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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faello, Sposalio (Marriage of the Virgin or The Engagement of Virgin Mary) 1504 Oil on roundheaded panel, 170 x 117 cm Pinacoteca di Brera, Milano

Raffaello, Sposalio (Marriage of the Virgin or The Engagement of Virgin Mary) 1504 Oil on roundheaded panel, 170 x 117 cm Pinacoteca di Brera, Milano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 도시 밀라노에 위치한 브레라 미술관(정식 명칭은 Pinacoteca di Brera)을 찾았을 때가 생각난다. “피렌체에 우피치 미술관이 있다면 밀라노에는 브레라 미술관이 있다.”는 말을 들을 만큼 그곳에는 만테냐의 「죽은 예수」 카라바조의 「에마우스에서의 저녁」, 하예츠의 「키스」 같은 놓칠 수 없는 걸작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고대하던 작품은 라파엘로의 「성모의 결혼」이었다. 이탈리아 땅을 밟은 후, 꿈에라도 보기를 갈망했던 걸작 예술품들을 실제로 보게 될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이 작품을 만날 때는 특히나 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6년 여름,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 당시 내 나이는 만 스물. 그리고 그 때로부터 약 500년 전인 1504년 경, 라파엘로가 「성모의 결혼」을 그렸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만 스물 하나. 라파엘로 같은 천재와 나 같은 범인(凡人)을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500년 전에 나와 나이가 같았던 사내가 이룩한 업적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는, 과연 내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 나이에 와 있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그저 잠재워두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스승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그린 두 개의 작품을 참고 해 그린 것이 분명하다. 하나는 마찬가지로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 장면을 그린 동명의 작품이며, 다른 하나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건네주는 예수」다. 이 두 작품, 특히 페루지노가 그린 「성모의 결혼」과 라파엘로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라파엘로가 스승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배경은 거의 똑같고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에도 거의 차이가 없다. 인물들의 배치나 심지어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까지도 유사하다. 어쩌면 라파엘로의 그림은, 스승의 그림을 모방해서 그린 습작(習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Perugino, Marriage of the Virgin 1500-04 Oil on wood, 234 x 185 Musee des Beaux-Arts, Caen

Perugino, Marriage of the Virgin 1500-04 Oil on wood, 234 x 185 Musee des Beaux-Arts, Caen



그러나 한결 자연스러운 원근의 표현, 경직되지 않고 부드러운 움직임이 느껴지는 인물들, 그림의 스토리 속으로 관객을 빨아들이는 장치의 활용(가령 페루지노의 그림에서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나무 막대를 부러뜨리는 사내가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는 전면에 배치, 강조되었다. 이 사내의 움직임이 단조로운 좌우 대칭에 파격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관객의 시선을 유도한다.) 등 여러 면에서 라파엘로는 이미 스승을 뛰어넘는 역량을 보여준다.

라파엘로의 그림과 너무나도 유사한 페루지노의 그림은, 제아무리 라파엘로라도 태어날 때부터 거인은 아니었으며, 그 역시 하나의 난쟁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거인의 어깨, 즉 인류가 축적한 역사의 정점 위에 서는 것이 허락되는 것도 어쩌면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조르조 바사리, 「미술가 평전」)” 라파엘로 같은 천재들에게만 허락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덧 내 나이는 라파엘로가 「성모의 결혼」을 그린 나이로부터 멀어져서 그가 죽음을 맞이한 나이(만 37세)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그림을 바라보며 가슴을 뜨겁게 불태우던 스무 살 적으로부터 지난 6년여의 인생은 대체 무엇을 향해서, 과연 얼마만큼이나 나아간 시간이었을까? 때때로 세상은 너무 거대하고 그 안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 적은 듯 느껴진다. 이 광대한 세상, 무궁한 역사 속에서 평범하기만 한 한 개인의 인생이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힘껏 발돋움 해 보아도 결국 거인의 발치에서만 머뭇거릴 뿐인가?

