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와 군주론


이 글은 2004년도 하반기에 쓴 것이다. 당시 나는 연세대학교에 수시로 합격하고, 대학 체험 강의로 ‘독서와 토론’ 수업을 신청하여 들었는데, 이 글은 그 수업에서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을 주제로 발표를 하기 위해 작성한 발표 자료이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그것이 그의 정치사상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발표를 맡았기 때문에, 군주론의 내용에 대한 고찰은 빠져있다. 이따금 내가 과거에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재미있다. 한창 군주론, 로마사 논고, 만드라골라 등을 읽으며 마키아벨리에 심취 해 있을 당시의 모습이 본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거의 요약 해 놓았고, 거기에 리돌피가 쓴 마키아벨리 평전에서 약간 내용을 가져왔을 따름이다. 문장도 지금 읽어보면 영 어색하기 짝이 없는데, 의식적으로 마키아벨리를 흉내 내려고 한 면도 있다. 수년 후, 수도사 사보나롤라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인물의 생애와 사상 형성의 과정을 고찰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슷한 유형의 글이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글을 풀어나가는 방법이나 문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 재미있다. 다음 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원래 이 글에는 이미지도 첨부되어 있고, 각주도 여럿 달려있는데, 옮기는 과정에서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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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렌체와 이탈리아 반도, 그리고 인접 국가들의 상황에 대하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논하기에 앞서, 그가 일생을 보냈던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는 일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비록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기존의 정치학과 뚜렷이 대비되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정치학은 그의 탁월한 판단력과 냉철함으로 당시 정세를 고찰, 분석함으로써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론>에 나타난 그의 정치학은 당시의 세태를 크게, 혹은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므로, <군주론>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마키아벨리의 조국 피렌체 및 이탈리아 반도 안팎의 여러 국가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 반도에 이탈리아는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분명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이다. 현대에도 마키아벨리는 많은 이탈리아인들의 자부심으로, 가령 그의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는 전 이탈리아의 축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작 그가 살아있던 시기(1469~1527)에 이탈리아 반도에는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조국은 엄밀히 말하면, 이탈리아 반도 안의 인구 10만 남짓 되는 조그만 도시국가, 피렌체(Firenze)였다. 이탈리아 분열의 연유를 살피자면 고대 로마제국의 붕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당시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하겠다.


이 지도는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당시의 이탈리아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탈리아는 크게는 5대 국가, 즉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로마 교황청, 나폴리 왕국, 피렌체 공화국으로 나뉘어 이었고 작게는 수많은 군소국가로 분열되어있었다. 아직 이탈리아 주변의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에서 강력한 전제왕권을 가진 군주가 등장하기 전에는 이런 상태도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분열 상태의 지속은 근대국가의 출현과 함께 이탈리아 전체의 위험을 경고하게 되었다.


이와 시기를 같이하여 이탈리아에는, 하나의 통합된 이탈리아를 꿈꾼 두 명의 인물이 출현하게 된다. 한명은 스스로의 야심을 위해 이탈리아의 통일을 획책했던 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이며 다른 한명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냉철하게 꿰뚫고 있던 우리의 주인공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이었다.


분명 마키아벨리를 낳은 것은 피렌체였으며 그의 활동도 대부분 이탈리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피렌체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 속에는 분명 이탈리아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가 실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군주론>은, 체사레 보르자와 같은 야심가에게 바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국가의 출현>


상기한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의 시대에는 이탈리아 주변에 강력한 절대왕권과 넓은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가 출현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표로 만든 것이다.
































국가



즉위시기


비고


스페인


카를로스 5세


(1500~1558)


16세


프랑스,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의 지배. 신대륙 식민지의 지배자.


신성로마제국


19세


프랑스


프랑수아 1세


(1494~1547)


21세


스페인과 대립. 이탈리아에서의 격돌 초래.


영국


헨리 8세


(1491~1547)


18세


터키


(오스만 투르크)


술레이만 대제


(1494~1566)


26세


동지중해를 터키의 내해로 만들어 버림.



