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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물건이든 굉장히 오래 쓰는 편이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 처음 사용한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수능 시험 답안지에 마킹을 했을 정도. 그렇다고 쓸 수도 없게 되어버린 고물을 끼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물건을 잘 망가뜨리지도 않고 잘 잃어버리지도 않으니 쓸 수 있는 한은 나름 애착을 가지고 오래 쓰는 편.

그런 나조차도 깜짝 놀랄 만큼 오랜 기간 사용한 아이템이 있으니, 바로 이 노스페이스 백팩이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니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것 같다. 내가 고1때라면 2002년이니, 무려 15년 전. 아무튼 고등학생 시절 내내 잘 사용했다. 2004년도 8월쯤 찍은 사진에도 이 가방을 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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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는 시퍼런 색깔의 키플링 백팩을 주로 사용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이 노스페이스 백팩을 꺼내 썼던 기억이 있다. 튼튼하고 공간도 넉넉한데다가 비를 좀 맞아도 끄떡없는, 그야말로 막 쓰기 좋은 백팩이었기 때문. 그래서 정말 막 썼던 것 같다.


2013년에 삼성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 당시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와이프가 샘소나이트 백팩을 선물해주었고, 대학원생이 된 지금까지 그 백팩을 잘 사용하고 있다. 노스페이스 백팩은 정말로 다시 쓸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도 이삿짐 꾸리는 용도로 다시 꺼내 쓴다든가 하면서 강제 수명 연장을 시켰고, 급기야 해외 자료조사를 나갈 때에는 여차하면 버려도 좋다라는 마음으로 들고나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버클은 깨지고 바닥에는 구멍이 나고 그물망은 헤지는 등, 결국 가방은 물리적으로도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 버려야 되나 싶은 차에, 와이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올해 결혼기념일 선물로 필드 워크용 백팩을 하나 사주었다. 이제 정말 미련 없이 이 녀석을 보내줘야 할 때.

 

헌 옷 수거함으로 보내버리기 전, 장장 15년을 함께 한 이 녀석의 사진을 한 장 남겨둔다.

2017/12/31 00:46 2017/12/3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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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일을 20여 일 남겨두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초음파 영상을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 표정이 굳어졌다. 아기가 자궁 안에서 성장을 멈췄단다. 말문이 턱 막힌 채 연신 눈물만 쏟는 아내를 데리고 대학병원을 찾아가니, 당장 내일이라도 배를 가르고 애기를 꺼내야만 할 것 같다고 했다.

 

별안간 입원하게 된 아내는, 전신 마취 후 제왕절개로 아기를 꺼내면 이 세상에 나오는 모습을 지켜봐줄 수가 없지 않느냐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하반신 마취만 하고 수술을 받으면 바깥세상의 공기로 첫 숨을 쉬는 아기를 안아줄 수 있으니,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간호사가 반신마취 적합도를 보겠다며 피를 뽑아갔는데, 곧 돌아와서는 수치가 기준치에 겨우 걸친다며, 아무래도 전신마취를 해야겠단다. 수술실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아내는, 마침내 수술실 안에서 마취과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며 하소연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술 직전, 마취 방법을 다시 바꾸었다.

 

자신의 배를 열어 지난 37주간 소중히 품고 있던 아기를 내보낸 어미와, 몸무게 2.03kg으로 세상에 나와 첫 울음을 터뜨린 아기는 서로 뺨을 맞대었다. 내 아내는 연신 고마워, 고마워를 읊조리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미숙아에 가까운 체중으로 태어난 아기를 급히 인큐베이터로 옮기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 이제 편히 쉬도록 수면제를 주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괜찮다며 깨어있는 채로 봉합 수술까지 다 받았단다. 나중에 회복실에서 나온 아내에게 왜 수면제를 맞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더니, 예전에 하반신 마취로 제왕절개 수술 받은 언니로부터 수면마취에서 깨어나고 나니 수술 중에 아기를 안았던 일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내는, 자신과 뺨을 맞대고 울던 아기의 그 일성(一聲), 결코 몽롱한 꿈결 너머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기는 꼬박 1주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지내고, 다시 2주를 중환아실에서 보냈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렇게 작게 태어난 아기가 기특하게도 호흡기 없이 숨을 잘 쉬고, 젖병을 물리면 마다하거나 남기는 법이 없을 만큼 식욕이 왕성했다고 한다. 아기는 3주 만에 몸무게를 500g이나 늘려서, 411일 무사히 퇴원했다. 마침 그날은, 원래 아기가 태어나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이었다.

 

꼼지락거리는 그 작은 손에, 가만히 내 손가락을 갖다 대니 움켜쥔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너희에게 줄 기쁨을 마음껏 누려라. 그리고 그 애가 컸을 때 갚아 주어라."