그러나 어느 날 사람들이 무심히, 감흥 없이 지나쳐버리고 마는 하나의 미술 작품 앞에 오래도록 가만히 서서, 그 작품을 뚫어져라 응시하였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어쩌면 나의 인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도 말하지 않았던가? “화가가 낮은 지대를 그리고자 할 때에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굽어보지만, 높은 산을 그리고자 할 때는 오히려 낮은 곳에 위치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들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 하는 높고 먼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거인의 발아래 있는 나는 바로 여기에서 높은 곳에 선 자들을 바라본다.

어느 시대고 예술이라는 것은 그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실로 위대한 예술가에게 그에 걸맞은 명예를 안겨주고 부당하게 명예를 누리는 자에게서는 오히려 그것을 빼앗는 것은, 자기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에만 골몰하는 예술가들의 역할이 아니라 그 개성 넘치는 다양한 예술가들을 모두 관조할 수 있는 관객, 바로 나 같은 역사가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하며 응원하고 또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내가 그들을 평가하는 것은, 내가 그들보다 위대한 개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종 스스로는 자신을 돌아볼 수 없는 그들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바로 내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악과 미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나는 나의 소임으로 여긴다.

2013/03/13 15:31 2013/03/1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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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초, 당시 교환학생으로서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나는 겨울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했다. 이 때 평생 일본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는 오케스트라 친구 고토도 함께 데리고 들어왔다. 고토에게 생애 첫 해외여행의 기회를 제공 해 주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철저하게 무계획적인 여행이었고, 더군다나 당시에는 나 자신이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이탈리아보다도 아는 게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여행은 그날그날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좀 미련스런 여행이 되어버렸다(여행 첫 날의 코스는 연세대학교와 실탄 사격장이었다).

그래도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반드시 그 나라의 유명한 박물관은 꼭 가봐야 한다는 나의 신조에 따라, 하루는 고토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막상 박물관에 도착하니, 상설전시 외에 특별전시로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 루브르 박물관전’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애 첫 해외여행을 하는 고토에게 한국의 문화와 미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 미술품들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한글도 읽을 줄도 모르는 고토에게 “너는 상설전시를 보고 와, 나는 특별전시를 보고 올 테니.”라는 말을 하고 말았고, 결국은 고개를 젓는 고토를 데리고 같이 ‘루브르전’을 관람하게 되었다.

고토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나는 그곳에 내걸려 있는 회화들을 감상하며 내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해 고토에게 열심히 해설을 해 주었다. 지금 와서는 그때 어떤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전시회 메인 작품으로 선전되었던 프랑수와 제라르의 ‘에로스와 푸쉬케’나 외젠 들라크루아의 ‘성난 메데이아’, 그리고 부셰의 ‘목욕하는 다이아나’ 같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 몇 점은 기억이 난다. 특히 낭만파 화가 중에서는 드물게 좋아하는 들라크루아의 작품 앞에서는 그 거친 붓 터치를 감상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약 5년여의 시간이 흘렀는데, 요즘 다시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루브르 박물관전’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주제를 선정하여, 관련 작품들을 모았다고 한다. 사실 지난 2007년도의 전시회는 통일된 주제 없이 이 작가 저 작가의 그림들을 가져다 놓아 결과적으로 어지러운 ‘B급 회화들의 집합’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그에 비해서 이렇게 명료한 주제를 제시 해 놓으면 각 예술품을 창작한 작가의 명성에 구애받는 것도 덜하고, 무엇보다 관람에도 확실한 맥이 생긴다.

