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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천 만 원의 돈으로도 하루 저녁의 행복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훨씬 더 적은 돈으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지혜다. 그 지혜는 지식과 경험의 산물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샤인Shine이라는 영화가 있다. 한 남자의 두서없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 그 남자는 유태계이고,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병자이고,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이름은 데이빗 헬프갓David Helfgott. ‘신의 도움Help of God’을 연상시키는 자기 성(姓)을 스스로 비웃는 그는, 라흐마니노프 3번을 연주하다가 미쳐버렸다.

라흐마니노프가 젊은 시절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야심차게 작곡한 교향곡 1번을 공개한 뒤 절망적인 혹평에 직면했고, 이후 우울증에 걸려 수 년 간 작곡에는 손도 대지 못 했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겨우 심리적으로 재기한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여 단번에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얻지만, 본래 귀족 가문의 태생이었던 그는 트로츠키의 붉은 군대가 동토를 피로 적실 때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부터 자신을 평생 따라다닐 새로운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다. 바로 향수병. 40년 가까운 미국 생활 동안 연주자로서는 평판이 좋았고 공연도 많이 했지만, 작곡가로서는 변변찮은 곡 몇 개를 쓰는 것에 그쳤다.

격동의 20세기. 라흐마니노프는 드뷔시,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가장한 농민들의 2월 혁명과 타이타닉 호, 우아한 레이스 부채를 든 귀부인들이 얌전히 앉아있는 살롱 대신 천재를 ‘소비’하려는 호기로운 대중들로 가득 들어찬 연주회장, 리코딩 기술과 재즈 밴드의 시대를 살기도 했다. 한 예술가의 업적은 어떻게 평가 받아야 할까. 그 어떤 예술가도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모든 예술가는 어떤 식으로든 과거에 빚을 지고 있는 시대의 산물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9세기 낭만주의와 20세기 자유자본주의의 결정(結晶)이지만, 안타깝게도 새 시대의 개척자는 되지 못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최후의 낭만주의 작곡가.’ 그러나 구닥다리 과학이론은 폐기되거나 잊히고 최초의 발명품은 더 나은 발명품에게 자리를 내주지만, 예술은 그 대체 불가능함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력을 누린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대체 불가능한 그만의 색채로 그 가치를 평가받아 마땅하다(그리고 드뷔시,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 새 시대를 열어젖히고자 노력한 많은 이들 중 감히 그 누가 라흐마니노프의 ‘인기’를 이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에 서린 짙은 러시아 냄새와 차이코프스키가 물려준 정신적 유물, 20세기에 이미 당대의 현인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던 ‘뜨거운 혹은 미칠 듯한 열정’을 즐기면 된다. 한 세기 전의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아니스트 백건우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별명이다. 이런 멋진 별명은 누가 생각해서 붙여준 것일까.

“그것은 가망 없는 질문이다. 모두가 작품에 대한 충실성을 이야기하며 ‘나는 작곡가의 영혼이 되어 연주해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작곡가의 혼을 담아 하는 우리의 연주는 어떠한가. 같은 피아노로 시작했을지라도 지휘자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오고 만다. 결국 ‘이것이 진실이다’라는 말은 음악에서 사라져야 한다. 다만 설득력에 대해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지휘자 므라빈스키의 말이다. ‘진리’의 부재가 곧 진리. ‘답이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걸어야 하는 가혹한 구도(求道)의 여정. 이것만큼 모순에 들어차 있으며, 철학자를, 예술가를, 과학자를 절망에 빠뜨리는 ‘진실’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진실이다’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라는 말 자체는 어린 아이라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도의 인생이 무엇을 남겼나? 이제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깊게 파인 60대의 노(老) 연주자가, 성실했던 자신의 인생을 걸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흔적, 그가 험난한 길을 직접 걸었다고 하는 증거뿐이다. ‘나만의 연주를 추구한다.’는 젊은 연주자들의 말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은 연주자가 있었던가? 지휘자를 향해 달려가든 혹은 그로부터 멀어지든 결국 자기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 한다. 한 시점에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많은 걸음을 걸었는지는, ‘들을 귀가 있는’ 청중이라면 들을 일이다.

