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종교개혁의 효시인가 또 다른 광신인가



이 글은 2008년도 ‘근대 유럽의 세계’ 강의를 들으며 리포트로 작성하여 제출한 글이다. 르네상스부터 68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사 중에서 자유롭게 주제를 선정하여 리포트를 작성하는 과제였는데, 나는 이 글에서 한 인물의 생애를 이야기함으로써 르네상스의 종언과 종교 개혁의 효시를 동시에 다루고 싶었다. 지난번에 공개한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다룬 글과 유사한 형식이지만, 글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달라진 점들이 많다. 나로서는 이걸 진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만…….



역시 이미지와 각주들은 생략되었다(나중에 보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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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종교개혁의 효시인가, 또 다른 광신인가





“내가 천국에 간다면, 하나님께 제일 먼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성자인지, 종파 분리자인지 또는 예언자인지, 악당인지를 물어보겠다.”


피우스 7세



일본 유학 시절, 내가 생활하던 국제 학생 기숙사에는 세계 각국 출신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우연한 계기로 러시아 태생 핀란드 국적의 유럽인 학생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신학을 전공한 학생으로 학위 취득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일본의 종교와 문화에 심취해 서툰 일본어 실력에도 아랑곳 않고 일본행을 택한 행동형 지성이었다.


독서와 토론을 좋아하는 우리 두 사람은 빠르게 친해졌고, 밤마다 숱하게 서로의 방을 드나들며 커피 한 잔으로 밤을 지세우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반하여 이렇게 만나게 된 인연에 놀라워하며, 우리는 일본의 매력적인 문화에 대해서 칭찬하는가 하면, 또 이면에 감추어진 모순과 일본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꼬집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여러 번 토론했고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주제는 역시 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을 전공했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반면, 나는 불가지론자적인 견해에서 반종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터라, 종교와 관련된 주제가 불거지면 우리의 토론은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토론은 마치 영원히 접점을 이룰 수 없는 두 평행선이 나란히 달려가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시간 열띤 토론을 벌여도 결국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 한 채 끝맺고는 했다. 그러나 우리는 토론을 통해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서로의 견해를 들어 볼 기회를 얻는 것 자체를 값지게 평가했다.


어느 날 우리는 종교개혁에 있어서 마틴 루터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다가 우연히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들로 이야기의 주제를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우리의 입에 오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였다. 사실 우리는 서로가 이 인물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그만큼 그는 역사를 교양으로 삼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세계사 교과서에도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들 이름으로 위클리스나 후스는 언급이 되지만, 기독교의 본산인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회와 투쟁을 벌였던 사보나롤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어쩌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운동과 독일의 종교개혁을 확실히 구분 지어 보여주고 싶었던 편집자들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적 현상은 공간적 차이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타락한 교회, 부패한 성직자, 신앙심을 잃은 민중에게 일침을 가하고 엄중한 경고를 보냈던 사보나롤라는, 분명 마틴 루터에 앞선 종교개혁가의 한 사람으로 여겨질 만한 면면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보나롤라는 중세적인 신비주의에서 탈피하지 못 했었고, 피렌체의 정치를 중세의 질서 속으로 무리하게 회귀시키려 했으며, 르네상스 정신에 대한 몰이해와 인간성에 대한 오해로 시대의 흐름에 제동을 걸려는 무모한 시도를 했다.


사보나롤라를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옹호하는 친구와, 그를 광신자이자 무능한 정치가로 평가절하 하는 나의 시각이 부딪혀, 우리는 오랜 시간을 토론했다. 물론 이 때에도 결국 결론은 얻지는 못 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르네상스를 살아간 중세인, 혹은 르네상스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의 삶과 그의 역할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과연 그는 종교개혁의 효시였는가, 혹은 또 하나의 광신에 불과했는가?


