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포니아 제23회 정기 연주회 後




저는 크고 작은 공연들을 자주 보러 다닙니다. 학생 때부터의 취미 생활이었고, 지금은 단조로운 군 생활의 낙이죠. 하지만 저는 꽤 까다로운 관객이라, 항상 후련하게 박수치고 연주회장을 빠져나오는 건 아닙니다. 저야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연주회장을 찾는 것이지만, 어떤 연주자에겐 연주가, 제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일상이고 일인 모양입니다. 그런 연주자는, 제가 매일 아침 무미건조한 보고서를 타이핑 하듯, 무표정하게 한 음 한 음을 그저 소리 내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무대 위의 유포니아 여러분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연주 시간이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겠지만, 반쯤은 아련한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상념에 젖어, 반쯤은 여러분들의 열정에 취한 채 보낸 감상의 시간은 제게도 정말 짧게만 느껴졌습니다.



제가 복무하고 있는 부대의 스포츠 센터 건물에는 강당이 하나 있습니다. 피치가 거의 1도 가까이 내려간 고물 피아노와 끊어진 전선을 억지로 이어 붙인 건반이 한 대 있는 이 강당에서, 저는 매일 퇴근 후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병사들이 문 열고 들어오려다 놀라서 돌아가기도 하죠.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유포니안들의 연습 소리로 가득했던 마술방, 요술방, 푸른샘(추억 속에서 다소 미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한데)에 비하면 오죽이나 쓸쓸한 연습 장소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연습해야 하는 이유를, 여러분들의 연주를 보면서 깨닫습니다. 고마워요. 저도 꾸준히 연습해서 2013년 가을 연주회를 노려…….



아무튼 준비한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게 공연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의 공연은 멋졌어요!

공연 관람 후 유포니아 공식 홈페이지에 올린 글




맥락



군 생활을 하다보면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혼동하게 된다. 2월의 마지막 날, 상황실 한 벽에 걸려있던 달력의 페이지를 누군가 하루 먼저 넘겨버렸다. 지휘관이 브리핑을 받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을 때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숫자 “3.” 그건 정말 중요한 것이었을까. 한 번 넘어가면 좀처럼 되돌릴 일이 없는 달력의 페이지를 거꾸로 넘기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우주의 모든 물질을 던져 넣어도 가득 채워지지 않을 광대한 인간의 사고가, 사방이 흰 벽으로 가로막힌 수평 남짓의 비좁은 방 안에 갇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잠식당한다. 공허함. 공허함은 끊임없이 팽창하여 모든 가능성의 영역을 남김없이 침범하고 이내 앗아가 버려, 결국 인생을 무의미함으로 가득 채워버린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내 인생의 독자성을 인정받기 바라는 것은 유치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누구나 하루에 한 번씩은 반드시 되뇌지만 쑥스러워 감히 입 밖에는 섣불리 내지 못 하는 말.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째서 그것을 지금 할 수 없는 걸까. 우리의 인생은, 대체 어느 순간에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 걸까?



세상에 쫓겨 다니며 살지 말자. 브리핑 때, 지휘관의 테이블 위에는 반드시 탁상시계가 놓여있어야 하지. 티슈는 항상 꺼내기 쉽도록 한 장이 반쯤 빠져나와 있어야 하고, 그리고 나는 문 앞에서 45도 각도로 바라보며 차려 자세를 하고 있어야 한다. 혀를 반쯤 내밀고 있는 티슈 갑(匣)과 책상 모서리와 각을 맞춘 탁상시계와 45도 방향을 튼 채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는, 있어야 할 위치에 정리정돈 되어있어야 한다는 질서 아래서 동급의 사물이다. 가치와 우선순위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세상에서야 살든 살지 않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의 인생이 최소한 자기 자신을 감상자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조형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섬세함과 인내심이 필요하겠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아마도 그 순간만이, 인생에서 기억될 빛나는 시간일 거야.



후기



연주회가 끝났다. 한바탕 인사와 촬영의 시간이 펼쳐지지만, 인사 나눈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만났었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할까 싶다. 그만큼 연주회 직후는 정신이 없다. 더 이상 인사 할 사람도 없다싶을 때쯤 이번 연주회에 서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따로 모여 가볍게 한 잔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어차피 전체 뒤풀이는 연주자들의 여운을 위한 연회. 연주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가 보았자 돈 써주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으니.



3월 첫째 주 금요일. 신입생 환영회다 오리엔테이션이다 뭐다 해서 신촌 바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가볍게 맥주 한 잔 걸칠 장소도 마땅치가 않아서 결국 바를 찾아 들어갔다. 월급쟁이는 어디를 가나 물주가 되는 법이라, 멤버들에게 칵테일 한 잔씩 돌렸다. 나는 ‘블랙 러시안’을 주문했다.



나는 05학번이지만, 08년도에 유포니아에 들어갔다. 당시 나와 함께 입단했던 08학번 새내기들이, 어느 덧 졸업 학년을 맞이했다. 그러니 그 사이 나는 얼마나 더 늙었단 말인가. 요새 부쩍부쩍 시간은 나를 놓아둔 채 쏜살 같이 달려 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나의 성장은 지체되어 있는데.



이런저런 얘기들 나누다가 12시쯤 헤어졌다. 새벽 2시를 넘겨서야 집에 도착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한 번 쓰다듬고, 그날은 그대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