위의 표를 살펴보면, 전제군주로서 등극한 왕들의 공통점을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그들의 치세가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겹쳐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전제군주화가 시대의 흐름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 이들은 젊은 나이에 즉위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세습 왕권의 정통을 이음으로서 마키아벨리가 언급했던 것과 같이 별다른 저항 없이 자국 통치를 안정화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젊은 나이에 즉위함으로써 권력의 행사에 쉽게 익숙해지는 이점이 있었다. 더욱이 위에 거론된 왕들은 제각각 역량도 겸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명백히 이탈리아 반도 국가들에게 위협적 요소가 되었다. 이들 전제군주들은 저마다 영토 확장의 야욕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좋은 표적으로 군소국가가 난립하고 있던 이탈리아가 있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이탈리아는,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프랑스, 스페인 등과는 달리 소규모 도시국가군이 주로 상업과 은행 업무를 통해 식량 및 물자를 조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와의 전면전에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꿰뚫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이미 1513년, 군주론을 완성하여 이탈리아에 강력한 군주의 탄생을 염원하였다. 그가 실제로 현실에 대해 얼마나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물론, 그 스스로는 이 책이 자신이 다시금 공직자로 복귀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쓴 것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의 혼란>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은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르네상스 태동부터 약 3세기동안 이탈리아가 지녀왔던 국가 관계의 주도권은 급속도로 유럽의 각 전제군주국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이 전제군주들의 세력 다툼의 각축장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탈리아의 위협은 보다 이전부터 구체화되어 가고 있었다. 1494년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은 더 이상 국제 관계의 주도권이 이탈리아에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샤를 8세가 철저히 비현실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확보한 그의 위치를 간단히 잃고 말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루이 12세는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가지고 이탈리아를 침공하게 된다.


이탈리아인으로서 이런 침략을 직접 겪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혼란의 상태로 가장 많은 타격을 받은 피렌체의 외교관으로 활약한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는 이 시기가 그의 정치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 이 시기의 경험을 통해 그는 시대가 변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에는 그에 걸맞은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피렌체의 위기>


이탈리아 반도의 혼란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는 역시 피렌체 공화국일 것이다. 르네상스의 융흥기에는 상업적, 문화적 부흥을 주도했던 피렌체였으나 프랑스의 침공 시에는 분별없는 외교로 그 위엄이 크게 손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경제적 다방면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피렌체의 상황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태생이며, 그는 이 피렌체를 위해 동분서주 활약했기 때문이다.



-메디치가-


피렌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설명이다. 피렌체는 본래 공화국으로 어떤 1인의 독재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융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피렌체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한 메디치가는 점차 피렌체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조반니, 코시모, 피에로 3대의 노력에 힘입어 로렌초 데 메디치가 메디치가의 당주로 우뚝 설 무렵에 메디치가는 더 이상 어깨를 나란히 할 어떤 세력도 피렌체 내에 두고 있지 않았다.


결국 로렌초는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로렌초 역시 그에 걸맞은 기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파치가의 음모로 인해 촉발된 피렌체와 교황-나폴리 연합의 대립을 현명함과 대담성으로 극복해 낸다. 피렌체인들의 그에 대한 찬사는,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메디치가와 피렌체의 위기는 그의 사후 직후에 찾아들게 된다. 이미 개인의 역량으로 밖에는 움직일 수 없게 된 피렌체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 피에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여러모로 아버지에 비해 역량이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기를 같이하여 프랑스의 첫 침공, 즉 샤를 8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는 사태가 발발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의 무능력이 철저히 들어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십자군 운동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나폴리의 왕위 계승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나폴리의 왕이 죽자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가 이를 거부하자 그는 즉각 9만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이 때,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피에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만다. 그는 프랑스 왕에게 피렌체에 해를 입히지 말 것을 부탁하며 왕의 군대에 대학 항복과, 두 개 시의 할양, 그리고 20만 피오리노의 금화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굴욕적 조치를 피렌체인들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피에로에 대한 여론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결국 이것은 메디치가의 축출의 빌미가 되었다.





-수도사 사보나롤라-


피에로 데 메디치가 프랑스 왕을 만나 위와 같은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있을 무렵, 피렌체에서는 사보나롤라라고 하는 한 수도사가 민중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신의 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난국을 타파하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주께 나아가는 일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어려운 시기, 크게 자신감을 잃고 있던 피렌체의 민중은 이 말에 현혹된다. 얼마 후 피에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이미 피렌체는 메디치가의 것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곧 피에로를 비롯하여 메디치가에 속했던 사람들은 피렌체로부터 도망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리었다. 메디치가의 축출이었다.