게다가 그리스 로마 신화다.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제 ‘아르센 뤼팽 전집’이나 ‘셜록 홈즈 명작선’ 같은 추리 소설에서도 졸업 할 때라면서, “진짜 독서를 시작해라”라며 부모님이 사준 책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였다. 대학 시절에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밤을 새워가며 읽기도 했다. 또 중학생 이래로 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을 동경했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를 특히 사랑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르네상스가 가장 찬란하게 꽃피웠던 예술 분야인 미술(회화, 조각,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내가 주로 읽던 책들은 역사책 아니면 서양 미술에 대한 교양서적들이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축약본으로나마 구해 읽은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가면 하루 온종일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보낼 정도로 회화나 조형 미술을 감상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서양의 미술사에서 성서의 이야기와 더불어 가장 많이 작품화 된 소재이다. 내가 ‘단군 신화’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더 친숙하게 느낀다고 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살짝 구름이 낮게 깔린 일요일 오후,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각오하고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으로 향했다. 관람객이 너무 많으면 순차 입장 방식으로 입장 인원을 통제한다고 들어서 걱정했지만 다행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대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입구 근처에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 주는 곳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오디오 가이드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도 나와 있어서 이미 그걸 다운 받은 우리는 그 긴 대기줄에 합류 할 필요가 없었다.

입장 자체는 원활했지만 막상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동행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떠밀리듯 관람하는 것이 싫다며 전시장 끝에서부터 관람을 하자고 제안했다. 초반부에는 미술품 하나하나를 잡아먹을 듯 감상하던 사람들도 전시 후반부가 되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설렁설렁 보고 지나가는 것인지, 확실히 뒤로 갈수록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이런 방법도 나쁘지는 않지만, 만약 전시장이 심하게 붐비지 않거나 뭇 사람들 틈에 끼인 채라도 전시물과 마주할 때는 온전히 일대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감상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면, 가급적 전시회장 입구부터 출구까지 순차적으로 관람하기를 권장한다. 살펴보니 이번 전시회는 기획자가 나름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서 신화의 서사적 구조에 따라 미술품들을 전시했다. 전시회 자체가 하나의 서사시가 된 셈이다. 그러니 뒤에서부터 관람을 하면 서사시를 뒤에서부터 읽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전시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기획자의 의도를 잘 이해할 기회는 잃는 셈이다.

1. 혼돈의 시대와 올림포스의 탄생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손잡이 두 개가 목 부분에 마치 귀(耳)처럼 달려있는, 적회식의 암포라가 눈에 들어온다. 표면에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인 거인족들과 올림포스의 신들 간의 전쟁, 이른바 ‘기간토마키아’가 묘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쪽만 뚫어져라 살피지 말고,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거기에는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인 제우스가,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번개를 집어 던지려고 하는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우스가 자유자제로 다루었던 번개와 권위를 상징하는 왕홀은 제우스의 상징이다. 또 제우스는 종종 그를 상징하는 동물인 독수리와 함께 그려진다. 이처럼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 속에는 묘사되어 있는 신이 누군가를 알려주는 상징적 도상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예비지식이 있다면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안타깝게도 너무 간략한 설명만 제공하는 오디오 가이드에는 이런 중요한 감상 포인트들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다. 오디오 가이드보다는 내가 훨씬 더 알찬 설명을 해줄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

2. 올림포스의 신들

안타깝게도 천지창조나 기간토마키아 같은 매력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은 더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이야기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안에서도 서사(序詞)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들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올림포스 신들이 인간들과 얽히면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다룬 것들이다. 전시회의 두 번째 코너에서는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을 하나씩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고대와 근대의 작가들을 통해 묘사된 신들의 모습은 저마다 개성이 넘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 신을 상징하는 도상들은 항상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의 시선을 잡아 끈 작품은 프랑수아 뤼드의 조각 두 점이었다. 청동으로 제작된, 아주 크지는 않은 규모의 조각은 내 취향에 잘 들어맞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은 바르젤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나텔로의 역작, 청동 다비드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다비드보다도 애정이 간다.

