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롤랜드 에머리히 <미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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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MIDWAY)』 (2019년 작품)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Roland Emmerich)

모든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경험한 최대, 최악의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은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영원한 패전국’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겠는가? 미국, 영국과 한편에서 싸웠더라면 지금까지도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자국의 역사를 ‘무결점’의 역사로 포장하고 떵떵거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국제 사회에서 대접받으며, 어쩌면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 하나를 꿰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 일본은 자기 주제도 모른 채 ‘거인’ 미국에 덤빈 하룻강아지요,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수많은 인명을 헛되이 희생시킨 전범국가로 영원토록 기억되게 되었다.

대체 왜? 전쟁이 끝난 지가 70년도 넘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당시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등지고 독자 노선을 걸어간 것이 그 원인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 뼈아픈 판단 착오를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일본의 지도자들이 선택한 길은 미국이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하지 않고, 하라는 것은 될수 있는 한 하는 것. 즉, 철저한 ‘종미(從米)’였다.

요즘 아베 내각의 행보를 보면서 일본이 다시 태평양전쟁 때처럼 무모한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일본이 철저한 ‘종미’ 노선을 버리지 않는 한, 그와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다.

영화 『미드웨이』는 시종 ‘미국’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이지만,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전후 70년간 철저하게 미국을 추종해온 일본을 어여쁘게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 내에서, 적어도 아베 수상을 위시한 정치계에서 만큼은 태평양전쟁이 일부 이성을 상실한 군국주의자들의 파멸적 선택이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어있다. 그 이전 한반도나 대만에 대한 식민지배는, 당시 열강이라면 어느 나라든 자행하던 행위로 ‘국제적 기조’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 인식이다. 중국은 여기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있다. 난징 대학살과 같은 개별적 사례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태평양전쟁 자체는 일본도 전쟁 범죄라고 시인하고 있고, 이에 대한 사죄와 반성도 표면하고 있는 만큼 중국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하여 한국만큼 격렬하게 역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국민통합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인지 모르겠으나, 반일감정을 교묘하게 조장, 활용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중국 회사 로고가 보이기에 『미드웨이』 제작에 중국 자본이 투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요즘 중국은 이런 투자를 할 때는 반드시 ‘가시적’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어서, 과연 중국 자본의 영향이 이 영화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를 관심 깊게 살펴봤다. 아마 그 보상은 영화 전체의 전개에서 보자면 사실상 불필요한 시퀀스였던 ‘둘리틀 특공대’ 이야기였을 것이다. 도쿄 폭격을 성공시킨 둘리틀 특공대가 중국 땅으로 숨어들자, 이것을 이유로 중국의 민간인들까지 무차별하게 학살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아주 잠깐 묘사되었고, 거기에다가 마지막 엔딩에서는 일본인이 학살한 민간인이 ’25만 명’에 달했다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자막으로 삽입시키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자본의 영향임에 분명한 이런 묘사를 제외하면, 이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미국의 전쟁 상대인 일본군의 모습은 ‘무사도’를 체현한 사무라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다.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광기의 집단과 그저 자기의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한 장병들을 분리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역사관, 전쟁관을 미국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이 미국과 다른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하지 않는 이상,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역사적 진상을 추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상업영화에서든, 국제정치에서든.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자면, 진주만 공습부터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지는 실제 역사적 과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꽤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사를 잘 모른다면, 스펙타클한 전쟁 장면을 즐기기에는 다소 밋밋하고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미드웨이 해전이 발발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진주만 공습을 다루는 것은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그 분량이 너무 길었다. 거기에다가 진주만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 사이에, 앞서 언급한 이유로 ‘둘리틀 특공대’ 에피소드까지 삽입되어서 영화의 전개가 너무 루즈해진 감이 없지 않다. 전투기들의 공중전이나 폭격씬은 나름 볼만하지만, 너무 비슷한 장면들이 반복되다보니 후반에 가서는 몰입도가 떨어졌다. 일본의 항공모함 3척을 격침시키고 일단 미국 항모 엔터프라이즈호로 귀환했던 딕 베스트가 다시 비행대대를 이끌고 일본의 마지막 항모인 히류를 공격하러 갈 때에는 그만 ‘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아무리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묘사라지만, 똑같은 수직강하 폭격 장면을 대체 몇 번이나 보여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그래도 십수 년전에 봤던 영화 『진주만』에 비하면 감정 과잉은 적은 편이고, 역사 고증도 그럭저럭 잘 된 편이라 제법 볼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