이후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를 만나 그를 그리스도인의 왕으로 추켜세우며 동시에 피렌체의 안전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면 신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십자군의 이상에 들떠있던 샤를 8세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왕이라는 칭호가 퍽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는 피에로로부터 약속받았던 두 도시를 다시 양보하고, 20만 피오리노의 금액도 12만으로 줄여서, 그것도 분할 지급으로 받기를 약속하였으며 그가 피렌체에서 머무르는 동안 분명하게 다른 여타 도시에 비해 군대에 의한 피해가 없도록 해 주었다. 피렌체인들은 이와 같은 조처가 모두 사보나롤라의 공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더욱 추앙하게 되었다.


그 이후, 샤를 8세는 나폴리를 손쉽게 얻게 된다. 그러나 곧이어 교황의 주창으로 반프랑스 동맹이 맺어졌다. 압력을 느낀 샤를 8세는 서둘러 프랑스로 돌아가 버린다. 그래도 피렌체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로 친프랑스 노선을 바꾸지 않는다.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득세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으나 그 실각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의 반대파 수도사들이 사보나롤라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며, ‘불의 시련’으로 진위 여부를 가리자고 하였다. 불의 시련이란 활활 타는 불속을 통과함으로서 과연 진짜 신의 사자인지를 판단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사보나롤라의 제자가 이 도전에 응한다. 그러나 피렌체의 수많은 민중이 모인 가운데 이 도전을 몇 시간이고 미루다가 우연히 소나기가 내리자 이것을 두고 ‘신의 계시다, 신은 시련을 원치 않으신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민중은 분개하였고, 사보나롤라는 예언자가 아니라 사기꾼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보나롤라는 바로 다음날 체포되었으며 재판 끝에 사형되었다. 1498년의 일로 그가 득세한지 겨우 4년만의 일이었다.


후에 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등장하게 된다.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것을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로써. 물론 그는 실패한 예이다.



-피사 문제-


피렌체 속담에, <문간에 피사인이 찾아오는 것 보다 차라리 사신(死神)이 찾아오는 편이 반갑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피렌체와 피사 사이에는 지긋지긋한 공방의 세월이 있었다. 피사는 본래 자유를 누리던 도시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도 나와 있듯, 과거에 자유를 만끽한 바 있는 도시는 현재의 상황이 어떠하든 항상 과거의 그것을 희구하는 법이다. 그들은 피렌체에 굴복당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피렌체에 반기를 들었다.


이 피사가, 1494년 샤를 8세의 침공으로 피렌체가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피렌체로부터 독립을 선언 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 피사가 다시 피렌체에 통합되기 까지는 무려 15년이 걸렸다.


피렌체는 피사 탈환에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어느 국가의 협력도 구할 수 없었다. 샤를 8세 때, 반프랑스 동맹에 모든 이탈리아 국가가 참여할 때에도 빠진 피렌체였다. 그들이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협력자는 바로 프랑스뿐이었다. 1498년, 사보나롤라가 처형당하던 해에, 프랑스 왕 샤를 8세도 사고로 죽었고 루이 12세가 그 뒤를 이었다. 루이 12세는 여러모로 샤를 8세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그는 십자군 원정과 같은 헛된 이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샤를 8세가 점유에 실패했던 나폴리와 더불어 밀라노를 손에 넣는 일만이 주된 관심사였다. 결국 루이 12세는 1499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밀라노를 손에 넣게 된다. 이듬해 1500년, 피렌체는 프랑스에 피사 문제의 해결을 도와줄 것을 건의한다. 막대한 돈을 들여 루이 12세로부터 그의 병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그러나 결국 피사 공략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용병들은 피렌체의 명령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급료가 적다는 핑계로 피렌체의 사절을 감금하는 어이없는 만행을 저지르기 까지 했다. 사절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으며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용병대는 현장을 이탈 해 버렸다. 결국 피렌체는 막대한 자금만 들이고서도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당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 정부의 제2 서기국장의 직위에 있으면서 이 일련의 과정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그는 용병대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순간에도 현장에 있으면서 곤란을 겪었고, 후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루이 12세와 협상을 위해 프랑스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마키아벨리에게 약하고 무능한 국가의 말로와 용병 제도의 모순을 철저히 인식시켜 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군주론>을 통해, 용병 제도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 메디치가의 복귀 –


루이 12세는 밀라노는 쉽게 손에 넣었지만 나폴리 공략에 있어서는 불찰을 범했다. 우선 교회 세력을 지나치게 키워주었으며 나폴리 공략에 있어 스페인 왕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프랑스는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주창한 캄프라이 동맹에 조인하여 베네치아를 공략하는 우를 범했다. 프랑스는 비록 베네치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는 오히려 신성로마제국, 교황, 스페인의 불만을 샀다. 베네치아는 이 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동맹국들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루이 12세에 대한 교황의 ‘신성 동맹’을 촉발시켰다.