프랑수아 뤼드作 헤르메스


조각과 회화 사이의 우월논쟁은 고래로부터의 해묵은 논쟁거리인데,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내 경우, 지금껏 보아온 작품의 수는 회화 쪽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가슴을 더 뜨겁게 달구어놓은 작품은 대개 조각이었다. 평면 위에 그려지는 회화는 표현할 수 없는 입체감, 근육의 꿈틀거림까지 느껴지는 것만 같은 섬세함, 무엇보다도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 속에 정지시켜놓은 듯한, 역동성과 영속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조각의 매력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에 특히 프랑수아 뤼드의 작품 ‘신발을 고쳐 신는 헤르메스’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제 막 비행을 위해 도약하려는 듯, 몸은 솟구쳐 오르고 있다. 특히 카두케우스를 든 왼손은 하늘을 향해 쭉 뻗어있다. 펄럭거리는 망토는 벌써 바람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순간, 헤르메스는 절묘하게 몸을 틀어 오른 손으로 날개 달린 샌들을 고쳐 신는다. 그야말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한 정지’의 상태에 가두어 놓은, 긴장감 넘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참고로 헤르메스는 올림포스 신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전령으로 활동한 신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비롯한 신화집 속에서 가장 활달하면서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신이다. 전령의 신일뿐만 아니라, 나그네와 상인, 심지어 도둑들의 신이기까지 했던 헤르메스는, 역시 관장하는 영역이 넓은 만큼 예술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며, 대체로 젊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헤르메스를 상징하는 도상은 몇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날개가 달린 샌들과 두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지팡이 카두케우스다. 날개 달린 샌들은 물론 발 빠른 전령이었던 헤르메스의 능력을 상징한다. 카두케우스는 헤르메스뿐만 아니라 아폴론, 이스클레이피오스의 지물이기도 한데, 아폴론과 이스클레이피오스가 모두 의술의 신이었던 까닭으로 오늘날에는 서로 몸을 꼰 채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이 의료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신화 속에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지만 헤라의 질투로 눈 백 개 달린 괴물 ‘아르고스’의 감시를 받게 된 이오를 구하기 위해서 헤르메스가 활약하는 이야기에서, 아르고스를 이 지팡이로 두드려서 잠재우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본 작품에서도 잘 살펴보면, 헤르메스의 발밑에 놓여있는 아르고스의 잘린 머리를 확인할 수 있다.

뤼드의 또 다른 작품인 ‘헤베’는, 아마도 제우스가 변신한 듯한 독수리가 자신과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 헤베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헤르메스와 비교하면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신들과 관련된 작품이 한두 점 소개되고 있는 것에 비해, 어떤 신은 탄생부터 성장까지의 이야기를 여러 작품들을 통해 시간적 순서에 따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특히 바쿠스는 이번 코너에서 꽤 비중이 높게 다루어지고 있는 신이다. 바쿠스는 올림푸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였던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원래는 온전한 신이 아니라 반신(半神)이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세멜레가 바쿠스를 아직 잉태하고 있을 때에,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를 눈치 챈 헤라가 세멜레를 벌하기 위해 계략을 쓴다. 헤라는 세멜레의 유모로 변신하여 그녀 앞에 나타나, 당신을 매일 찾아오는 그 남자가 정말 제우스신인지, 또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으니 증명을 위해 신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 것을 요구해 보라고 부추긴다. 헤라의 꼬임에 넘어간 세멜레는 베갯머리에서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맹세하는 제우스를 향해 본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조른다. 신조차도 맹세를 깰 수는 없었기에, 제우스는 이것이 세멜레를 죽음으로 이끌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본래의 모습인 번개로 변신하고,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이가 발하는 빛에 타 죽는다. 세멜레는 재가 되어버렸지만 그 안에서 신의 기운을 받은 바쿠스가 아직 죽지 않고 발견되었다. 제우스는 바쿠스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가르고 그 안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바쿠스를 넣어 자신의 몸 안에서 기른다. 완전한 신인 제우스의 몸 안에서 성장하고 태어난 덕분에 바쿠스는 반신이 아닌 온전한 신이 될 수 있었다.

