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월 18일, 살아있는 시간


오케스트라 튜닝 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 그 안에 모든 ‘재료’가 다 담겨있는 것 같다.



한국 남자들이 징병제에 의해 강제로 군 복무를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만나본 외국인들의 생각은 다양했다. 어떤 사람은 복무 기간 동안 인간적으로 또 남성적으로 성숙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보았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한국 국민들은 그런 부당한 처사를 50년 넘게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느냐며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내가 장교로 입대할 것을 결정했을 때,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왜 복무 기간이 한참 더 긴 장교 생활을 선택했느냐고.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퇴근하고 바이올린 켜려고.”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 어쩌면 나는 조금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과 고독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스스로 이방인의 삶을 택했다. 내가 남들보다 더 외로울 이유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나는 그 외로움을 온전히 긍정하기로 했다. 그 조금은 쓸쓸한 생활 속에서 오케스트라 생활, 바이올린 연습은 위안이었다.



오케스트라 활동을 중심으로 짜인 하루 일과를 마치고, 흔들리는 전차에 몸을 싣고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내 옆에는 대개 귀갓길 방향이 같았던 친구가 있었다. 문득 설움이 복받쳤다. 책 못 읽는 생활은 싫어. 악기를 그만두고 싶지 않아. 아주 작더라도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영역을 지키고 싶어. 아마 그때, 장교로 지원할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인생 길어야 80년. 그 중에 무언가에 헌신하고 정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기는 고작 40~50년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을, 나의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쓰고 싶었다. 이 세상에 오래도록 기억될 업적을 남길 수는 없겠지. 이 세상에 기억된다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다면 내 자신,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느 한 사람 정도에게는 의미가 있는, 그런 일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힘겨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100km의 속도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점점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긴급히 비상등을 켜고 갓길로 차를 붙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엔진이 멎어버렸다. 그저께 불이 들어온 오일 램프를 무시하고 달린 결과였다. 바퀴가 내 차만한 화물차들이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멈춰선 내 차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온 차체가 흔들렸다. 점점 추워지고 있었고, 나는 견인차가 올 때까지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무서웠고 서러웠다.



차 수리 견적은 100만원이 나왔다. 천만 원 모으고, 돈 좀 쓰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지출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설 명절 보너스를 그대로 반납하고, 집에서 약간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제어하지 못 하고 울분에 찬, 우울함에 빠진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미국 유학 생활 이후 처음인 것 같다. 그 스트레스의 원흉이 공허함 때문이니, 상황은 더 나쁘다. 가능하면 이 일을 평생의 직업을 선택한, 나보다 나이 많고 일에 대한 열정도 더 많은 사람들을 앞에 앉혀놓고 차분히 이야기 해 주고 싶다. 무언가는 바뀌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은 3년 복무하고 떠나갈 나 같은 단기 장교가 아니라 이 일에 젊음을 바치기로 한 당신들이라고. 평생 윗사람 눈치나 보고 주어진 일 속에서 쳇바퀴나 돌다가 청춘을 다 소모할 작정이냐고. 뭐가 문제인 걸가. 사람들의 지성이 부족한 걸까? 용기가 부족한 걸까?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시스템이 너무 공고한 것일까?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얼굴에 이렇게 쓰인 사람들을 도처에서 봤다. 음식점 종업원, 매표소 직원, 운전기사, 공공기관이나 대학 학생처의 사무원……. 지금 누군가 내 얼굴을 본다면, 저들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박물관의 화장실 청소부가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피렌체의 환경미화원은 나보다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어…….



어렸을 때부터 책임감은 강해서, 내게 무슨 일거리가 주어지면 항상 필요 이상으로 중압감을 느끼곤 했다. 덕분에 어떤 일이든 보통 주위의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긴 했지만, 그렇게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때로는 너무 많은 피로를 느끼기도 했다. 어떤 일은 완전히 무의미하며,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긴 시간동안 지겹도록 반복된다. 언제까지 이 피로를 달고 갈 수 있을까.




퇴근 후, 나는 바이올린 연습을 한다. 하루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몸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가급적 연습은 거르지 않는다. 바이올린 켜려고 장교 지원한 거니까. 그렇다. 나는 하루하루 쓰레기를 만드는 일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낮 동안의 나는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시간은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어떤 의미로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소멸을 희생이라고 부르는 법은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소멸이다. 훗날에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잊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 만 24살의 나에게는, 하루가 고작 5시간 정도다. 아마 그 시간이 내가 숨 쉬고 살았던, 한 청년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에게 혹은 또 다른 누구에게 의미가 있고 기억될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의 한 조각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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