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부터 복귀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

그렇다. 제123기 공군사관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지난 2009년 9월 14일자로 입영했던 나는, 입소 5일 만에 훈련소에서 쫓겨나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 다사다난했던 지난날들을 정리한다. 참고로 훈련소 생활 5일간의 일기는 실제로 훈련소 생활 짬짬이 쓴 것.


[#M_2009년 9월 14일 입소|less..|

군대에 갈 때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몸뚱이 하나로 홀가분하게 들어가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가입교 기간 동안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챙겨오라고 되어 있어서, 간밤에는 마치 캠프라도 가는 양 짐을 좀 꾸려야 했다.



그보다도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 것은, 그동안 연락을 통 못 하고 지냈던 몇몇 지인들에게 메일로나마 간단히 입대 소식을 전한다거나, 입대의 소회를 간략히 글로 정리하여 두는 일 따위였다.



결국 간밤에는 한 숨도 자지 못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공군교육사령부로 오후 2시까지만 도착하면 되는 것이라 아침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마 8시쯤 집을 나섰던 것 같다.



공군교육사령부 인근은 그야말로 촌 동네라 점심 식사 할 곳도 변변치 않았다. 조금 멀리 읍내까지 음식점을 찾아 나가서 점심을 어영부영 끝냈다. 1시 반쯤 사령부 안의 집합 장소까지 차를 타고 들어갔는데, 신종 플루 예방 차원이라며 가족과는 차에서 작별하라고 했다. 물론 그런 주의를 충실히 따르는 가족들은 많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집합 장소로 들어갔다. 병사 한 사람이 마스크를 건네주었다.



첫 날은 모든 것이 낯설기 마련이다. 낯설음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훗날 나의 훈련소 시절을 회상할 적에, 입소 첫 날은 아마도 가장 길었던 하루로 기억되리라. 입소하여 2시 정각부터 저녁 식사를 한 저녁 6시까지의 4시간 동안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이름 불리고 헤쳤다가 모이기를 반복하며, 2차 수험번호라든가 가소대 번호 같은, 앞으로 내 이름 대신 사용될 중요한 번호를 부여 받았다. 나는 1중대 3소대 22번이다.



식사 전후로는 차려 자세로 멍하니 대기한다. 할 일이 없이 이렇게 멍하니 있어야 할 때면,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곡이란 곡의 멜로디들을 모조리 재생시켜본다. 오후 6시 정각에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기를 하기(下旗)한다. 저녁 식사로는 흔히 급식에서 보는 제육볶음이 나왔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이 제공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8시 무렵에 사제품 수거를 했다. 일차 수거 대상은 모든 종류의 전자기기, 귀중품, 흉기가 될 소지가 있는 위험물들이다. 이런 것들을 제외하면 일단 첫 날의 사제품 수거 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 사실 소지품 검사 같은 것도 따로 하지 않는다. 아직 민간인 신분이 유지되는 가입교 기간 동안에는, 성경 외의 책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사제품 수거가 끝난 뒤 강당으로 이동하여 신상명세서 따위를 작성했고, 수건, 칫솔, 치약, 속옷, 슬리퍼 따위의 보급품을 받아 숙사로 이동했다. 숙소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넓어 쾌적한 생활이 가능해 보인다. 한 방에 2층 침대가 두 개씩 놓여 있어서, 기본적으로 4인 1실이다. 네 사람을 위해 관물대, 책상, 스탠드, 의자도 모두 1개씩 배치되어 있다. 내가 배정된 방은 명예관 2층 213호실.



9시 45분부터 씻을 시간이 겨우 15분 주어졌다. 10시 정각 소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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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_2009년 9월 15일 정밀신검|less..|

새벽 5시 50분, 기상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런 시끄러운 소리에 강제 기상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앞으로 100회 이상은 들어야 할 음악이다. 사실 아침에 처음 듣는 음악은 그날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브람스를 떠올리다가도 문득문득 이 바보 같은 멜로디가 난데없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메스꺼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튼 입소 전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로가 누적된 때문인지, 간밤에는 모처럼 숙면을 취했다. 6시 05분, 바로 식당 앞으로 집합하여 차례로 아침 식사를 들기 위해 입장했다.



