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9월 15일 첫 통역 업무


너무나 화창한 날이었다. 새벽 4시 무렵에 일어나 브리핑 스크립트를 일어로 작성하느라 잠을 설친 나는, 쏟아지는 햇살을 감당하기에는 좀 몽롱한 상태였다. 7시 반, 시동을 걸고 수원으로 출발했다. 수원은 분당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주말 저녁 귀가 때마다 극심한 정체로 짜증을 돋우던 영동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었다. 이대로 달려 집으로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수원 비행단은 수원 화성의 명성을 의식한 탓인지 정문 주변 방책이 석재로 쌓아올린 꽤 근사한 성벽으로 되어있었다. 헌병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공무용 출입증을 받아서 비행단 단본부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본부 2층의 계획처 문을 두드렸다.



오늘의 업무 내용을 전달 받았는데, 15분 정도의 브리핑만 간단히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일단 방문하는 사람들이 55명. 그 중 고위급 몇몇은 단장과 접견실에서 회담을 하는데, 그때 단장과 방문단 수장 사이에서 통역을 해야 한다고 했다. 또 브리핑이 끝나면 55인을 대동하고 비행단을 견학하면서 시설 안내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전은 브리핑 자료 수정과 브리핑 리허설을 하며 보냈다. 점심을 먹고 코코아 한 잔 마시며 휴식을 취한 후, 1시 30반 정도 되어 손님들을 맞이했다. 손님들의 정체는 일본 항공자위대 간부학교 지휘막료과정(CSC)의 학생들 및 인솔자 55명으로, 계급은 3좌(소령)부터 1좌(대령)까지였다.



단본부 앞에서 기념 촬영 후 인솔자들을 대동하고 접견실로 이동했다. 접견실 안쪽에는 단장과 방문단의 수장이 앉을 자리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그 사이 약간 뒤로 물러선 위치에 통역관, 즉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1:1 통역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화자의 말을 키워드 중심으로 간단히 요약정리 해 두면, 다시 문장으로 만들어 읊으면 되었다. 초반의 긴장이 풀리고 나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술술 통역이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대충 얼버무려버린 말이나 반대로 너무 매끄럽게 내 스타일로 뽑아버린 문장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했다.



문제는 일대 다수의 통역이었는데, 같은 말임에도 다수를 상대할 때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일단 시점이 분산되다보니 집중력이 흐트러져 짧은 시간 안에 문장을 정리하는 순발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브리핑은 내가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읽는 것으로 족했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다. 사실 행사 주최 측에서 미리 원고를 주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읽었다가는 손님들은 내가 무슨 중국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미리 일본어 실력 있는 병사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슬라이드에는 기초적인 한자 오기만 해도 십 수 개. 이 슬라이드를 그대로 보여줬다면 정말 웃음거리가 되었겠지. 일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한국만의 한자어 표현도 많았으나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뜯어고칠 여유가 없었던 건 유감이다.



브리핑 후 단장과 학생들 사이에 질의응답도 통역을 했는데, 여기서도 살짝 진땀을 뺐다. 아무래도 질의응답 시에는 화자들도 미리 준비되지 않은 말들을 하게 되다보니, 그걸 정리해서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브리핑이 끝나고 단장이 물러간 후, 한국측에서는 부단장이 인솔자가 되어 기지 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브리퍼들이 한국어로 시설에 대해 안내하는 브리핑을 실시했는데, 번번이 내가 통역을 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가령 무장 같은 것에 대해 브리핑 할 때는, 나부터가 한국어로 들어도 이해 못 하는 내용을 통역해야 했으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어쨌든 첫 통역 임무는 큰 사건 없이 무사히 끝났다. 마지막으로 서로 선물 교환을 했는데, 나도 CSC 측으로부터 볼펜 한 자루 받았다.



4시 반, 아직 화창한 가을 햇살이 생생한 시간, 나는 퇴근했다. 첫 통역 업무였던 만큼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지만, 그러나 일단 통역에 들어가서는 의외로 침착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손님들을 다시 태우고 멀리 떠나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담배라도 한 대 펴야겠군.”



출장지에 제대로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비행단 앞의 편의점에서 음료수 한 캔 사마시고 영수증을 챙겨뒀다. 자가 차량 이용 시 출장비는 하루에 2만 원 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기름 값은 충분히 충당되는 돈이다.



임관 휴가 후 처음으로 평일에 집을 들어가 봤다. 똑같은 집인데, 어딘가 주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무거운 군복을 벗어던지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몸을 던졌다. 테이블에는 얼음을 가득 채운 맥도널드 컵에 톡톡 탄산의 기포가 올라오는 콜라가 따라져 있다.



내 군 생활은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