바쿠스가 다시 제우스로부터 태어나자, 제우스는 헤라의 눈을 피해 바쿠스를 니사 산의 님프들에게 맡겼다. 그곳은 님프들, 사티로스들, 푸토(아기 모습의 요정)들이 늘 잔치를 벌이는 향락적인 곳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바쿠스는 향락의 신이 되었고, 포도주를 발명했다. 훗날 바쿠스는 낙소스 섬에서 테세우스에게 버림 받은 아리아드네와 만나 결혼했다. 향락의 신으로 손꼽히는 바쿠스지만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의 아내는 아리아드네 한 사람 뿐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은 이날 전시회에도 한 점이 전시되어 있고, 역사상 많은 예술가들이 다루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티치아노가 그린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

참고로 바쿠스를 상징하는 도상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포도넝쿨이며, 그를 상징하는 동물은 표범이다. 또 바쿠스는 혼자서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고 항상 님프, 사티로스, 푸토들을 잔뜩 거느린 채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날 전시회에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성대하고 떠들썩한 결혼식 장면을 대단히 화려하게 묘사한 은제 물병도 전시되어 있다.

3. 신들의 사랑

전시회 세 번째 주제는 사랑이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그 주제처럼 달콤한 분위기를 띄고 있지는 않다. 사실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사랑은, 행복뿐만이 아니라 고통과 다툼, 증오, 심지어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코너에는 제우스의 사랑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이오, 또 그 미모로 인해 제우스에게 납치당한 미소년 가니메데스,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군신 아레스의 질투를 받아 목숨을 잃은 아도니스, 원치 않는 사랑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청해 월계수로 변해버린 다프네 등 사랑으로 인해 비극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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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폴로作 아폴론과 다프네


이 중에서도 특히 티에폴로가 그린 ‘아폴론과 다프네’는 눈길을 끈다. 아폴론에게 잡힌 다프네가 손끝에서부터 점차 월계수로 변해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폴론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역력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아폴론이 사랑의 신 에로스를 경솔하게 놀린 사건에서 비롯됐다.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다. 그는 금촉이 달린 화살을 쏘아 사람들을 맹목적인 사랑에 빠뜨린다. 하지만 때로는 납촉으로 된 화살을 쏘아 사랑이 아닌 증오로 마음을 물들여버리기도 한다. 어느 날 아폴론은 활을 매고 다니는 에로스를 보고 말했다. “애송이야, 활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단다. 활은, 무엇이든 쏘아 잡을 수 있는 나 같은 신에게 어울리지.” 그러자 기분이 상한 에로스가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의 화살은 아무 것이나 다 맞힐 수 있겠지만, 내 화살은 바로 당신을 맞힐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높이 날아올라 아폴론을 겨눠 금촉의 화살을 쏘고, 다프네를 향하여 납촉의 화살을 쏘았다. 아폴론은 그 즉시 다프네를 향한 맹렬한 사랑에 빠졌지만, 다프네는 반대로 아폴론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둘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되풀이하게 되었다는데, 결국 아폴론은 어느 날 다프네를 잡는 데에 성공하지만, 다프네는 그 순간 아버지에게 소원을 빌어 스스로 월계수가 되어버렸다. 이후 아폴론은 언제나 월계수로 자신을 치장하고 다녔다고 한다. 참고로 월계수는 하프와 함께 태양과 음악의 신 아폴론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자주 등장한다.

4. 고대 신화속의 영웅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태초의 혼돈과 신들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그 묘사의 대상이 올림포스의 신들로부터 반신, 그리고 인간들에게로 옮겨간다. 이번 전시회도 이런 서사적 구조에 충실히 따라, 후반부에는 신들이 아닌 인간들의 이야기들을 다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번 코너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야기는 바로 트로이 전쟁이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이 둘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부모) 때 초대 받지 못 한 불화의 여신이,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 사과를 결혼식장에 보낸다. 각자 자신의 아름다움이 최고라 여겼던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는 이 사과의 소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였고, 결국 이 셋은 판결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이 세 여신은 각자 파리스를 회유하기 위해 보상을 제시했는데, 헤라는 높은 지위를, 아테네는 최고의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약속했다. 결국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파리스의 짝으로 구해주지만, 그녀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결혼한 유부녀, 헬레네였다. 파리스가 헬레네를 몰래 납치하여 고국인 트로이로 도망간 것에서 그리스 국가들과 트로이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바로 이 트로이 전쟁을, 전쟁 10년째에 접어든 시점에서부터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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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제라르作 다프니스와 클로에


