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選] 1. 몰리에르, <타르튀프 서문>

[#M_타르튀프 서문|몰리에르, 1669년|타르튀프 서문
몰레이르, 1669년

이 작품은 말도 많았고 오랫동안 박해받았던 희극이다. 이 희극이 다루는 사람들은 내가 지금껏 다루었던 그 모든 사람들보다 프랑스에서 힘 있는 자들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후작들, 귀부인들, 오쟁이진 남편들, 의사들은 자신들이 극화된 사실을 그럭저럭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희화적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처럼 재미있어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 위선자들은 조금도 농담을 받아넘기지 못 했다. 처음에는 그들은 질겁했고, 내가 무례하게도 그들의 갖가지 표정을 농락하고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개입된 직업을 비방하려 든 것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로서는 결코 용서 못 할 범죄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격분하여 내 희극에 맞서 무장했다. 그리고 그들을 아프게 한 부분으로 공격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도 정치적이었고, 자신들 영혼의 밑바닥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도 처세에 밝았던 것이다. 그들은 훌륭한 관습에 따라 하나님을 내세워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치장했다. 그들은 <타르튀프>가 신앙을 모독하는 연극이라고 말한다.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경한 말로 그득하며, 지옥불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불경하며, 제스처 또한 죄악이라고 한다. 눈짓 한 번, 머리직 한 번에도, 또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한 발짝 옮기는 것에도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보고 그들은 그걸 내게 불리한 쪽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이 연극을 친구들의 해석에 맡겨 보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의 검열에 맡겨 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이 연극에 가할 수 있었던 수정들, 이 연극을 본 국왕과 왕후의 판단, 대중 앞에서 이 연극을 칭찬한 지체 높은 대공들과 대신들의 찬양, 이 연극을 유익하다고 판단한 선량한 사람들의 증언, 이 모든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조금도 단념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들은 떠벌이기 좋아하는 열성분자들을 시켜 공개적으로 떠들어대게 하였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욕설을 퍼붓고, 자선하듯 나를 지탄하는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나의 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들의 책략,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인해 사람들이 보여 주는 대로 쉽게 받아들이는 정말로 선량한 사람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그들의 선의에 선입견을 주입하는 그들의 책략만 아니었다면, 난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책략들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방어하게끔 만들었다. 내 희극의 구성에 대해 내가 해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진짜 신자들이다. 나는 그들이 보기도 전에 비난하지 말기를,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그 찌푸린 표정 대문에 체면이 말이 아닌 자들의 격정에 이용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간청한다.

내 희극을 선의를 가지고 검토해 본다면, 내 의도들이 순수하며 숭배해야 마땅한 것을 우롱하려는 것이 조금도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미묘한 문제이기에 최대한 조심을 해서 다루었으며, 위선자와 진짜 신자를 구분짓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술과 정성을 기울였음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그 간악한 인물의 등장을 준비하는 데만 두 막을 통째로 활용했다. 그자는 단 한순간도 관객을 애매한 상태에 두지 않는다. 처음에 관객은 내가 그자에게 부여한 특징을 통해 그를 알아본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악인의 성격을 관객들에게 드러내 주고, 그에 맞서는 진정한 선인의 성격이 드러나게 하지 않을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높으신 분들은 이렇게 넌지시 답하려 들 것이다. 이러한 사안은 연극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지만 나는 그 훌륭한 기준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그분들에게 묻고 싶다. 그것은 그들이 그저 추측할 뿐이고, 어떤 방법으로도 중명하지 못 하는 하나의 제안에 불과하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희극이 그 기원을 종교에 두고 있었으며, 신비스런 종교 의식의 일부였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웃 스페인인들의 축제에는 언제나 희극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네에서도 희극은 오늘날까지도 오텔 드 부르고뉴가 소속되어 있는 극회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곳은 우리의 중요한 성사극들을 올리기 위해 제공되었던 장소이다. 거기서는 소르본 박사라는 이름 아래 고딕체로 새겨진 희극들을 아직도 볼 수 있으며, 멀리 갈 것도 없이 코르네이유의 성스런 작품들이 공연되었으며, 온 프랑스가 그 공연들을 찬양했다.

