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6월 1일


타인은 나에 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다. 나의 1/100 만큼도 알지 못 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타인에 대하여 그 사람의 1/100 만큼도 알지 못 한다. 사람들은 이처럼 서로에 대해 무지한 채로,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겪는 보편적인 경험에 의지하여 서로를 이해하는 척 기만을 떨거나 무례하게 충고를 내던지고는 한다. 27살의 애 엄마가 나에게 사랑에 대해 충고하는 기막힌 일은, 이렇게 일어난다.



이런 바보 같은 일들은 하루 이틀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나는 남에게 충고를 하고 싶어 안달하는,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사람들과 수도 없이 마주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간사한 마음이 있다. 누구나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며, 자기 경험이 보다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는 착각을 품게 된다. 이런 착각은 습지의 독버섯처럼 성장하여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다양성이 제거되고 ‘차이’에 대한 관용이 소멸된 사회에서 이 독버섯은 훨씬 유해하다. 사람들이 저마다 인생이란 다 비슷비슷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자신의 우월성을 관철하고 기만적인 자기만족에 빠질 기회라는 것은 선(先)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10년 먼저 태어난 사람은 10년 먼저 죽는다. 먼저 죽는 사람은 나중에 죽을 사람이 더 보고 누리고 경험하는 삶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할 수가 없다. 역사가 그의 죽음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는 가련한 인간들은, 자신의 삶이 뭇 사람들로부터 경배 받을 수 있는 신화로 남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 자신이 자기보다 먼저 죽을 사람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처럼, 후배들은 자기보다 먼저 늙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결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에게, 자기가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쌓았는가를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가 앞으로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할 것인가 하는 포부를 밝히는 사람보다 훨씬 덜 매력적이다. 초등학교 시절 장래 희망을 쓴 이후로는, 사람들은 줄곧 미래보다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포장하고, 신성시한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말하지 않고, 무언가를 했노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무덤에 들어갈 준비가 끝난 사람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이미 깨우친 사람은, 이승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다.



애써 젊은 시절에 자기의 인생을 남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가련할 뿐 의미가 없는 행위다. 서글프게도, 결국 죽을 무렵에 이르러 그의 삶을 칭찬하고 본받고자 하는 이가 없다면, 그 삶은 별로 칭송 받을 만한 점이 없는 그저 그런 인생인 것이다. 나는 감히 부끄러워서, 손자 앞에서도 내 인생을 자랑하지는 못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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