2007년도에 루브르 전에서는 프랑수아 제라르의 작품 ‘에로스와 푸시케’가 광고 전단에 실리더니, 이번에도 그의 작품이 광고 전면에 실렸다. 바로 ‘다프니스와 클로에’다. 이 작품 역시 4번 코너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사실 이번 전시회의 주된 맥락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로 느껴진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서기 2~3세기 무렵에 그리스 작가 롱고스가 지은 소설이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모두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였는데, 한 목장 주인이 이 두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다. 둘은 성장하면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온갖 역경을 겪게 되는데, 결국은 둘 모두 부모도 찾고 사랑도 이루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작곡가 라벨은, 이 소설을 주제로 대단히 아름다운 발레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림은 다프니스의 무릎에 살며시 기대 잠든 클로에와, 그녀의 머리 위에 화관을 씌워주려는 듯 보이는 다프니스의 모습을 너무나도 평화롭게 잘 묘사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통틀어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장 고요하고 온화하게 표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전시회의 마지막 코너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 주제들을 모티프로 하여 새롭게 창작된 신화적 이야기들을 다룬 작품 몇 개를 보여주는데, 전시회의 전체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에 크게 의미 있는 시도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번 전시회에는 비록 루브르의 명성을 실감하게 하는 명성 높은 작가들의 수작이 잔뜩 온 것은 아니지만, 카라바조, 와토, 부셰, 티에폴로, 자크 루이 다비드 등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화가들의 작품도 몇 점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관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서 전시회를 짜임새 있게 기획했기 때문에, 감상의 맥을 잡기가 쉽다. 딱히 서양 미술에 대한 애호가 없더라도, 어린 시절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그 신화 속 이야기들을 시각화 한 작품들 통해 옛 기억을 되살려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인파, 빈약한 오디오 해설 등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예비지식이 완비된 식견 있는 감상자라면 이런 것들을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2012/07/08 18:35 2012/07/0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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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Oil on Canvas 94.8 x 74.8cm
Kunsthalle, Hamburg

카스파르는 독일 출신의 낭만파 화가로, 낭만파 화가들 중에서 들라크루아나 고야만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웬만한 서양미술사 개설서에는 대개 이름을 올리고 있을 만큼 중요성을 인정받는 화가이다. 그리고 위의 그림이 흔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 일컬어지는, 카스파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낭만주의(Romanticism)’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특히 하나의 예술 사조로서 ‘낭만파 미술’이 지니는 본질이 무엇인지 늘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낭만주의 이전의 시대, 그러니까 중세는 물론이고 르네상스 시대나 바로크 시대의 미술작품 전반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식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림의 주제, 구도, 색체, 빛의 활용, 필법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낭만주의의 본질은 이런 양식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양식’의 이면에는 그것을 낳은 ‘철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낭만주의의 본질은 보다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그렇다면 낭만주의의 본질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지배한 ‘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인간의 역사에서 언제나 아폴론의 질서와 디오니소스의 광분이 번갈아 등장했던 것처럼, ‘혁명’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낳은 계몽주의는 다름 아닌 그 혁명 이후로 사람들에게서 환멸을 샀으며, 시대는 순리에 따라 감정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살았던 많은 예술가들은 계몽주의가 낳은 세상을 결국 정신의 공동(空洞)쯤으로 보았고, 자아에 대한 탐색에 들어갔다. 합리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했으며, 어떤 이상에 대해서 그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다만 동경하는 쪽을 택했다. 대체로 이정도가, 우리가 낭만주의 시대의 지배적 분위기였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설령 낭만주의 시대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가지고 바라보더라도, 이 시대에 활약한 화가들, 이를테면 고야, 제리코, 들라크루아, 터너, 블레이크, 컨스터블, 카스파르의 작업이 하나의 통일된 정신 아래에서 수행된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화가들은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확연히 개개인의 화가들에 대한 개별적인 접근, 특히 화가의 개성적인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를 관람자에게 요청하고 있는 듯 생각된다. 한때 우첼로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그림의 탁월한 원근법에 주목 해 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카스파르가 관람자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어떤 특별한 기법에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바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결국 카스파르의 그림에서 남는 것은 ‘분위기’다.