오늘의 일정은 정밀신체검사. 기본적인 신장, 체중, 시력 등의 검사는 생략하고, 신체 외형 검사, 피 검사, 소변 검사, 흉부 X-ray 검사 등을 했다. 신체 외형 검사 때에는 고환 검사와 항문 검사도 한다. 즉 검사관 앞에서 알몸이 되어서 성기를 들어 올린다든가 얼굴을 향해 엉덩이를 내밀고 항문을 열어젖혀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적인 검사라고는 하지만 검사 받는 입장에서도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검사관 입장에서는 더욱 구토가 이는 일이 아니겠는가. 수백 명의 고환과 항문을 일일이 쳐다봐야 한다니 말이다.



2일차까지 특별한 일은 없고, 대기하는 시간이 길었다. 책을 압수당하지 않아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시오노 나나미의 신작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를 읽었다.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제법 쌀쌀한 관계로 야전용 상의(줄여서 야상이라고 부른다)를 지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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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_2009년 9월 16일 체력검정 그리고 불길한 조짐|less..|

입소 3일째. 별 관문이랄 수도 없는 첫 관문인 체력 검정이 실시되었다. 통과 기준이 매우 느슨한데다가 편법조차도 봐주는 관대함 덕분에 여기서 탈락할 일은 거의 없다. 타고난 기초 체력 부실에, 그나마 지난 몇 달간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나도 별 무리 없이 통과했을 정도다. 그러나 오래 달리기에서는 상당한 체력적 부담을 느꼈다. 장차 받게 될 훈련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체력 검정이 끝난 뒤 교육대 내부에 있는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었다. 널찍한 실내에 깨끗한 시설. 용장 중앙에는 커다란 공동 욕조도 있었다. 어지간한 공중 목욕탕보다 나아보였다.



오후에는 전투복, 전투화를 지급받았다. 지급 전, 신체 사이즈를 레이저 스캔을 통해 정밀하게 측정하는데, 군대에 이런 첨단 방식이 도입 되었다는 데에 감탄한 것도 잠시, 엉터리로 찍혀 나오는 수치는 애교로 봐주더라도 그나마 지급은 병사들에게 시켜서 거의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첨단 기가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체력 검정이 있었던 때문인지 저녁 식사는 상당히 호화롭게 나왔다. 음식은 실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나 솔직히 기대 이상이다.



추가 기재.



뜻밖에 일이 생겼다. 취침 전 점오 때에 내일 있을 추가 정밀 신체 검사 대상자를 호명했는데, 내 이름이 불린 것이다. 아마 오래전부터 있었던 혈뇨가 원인인 듯하다. 병원에서도 몇 번 검사 받은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원인을 알 수 없다거나 별 일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이번에도 큰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진 않지만, 아무튼 당장 내일 검사를 재실시 하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걸러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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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_2009년 9월 17일 성병이 아니냐고?|less..|

예상치 못 한 일이다. 정밀 신체 검사 대상자로 선정되어 오전, 오후로 소변을 세 번이나 받아 제출해야 했다. 교육사령부 안에 항공의무전대라고 병원이 있다. 이곳에서 내과 의사를 만났다. 나는 혈뇨 증상이 예전부터 있었고, 병원에서도 별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의사에게 얘기했지만, 의사는 오줌에 혈액이 비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백혈구가 발견 된 게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최근에 사창가 출입을 한 적이 없냐는 질문을 했다. 오줌에서 백혈구가 발견되는 경우는 주로 요도에 염증이 생겼을 때인데, 요도염의 원인이 대부분 불결한 성관계라는 것이다.



물론 나에 한해서 그럴 가능성은 없을 뿐만 아니라, 소변을 볼 때에 통증을 느낀 적도 없으니까, 정말 오줌에서 백혈구가 발견되었다면 다른 곳의 염증을 의심 해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장 쪽일까. 아무튼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의사는 내 이름을 어쩔 수 없이 심의위원회에 올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두고 봐야겠지만, 말하는 투로 봐서는 90% 이상 차수조정자가 될 것 같다. 차수조정자란 이번 기수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입영이 보류되지만, 합격자 자격은 그대로 유지되어 다음 기수에 다시 입영할 기회를 갖는 사람을 말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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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_2009년 9월 18일 그리고 쫓겨나다|less..|

잠시 뒷면 이발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아직까지 심의결과를 통보 받지 못 했다. 여기까지 온 마당이니 무사히 훈련을 받을 수 있기만을 바란다. 성경 외 도서는 모두 반납해야 한다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와는 당분간 작별이다.