– 목차 –





– 머리말



– 서문



– 메디치가(家)의 추방과 피렌체의 몰락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피렌체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예언자 사보나롤라



– 사보나롤라와 알렉산데르 6세



– 개혁과 광신 사이



– 불의 심판



–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 종교개혁의 효시인가, 또 다른 광신인가



– 참고 문헌














표지 그림 : 『예언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초상』프라 바르톨로메오 1498년作,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소장


“오, 피렌체여, 로마여, 이탈리아여, 노래와 춤으로 세월을 보내던 때는 지났다. 이제 눈물의 강이 흐른다. 나의 백성들이여, 회개하라. 주께 가까이 다가가라!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희가 지은 죄 때문에, 저희에 대한 사랑 때문에 피를 흘리신 이여, 용서하소서. 당신의 어린 양이 되고자 애쓰는 이 피렌체의 백성을 용서하소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거대한 돔형의 천장에는 세상이 끝나는 날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모든 인간들에게 심판을 내린다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 주변으로 성인들과 천사들이 어울려 합창하는 조화와 평화로움으로 묘사 된 천국의 아래로, 뿔과 날개가 달린 악마들이 불 꼬챙이를 들고 죄 지은 인간들을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 아래 펼쳐진 무시무시한 지옥의 묘사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그 안에는 악랄한 정치가, 탐욕스러운 상인, 그리고 타락한 성직자들이 악마의 채찍질과 지옥의 화염으로 고통 받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일찍이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저 아름다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원형 지붕은 피렌체의 자부심이요, 암흑과 무지의 중세를 극복해 낸 르네상스 시대의 영광스러운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지붕의 안쪽 면에는 여전히 중세적 사고의 전형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회개하라, 오직 주에게로 다가가라!”


설교단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검은 수도복을 입은 사내였다. 깊은 두 눈, 입술까지 흘러내리는 듯한 매부리코.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숨 쉬는 것마저 잊게 할 정도였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우렁차면서도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외칠 때마다, 성당 안에 모인 1만 명 이상의 군중들은 탄식조차 내뱉지 못 한 채 쉼 없이 두 눈에서 눈물을 쏟아 냈다. 설교의 중간 중간에 군중들은 눈물 가득 고인 두 눈으로 천장의 무시무시한 그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피렌체는 끝이 났다. 아니, 어쩌면 이탈리아의 종말이 올 지도 모른다. 심판의 시간이 가까웠다. 타락한 시대는 결국 신의 철퇴를 맞으리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우리 곁에는 예언자 사보나롤라가 계시니까. 그가 우리를 회개의 길로, 천국의 방향으로, 주님의 품으로 인도 해 주실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돔 지붕의 겉과 속처럼, 상반된 가치가 서로 맞물리고 충돌하던 시대. 유럽이 근대라는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열어젖히기 위해 종교 개혁이라는 준비된 무대로 나아가기에 한 발 앞서, 인본주의 사조를 열며 개인을 새롭게 발견했던 르네상스 정신을 개척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는 거대한 혼란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중심에는 신의 소명을 받은 예언자, 혹은 광신자이자 종파 분리자로 불리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도사가 있었다.



메디치가(家)의 추방과 피렌체의 몰락



1494년에 들어서자마자 이탈리아 반도에는 불온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해 1월,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국가인 나폴리의 왕 페란테가 사망하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나폴리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샤를 8세는 혈통을 들어 자신이 나폴리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주장하는 한편, 십자군 원정의 배후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나폴리를 점령하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교황청에 보냈다. 교황청이 이탈리아의 안정을 고려하여 좀처럼 청원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자, 샤를 8세는 당장에라도 알프스 산맥을 넘을 기미를 보이며 교황청에 대한 압박을 가했다.


때를 같이하여, 피렌체에서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타락한 시대와 부패한 교회, 신앙심이 부재하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며 이탈리아에 신의 회초리가 내릴 것이라는 예언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교황청이 끝내 프랑스 왕의 청원을 거부하자, 샤를 8세는 친히 9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이후 프랑스 군은 이탈리아 반도를 거침없이 남하하여 11월에는 피렌체 인근에까지 다다랐다.


당장에라도 프랑스 군의 침략과 유린이 시작될 것만 같은 상황에서, 피렌체의 군중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때 사보나롤라가 군중들 앞에서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리신 칼이다. 내 예언은 적중했다. 회초리가 내려온다. 신께서 몸소 저 군대를 이끌고 계신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리신 노여움의 시련이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군중들의 공포심 사이로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민중들은 광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심취한 프란체스코 발로리는 앞장서서 민중들을 선동했다. 그의 주도 아래 광분한 피렌체 시민들은 한 세기 이상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가문이었던 메디치가(家)를 추방했다. 피렌체의 시민들이 그토록 사랑해마지않았던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사망한 지 겨우 2년 뒤의 일이었다.


메디치 가문을 추방한 피렌체 시민들은 이제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프랑스 왕의 입성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샤를 8세가 피렌체 인근의 도시 피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특사의 자격을 얻어 왕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를 이탈리아의 죄악을 벌하고자 신이 보낸 사자이자 기독교도의 왕이라 추켜세우는 한편, 신의 대리자로서 피렌체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할 것을 당부했다.