카스파르는 풍경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는 종교적 상징이 가득하며, 많은 경우에 그의 그림은 신비주의적 분위기에 치우쳐 있다. 만일 그의 그림이 그의 사상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카스파르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때로는 신과 동일한 위치에 놓이는 위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무력감과 철저한 고독을 곱씹은 사람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카스파르의 그림 속 풍경은 아름답기보다는 무거우며, 설령 사물이 캔버스를 빼곡히 채우고 있더라도 그 안에는 적요(寂寥)함만이 가득하다. 카스파르의 풍경화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사람이 등장할 때는 대체로 위대한 자연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그려진다. 압도적인 자연과 나약하고 고립된 인간의 대비가 외경심과 숭고미를 자아낸다는 것이, 카스파르의 화풍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그런데 정작 카스파르를 대변하는 그림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어떤가? 풀 한 포기 없는 거친 암반을 딛고 서서, 한 남자가 안개에 휩싸인 풍경을 굽어보고 있다. 봉우리들만 간신히 안개를 뚫고 나와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을 뿐, 안개에 가린 바위 골짜기가 얼마나 깊은지, 산맥이 얼마나 광활히 뻗어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분명 이 그림에는 적요함이 감돌고, 가슴 아릴 정도의 고독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카스파르의 여느 그림보다 크게 그려진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을 중심에 배치한 구도, 무엇보다도 풍경을 굽어다보는 시점 묘사 때문일까, 이 그림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다만 티끌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무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그림에서는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서도 체념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어떤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것은 이 그림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요, 카스파르의 정신세계에 대한 완전한 곡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림이 카스파르의 그 어떤 그림보다도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사랑받는 까닭은, 그 오해의 여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Frei Aber Einsam.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낭만주의 시대의 또 다른 예술가 그룹이 모토로 삼았던 이 말을 떠올리고는 한다.

그들은 말했다. 예술가의 삶이란 자유롭지만 고독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결국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이 아니겠느냐고.

2009/11/11 04:20 2009/11/11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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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된 일인데, 이제야 글을 쓴다. 지난 10월 25일,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서울국제아트페어 MANIF에 다녀왔다. 갑자기 현대 미술에 대한 관심이 발동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여기에 조각가인 삼촌도 부스를 냈기 때문에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요즘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기분 전환 삼아서 다녀왔다.

이 날이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는데, 그래서였는지 전시장 안에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전시장은 1층부터 3층까지. 대충 칸막이 쳐서 만든 부스가 한 층에만 꽤 여럿 되었다. 그만큼 참가 작가가 많다는 것.

한 층에 30분 정도씩 할애해서 대충 1시간 반 만에 다 돌아보고, 저녁은 삼촌과 함께 먹었다. 주차장에서 삼촌 차를 빼서 나가려는데, 주차료를 지불하더라. 전시자도 주차료를 내야하느냐고 물었더니 주차료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발생하는 비용 대부분 자가 부담이라고 한다. 요는, 자신의 작품을 많은 대중들에게 내보일 기회를 ‘구입’하는 것이라나.

원래는 MANIF 전시 관람을 마치고, 저녁 8시부터 리사이틀 홀에서 시작되는 우드윈드앙상블 연주를 듣고 오려고 했으나, 저녁을 들고 나니 시간이 애매해서 그냥 돌아왔다.

재미로 보는 현대 미술의 경향

2009/11/06 19:22 2009/11/06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