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요시다 슈이치 『도시여행자』

액셀을 밟자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계기판의 바늘이 올라간다. 밤이슬에 덮여 뿌옇던 차창이 히터의 더운 바람을 맞아 차차 선명해진다. 스피커에서는 라벨의 ‘거울 모음곡’의 제1 곡이 흘러나온다. 도로는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 하다. 그러나 속도를 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가능하다면 이 음악과 함께 언제까지나 달려가고 싶다.



새벽 1시 반을 넘겨, 충주의 숙소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했지만, 들뜬 마음은 쉬 가라앉지 않는다.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한 곡만 더’, ‘한 번만 더’를 번갈아 외치는 사이, 어느 덧 시계는 새벽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밤에는 채 3시간도 자지 못 했다. 그리고 오늘은 밤 10시를 넘겨서야 간신히 퇴근했다. 그야말로 ‘베개에 머리만 갖다 대면 그대로 잠들어버릴’ 만큼 피곤하지만, 무언가에 들뜬 이 마음은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 뜨거운 덩어리를 어떤 식으로든 토해내지 않는다면,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도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를 헤매며 또 하루 나를 더 지치게 만드는 밤을 보내리라. 하지만 내게는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예리해진 정신을, 정확히 과녁의 중심으로 인도할 만큼의 집중력이 없다. 이런 때에 중요한 것에 대해 쓰는 것은, 또 다른 꿈을 꾸는 것과 같으리라. 나는 달려가려고 하지만 힘차게 발을 구를수록 더욱 뒤로 밀려날 뿐이다.



우회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에 대해 쓰는 것으로 잠시 이 불안한 분출의 기미를 보이는 욕구를 달래놓는 것이다.






얼마 전에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사요나라, 사요나라』에 대해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어째서 이런 작가에게 아쿠타가와 상을 수여했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혹평을 했는데, 아무래도 한 명의 작가를 단 하나의 작품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심정으로 골라본 것이 바로 단편집 『도시여행자』이다. 사실 책날개나 띠지에 적힌 화려한 선전문, 책 뒤편에 실린 호들갑스런 서평 따위는 이 책을 고르는 데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단지 『도시여행자』라는 제목이 지닌 매력에 이끌렸을 뿐이다. 더불어 도시의 지도를 책표지로 넣고, 그 위에 편지 봉투 모양의 커버를 씌운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거리,’ 도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야근을 하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온 샐러리맨이 밝힌 전등, 퇴근길 운전자가 밝히는 자동차 미등,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는 음식점, 술집들의 화려한 간판 조명 따위가 뒤섞여 빚어내는 도시의 야경. 아름다운 모자이크의 한 조각이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발밑을 밝혔을 뿐인 불빛이 모여 의도하지 않은 풍경을 만든다. 걸쭉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러나 제법 먼 거리의 공간이 가로놓여있다. 멀리서는 찰싹 붙어서 마치 하나처럼 보이던 건물들 사이에 반드시 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시여행자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의 거리를 여행하는 사람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제목이 나에게 품게 한 높은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 했다. 만약 이 단편집의 제목이 원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원제는 이 단편집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의 제목과 같은 『캔슬된 거리의 안내』이다.) 출판사나 역자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면, 작가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다. 대체 이 소설 어디에서 “작가가 늘 관심을 가지는 ‘공간’, 즉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삶의 양상을 표현한다는 기본적인 모티브”가 존재하는 것인가? 모든 일들이 실은 어떤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야기가 배경과 좀 더 밀접한 관련성을 갖지 못 한다면, 위의 주장은 그저 삶의 양상을 표현한다는 소설의 ‘기본’을 두고 ‘모티브’라고 표현하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10년간의 성장을 보여주는 10편의 소설이라고 하지만, 성장의 결과가 『사요나라, 사요나라』 정도였다면 그 과정이라는 것도 어쩌면 뻔한 것이겠지. 장기간에 걸쳐 서로 큰 연관성 없이 쓰인 소설인 만큼 각 작품마다의 퀄리티도 제각각이다.



『나날의 봄』은 매우 통속적인 작품이다. 연애소설의 가장 단순한 패턴을 토대로 심리 묘사의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딱히 인상적인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영하 5도』는 즉흥적인 착상이 충분한 고려나 고심 없이 성급하게 작품화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배경을 ‘서울’이 아니라 ‘상하이’로 바꾼다 한들 뭐가 문제될 것인가. 그만큼 배경이라는 요소를 작품 속에서 적절히 활용하고 있지 못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독자로서는 이해할 길 없이 허공에 떠버린 주제다. 작가의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의 핵심이 태동했을 때에는, 그 핵심적인 생각이 독자에게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전후의 맥락을 빈틈없이 구성해야 한다. 모든 소설이 반드시 독자에게 친절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성을 갖춘다’고 하는 작업은 뜬금없는 생각을 성급하게 작품화시켜버리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다.



『24 Pieces』는 실험정신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만큼 ‘어떻게 쓸 것인가’ 역시 소설을 쓸 때에 끊임없이 고민되고 연구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쓰기의 방법을 새로 개척하는 만큼 소설의 영역은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24 Pieces』는 이미 동시대의 젊은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그의 단편집들에서 시도한 것들이 비하면 얼마나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 물론 작가가, 이 작품을 두고 쓰는 방식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의도 없이, 단순히 단절적인 문단의 나열을 통해 복잡한 심리를 생생하게, 또한 상징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반면 비교적 마음에 드는 작품들도 있었다. 가령 『젖니』와 『캔슬된 거리의 안내』가 그렇다. 이 두 작품은 적절한 배경의 설정과 이야기와의 융화가 소설의 완성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젖니』는 어떤 거창한 현실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부재, 스스로 서서히 침몰하고 마는 인간의 기울어진 인생, 탈출구 없는 부조리의 느낌을 상당히 잘 전달하고 있다. 여기서 마치 『사요나라, 사요나라』의 가난한 단지를 연상시키는 동네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와 더불어 이 소설의 분위기를 완성하고 있다.



『캔슬된 거리의 안내』는 이 단편집 안에서 단연 가장 읽을 만한 작품이다. 현재의 나, 과거에 대한 회상 속의 나,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속의 나라는 세 자아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구성도 상당히 탄탄하다.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세 이야기의 분위는 모두 암울한 분위기를 띠는데, 단지 우울한 회상으로 닫힌 채 끝날 것 같은 이야기들은 각각의 시점을 기준으로 미래에 대해서(또는 현재의 시점에서 같은 사건을 재해석함에 있어서) 모종의 가능성의 존재를 열어둔 채 종결되면서 이 세 이야기들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캔슬된 거리’가 의미하는 ‘군함도’란 배경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