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기] 12. 6. 22 대전 시립교향악단 <거장 그 위대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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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대전시립교향악단 공식 홈페이지의 악단 소개 코너에 게재되어 있는 것이다. 대개 어떤 단체든 그들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 페이지에는 해당 조직의 설립 취지나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윗글에서 비록 ‘비전’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으나 아마도 이 자못 장대한 기상이 느껴지는 글은, 대전시향이 스스로 설정한 비전이며, 정체성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전시향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조직과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바람직한 구상이다. 비전이 너무 구체적일 필요는 없지만(어떤 기업도 매출 100억 달성! 따위의 목표를 그들의 ‘비전’으로 삼지는 않는다), 조직원들이 애써 달성하고자 하는 어떤 목표를 넌지시 암시하고는 있어야 한다. 요는 그저 좋은 말들을 모조리 가져다 나열한다고 해서 좋은 비전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심지어 위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미래에 대한 방향 제시라기보다는 이미 달성한 과업의 선전에 가깝다. 이런 훌륭한 치적과 실력을 가지고서 시민 사회에 기여하는 놀라운 오케스트라를 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내 고장에 있는 오케스트라라고 하니 감격에 겨워 허파에 바람이 찰 지경이다.

내가 지금까지 세 번의 연주회를 감상하면서 이 조직에 대해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평균적인 실력을 가진 월급쟁이 음악가들의 집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오케스트라’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을 매우 딱딱한 태도로 대하는 샐러리맨들에게 부정적 함의를 담아 ‘직업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바로 그 직업적 태도를 대전시향의 연주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엔터테인먼트를 제공(이건 그들이 주장하는 비전 중의 하나이다)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가서 일을 하고 내려간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사무 공간에 불려가 그들이 일과 중에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나오는 것이다. 아니 대체 내가 왜?

이건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고 많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사실을 적시(摘示)하자면 한국의 연주자들은 대체로 지성이 부족하다. 나는 그들에게 ‘연주란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을 때 ‘뭐긴 뭐야, 밥벌이 수단이지!’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두렵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을까? 그 곡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껴본 적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연주로 관객들에게 곡을 이해시키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느끼는 인간의 속성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시인 보들레르는 어린 소년과 예술가의 공통점은 바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소년의 감수성과 예술가의 감수성은 분명 다른 것이다. 소년의 감수성은 무엇에든 쉽게 자극을 받고 과잉 정서를 생산 해 내며 종종 그 감정 과잉 상태에 중독되는 감상주의에 빠져들지만, 예술가의 감수성은 훨씬 분별력이 있어서 아무 것에나 감동 받지 않고, 또 절제 없이 과잉된 감정들을 배설해내지도 않는다. 이런 감수성이야말로 진정한 ‘심미적 감수성’인데, 심미적 감수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감성(感性)보다는 지성(知性)의 역할이다.

내가 볼 때에 단원들에게는 심미적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심미적 감수성을 잉태할 ‘지성’이라는 모태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결여된 개인들의 집합은 양몰이 개의 짖음에 따라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는 양떼와 비슷하다. 목동은 그들을 잘 몰아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도 나오게 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지휘자가 긴장의 끊을 놓지 않을 때에만 의도대로 움직이며, 도무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다.

윗글에 언급된 것처럼 이 연주 단체가 수차례 해외 연주와 서울 연주를 통해 국내외의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면서도 유독 자기 고장 안에서 나 같은 일개 시민에게 이토록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해외 순회공연이나 서울 공연처럼 많은 전문가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중요한 연주가 아닌, 본고장의 어수룩한 시민들 앞에서 하는 연주회에서는 너무 쉽게 긴장을 놓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휘자도, 양몰이 개도 신경을 덜 쓰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는 양떼는 질서를 잃고 멋대로 움직인다. 나는 이 연주 단체가 보다 잘 연주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세 번의 연주회 동안 내 앞에서 그 역량을 다 발휘해서 보여준 적이 없다. 어디에서 얼마나 훌륭한 연주를 하고 무슨 칭찬을 들었든, 나는 오직 내 귀에 들리는 연주만으로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이 단체에게 무슨 충고를 한다 한들, 그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고장의 오케스트라에 대한 한 가닥 실 같은 애정 때문에 몇 마디 하자면, 우선 단원 개개인들에게 전혀 접수되지 않는 저 거창한 비전은 집어치우고, “대전의 어린이들이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기를 꿈꾸게 해 줄 수 있는 시향” 같은 소박하지만 확실히 각인되는 비전을 세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무슨 해외파/유학파 출신의 실력 있는 인재를 고용하거나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기량을 향상시키는 것을 도모할 게 아니라, 단원들에게 음악 영화와 작곡가들의 전기, 음악을 주제로 한 소설 같은 것을 보라고 권하길 바란다. 단원들이 음악의 진정한 가치와 연주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면, 양몰이 개의 윽박지름 없이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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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향을 비판하는 글을 너무 길게 써버려서, 연주 자체에 대한 평은 간략히 줄이고자 한다.

1부에서는 브람스의 곡만 두 곡이 연주되었는데, 어지간하면 국내 오케스트라는 브람스를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마 위에서 두부 썰듯 하는 브람스 연주는 듣기에 괴로운 수준을 넘어서 가슴이 참 아프다. 음악의 구간구간을 레터로 나눈다면, A 다음에 B, B 다음에 C 하는 식으로 순서대로 소리만 낸다고 ‘연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 파트간의 밸런스, 한 프레이즈 안에서 자신의 역할, 프레이즈와 프레이즈의 연결 같은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앙상블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래서야 교향곡에서도 실내악 같은 앙상블을 구현한 브람스의 음악을 어떻게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세세한 부분은 더 지적하지 않겠다.

2부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1부의 곡들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3악장 스케르초가 너무 산만했던 것을 제외하면, 1, 2, 4악장은 연습한 흔적이 꽤 보였고, 2악장 연주 때는 앙상블에도 주의하는 것이 느껴졌다(동행한 지인은 ‘여기다’하는 부분에서만 너무 호흡이 잘 맞아서 오히려 웃겼다고 했다). 최소한 이 정도의 집중력을 연주회 내내 고르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은 위에서 길게 썼으니 반복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