이렇게 되자 친프랑스 노선을 가지고 있던 피렌체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들로서는 선택의 기로에 선 셈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가 자국을 스스로 방위할 능력이 없는 한, 프랑스와의 관계를 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고 그의 판단은 적절했다. 곧이어 벌어진 동맹국과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도 읽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루이 12세의 중증에 달한 무능이었는데, 그는 동맹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그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군대를 밀라노까지 후퇴시켜 버렸는데, 이는 동맹국들이 다시 재정비할 시간을 벌도록 해 주었다.


이 와중에,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스페인 군은 뚜렷한 목적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집합된 군인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군대에 메디치가가 접근했다. 그리고 그 군대의 행로를 피렌체로 돌렸다. 결국 피렌체는 이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 틈에 메디치가는 다시 피렌체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피렌체, 이탈리아, 그리고 르네상스의 종언-


이후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그리고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의 격전장으로 변모하였다. 이 때 이탈리아는 프랑스 편에 서서 반스페인 동맹에 가담하게 되는데, 결국 스페인 군에게 패해 로마가 점령당하고 교황이 그들과 강화를 맺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후에 로마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페인군에 의한 로마의 약탈이 자행되었고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전 지역이 스페인의 실질적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 르네상스 탄생의 땅 이탈리아는, 오히려 반종교개혁의 폭풍이 몰아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피렌체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고, 코시모가 초대 토스카나 대공에 오르게 되면서 한낮 영토 국가의 수도로 전락하게 된다.



2. 마키아벨리의 생애



이탈리아가 마지막 영화를 뽐내고 있을 무렵, 그는 태어났다. 피렌체가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훌륭한 인물 밑에서 아직 그 찬란한 영광을 수호하고 있었을 때에 그는 태어났다. 그러나 곧 그는 이탈리아의 가장 힘겨운 시기를 몸소 겪으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곧 르네상스의 종말과 함께, 그의 조국 이탈리아와 함께 죽었다.


가장 혼란했던 시기, 누구보다도 냉철한 판단력과 분석력을 지니고 있던 그의 생애를 추적하는 일은, 그의 저작 <군주론>을 이해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탄생-


우리의 주인공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피렌체 시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로, 법률가였다. 그는 <비망록>이라는 일기를 남겼는데, 덕분에 현재의 우리는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어렸을 적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저급한 인물은 아니었고, 더욱이 학식을 중요시하는 인물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어려서부터 라틴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책도 많이 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가 23세가 되던 해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는다. 그리고 곧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득세한다. 1498년 3월 9일자로 된, 마키아벨리가 로마 주제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통 남아있다. 시기적으로 사보나롤라가 실각하게 되는 <불의 시련>이 있기 약 한 달 전으로, 사보나롤라에 대한 보고서 형식으로 씌어 있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냉정한 사고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과장된 협박으로 시작된다.>


마키아벨리의 냉철함이 젊어서부터 예사롭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바로 한 달 뒤, 사보나롤라는 <불의 시련> 사건과 관련하여 실각하고 말았다.



-공직 생활-


사보나롤라의 처형 5일 후 발표된 피렌체 공화국 제2 서기국 서기관 후보 명단에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달, 그는 다른 후보자들을 제치고 서기관에 취임한다. 그와 경쟁하던 다른 후보들은 모두 교수, 혹은 변호사의 신분이었다. 오직 마키아벨리만이 <변호사-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의 아들, 무직 니콜로 마키아벨리>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선출될 수 있었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여하튼 그는 피렌체 공화국 제2 서기국 서기관으로 취임하였다. 곧이어 그는 ‘평화와 자유의 10인 위원회’의 서기관 및 대통령 소델리니의 비서관직도 겸하게 되었다. 그의 능력이 인정받은 결과지만, 그로인해 그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됐다. 그렇긴 해도 워낙 일을 좋아한 사나이였기 때문에 그것을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이와 같은 연유로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정무의 핵심에 서 있었다. 물론 그가 직접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가 접근할 수 없는 국가 기밀도 거의 없었다. 그는 모든 정보를 가장 신속하고 풍족하게 제공받을 수 있는 위치를 두루 꿰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그가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모든 면에 대해 두루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