며칠 후 샤를 8세는 성문이 활짝 열린 피렌체로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입성했다. 사보나롤라에 의해 크게 고무된 샤를 8세는 피렌체에 입성하자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과 교황 퇴위 요구의 명분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프랑스 군은 피렌체에 열흘 가량 머물렀는데, 다른 도시들에 비해 프랑스 군의 횡포로 인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피렌체의 시민들이 이 모든 것이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덕택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한 때 레오나르도 브로니가 그토록 칭찬에 마지않았던 자유와 덕성이 가득했던 피렌체는, 한 명의 광신적 수도사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75년 4월 24일 성 조지의 축일. 이탈리아 북부 도시 볼로냐에 소재한 도미니크 교단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는 한 청년이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물 셋의 나이였지만, 초췌한 인상, 근심 가득한 표정은 그를 훨씬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혼란한 세상에 대한 뿌리 깊은 경멸감으로 가득한 청년은, 속세를 등지고 오직 신에게 기도드리며 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스물 남짓의 나이에, 그는 이미 세상에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속적 욕망이나 야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초췌한 청년이, 장차 도시 국가 피렌체의 운명을 좌우할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1452년에 이탈리아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그가 의사가 되길 바라서 어려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읽혔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플라톤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 했다. 프라 베네토 등 전기 작가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큰 감명을 받은 책들은 고대 철학자들의 저작이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이었다. 특히 그는 『신학대전』에 심취 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그가 그다지 지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훗날 그가 행한 설교나 알렉산데르 6세 교황과 주고받은 서신의 내용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으로부터 논리를 배우지 못 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사보나롤라는 그러나 매우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 한 것들을 느껴야 했으며, 그래서 유년 시절을 비감(悲感)과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어쩌면 사보나롤라는 훗날의 마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속세에서 일반인들과 같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청렴하고 여린 심성의 소유자였는지도 모른다.



수도회에 입문하기 전, 사보나롤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남녀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했다. 상대가 신분이 높은 귀족 집안 출신이라 사보나롤라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보나롤라에게 단테나 페트라르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고통을 승화시킬만한 이성과 지성이 있었더라면, 그가 그토록 세상을 미워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예민한 감성이 입은 상처를 위로해 줄만한 어떤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신앙이었고, 기도였다. 결국 청년은 자신을 고통스럽게만 할 뿐, 어떤 기쁨도 선사하지 않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했다. 수도원에 입문하면서, 그는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시 한 편을 지었다.


제목이 ‘세상을 경멸함’으로 되어있는 시에서 그는 “이 세상은 너무나 타락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향하여 진노의 칼을 갈고 계심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시대와 동일하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의 눈에는 나름대로 시대를 즐기며 살아가고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혹은 그런 노력을 기울일 용기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매도하고 분노와 증오를 폭발시켰다.


이때의 사보나롤라는 아직 예언자의 꿈을 꾸진 않았지만, 벌써 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처럼 부패하고 타락해도 인간에게는 그 세상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신이라면 가능하다. 사보나롤라는 언젠가 이 세상이 반드시 신에 의해서 심판 될 것이라고 믿었다. 훗날 예언자로서의 그의 모습은, 젊은 시절에 느낀 깊은 절망과 분노 위에, 심판의 대리인으로서 신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믿음이 더해짐으로서 나타난 결과였다.



피렌체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사보나롤라가 수도원에 들어가 하루 아홉 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올리고 갖은 허드렛일을 하며 속세와 단절 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이탈리아 반도는 찬란한 르네상스기의 마지막 절정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훗날 사보나롤라의 활동 무대가 된 피렌체는, 1469년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피렌체의 지배자로 등극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탁월한 통치 하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피렌체는 역사상 ‘르네상스’라 불리는 시대를 선도한 국가이다. ‘르네상스’는 역사상 어떤 한 시기를 가리키는 말임과 동시에 그 시대의 정신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고, 사조이자 운동, 때로는 미술이나 음악상의 양식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한 단어가 이토록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런 다양한 의미를 아우르고 있는 것조차 ‘르네상스’라는 말에 매우 어울린다.


