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작문론(作文論) – 생각과 표현




일일이 헤아려보지는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글로 정리되기를 기다리는 주제가 백만 개(?)쯤 들어있다. 물론 옥석(玉石)을 가릴 필요는 있겠지만,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꼭 글을 써보고 싶다’란 생각이 들게끔 하는 주제는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글로 옮겨내지 못하는 것이, 전적으로 내 게으름 탓인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표현력이다. 초보 조각가의 심중(心中)에 아무리 거창한 구상이 들어있더라도, 그것을 구현해 낼 기술이 없어 작업을 시작조차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마음 속 백벽(白璧)에만 수백 번 밑그림을 그려 볼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사람은 아주 위대한 사람이거나, 아주 형편없는 인간이다. 꼭 세칭(世稱) 작가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형태의 글을 쓰든 간에, 그 글이 작자(作者)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썩 훌륭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글이며, 그런 수단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역시 훌륭한 작가다.
나는 그런 경지와는 거리가 멀다. 내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다. 언제나 완성(完成)은 내 능력의 지평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어서, 어렵사리 시작을 하더라도 그 끝에 이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종종 글을 써내는 것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즉, 제재(題材)가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어서 쓰는 데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경우, 혹은 그것이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너무나도 급박하여 글쓰기를 잠시도 유예할 수 없는 것인 경우.
전자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작문 연습 삼아 써내버린다. 물론 언제나 글을 쓸 때는 진지한 자세로 임하지만, 구상에도 또 작문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완성도에도 과히 미련은 없고, 곳곳에서 허점이 들어나게 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습작(習作)에 불과하다.
후자의 경우는 모든 면에서 전자와는 판이하다. 다듬고 다듬어서 유리구슬이 되어야만 비로소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을, ‘급박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써내는 것이다. 비록 급박(急迫)함이 본래 ‘시간의 촉박함’이란 의미를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으나, 사실 시간에 쫓긴 다기 보다는, 그 주제를 더 이상 내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말 쓰지 않고는 내가 미쳐버리고 말 것 같은, 한 시라도 빨리 글로 써서 밖으로 뱉어내어야만 하는 것.
이 때에는 나도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여 글을 쓴다. 치밀하게 구상하고, 성실하게 쓴다. 어휘 하나도 선별하며, 그 배열에는 신중을 기한다. 동시에 너무 부분에만 치중하여 균형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이렇게 써낸 글은,

“그렇다면 네가 전력을 기울여 만든, 네 능력을 증명할 만한 작품을 내보여라.(몽테뉴)”

라는 요구에 당당히 내놓을 수 있는 나의 작품이다. 물론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방만했기 때문에 느끼는 수치스러움이 아니라, 전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결국 표현력 부족으로 인하여 제재(題材)의 가치를 작품에서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느끼는 자괴(自愧)감이다.
즉, 그 글은 온전히 내 자신이다. 미진한 완성도는 내가 여전히 미성숙의 존재라는 것을 반증한다. 여기에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렇게 써낸 글은 애증(愛憎)의 대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매우 잔인한 일이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자각(自覺)하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물론 내가 이렇게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 글을 쓴 것은, 생애를 통틀어도 몇 차례 되지 않는다.)
이 때에는, 내가 아직 젊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초조해 할 것은 없다. 내 나이 이제 겨우 만 이십 세 일 개월이다. 앞으로 충분한 수련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기술적인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베토벤이 실러의 시(詩)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이기로 결심한 뒤 그것을 해내기까지 31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 첫 행을 쓴 뒤로 그것을 하나의 완성된 소설로 만드는 데는 장장 23년이 걸렸던 것을 보면, 어떤 위대한 주제를 표현해 내기 위한 뛰어난 표현력을 얻기 위해서는 과연 그에 걸맞은 수련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간혹 히라노 게이치로 같은 천재가 나타나 이십 대에 ‘장송’같은 대작을 써내버려서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건 정말 예외라고 믿고 싶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서 삶의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릴케)”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커다란 함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파우스트’가 인생의 말년에 가서야 겨우 씌어질 수 있는 작품이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역시 이십 대의 괴테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현재의 나는, 생각과 표현력 사이의 심한 불균형 상태에 있다. 젊은 만큼, 감정은 때때로 폭발적으로 격앙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적절히 표현할 표현력은 보유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물론 기술적인 면에서는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나이 사십, 혹은 오십에 가서야 성숙한다면, 그때에 이르러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표현 해 내는 것이 가능할까? 회상은 결국 회상일 뿐이다. 빛바랜 옛 추억을 마치 지금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인양 온갖 수사로 치장하여 묘사한들, 그것이 역겹기밖에 더할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곧바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면, 나는 젊은 시절을 영영 잃고 말 것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젊음을 잃어버렸는가? 그들은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노인(老人)이었던 것 같다.
결국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사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한다. 변화 자체로는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써내고 싶다.
훗날, 나의 어떤 면은 비약적인 진전을 이루었을 것이고, 어떤 면은 눈에 띄게 퇴락하였을 것이다. 분명 그때에는, 단테가 그러했던 것처럼 젊은 시절의 작품을, 그 안에 섞인 치기(稚氣) 때문에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더 우려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써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나는 오히려 아무 것도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아무렇게나 막 써대는 행위에 대해 분개한다. 하기야 이것은 학생들의 표현력을 말살해버린 현 교육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도무지 대학생들이 써대는 글을 읽어 줄 수가 없다. 그 문장의 조잡함, 초보적인 어휘력, 그리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알 수 없게 만드는 애매모호함!

“그가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다.(카이사르)”

내가 대학 강의 시간에 조별 작문 과제며 발표를 도맡아 했던 것은, 그런 유치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글을 써대는 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렇게나 마구 써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수련이 필요하다. 나는 비록 아주 기초적인 지도도 받지 못했지만, 그것이 유치하고 난잡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대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에게 그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표현력을 기르는 훈련을 하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은 가장 훌륭한 훈련 수단이다. 얼마동안은 소설에 집중했지만, 근래에 다시 역사서, 철학서 등도 읽고 있다. 또한, 내가 비록 ‘작문’을 ‘나의 수단’으로 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직 그 한 가지에만 얽매이려 하지는 않는다. 카프카는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문학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다른 것이 될 수도 없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내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음악도 미술도 모두 훌륭한 표현의 수단이며, 그 소양을 쌓는 것은 표현력을 기르는 데 분명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젊고, 미숙하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할 생각은 없다. 젊어서는 젊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절대 유예(猶豫)될 수 없으며, 미루다가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것을 누구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만큼은, 그것은 분명 커다란 상실이다.
생각과 표현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하자. 젊은 만큼 생기 넘치는 사고에는 역시 생기 넘치는 표현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갖추도록 하자.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서는, 그것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심지어 필요성조차도 환기시켜 주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노력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