만약 희극의 역할이 인간들의 악덕을 교화하는 데 있다면, 어떤 이유로 그에 대해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에 한층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극이 교화를 위한 큰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진지한 도덕적 표현들은 대개 풍자적 표현들보다 그 효과가 덜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꾸짖는 데는 그들의 잘못들을 묘사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그 잘못들을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도록 공개한다는 것은 악덕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다. 사람들은 질책은 쉽게 묵인한다. 하지만 조소는 좀처럼 묵인하지 않는다. 고약한 사람이 되는 건 원할 수 있어도,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조금도 원하지 않는 법이다.

주인공 사기꾼의 입에서 신앙의 말들이 나오게끔 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날 비난한다. 하지만 위선자의 특징을 잘 표현하기 위해 그러지 않고 달리 어쩌겠는가? 내가 보기엔 그자로 하여금 그런 말들을 하게끔 만드는 나쁜 동기들을 드러내고, 그자가 나쁘게 사용하는 걸 듣게 된다면 참기 힘들 것 같은 신성한 용어들만 배제하면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그는 제4막에서 유해한 훈계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 훈계는 우리 모두가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내 희극에서는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는가? 어떻게 그처럼 모두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들이 사람들의 머리에 어떤 인상을 남길까봐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것들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그것들이 위험한 것이 될까봐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것들이 한 극악한 자의 입을 통해 어떤 위엄을 얻기라도 할까봐서? 그 같은 기미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희극 <타르튀프>를 인정하든가, 아니면 모든 희극을 통틀어 처단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부터 사람들이 맹렬히 집착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지금껏 한 번도 사람들이 연극에 대해 이처럼 격분했던 적이 없다. 교회 주교들 가운데 희극을 금지시킨 분들이 있었음을 난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연극을 좀 더 유연하게 다루었던 분들도 몇몇 있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렇듯 이 같은 분열로 인해 검열이 가지는 권위가 훼손되었다. 동일한 신앙을 가진 견식 있는 지성들이 보이는 견해의 다양성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그들이 희극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희극을 그 순수성 안에서 고찰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희극을 그 타락성 안에서 고려함으로써 추잡한 공연이라 부를 만한 그 모든 상스런 공연들과 혼동한 것이다.

사실 말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태들에 대해 논해야 하기 때문에, 또 대부분의 대립들이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상반되는 것들을 같은 말로 포장하기 때문에 애매한 표현의 베일을 벗겨야 하고, 희극이 비난받아야 할지를 알기 위해 희극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직시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희극이 유쾌한 교훈을 통해 사람들의 단점을 꾸짖는 독창적인 시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부당하게 금지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점에 대해 고대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본다면, 너무도 엄격한 지혜를 주장하고 그 시대의 악습들에 대해 부단히 규탄하던 그 시대의 가장 이름난 철학자들이 희극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듣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밤을 새워가며 연극을 연구했으며, 희극을 만드는 법을 법칙으로 정리하는 일에 전념했던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과 최고위층 고관들이 직접 희극들을 만들었으며, 대중 앞에서 자신들이 만든 희극들을 낭송하기를 개의치 않았던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스가 영예로운 상을 제정해 이 예술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리고 로마에서는 이 예술이 극도의 존중을 받았음도 알게 될 것이다. 방탕한 로마에서 황제의 허락하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규율 잡힌 로마에서 집정관들의 지혜로운 판단하에, 그것도 로마의 위력이 가장 왕성하던 때에 그랬던 것이다.