피렌체의 번영은 12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 멸망 후 오랫동안 침체를 겪었던 상업과 교류가 10세기 이후 부활하기 시작하면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도시 자유민들이 점차 힘을 얻었고, 기존의 지배 영주와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피렌체의 경우 특히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여, 코무네로서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14세기에 들어 피렌체는 강대한 도시 국가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굳혔으며, 미술의 조토, 문학의 단테 등이 이때 배출되었다.




피렌체의 이러한 융성은 단지 일 개 도시의 차원을 넘어서서 전 이탈리아, 나아가 전 유럽 세계에 큰 파급 효과를 미쳤다. 저명한 역사가 부르크하르트는『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피렌체를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피렌체의 역사에서 우리는 고도의 정치의식과 풍부한 발전형태가 어우러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나라는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라는 이름을 얻어 마땅하다… 예리한 지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놀라운 피렌체의 정신은 정치와 사회를 끊임없이 개혁하고 지속적으로 기술하며 평가해갔다. 따라서 피렌체는 정치적 학설과 이론, 실험과 도약의 산실이며… 지구상 모든 나라에 앞선 근대적 의미의 역사 기술의 선구자였다.”



14세기에 피렌체의 역사를 기술하는 대업을 이룬 조반니 발라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로마는 저물어가지만 나의 조국은 솟아오르며 대업을 이룰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내 조국의 과거를 기록하려는 이유이다. 나는 현재는 물론이고 내가 모든 사건을 경험하는 날까지 쉬지 않고 기록 할 것이다.”


이처럼 이 시기의 사람들은 나날이 번영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인간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했다. 또한 상업적 번영과 탐구 정신의 확충은 과연 인간의 창조성을 뒷받침하여 인류 역사상 위대한 업적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에 대한 발견, 과시와 경쟁이 허락된 교양, 도회적 자유의 향유 이면에는 지난 천 년간 이어져 온 교회 질서의 붕괴와 신앙의 약화라는 혼란 역시 존재했다. 물론 르네상스 정신 자체가 종교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이라는 저명한 저술을 통해 중세를 암흑과 야만의 시기로 규정했던 조르조 바사리조차도 실은 바로 같은 저서에서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을 신의 은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을 정도다.


그가 비판을 가한 중세의 무지와 야만성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의 문명을 퇴보시켰던 야만인들의 무지와 폭력성에 대한 것이었지, 교회 질서에 대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르네상스 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삶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이 촉발시킨 탐구와 자유의 정신은 맹목적인 신앙과 순종의 미덕을 중요시하는 교회의 질서와는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종교가 관여해야 하는 분야와 관여하지 말아야 할 분야를 확실히 구분 짓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인간들이 다수 출현했다. 이탈리아어로는 ‘라이코’라 부르는 이들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천재들이다. 버트란드 러셀이 말한 것처럼, 이 시대는 옛 시대의 질서가 붕괴하지만 새 시대의 나쁜 점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시대로, 필연적으로 위대한 천재들을 다수 배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교회의 역할 역시 인정하지만, 종교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구분 짖는 라이코들의 가치관은, 세상이 교회의 진리 아래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르네상스의 정신과 교회의 질서의 동거는 기묘했으며, 발작적인 대립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타락한 교황의 전형이라 비난받는 알렉산데르 6세나 레오 10세는, 신의 대리인이자 카톨릭 교회의 수장이면서도 르네상스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었다. 반면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기독교의 진리에서 이탈한 르네상스 정신을 증오했으며, 시대와 타협한 교회를 경멸했다.



유럽의 모든 지역 중에서도 이탈리아는 교황청의 소재지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일찍이 베드로가 기독교의 중심지로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를 택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서 정치는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심지어 현대 이탈리아의 정당 정치를 보아도 변함이 없다.


사보나롤라의 비극은, 바로 기독교의 중심지인 이탈리아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점이었다. 이것은 독일이라는 변방에서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와의 중대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 사보나롤라



피렌체의 지도자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메디치가의 경영은 물론 피렌체의 정치, 이탈리아 세력 균형 유지, 교황청과의 다툼,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 등으로 정신이 없는 사이, 수도원에서 속세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사보나롤라의 인생에도 일대 전환기가 찾아왔다.