-외교관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은, 피렌체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이상으로 부리기 적합한 인물이 없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우선 신분이 고귀하지 않았고-물론 마키아벨리가가 전혀 무명의 가문은 아니었으나-대학 교육과 같은 고등교육을 거친 엘리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구 일을 시켜도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마키아벨리 스스로가 일을 워낙 좋아해서 스스로 찾아 할 정도였으며, 금상첨화 격으로 그 업무 수완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외교관으로 자주 선발되었다. 물론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의 직책은 아니었고, <대사>를 보조하는 <부사> 정도였다. 그는 주로 타국에 대한 변명, 시간 끌기, 분위기 파악 등에 이용되었다.


그는 파견지에서 항상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냈는데, 언제나 철저한 관찰과 뛰어난 분석 위에, 그것도 명문장으로 씌어져 있었기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비롯하여 프랑스, 스위스, 독일 등 비이탈리아권 국가에도 여러 차례 파견되었다. 그의 이런 외교 활동은 그가 세계정세를 파악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 파직 –


그토록 일을 좋아했던 마키아벨리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바로 메디치가의 복귀 직후에 결정된 그의 파직이었다. 메디치가는 소델리니 대통령을 추방한 외에는 주요 공직자들은 그 유임을 허락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만은 소델리니처럼 파직되어 추방되었다. 그 이유를 많은 학자들은 그의 유능함에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그의 상사인 제1 서기국장은 유임되었는데도 유독 제2 서기국장만 파직시킨 것은 그가 제1 서기국장보다도 오히려 더 유능하고, 따라서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는 정말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파직과 추방령 이후 그는 산탄드레아에 있는 그의 산장에 은거하면서도 곧 복직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점차 그의 파직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그 절망도 깊어져 갔지만 그래도 그는 <군주론>을 써서 메디치가에 헌정하면서 까지 일에로의 복귀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복귀는 끝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와 군주론-


상기한 바와 같이, <군주론>은 그가 파직되어 산탄드레아 산장에 틀어박혀 있을 당시에 씌어진 것이다. 물론 <군주론>이 그의 정치사상을 집약한, 그가 남긴 최고의 저작이자 후대의 우리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지만, 아마 그 스스로는 파직 전에 그의 생에서 <군주론>을 집필한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에게 <공직 생활과 군주론 중 선택할 기회를 준다면 그는 주저 없이 공직 생활을 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치 단테가 추방을 겪었기에 <신곡>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군주론> 역시 마키아벨리가 파직으로 실의에 빠짐으로써 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등용되어 보고자 하는 희망역시 가지고 있었다. 물론 무위로 끝나버리지만.



-역사가, 희극작가, 비극작가-


파직으로 인해, 마키아벨리는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가 공직에 몸담고 있을 때에도 수많은 보고서를 썼지만 후대에 그의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되는 것들은 모두 파직 후에 씌어진 것이다. 또 그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정치학과 관련해서만 뛰어난 저작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극, 서사, 서정 등 다양한 문학적 분야에서도 그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희극 <만드라골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희극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역사가, 희극작가, 비극작가>는 그가 실제로 사용했던 서명이다. 그 말대로 그는 역사가였고, 희극작가였고, 비극작가였다. 마치 그의 인생이 역사적, 희극적, 비극적이었던 것처럼.



-르네상스, 이탈리아, 피렌체,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죽음-



그의 인생 말년에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의 격전장으로 변모한다. 이탈리아의 미래를 끊임없이 걱정하였던 마키아벨리는 교황에게 직접 자국군의 편성까지 건의하지만 무의로 끝나고 만다. 이후 메디치가 출신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가 스페인에 무조건 항복 한 이후, 피렌체에서는 다시 메디치가 추방이 이루어졌다. 58세가 된 마키아벨리는 이 소식을 듣고 바로 피렌체로 돌아가 다시 공직 복귀를 염원하였다. 그러나 제2 서기국 서기관 자리에 입후보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이번에는 메디치가로부터 도움을 받았었던 전력이 문제가 되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열흘 후, 그는 병으로 쓰러져 곧 숨을 거두고 만다.