고백하건데, 희극이 타락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우리가 매일 같이 타락시키지 않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들이 죄를 범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그 무엇도 없고, 인간들이 그 의도를 뒤집을 수 없을 만큼 이로운 학문도 없다. 그 자체로 너무도 선해 인간들이 나쁘게 이용할 수가 없는 그런 이로운 학문은 없는 것이다. 의학은 유익한 학문으로, 모두가 그것을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한 학문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이 추악해졌던 때가 있었고, 종종 인간들을 독살하는 기술이 되기도 했다. 철학은 하늘의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자연의 경이를 관조함으로써 신을 인지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학문을 종종 왜곡해서 사용했으며, 드러내 놓고 무신앙을 옹호하는 데 이용했다는 사실을 안다. 가장 신성한 것조차도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 하다. 우리는 신앙을 악용하여 가장 흉악한 죄악을 저지르는 데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악한 자들을 매일같이 본다. 그런데도 그런 면에 대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구분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타락시키는 학문의 선한 면을, 타락시키는 자들의 악의와 더불어 잘못된 결과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학문의 의도와 그것의 잘못된 사용을 항상 구별해야 한다.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추방되었기에 의학을 금할 수 없고, 아테네에서 공개적으로 규탄 받았기에 철학을 금지할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시기에 규제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희극을 금지하려고 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 규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존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규제는 그것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 갇힌 것이기에 스스로 부여한 한계로부터 지금 그것을 끌어내려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멀리까지 확장시켜는 안 되며, 비난 받아 마땅한 것과 무고한 것을 그 규제 안에 포괄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규제가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희극은 오늘날 우리가 옹호하려는 희극이 전혀 아니다. 그 둘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 둘은 품행이 정반대인 두 사람과 같다. 이름의 유사성 외에는 서로 아무런 단계도 없는 것이다. 방탕했던 올렝프가 있었다는 이유로 선량한 여자 올렝프를 지탄하려 든다는 건 끔찍한 불의일 것이다. 그와 유사한 압류들은 이 세상에 큰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규제받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같이 이용하는 많은 분야에 있어 이와 같은 엄격성을 지키기 못 하고 있으므로 희극에도 그와 같은 은총을 베풀어야 하고, 교화와 예의범절이 돋보이는 연극 작품들을 인정해야만 한다.

까다로운 정신의 소유자로서 그 어떤 희극도 묵인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안다. 그들은 가장 정숙한 작품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희극에서 묘사되는 정열이 덕성으로 넘쳐날 때 그만큼 더 감동적이고, 그런 종류의 극작품이야말로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숙한 정영을 보고 감동하는 것이 무슨 큰 죄악이란 말인가. 그들은 우리 영혼을 무감각한 상태로 끌어올리려는데, 나로서는 그것이 어떤 높은 수준의 덕인지 알지 못 한다. 그 같은 완벽함이 인간 본성의 능력 안에 있다고는 난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들의 정열을 교화시키고 누그러뜨리는 데 힘쓰는 게 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극장보다 드나들면 훨씬 좋은 장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비난하려 든다면, 희극도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는 게 분명하다. 나 또한 희극이 나머지 것들과 함께 규탄받는 것에는 조금도 나쁘게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듯이 신상의 실천에도 일정한 뜸이 있는 법이고, 인간은 오락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가정한다면, 희극보다 더 순수한 오락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고 나는 주장한다. 내 말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희극 <타르튀프>에 대해 한 지체 높은 대공이 한 말을 끝으로 인용하기로 하자.

<타르튀프>가 금지된 지 8일 후, <은둔자 스카라무슈>라는 제목의 희극을 왕궁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국왕께서 나오면서 내가 인용하려는 그 대공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몰리에르의 희극에는 그처럼 분개하면서, 어째서 스카라무슈의 것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정말 궁금하오.” 이에 대공이 이렇게 대답한다. “그 이유야 희극 <스카라무슈>는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다루는데 저 양반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지요. 하지만 몰리에르의 희극은 바로 저 양반들을 다루지요. 그러니 봐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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