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8월 16일, UFG


UFG가 시작됐다. 난 원래 훈련 참석 대상자가 아니었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훈련 인원에 공백이 생겼다면서 다짜고짜 나를 상황실에다가 앉혀놓았다. 이어서 시작된 무능한 자들의 핑퐁질. 너무 화가 나서 ‘모르겠습니다.’, ‘해 본 적이 없습니다.’로 일관하다가 그냥 뛰쳐나오려고 했는데, 타고난 성실성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았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또 일은 하게 되어버리니.



12시간씩 2교대 근무로 2주간 지속 훈련이다. 오늘은 10시에 퇴근했다. 지난주에는 선생님 사정으로, 이번 주와 다음 주는 내 사정으로 레슨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내 인생이 어떤 식으로 낭비되고 있는지, 이런 때에 종종 깨닫는다. 대체 무얼하고 있느냐고 자신에게 묻는 날이면, 나도 조금은 우울해진다.



어제였나. 바렌 보임이 이끄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가 국내에서 공연을 했다. 이번에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한다지. 어제의 프로그램은 합창 9번으로, TV에서 무려 새벽 1시에 녹화방송을 해줬다. 별로 끝까지 듣고 잘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끝까지 다 듣고 말았다. 소프라노는 조수미. 소프라노가 그렇게 두드러지는 곡은 아님에도(그리고 비교적 카메라가 4명의 독창자를 고루 비춰주려고 노력했음에도), 조수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한편 바렌 보임. 아, 그도 늙었다. 사람이 늙으면 눈빛이 변한다. 젊은 예술가의 시선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이상을 응시하고, 늙은 예술가의 시선은 내면의 추억과 회한을 쓰다듬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음악가들이 모여 만든 이 기적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바렌 보임은, 어느 덧 자기가 걸어온 삶 속에 구축된 하나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관객의 매너에 대해서 코멘트. 나는 악장과 악장 사이의 박수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박수를 치지 않는 게 에티켓이기는 하나, 그것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감상자들 사이에서나 통용이 되는 이야기다. 한국인에게 음악이란, 마음에 들면 언제든 박수칠 수 있고 아는 멜로디면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음악 감상의 자세에 있어서 야만하다고까지 칭해졌던 이탈리아인들과 기질이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들은 서양의 클래식도 모르거니와 동양의 고전도 모른다는 것(나도 동양의 고전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에티켓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진지하게 마주하고 탐구하듯이 파고들어야만 즐길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음악을 듣는 자세가 어떠하고는 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건 자기가 즐기는 음악의 속성을 알면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니까.



그래도 4악장 중간에 터져 나온 박수는 너무 심했잖아! 성남시향이 베토벤 9번 한 곡을 연주하는 동안 7번의 박수가 터져 나왔던 게 떠올랐다. 연주도 개판이었는데 그렇게 박수를 남발하는 건,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라 강박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어제는 3시간도 못 잤다. 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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