곧이어 피렌체 공화국은 코시모 데 메디치에 의해 멸망되어 토스카나 공국에 포함된다.


이탈리아 반도는 스페인의 실질적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찬란히 꽃피웠던 르네상스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3. 군주론의 모델은 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많은 유형의 군주가 등장한다. 그러나 모세, 테세우스와 같은 신화적 인물을 제외하고, 실제로 본받을 만한 유형의 군주로 제시되는 인물은 별로 없다. 오직 체사레 보르자만을 마키아벨리는 진정한 군주의 유형으로 꼽고 있다. 체사레는 실패한 인물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에 대해, 결과만 중시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성공하지도 못한 체사레 보르자를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유형으로 꼽았는가? 우리는 이 인물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참조해 주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그 대략의 내용을 간추리도록 하겠다.



– 체사레 보르자 –



체사레 보르자. 그는 교황의 아들이라는, 기독교 세계의 이단아로 태어났고, 그러면서도 당시의 최고 권위인 로마 교회를 철저하게 자기를 위해 이용함으로써 기독교를 모멸하였다. 한때 몸에 걸쳤던 추기경의 주홍색 법의, 평생의 영예와 안정을 보장해주는 그 법의마저 벗어던지고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자기의 왕국을 창건하려 했던 그의 야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년 동안의 역사가 그를 ‘르네상스 시대의 메피스토펠레스’라고 탄핵해온 이유가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中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었다. 성직자는 기본적으로 결혼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성직자의 이른바 <연애>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교황에게 이르면 그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체사레가 교황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알렉산데르 6세를 두고 마키아벨리는 <돈과 무력만 있으면 교황이 얼마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역대 교황 중에서 가장 잘 보여주었다>고 평하였고, 또 <알렉산데르 6세는 남을 속이는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언제나 속일 사람을 찾아내었다>, <그의 기만은 항상 성공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알렉산데르 6세라는 교황은 철저히 혈족주의에 입각하여 그의 아들들을 요직에 앉혔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움직여 교회 세력의 확장을 기도하였다. 체사레는 그의 맏아들로 교황은 그를 일찌감치 추기경의 자리에 앉혀놓았다. 그러나 교회 세력을 실질적으로 확장하는 역할은 둘째 아들인 간디아 공작 후안에게 맡겨져, 후안은 교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후안은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전투에서 승리다운 승리를 이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교황의 그에 대한 총애는 계속되었다. 누구보다 야심이 컸던 체사레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을 것이다.


교회군 총사령관이었던 후안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변사체로 발견되는 데 그를 암살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체사레가 그를 암살하였다는 의심은 당시부터 있었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체사레가 저질렀다는 그 어떤 증거도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후안의 암살이 분명 체사레의 출세 길을 터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 루이 12세와의 밀약 –


1498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죽고 루이 12세가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곧 샤를 8세의 미망인과 결혼을 위해 기존의 부인과 이혼을 결심하였는데 미망인이 브르타뉴 공국이라는 큰 지참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는 이혼을 위해서는 교황의 허가가 필요했다. 때문에 루이 12세는 교황에게 접근했다.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체사레는 프랑스 왕에게 발랑스 지역과 거기서 발생하는 모든 수입을 양도받고 더불어 얼마간의 병력과 연금 등을 보장받는다. 체사레가 발렌티노 공작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발랑스 령의 주인 이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물밑 작업을 끝마쳐 놓고, 체사레는 추기경 직에서 사임하였다. 현직 추기경이 그 직위를 버리는 일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 만큼 추기경은 영속된 영예와 안정을 보장해 주는, 성직자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성공적으로 추기경에서 공작으로 신분을 옮긴 체사레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야망을 이루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왕으로부터 원조 받은 군대와 용병대를 이끌고 교황령에 속하면서도 교황에 반발하는 무리들을 징벌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로마냐 지방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그의 로마냐 평정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의 역량은 후안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 체사레 보르자와 마키아벨리 –



놀라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한 체사레는 불과 4년 만에 이탈리아 반도의 3분의 1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다름 아닌 피렌체였다. 당시 피렌체는 체사레의 영토에 포위된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체사레는 피렌체를 포위하고는, 피렌체가 자신을 피렌체의 용병대로써 고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체사레를 피렌체의 보호자로 인정하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는데, 이 때문에 급히 체사레와 협상을 위해 파견된 인물이 바로 마키아벨리였다. 물론 이 요구는, 마키아벨리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피렌체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던 루이 12세가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 보임으로써 체사레가 한발 물러섰기 때문에 무위로 끝났다. 체사레에게 있어 프랑스는 매사에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었다.


