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유포니아 2


4.



일본 입국 첫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무거운 짐들은 공항 안의 택배 회사를 찾아 당일 배송 서비스로 부치고, 기숙사 주소와 약도가 그려진 안내장 한 장과 바이올린을 들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서는 대담하게 택시를 탔다. 일본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어의 억양에는 아무래도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얼마 후 당도한 오사카 대학의 국제학생 기숙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름한 건물이어서 첫 인상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관리실로 들어가 일본어로 내 소개를 하려는데, 상대방이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국제학생 기숙사인 만큼 관리실을 지키는 사람들도 유학생들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108호 A. 내가 1년 동안 생활하게 될 방으로 안내되었다. 좁은 방 안에 책상, 책꽂이, 옷장, 냉장고, 침대, 에어컨 등 시설이 빼곡히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허전해 보였다. 관리인이 돌아가고, 나는 침대에 홀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외국에서 홀로 시작하는 유학생활. 내가 바랐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건만,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억누를 길이 없었다.



며칠 후, 오사카 대학에서 나의 지도 교수로 지정된 교수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1년 동안 공부할 캠퍼스에 가 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면담을 끝내고, 나는 캠퍼스 안을 산책하며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금관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소리의 근원에 다가갈수록, 금관악기뿐만 아니라 목관악기, 현악기 등 다양한 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끄러운 소음은 어떤 허름한 건물의 1층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구의 유리문에는 “초심자도 환영. 사양하지 말고 들어오세요.”라고 적힌 빛바랜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곳은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이었던 것이다.



10월. 학기가 시작되었다. 간혹 한국인 유학생 선배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조심스럽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보통 그런 것에는 무심한 사람들이어서, ‘항상 시끄럽다’거나 ‘조금 소리가 들을만해지면 또 신입생들이 들어와 시끄럽다’란 얘기들뿐이었다. 10월 6일. 아마도 그날은 추석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아갔다. 문을 열려는데, 마침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한 사람이 너무나 멋지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어서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혹시 입단 신청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악기를 내려놓고 물었다. “무슨 악기로 지원하시려고요?”



“바이올린이요.”



온통 어지러운 연습실 안에는, 대충 책꽂이라든가 책상 따위로 각 파트의 구역을 나눠놓고 있었다. 나는 바이올린 구역으로 안내되었다. 즉석에서 일종의 입단 테스트가 치러졌다. 입단 테스트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오케스트라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식이어서, 연주를 못 한다고 입단을 거부당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해 보려는 것이었다. 한 단원이 내게 악기를 빌려주고, 단지 1년 정도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나의 말을 참고해 적당히 쉬운 곡들이 실린 악보집 하나를 건네줬다. 그 안에서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레슨 받았던 곡을 찾아내어 연주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려 좀처럼 고개를 똑바로 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날 나는 추석날 밤의 보름달이 뽐내는 아름다운 달빛을 흐뭇하게 즐기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추석을 맞아 한밤중에 한국인들끼리 모여 연 가벼운 주연(酒宴)에서, 나는 내가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밝혔고, 사람들의 성화에 바이올린을 꺼내 또 얼토당토않은 연주 실력을 피로했다. 그렇게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나의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5.



입단 둘째 날, 나는 악기를 들고 연습실로 찾아가 정식으로 입단 원서를 작성했다. 바이올린 파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내 악기 지판에 붙어있는 운지 테이프가 부끄러워, 나는 이 날은 끝끝내 악기를 꺼내보지 못 했다. 눈치껏 살펴보았으나 지판에 테이프를 붙여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 지판의 테이프를 떼어버렸다. 그리고 음정을 잡아보려 했지만, 항상 눈으로 손 짚을 자리를 확인하던 습관 때문에 영 어색하고 음정이 정확하지가 않았다. 무작정 오케스트라에 지원은 했지만, 점점 마음은 초조해져만 가고 있었다.



2학기 신입 모집은 거의 하지 않는 일본의 동아리. 여름 방학이 지나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환영식 같은 것도 물론 없었고, 동아리 안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내가 단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해주는 것은, 3000엔의 단원 회비와 얼마 후 떠나게 될 합숙 훈련비를 내야한다는 회계의 전달 사항뿐이었다. 나는 아주 고독하게 오케스트라 생활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연습실로 가서 보면대 위에 악보를 펼쳐놓고, 저녁 8시 학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주로 호만이나 스즈키 교재에 실린 것들을 지루하게 반복해서 연주했다. 며칠 후 ‘아미야’란 단원이 내게 악보를 건넸다. 합숙 훈련을 가면, 오케스트라 1년차들끼리 모여 연주할 곡이라고 했다. 생각이 있으면 연주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예스’라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살펴본 악보는, 내 수준에서 도저히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악보는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 제2 바이올린 파트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월 초, 오사카 대학의 축제가 한창일 때, 오케스트라는 정기 연주회 대비 합숙 훈련을 떠났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합숙 훈련을 본격적인 연습의 시발점으로 본다. 물론 실력 미달의 신입 단원인 나는, 정기 연주회 참여 대상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견습 단원이라고 할까. 합숙 때 나는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소개되었고, 저녁 술자리에서 드디어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사용을 고집하던 경어(존댓말)를 버렸다.



합숙 훈련 중에 나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습 과정을 지켜보았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널찍한 방안의 냉랭한 공기도 단원들이 연습만 시작하면 금방 달아올랐다. 현과 목관과 금관과 타악기가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함께 소리를 낸다. 뭔가 어그러지고 맞지 않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엔가 하나의 소리로 모아진다. 음악 감상의 경력도, 연주 경력도 짧은 내게 그 모습은 하나의 경이였다.



실력 미달의 신입인 나는 아직 정기 연주회에 참여할 수 없어, 몇 명의 다른 초심자들과 함께 ‘피델리오’ 연습에 매진했다. 이 연주는 오케스트라 1년차들이 모여서 합숙 기간에 한 번 재미로 연주해 보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과 생애 처음으로 앙상블을 맞추는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아미야는 성심껏 지도를 해주었지만, 실력의 한계를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리듬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처음 깨쳤다. 혼자서 연습할 때 늘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은 음정이었다. 그러나 앙상블을 맞출 때는 리듬을 틀리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16분 음표와 4분 음표, 온음표의 음가, 그리고 부점이나 트릴, 꾸밈음의 음가에 대한 이해와 정립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몸으로 익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너무 어려웠다. 어려운 부분에서 느려지지 않기, 쉬운 부분에서 빨라지지 않기, 여린 부분에서 크게 연주하지 않기, 포르테에서 작게 연주하지 않기, 쉼표 잘 지키기 등 평소 내가 악기를 연습하며 등한히 했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음악을 만들어 나감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이었는지를 ‘혼나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합숙 훈련에서 돌아온 후, 나는 바로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발견한 음악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고, 레슨을 견학한 뒤 바로 등록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잠깐 도서관에 들렀다가 늘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았고, 거의 매일 저녁 8시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마침 귀갓길 방향이 같았던 ‘고토’와는 매일 함께 하교를 하다 보니 제법 친해졌다. 더군다나 고토와는 바이올린 초보의 애환도 공유하고 있었다. 레슨 받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늘지 않는 실력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해의 겨울을, 오케스트라에 대해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열정으로, 타지(他地)에서도 외롭지 않게 이겨낼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