 새로 편집하면서 붙여놓은 서문)’에 머무르고 있다. 다음 주에는 본문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한자로 쓰인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 희열이 느껴지는 일이다. 지식의 경계가 넓어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제 비로소 나는 까막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내 텍스트에는 토가 달려있지 않다. 나는 문장의 의미만 파악할 수 있으면 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한문도 완전한 문장이다. 우리가 영어 문장에 토를 달아 읽지 않듯, 한문 문장에도 토는 필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생님께서는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도 토는 매우 중요하다고 믿고 계신 것 같다. 아무튼 선생님께서 문장을 읽어주시고 순서대로 해석하며 뜻을 설명 해 주신다. 종종 나에게 문장을 읽고 해석 해 보라고 하시는데, 나는 예습을 착실히 해가는 학생이라서 한자를 못 읽거나 문장의 뜻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는 참담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토를 틀리거나 문장의 큰 뜻을 파악하는 데 별로 지장이 없어 보이는 몇 개의 한자들을 정확히 해석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가령 以, 所 같은 애매한 한자들) 선생님께서는 놓치지 않고 지적을 하신다.



대학 수업이 끝나면 다음은 글쓰기 연습이다. 지난 목요일에 구양순체 초급 교본을 받아 처음으로 ‘한 일(一)’자를 써보았다. 선생님께서 쓰신 글씨는 정말 아름다운 ‘한 일’이었는데, 내가 쓰는 한 일자는 꼭 닭다리 뼈다귀의 형상이다. 펜글씨도 제대로 못 쓰는 천하 악필인 내가 붓글씨라니! 바이올린 활을 처음 쥐었을 때와 같은 막막함이 느껴졌다. 바이올린이야 멋도 모르고 시작했으니 어찌어찌하여 6년을 넘게 해오고 있으나 앞으로 또 붓을 잡고서 그 지난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망스럽기도 하다.



오페라



지난 금요일에는 바이올린 선생님이 소속되어있는 연주 단체가 연주하는 오페라를 보러갔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연주회를 보러가는 일이 좀처럼 없는데, 이번에는 어쩌다보니 두 사람과 함께 오페라를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이 모두 군인인데, 그 중 한 명은 나의 한 기수 선배이고 나에게 공주의 한문 교실을 소개해준 사람이다. 사형(師兄)이라고나 할까. 이 공연을 무려 두 달 전에 예매 해 두었다고 한다. 과연 이 선배는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공연장 객석 맨 앞줄의 정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반향(反響) 없이 직접 들려오는 소리가 그리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단다. 나는 선생님께 받은 티켓으로 적당히 뒤에 자리를 잡고 공연을 관람했다.



이 날 공연된 작품은 도니제티의 ‘돈 파스콸레’로, 지난번에 본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와 스토리는 정반대지만 분위기는 매우 비슷한 작품이었다. 거대한 콘서트 홀이 아닌 아담한 앙상블 홀을 무대로, 배우를 딱 4명만 캐스팅하여 챔버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조촐하게 공연되었다. 엑스트라가 없어서 아리아나 중창 중간중간의 디테일들은 지휘자의 설명으로 대신했는데, 지휘자의 언변이 부족하여 몰입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이런 소규모의 살롱 오페라는 매우 참신하지만, 좀 더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디테일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유능한 ‘이야기꾼’의 존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치 ‘판소리’처럼, 직접 배우들이 연기로 보여주지 않더라도 구연자의 생생한 이야기만으로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듯 표현할 수 있게끔 말이다.



허술한 구석이 많긴 했지만 나름 재밌게 보았다. 특히 돈 파스콸레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정말 일품이었다. 그 궁상맞아 보이다가도 애처로워 보이는 연기를 참 맛깔나게 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 세 사람은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마시며 잠시 소감을 나눴다. 중간에 바이올린 선생님이 카페로 찾아와 감상하러 와줘 감사하다며 와플을 사주었다. 공짜 티켓에 서비스까지. 연주하고 남는 게 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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