훈육관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도 크게 보면 연극의 일부라는 것을 알지만, 몸이 먼저 긴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직 본 훈련은 시작도 안 했지만, 대한민국 남자들에게는 어려서부터 각인된, 혹은 이미 유전자에 새겨진, 군대 생활에 대한 근원적 공포감이 존재하는 듯하다. 우리가 여전히 민간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가입교 기간 동안 훈육관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야단치거나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경우도 없지만, 후보생들은 그래도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 조심함이 지나쳐서 바짝 얼어 있는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사회에서라면 이만큼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만사가 아무런 소요도 발생시키지 않고 처리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군대란 곳은 성인 남자들을 오그라든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 공포의 힘이란 대단하다는 것을 세삼 느낀다.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파상풍 주사를 접종하기 위해 후보생들을 집합시켰는데, 주사를 맞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 즉 귀가 조치될 사람들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그 안에 내 이름도 있었다. 결국 심의 결과, 나는 차수조정을 받게 된 것이다. 내가 기수에 단 한 명만 선발되는 일본어 통역 장교인 점까지 들먹이며 어필을 해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이런 보직이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았지만. 머리를 깎으러 목욕장으로 향하는 후보생들이 차라리 부럽게 느껴진다. 이대로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보급품을 반납하고, 집으로 택배 부칠 예정이었던 짐까지 되돌려 받고 나니 이제는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300명 정도의 후보생들 중 이런저런 사정으로 귀향하게 되는 사람이 20명 가까이나 되었다. 강당에서 귀가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한참이나 대기하면서 대위라는 사람과 수다나 떨다가, 버스에 우르르 탑승하여 입소 5일만에 훈련소를 나갔다.



버스는 나를 고속버스터미널에 덩그러니 떨어뜨리고는 떠나가 버렸다. 20분 뒤 성남으로 출발하는 고속버스 티켓을 한 장 구입하고 공중전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회의 중인지 받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내 목소리를 듣자 화들짝 놀랜다.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



파리 바게트에서 빵을 몇 개 사서 버스에 탔다. 바로 얼마 전에도 작별할 각오를 했던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다시 꺼내어 읽다가 이따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해가 서쪽으로 지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은 그래도 아름다웠다. 이날 저녁은 집에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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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_2009년 9월 29일 병원 진찰|less..|

용산에 있는 중앙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비뇨기과 진찰을 잘 한다고 해서 집에서 멀지만 일부러 찾아갔다. 하기야 가까운 분당 서울대 병원은 예약 환자가 많아 진찰을 받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의사를 만나 군대에서 쫓겨났다는 얘기를 했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었다. 한 두 차례 검사로 백혈구가 나왔다고 확진할 수 있는 것도 없을뿐더러 설령 오줌에 정말 백혈구가 섞여 나온다 하더라도 훈련을 못 받을 일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소변 검사를 다시 했다. 그리고 결과는, “백혈구는 없다.”였다. 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훈련소에서 쫓겨났단 말인가? 얼마 전 나와 함께 훈련소를 나온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그도 재검 결과 백혈구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혹시 입소 전 과음 같은 게 원인이 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무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몸에 염증이 생겼다가도 자연 치유될 수 있으니 훈련소에서의 검사가 완전히 잘 못 된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래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소변에 약간의 혈액 성분이 섞여 나오는 것은 여전했다. 이참에 다시 한 번 혈뇨의 원인을 알아보고자 정밀 검사를 받기로 했다. 혈뇨의 원인은 보통 네 가지. 혈관 기형, 결석, 염증, 그리고 암이란다. 이 중 암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문제가 될 게 없다고 하는데, 아무튼 암 검사를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점검 해 보기로 하고, CT 촬영 예약까지 했다. 결국 세포 검사를 위해 소변 한 컵을 또 받아 제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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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_그후|less..|

2009년 10월 3일



추석. 이번 추석에는 내가 가족들과 함께할 수 없을 줄 알았다. 결국 또 내가 갈비찜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리게 되었다. 갈비찜을 한 냄비 만들어 할아버지 댁에 가니, 삼촌과 사촌 동생이 나를 보고 놀랐다. 아무튼 줄곧 이런 반응들이다. 얼마 전에는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도 출몰하여 이 복잡한 사정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생각해보니 내년 설에도 나는 여전히 사회에 있을 예정이다.



