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목하오월(目下五月)-상상력의 기만(欺瞞)에 대하여

비교적 늦게까지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이곳 산골 집의 매력이다. 그러나 며칠 전까지도 산 군데군데를 환하게 밝혀놓았던 벚꽃은 이제 거의 져버렸다. 온 산을 뒤덮은 녹색은 너무나도 선명하여 자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광택이 도는 유화(油畵) 같은 느낌을 준다. 옆집 마당에 우뚝 선 벚나무를 스치는 실바람 한 줄기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꽃잎을 떼어내어 울타리 안쪽에 떨어뜨려 놓는다. 그 초라한 낙화(洛花)를 바라보며, 이번에도 때늦은 후회에 사로잡힌다. 만개한 벚꽃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는 정작 그것을 마음껏 감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벚꽃이면서, 어째서 번번이 때를 놓치고 마는 것일까.

나에게 봄은, 언제나 화사한 벚꽃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니, 봄과 벚꽃은 완전한 동의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봄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셔도, 따스한 양기가 헐벗은 토지 위에 부드럽게 깔려도, 벚나무 가지에 꽃이 피기 전에는 봄을 실감할 수 없었다.뭇 사람들은 두터운 코트를 벗어놓기가 무섭게 봄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내게는 그것이 너무 성급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벌써부터 봄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을 때, 나는 조금 더 인내를 가지고 봄을 기다렸다. 4월 문턱을 넘어서서 드디어 벚나무 가지에 망울이 지면, 봄은 서서히 내 상상 속에서 먼저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찰나(刹那)와도 같은 순간의 봄이다.

햇빛을 받아 융랑(融朗)하게 섬요(閃燿)하는 벚꽃의 향연(饗宴). 산 하나를 한 그루의 거대한 벚나무로 만들어버리는 풍성한 꽃송이들. 선들선들 부는 춘풍(春風)을 눈앞에 그려놓는 화우(花雨), 그리고 달빛에 비쳐 아스라이 드러나는 밤 벚꽃의 매혹. 어느 한 군데 흠을 논할 수 없는 완벽한 미(美)로, 봄은 어느 샌가 내 머릿속에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어느 때고 이러한 것들을, 이 도저히 놓칠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다움을 좇아 나선 적이 있던가? 막상 고대하던 봄이 오고, 벚꽃이 만개하면 언제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었냐는 듯, 무심함이 내 가슴을 점거하고 나서지 않았던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동산이 시시각각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데, 나는 단 십 여 분이라도 그 정경을 차분히 감상한 일이 없다. 정작 꽃비가 내릴 때에는, 어느 한 장의 잎이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에 가 닿아 살며시 수면을 두드리는 그 숨 막힐 듯 조용하고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외면했다. 그래놓고서 이제야 탁색(濁色)된 꽃잎이 맥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때늦은 후회를 품는다. 그토록 좋아하는 벚꽃이건만 어째서? 아니, 나는 정말로 벚꽃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 좋아하는 마음에 어떤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때때로 생각하면 불안하다. 상상에 의해 각색되지 않은, 온전히 이 세상의 것을 나는 사랑한 일이 있었는가.

나는 이따금, 나 자신의 감정 토로가 얼마나 솔직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그것은 어쩌면 크게 부풀려져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회화에 바친 나의 찬사는 오직 진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떤 음악회장에서 나는 정말로 ‘전율’을 느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은 ‘언어’로 표현하여 확정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숨겨진 의도에 의해 발설된 거짓이 아니었을까? 나는 오직 상상만을 사랑하였고 정작 실체에는 마음을 준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나는 벚꽃을 동경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거리를 걷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는 느낄 수 있는 그 감동을, ‘현실’의 꽃비가 쏟아지는 길목을 걸으면서 단 한 차례라도 맛본 적이 있었던가? 내 머릿속의 이미지들은 물론 현실 세계에서 내가 직접 목격한 것들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토대의 역할에 불과하다. 대체 무리 진 달빛이 발하는 휘광(輝光)과 어우러진 밤 벚꽃이라는 것을 나는 본 적이나 있었던가? 그것은, 어느 가을 날 밤 우연히 산책을 나갔다가 본 아름다운 보름달의 인상을 엉뚱하게도 벚나무 위에다가 걸어놓음으로써 억지로 생성해버린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상상 속에서 재구성하고 오직 그 안에서만 지극한 감동을 탐색하여 왔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기만(欺瞞)적인 행위인가. 얼마나 기만적인 감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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