말러 1번

내가 유포니아에서 처음으로 연주했던 교향곡. 신입 환영회 때 어떤 곡을 연주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농담조로 ‘브루크너’라고 대답했는데 돌아온 곡은 말러였다. 변변한 연습 공간이 없어 손끝이 얼어붙을 만큼 추운 복도에서 연습했던 기억.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늦은 밤이면 동아리 방에서 전기난로를 켜놓고 연습하기도 했다. 거대한 호숫가에 서서 조약돌 하나씩을 집어던지는 듯한 막막함을 선사해준 곡. 하루 한 번씩은 들었고, 보잘것없는 결과 앞에 멋쩍게 웃음 짓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결국 지킬 수 없었던, 찌릿찌릿한 연주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곡.

태고의 신비라고 하든 아직 잠들어있는 대자연이라고 하든 불가사의한 현악기의 하모닉스 소리, 곧 소리가 만들어내는 정적. 그 정적을 뚫고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트럼펫 소리. 아! 정말 대기의 질량마저 느껴지는 원근법이로군! 그러나 트럼펫 주자를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조금 있으니까 무대 왼쪽에서 세 명의 트럼펫 주자가 쪼르르 들어온다. 그렇다, 그 트럼펫 소리는 ‘멀리서 들여오는 듯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 ‘멀리서 들려온’ 소리였던 것이다.

완벽한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한 음반 작업 중이라면 모를까, 일회성이고 관객과의 호흡이 중요한 실황에서 굳이 연주에 대한 집중의 방해까지 감수 해 가면서 ‘멀리서 들려오는 트럼펫 소리’를 연출해야 했을까? 게다가 한 트럼펫 연주자는 자기 자리를 찾아 앉던 도중 악보인지 뭔지를 떨어뜨려서 큰 소음까지 만드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1악장은 반복이 생략되었고, 2악장 이전에는 ‘꽃의 악장’이 연주되었다. 이 모든 변수들이 집중을 방해했다. 요즘은 무엇이든 ‘최초의 의도’가 중시된다. 나는 대개 ‘최초의 의도’보다는 ‘최후의 의도’를 더 중요시한다. 물론 어떤 철학자는 죽기 직전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다고 평생 반종교적 신념으로 산 그 인생이 한순간에 재평가 받는 일은 없어야한다고 말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지경이 아니라면, ‘나중의 생각’을 존중 더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확고한 신념에 따라 인생을 산 사람도, 그가 산 삶으로 말미암아 생각에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니까(간디가 젊은 시절 비폭력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이 그의 원 사상에 더 가깝다는 주장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말러가 본래 2악장이었던 ‘꽃의 악장’을 나중에 삭제했다면,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결정은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적어도 수정 이전의 곡을 ‘본의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주위 사람들의 입김에 너무 자주 휘둘린 브루크너의 경우는 예외로 하더라도).

주빈 메타 그리고 이스라엘 필하모닉

파르시 지휘자와 키파를 쓴 연주자들. 그들 사이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다.

영상으로 봤을 때는 흡사 실베스터 스탤론을 연상시키는 외모에, 위압적인 거구를 상상했지만. 실제로 보니 체구가 그리 커보이지는 않았다(이건 내가 무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를 장악하는 그의 힘은 ‘거인’ 같았고 가히 ‘불의 숭배자’다운 화끈함을 보여줬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이스라엘 필하모닉은, 그에게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완벽한 악기이리라.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라면 음악의 힘을 사용하겠다는 주빈 메타. 순수한 예술지상주의자들에게는 이 생각이 타락으로 보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오히려 너무 순진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논평 할 생각은 없다. 그 역시 현 시점에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보여줄 뿐. 판단은 역시 들을 귀 있는 청중들의 몫.

앙코르

티켓 값이 얼만데, 그냥 보낼 수 없어! 협박의 기운마저 느껴진 관중들의 끈질긴 박수에 응해 연주한 곡.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Wiener Blut. 앙코르보다는 차라리 서곡을 챙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대곡을 마주하기 전에 집중력을 가다듬을 여유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반면 무게감 있는 메인 곡이 끝난 뒤의 가벼운 앙코르는, 오히려 연주회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감도 없지 않다.

2010/11/29 01:15 2010/11/29 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