2009년 10월 5일



중국어 학원과 영어 회화 학원에 등록하여 첫 수업을 받았다. 중국어는 대학에 수시 전형으로 합격한 후 몇 개월, 그리고 대학에 입학해서 대학 강의로 한 학기 배운 바 있지만, 여전히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발음과 성조를 배운다는 Grade 0은 건너뛰고, 초급 1레벨에 해당하는 Grade 1 반에 들어갔다.



영어는 회화 반에 들었는데, 등록 전 온라인으로 1차 테스트를 하고, 학원에서는 원어민과 인터뷰를 한 뒤 반을 배정 받는다. 레벨이 1부터 7까지 있다는데, 나는 레벨 5로 배정되었다.



2009년 10월 6일



CT 촬영 결과를 듣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소변 검사도 다시 했다. 여전히 백혈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혈뇨도 여전했다. 의사는, CT까지 촬영했음에도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염증이나 결석, 암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그렇다면 혈관 기형이라는 것일까? 그리고 뜻밖에도 의사는, 대장 쪽 임파선이 부어있는 것 같다며 내과 진료도 받아보라고 했다. 하여 나는 또 협진으로 내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내 배를 이리저리 눌러보며 통증이 있는지, 설사를 하는지, 최근에 몸무게가 많이 줄거나 한 일이 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어느 것에도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하니,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확실을 기하기 위해 2주 뒤에 채혈 검사를 한 번 해보자고 했다. 결국 2주 뒤 또 다시 병원 예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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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내가 입소 5일 만에 훈련소에서 쫓겨나 여전히 사회에서 비비적거리며 생활하게 된 경위이다. 현재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내 동생은 이 소식을 접하고 “부럽다, 오빠한테는 자꾸 맘껏 쉴 시간이 주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에 훈련소에서 쫓겨 날 때는 당황스럽고, 머리를 깎으러 목욕장으로 들어가는 후보생들이 부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사회로 다시 나와 며칠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주변에 연락도 못 취하고 멍하니 지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생 말처럼 마음의 짐 없이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이번 겨울에 중국 여행을 가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낡은 영어 실력을 다시 연마하기 위해 회화 학원에도 등록했다. 내년에는 아마 오케스트라 연주도 한 번 더 서지 않을까 싶다. 독서할 시간도 많아서 벌써 몇 권의 책을 읽었다. 바이올린 레슨은 아직 쉬고 있지만, 조만간 선생이 구해지면 집에서 레슨을 받을 생각이다. 사진 찍는 것에도 흥미가 생겨서 앞으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사진기를 가지고 돌아다닐 생각이다. 집에 있을 시간이 많으니까 이것저것 요리도 해볼까 한다. 전자저울 같은 것을 사서 제빵에도 도전해 보려고 생각 중이다.



무엇보다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검사 결과, 나는 몸에 그토록 소홀했음에도 아직 건강하다. 그러니 이 건강을 잘 지키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할 생각이다. 입대가 6개월 늦춰졌고, 그만큼 제대 후 인생 6개월을 손해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인생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앞에서 자르나 뒤에서 자르나 매한가지다. 27세의 6개월은 손해 봤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젊은 23세의 6개월을 얻었으니 아쉬워 할 것은 없다.



다시 한 번 후회 없이 놀고, 앞으로 블로그에 좋은 글들을 많이 남기겠다. 그렇다, 이 시간은 정말 ‘글을 쓰기 위해’ 주어진 시간인 것 같다. 대학 생활 동안 너무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쌓은 지식들을 차분히 정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늘 아쉬웠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지적 성장으로 충만하고, 심정적으로 안락하며 즐거운 생활을 보내겠다.

2 thoughts on “입소부터 복귀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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