같은 해(1502년), 체사레에게 일대 위기가 닥쳐왔다. 그의 휘하 용병대장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였으나 체사레의 출신성분에 대한 경멸과 체사레에 대한 공포가 주된 원인이었다. 그들은 마조네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곧 행동으로 옮긴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마조네의 반란이다.


반란군은 불과 열흘 만에 체사레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반란 수괴들이 제각각 스스로의 이익 챙기기에 여념에 없게 됨으로써 통일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정체하게 되었다. 체사레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셈인데, 이 기회를 그는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자신의 배후에 교황이 있다는 이점과 그가 가진 자금력-교회의 금고는 곧 그의 금고였다-를 총 동원하여 그는 자신의 위치를 조금씩 유리한 위치로 이끌고 갔다. 또한 반란자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관대함을 표시하였다.


이윽고 그의 책략에 걸려든 반란군의 수괴 중 한 사람인 파올로 오르시니를 통하여 체사레는 반란자들과 화해의 만남을 마련한다. 그들은 체사레에게 지난 잘못을 모두 용서받고 원할 경우 인상된 급료로 다시 그의 밑에서 일할 것에 동의하기 위해 세니갈리아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그들의 최후가 되었다. 체사레는 결코 반란자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마키아벨리는 바로 그의 곁에서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더욱이 이 사건이 있은 후, 체사레는 마키아벨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탈리아의 불화의 원천을 멸망시킨 것>이라고. 이 사나이의 머리 속에 이탈리아 통일의 구상이 있음을 안 마키아벨리는 놀라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이상적인 군주의 표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국군의 편성-


자국군은 곧 돈을 주고 고용하는 용병이 아닌, 징병을 통해 자국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자국군이야 말로 시대의 대세라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의 선구자이자 곧 그것을 실현하려 하였던 최초의 인물이 바로 체사레였다. 그는 로마냐 지방을 평정하자마자 로마냐에 대대적으로 징병령을 내고 자국군 구성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국군이 하나의 훌륭한 군대로 자리 잡기 전에 체사레가 실각하게 됨으로써 무위에 그치지만 마키아벨리의 사상에는 큰 영향을 주었고, 마키아벨리의 예상대로 자국군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어진 근대 국가 시기의 대표적 군사제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실은 마키아벨리도 피렌체에서 자국군의 구성에 힘썼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룩하여 피사를 재영유 할 때에는 피렌체의 자국군이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스페인 패잔병들을 맞이하여 벌인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흐지부지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체사레의 참신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체사레의 실각-


군주론에서 체사레는, 타인의 호의와 운에 의해 군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나와 있다. 아마 체사레 스스로가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에 오른 인물이, 그 자리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도 역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번번이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운에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자력으로 독립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했다. 자국군의 편성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이 결실을 채 맺기도 전, 그에게 불운이 닥쳤다. 세니갈리아 사건이 있은 바로 이듬해 여름, 로마에는 유례없는 대 폭염이 닥쳤고 전염병, 특히 말라리아가 대 유행하였다. 이 때, 체사레의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가 먼저 병으로 쓰러지고 이튿날 체사레도 같은 병으로 쓰러졌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결국 병으로 죽었다. 체사레는 목숨은 건졌으나 이미 그를 비호할 세력을 잃고 있었다. 투병 중에 그는 율리우스 2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는 데 협력하였다. 이것이 일생일대의 실수였는데, 율리우스 2세는 보르자 가문에 원한이 있는 인물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지적했듯, 과거의 원한을 현재의 보상으로 잊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었다. 즉위 한 즉시 율리우스 2세는 보르자를 파멸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결국 체사레는 실각하여 스페인으로 유배 보내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나바라 왕국으로 도망하지만 곧 있은 스페인의 나바라 왕국 침공 때 참전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



일찍이 한 인물 속에, 신이 이탈리아의 속죄를 명하지 않았는가 하고 여겨지는 한 줄기 빛이 비치는 듯이 보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인물은 그 활동의 절정기에서 운명의 버림을 받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제 26장 中



그 한 줄기 빛을 잃은 후, 이탈리아는 354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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