1482년,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적을 옮긴 사보나롤라는, 같은 해에 열린 도미니크 수도회 총회에 산 마르코 수도원의 대표로 참석해, 타락한 성직자들에 대한 규탄의 장에서 격한 어조로 성토를 쏟아내면서부터 설교자로서의 사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2년 뒤,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시에나 시에서 처음으로 예언자적인 명제를 설교했다. 그것은 첫 째, “이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채찍을 맞게 될 것이다.” 둘 째, “교회는 이를 통해 새로워질 것이다.” 셋 째, “이 모든 일들은 신속히 성취 될 것이다.”였다. 이때부터 그는 동료 수도사들로부터 깊은 신앙심과 청렴함, 강직함으로 말미암아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수 년 동안 사보나롤라는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며 신앙을 잃은 시대에 대한 규탄과, 귀족들의 문란함, 교회의 부패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는 설교를 했다. 특히 그의 근거지인 피렌체에서는 타락한 르네상스 정신과 부패한 교회의 지원자로 메디치 가문을 지목하고, 지도자 로렌초 일 마니피코를 공격하는 설교를 자주 했다.


당시까지 피렌체는 번영을 누렸으며, 그는 민중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사보나롤라의 이러한 공격이 로렌초의 생존 시까지는 그리 큰 타격을 입히지 못 했다. 그러나 로렌초의 사후, 그의 무능력한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가 자리를 계승하자, 사보나롤라의 탄핵은 조금씩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피렌체 시 전체의 인구와 맞먹는 수의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정세에 불안을 느낀 민중은 사보나롤라의 설교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디치가는 추방되었고, 피렌체는 외국 군대 앞에 문을 활짝 열었다. 바야흐로 사보나롤라의 신정(神政)정치가 시작되었다.



사보나롤라와 알렉산데르 6세



1495년 7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 앞으로 서신을 띄운다. 이 시기에는 이미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시정(市政)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날이 살벌한 연설로 교회를 비판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서신에 나타난 알렉산데르 6세의 어조는 매우 부드러웠고, 사보나롤라의 활동을 일부 인정하면서 그를 교황청으로 초정하고 있다. 물론 이 편지에 대해 사보나롤라는 건강상의 문제와 신변의 안전, 그리고 바쁜 시정 등을 핑계로 초청을 거부하는 답장을 보낸다. 이로부터 예언자라 자칭하는 일개 수도사와 카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 사이에는 수차례 편지가 오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495년 4월,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 왕 샤를 8세에 대항하여 교황을 위시한 이탈리아 반도 열강 및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까지 아우르는 반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샤를 8세는 야욕을 접고 황급히 프랑스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때 유일하게 반 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가 있었다. 바로 사보나롤라의 지배하에 있던 피렌체였다. 사보나롤라는 프랑스 왕이야말로 교회를 개혁하고 기독교의 질서를 다시 찾아줄 희망이었다. 적어도 프랑스 왕에게 기대지 않는 한, 부패한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를 퇴위시킬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유일하게 반 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피렌체는 샤를 8세의 대패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사보나롤라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런 고립으로 인한 시민들의 불안은 사보나롤라에 대한 추앙을 훨씬 공고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로서는 샤를 8세의 퇴각으로 겨우 한 숨 돌릴 수 있었지만, 프랑스 왕이 언제 다시 이탈리아 침공의 야욕을 불태울 지 알 수 없는 시점에서 프랑스 왕에게 끊임없이 이탈리아 침공의 구실을 주고 있는 피렌체의 정치적 행보를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사보나롤라를 교황청으로 소환하려는 첫 시도가 좌절되자, 교황은 이후 좀 더 구체적으로 사보나롤라의 행적에 대해 지적하며, 이에 대해 직접 출두 해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알렉산데르 6세가 열거한 사보나롤라의 문제적 행위들은 다음과 같았다.



1.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개혁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


2. 이탈리아의 사태 변화를 광신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


3. 교리와는 상관없이, 또는 교리를 어기고, 민중 앞에서 자신을 신의 사자라고 선언했다는 것.


4. 자신을 신과 대화를 가진 자라고 말했다는 것.


5. 자기가 사람들을 속였다면,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신과 십자가에 매달린 주 예수 그리스도도 사람들을 속인 게 된다고 말했다는 것.


6. 자신의 오만방자한 말을 믿지 않는 자는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교했다는 것.



사보나롤라는 이번에도 교황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교황이 열거한 문제점들에 대해 하나씩 반박을 했다. 그는 교황이 열거한 행위들을 하나도 하고 있지 않으며, 만일 했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옳은 방향에서 행한 일들이었다는 식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이런 사보나롤라의 반박에 대해 교황은 즉각적인 대처를 취하지 않았다. 알렉산데르 6세는 좀 더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 것이다.



