關係

진실로 누군가를 위하고 싶다면, 먼저 그 사람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M_덧붙임|less..|‘관계’라고 하는 말은, 그저 언어적 규정일 뿐이다. 그것은 어쩌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도 덮어씌울 수 있는 단어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 체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언어이지만, 의외로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것들은 그 개념이 언어로 명확하게 정의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어떤 가치가 단편적이고 고정적인 하나의 단어로 축약되어버리면, 그 단어는 오히려 우리가 진실로 접근하고 감응해야 할 대상으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인격과 인격의 마주함이다. 인격은 한 인간의 평생이라는 시간적 개념과 그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가 처하게 된 환경이라는 공간적 개념이 맞물려 빚어낸 산물이다. 모든 유한한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데, 우리의 몸이 주변의 환경과 감응하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정신을 이루므로, 본래 정신과 몸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격이란 그 사람의 몸과 정신이며, 현재에 이른 결과이다. 또 인격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앞으로 새로운 경험에 대해 열려있어,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관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설정되는 소통이다. 그것은 곳 상대방의 몸과 마음에 접근하는 시도이며 또 상대방이 나의 몸과 마음에 접근하는 것에 대한 허락이다. 각자의 인격이 오랜 시간과 많은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처럼, 서로의 인격이 어우러지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타인이 살아온 모든 시간과 거쳐온 모든 환경을 똑같이 답습하지 않고서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길이 없으나, 나의 고유한 경험의 토대 위에서 나와 다른 인격을 마주하면, 그 다름으로 인하여 내 인격이 새롭게 감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된 관계는 현재에 생생하고 과거를 포섭하며 또 미래를 열어젖히는 것이다. 만일 상대를 참으로 알고자 하는 노력이 없고, 나를 보여주려는 솔직한 태도가 없는 두 사람 사이에서 관계를 논한다면, 그건 마치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을 억지로 실로 이어놓고서, 그 실을 ‘관계’라고 부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자주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을 하고 또 듣는다. 그러나 진정 남을 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선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갖는 것부터가 쉽지가 않다. 설령 그런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진정 무엇이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인지 쉽게 알 수가 없다. 종종 남을 위하는 마음은 애정과 애욕에 넘쳐서 정작 받는 이의 인격은 무시한 채 폭력적으로 휘두르는 이기심이 되어버린다. 내 마음을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도 저 아름다운 꽃나무의 뿌리는 그것을 다 받아들일 수 없다. 지나친 사랑은 상대방을 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남을 위하는 것은 충동과 애끓는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주 서서히 ‘그 사람’에게 접근해야 하며, 내가 다가가는 만큼 또 나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사람을 위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사람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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