개혁과 광신 사이



1496년에 접어들어, 피렌체에는 갖가지 불운이 겹쳐 일어났다. 폭우로 인해 작황이 나빠져 큰 기근이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해 봄부터 피렌체에는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주도해 나가던 영광스런 피렌체는 말 없는 동상들만이 과거의 영광을 쓸쓸하게 상기시켜주는 음울한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근과 역병 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 사보나롤라는 오히려 더 힘을 얻고 있었다. 그의 연설은 점차 광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듬 해 2월, 정치적 고립이 계속되고 기근과 역병 문제도 좀처럼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자, 사보나롤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바로 ‘허영의 소각’이라 부르는 의식이었다. 피렌체 중심부의 시뇨리아 광장에 온갖 사치품들과 예술품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지른 것이다. 사치품 더미는 둘레가 72미터에 높이가 약 18미터나 되었다고 한다. 훗날 나치당의 책 바비큐를 연상시키는 대중 선동용 이벤트다.


민중들은 불타오르는 사치품 곁에서 무릎 꿇고 신의 나라가 열리는 순간을 위해 거듭 기도했다. 시민들은 호화로운 복장을 벗어버렸다. 여인들은 장신구로 스스로를 꾸미지 않았다. 사람들의 삶은 분명 이전보다 검소해졌다.


사보나롤라의 개혁은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의 전성기 때는 이교적인 주제를 가지고 호화로운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도 화풍을 바꾸었다. 특히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로 유명한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에게 깊이 심취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만년의 그림은, 젊은 시절의 진취적이고 탐미적인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음울하고 상념적인 화풍을 띠고 있다.



사보나롤라는 빵 만으로는 살 수 없는 인간들에게 빵 보다 더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에는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인간은 빵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 프랑스 왕에 대한 끊임없는 구애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 하고, 정치적 고립과 기근이 길어질수록 피렌체의 불안은 증폭되어 갔다. 이 팽배한 불안과 공포가 사보나롤라의 열성적인 설교로 억눌러져 있지만, 언제 그것이 폭발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1497년 5월. 알렉산데르 6세는 드디어 사보나롤라를 파문한다. 처음에는 사보나롤라의 주장에 동조하던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들이나 교황청 내부의 추기경들도 점차 사보나롤라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파문이 무효라고 선언하며 투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파문의 근거를 반박하는 설교를 행하고, 그 설교를 인쇄하여 피렌체 시내외로 배포했다. 이 때부터는 사보나롤라와 알렉산데르 6세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가속화된다.



1498년에 접어들어, 점차 입지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사보나롤라는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하다. 그는 유럽 각국의 유력한 왕과 제후, 영주들에게 서한을 띄운다.



“복수의 때가 왔습니다. 신은 제가 새로운 비밀을 세계에 알리고,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는 실상을 폐하께 호소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성 베드로의 배는 이제 곧 가라앉으려 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태만 때문에 가라앉으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혐오스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는 교회를 구제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더럽히는 장본인을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오랫동안 교회를 목자가 없는 곳으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신이 주신 말씀을 전합니다. 알렉산데르는 교황이 아닙니다. 그는 성직 매매로 오늘의 지위를 얻었고, 돈을 내는 자에게 성직을 팔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그의 죄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그는 기독교도가 아닙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입니다. 불신을 퍼뜨리는 악의 장본인입니다. 이제 그를 파멸시킬 때가 왔습니다.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를 퇴위시켜야 합니다. 폐하께 신의 명령을 전합니다. 좋은 시기와 장소를 고르는 것은 폐하께 맡기겠습니다. 신은 어떤 기적을 통해 제 말이 진실임을 폐하께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유럽의 군주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사보나롤라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밀라노의 영주가 가로채 교황령으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 편지가 유럽의 제후들에게 전해졌다한들, 그들이 사보나롤라의 호소에 따라 어떤 행동에 나섰을까? 확실히 세계는 교회 질서의 붕괴와 영토형 국가들의 대두라는 시대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카톨릭 교회의 틀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훗날 루터 시대에 독일 제후들이 생각했던 종교 선택의 자유란 개념은 싹이 틀 여지조차 없었다.


사보나롤라가 성급하게도 이런 호소에 나서야 했을 만큼, 피렌체 안에서 그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었다. 점차 사보나롤라에 반대하는 아라비아티파(반사보나롤라파)가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점차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방해하고, 사보나롤라가 금지한 사치스러운 복장을 떳떳하게 입고 다니는 등, 피아뇨니(친사보나롤라파)와 대립하며 사보나롤라를 자극했다. 아라비아티파 사람들은 이윽고 사보나롤라는 사기꾼이며, 광신자라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불의 심판



민중은 알 수 없는 존재다. 개개인은 타산적이고 영악해서 나름 이성적인 사고를 한다. 그러나 무리를 이루고 나면 때때로 그들의 사고는 어린 아이보다도 못 한 동물적인 것이 되고 만다. 바로 전날까지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것을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팽개쳐버릴 수도 있다. 민중의 변덕은 그처럼 무시무시한 것이다.


4년에 걸쳐 피렌체를 지배했던 사보나롤라의 실각은 놀라우리만치 어이없고 신속했다. 발단은 아라비아티파가 제안한 ‘불의 심판’이었다.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사보나롤라가 종교적 독단에서 피렌체 시의 정치를 마음대로 좌우하자, 이에 특히 반발한 것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경쟁자였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였다. 그들은 사보나롤라에게 활활 타오르는 불속을 맨몸으로 통과하는 불의 시련을 겪어보자고 제의했다. 만일 사보나롤라가 진짜 예언자라면, 신이 그가 불에 타 죽는 것을 내버려둘 리 없으니 그는 무사할 것이고, 곧 신의 사자임이 증명되는 것이지만, 만일 화상을 입거나 죽으면 그가 곧 사기꾼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보나롤라의 제자인 도메니코 수도사가 이 도전에 응했다.


이 소식은 즉각 교황청에도 전해졌다. 교황청의 공식적인 입장은 물론 신을 시험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지만, 알렉산데르 6세는 불의 심판을 중지할 것을 직접 명하지는 않았다.


1498년 4월 7일, 시뇨리아 광장에 ‘불의 심판’을 위한 거대한 무대가 설치되었다. 광장은 물론이거니와 심판장이 보이는 건물이란 건물 벽에는 죄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많은 피렌체 시민들은 여전히 사보나롤라가 오랜 의혹을 벗고 참 예언자임을 증명 해 보일 것이라고 믿었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과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은 당장이라도 심판을 시작할 것처럼 등장했다. 그러나 심판은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심판의 절차를 놓고 양측이 좀처럼 타협을 이루지 못 하고 있는 사이, 민중들은 기다림이 길어지자 점차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까지도 심판이 시작되지 못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강풍이 불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은 일제히 외쳤다고 한다.


“기적이다! 신께서 이런 심판을 원치 않으신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4년간 억눌려있던 민중의 분노는 한 순간 폭발했다. 오랜 정치적 고립에서 얻은 것은 소외감과 기근, 경제적 곤궁과 자부심의 상실뿐이었다. 사보나롤라가 주장한 신의 심판은 결코 오지 않았다. 한 순간 폭도의 무리로 변한 시민들은 4년 전 메디치 가문을 추방했을 때와 똑같이 사보나롤라파를 공격했다.


메디치가 추방을 주도했던 프란체스코 발로리는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밖에 사보나롤라 파의 주요 인물들도 죽거나 간신히 시외로 도피했다. 개중에는 도피 후에 자객에게 암살당한 인물도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하루아침에 반사보나롤라파 사람들로 물갈이 되어버린 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시 정부는 교황청으로 심판관의 파견을 요청했으며, 곧 사보나롤라에 대한 종교 재판이 시작되었다.


사보나롤라는 고문을 받고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현대에는 고문에 의한 자백이 인정되지 않지만(물론 이것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이 시대에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사보나롤라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물론 그는 성직자였기 때문에, 교회법에 의한 판결이었다. 죄명은 이단의 죄, 분파 활동을 한 죄, 성스러운 로마교회에 대한 반역죄였다.


1498년 5월 22일, 시뇨리아 광장에 처형대가 세워졌다. 사보나롤라는 처형대에 이끌려가는 순간에도, 형이 집행되는 순간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보나롤라는 먼저 교수대에서 목이 매달린 후, 그 자리에서 바로 화형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의 육체는 철저히 불태워져 그 재는 모두 아르노 강에 던져졌다. 몇몇 사람들이 강 하류에 숨어 있다가 떠내려 오는 뼛조각을 주우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뼛조각을 주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보나롤라의 화형식을 지켜보는 군중 가운데는 훗날 『군주론』을 써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마키아벨리도 있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화려했던 마지막 시기와 사보나롤라의 광신이 지배했던 피렌체의 역사를 생생하게 목격한 이 젊은이는 사보나롤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멸망한다.”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 종교개혁의 효시인가, 또 다른 광신인가



사보나롤라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엇갈리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는 사보나롤라를 마틴 루터에 앞선 종교 개혁의 효시로 보고 열렬한 추앙을 보내고 있는 반면, 카톨릭 교회의 입장은 서문에서 인용한 피우스 7세의 질문이 보여주듯 여전히 그에 대한 재평가를 보류하고 있다.


반면 종교적 지도자가 아닌 정치가 사보나롤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민중의 지지를 지나치게 믿었고, 피렌체의 정치적 고립과 경제의 붕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분명 사보나롤라는 타락한 기독교 교회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훗날의 마틴 루터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의 중대한 차이는 운동의 방향이나 교리 해석 등에 있다기보다는, 이탈리아와 독일이라는 다른 무대와 15세기와 16세기라는 시대적 차이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의 정치에는 기독교 교회의 영향력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 교회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에는 현대의 이탈리아도 성공하지 못 하고 있다. 그런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그것도 교황령과 매우 가까운 피렌체에서 다름 아닌 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마틴 루터가 변방 독일에서 교황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제후들의 보호와 든든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사보나롤라는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사보나롤라는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명민하게 움직이지 못 했다. 그는 너무 이상적이었고 순수했기 때문에 정치적 고려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탁월한 설교자이긴 했지만 무능한 정치가였다. 마틴 루터가 어디까지나 제후들 뒤에서 종교적 지도자로만 남은 데에 비하여 정치 전면에 나섰던 것은 사보나롤라에게 있어 직접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상의 좌절을 가져온 비극이기도 했다.


종교 개혁적인 면에서 볼 때 사보나롤라의 교회 비판에는 분명 타당한 점도 있다. 당시 교회의 사치와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으며, 중세적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심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보나롤라를 위시한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부패와 성직자들의 타락에만 너무 시선을 고착시킨 나머지, 르네상스라는 시대가 탄생시킨 인간적인 문화의 아름다움은 깨닫지 못 했다.


사보나롤라는 ‘허영의 소각’이라는 선동적인 정치 이벤트를 통해 민중들로 하여금 중세의 가치관으로 회귀할 것을 명했다. 이것은 분명 개혁적이라기보다는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주장이었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루터의 교회 비판에는 타락한 성직자들에 대한 분노 이면에 찬란한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우고 경제적 윤택을 누리는 이탈리아에 대한 질시도 숨어 있었다. 훗날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개신교도들이 된 독일의 용병들이 로마를 철저히 유린하고 약탈한 이른바 ‘사코 디 로마(로마의 약탈)’ 사건은 변방 독일이 이탈리아에 대해 얼마나 큰 열등감과 질투를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우리는 종교개혁의 공을 지나치리만큼 마틴 루터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쩌면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마틴 루터가 기독교 교리를 새롭게 해석하고, 신앙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6세기 이후 유럽 각국에서 점차 독립 의식이 싹트고 카톨릭 교회의 지배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사보나롤라가 활동하였던 15세기는 아직도 샤를 8세가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하고서도 정작 알렉산데르 6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그의 반지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기독교적 질서의 구속이 강했다.


마지막으로 사보나롤라의 신비주의적이고 광신적인 언행에 대해서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피렌체 등에서 행한 연설은 그 스스로도 묶어 출판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록하여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연설문에서 드러나는 그의 면모는 분명 이성적인 종교개혁가의 모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신이 보낸 예언자라고 주장했고, 신에 의한 심판이 임박했음을 설파했다. 프랑스 왕의 침공이라는 시류에 영합하여 무시무시한 예언을 쏟아내 민중을 공포에 빠뜨리고 거기에 교묘히 자신을 구원의 사도로 내세움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획득한 것은, 그 목적이 여하한 것이든 간에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피렌체의 도심에 있는 시뇨리아 광장 한복판에는 지름이 1미터쯤 되는 원형의 돌이 박혀있다.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1498년 5월 23일, 이곳에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도사는 도메니코 수도사 및 실베스트로 수도사와 함께 부당한 판결로 교수형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 4세기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이 기념비를 세운다.”


참고 문헌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시오노 나나미 『신의 대리인』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레오나르도 브루니 『피렌체 찬가』


마키아벨리 『군주론』


리돌피 『마키아벨리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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