 

30여 년 전,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께서 아버지에게 해주신 말씀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 말씀은 다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졌다. 이 뜨거운 생명이 내 손끝을 잡았을 때,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다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전달된, 이 지혜로운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기의 이름은, 가족의 전통을 따라 한 글자로 지었다. (). 한자는 나의 아버지가 직접 골라주었다. ()과 무()와 돈()이 합쳐진 무적의 글자다. 김윤. 박유희와 김민의 딸이다.

2017/04/15 23:51 2017/04/1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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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추가적인 업그레이드나 서비스 지원이 중단된 텍스트큐브를 벗어나 전 세계인의 공용 툴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워드프레스로의 전환을 야심차게 추진했으나, 결국 갈라파고스 현상의 산물인 한국형이라는 덧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설치하는 순간, 일반적인 한국의 블로거들이 요구할 법한 모든 기본적인 기능이 갖추어져있는 텍스트큐브에 비해, 워드프레스는 계층화된 카테고리를 화면에 표시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마저 설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만큼 워드프레스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겠지만, 각종 플러그인을 검색하고 설치하고 설정을 바꾸느라 몇 시간씩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진입 장벽이 높다. 갈라파고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이국의 생태계에 적응해보려던 노력은 실패한 것이다.

 

2016/10/04 12:00 2016/10/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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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프로포즈도 한 적이 없다. 언젠가부터 결혼이라는 단어가 우리 둘 사이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고는 했지만, 특정할 수 있는 어느 날 "결혼을 하자"고 정한 것은 아니었다.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어떤 흐름에 휩쓸리고 마는 우리의 인생처럼, 이번에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덧 나는 결혼이라는 단계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이러한 이행을 매우 자연스러운 내 인생의 한 과정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혹은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언제 결혼이라고 하는 뚜렷한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와중에도 '결혼 준비'라고 하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입학식 날' 만큼이나 엄정하고 확실한 시작점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국이 광복을 맞은 지 정확히 69주년이 되는 지난 금요일부터 결혼 준비의 대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8.14 밤부터 8.15 금요일 아침까지

학창 시절에는 휴일이면 종종 오후 제법 늦은 시각까지도 잠을 자고는 했다. 아니, 고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방학 중이나 휴일의 평균 기상 시간은 오후 1시 전후였다. 아마 대학생이 된 이후로, 그보다는 좀 더 확실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한 이후로, 아무리 휴일이라 하더라도 오후 늦게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직장인이 되고나니 휴일 기상시간은 9시 전후, 늦어도 10시 반 이전이 되었는데(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나를 두고 여전히 '게으름의 죄악'에 빠졌다고 힐난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새벽닭이 울 때까지 밤을 충분히 즐길 체력이 더 이상 내게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즉, 빨리 잠들면 그만큼 빨리 일어나게 된 다는 것. 요즘은 주말이라 하더라도 새벽 2시를 넘겨 자는 일은 드물고, 제아무리 늦어도 3시 언저리에는 반드시 잠들게 된다. 그 시간을 넘어가면 그 어떤 신나는 일로도 정신을 깨어있도록 유지시키기가 힘들다.

그래도 비교적 어제는 늦게 잔편이었다. 동탄에서 지찬이와 종필이를 만났는데, 이렇게 셋이서 모인 것은 거의 정확하게 1년 만이었다. 사실 만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데, 그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만남이 그렇게 간절하지 않은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동탄이라는 동네는 내가 한 때, 그러니까 결혼은커녕 연애에 대한 생각도 없던 시절에 단기적으로는 투자의 목적으로, 장기적으로는 내가 안거(安倨)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활용하기 위해 매입한 오피스텔이 있는 곳. 최근에 골치를 썩이던 세입자를 가까스로 내보내면서 오피스텔을 청소하기 위해서도 몇 번 들른 일이 있는 낯익은 동네. 그래서 가는 길도 잘 알고 있으니, 이곳에 살고 있는 지찬이의 편의를 위해 나는 기꺼이 동탄으로 찾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찾아가는 데에야 애를 먹지 않았지만, 밤의 동탄은 낮의 동탄과는 사뭇 달랐다. 내 오피스텔 인근이 설마 그런 엄청난 환락가였을 줄이야. 저녁 메뉴를 고르기 위해 이 가게 저 가게 둘러보며 고작 몇 블록을 오가는 사이, 도대체 호객꾼이 몇 명이나 달라붙었는지! 동탄의 공원 풍경은 참으로 기이하기까지 했다. 아직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 제법 선선한 날씨에 동네의 젊은 주부들은 장바구니를 끼고 걸어가는가 하면, 어린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기도 했는데 이런 매우 일상적인 풍경 속에는 행인, 특히 남성들의 얼굴빛만 살피고 있는 호객꾼들의 무리가 마구잡이로 뒤섞여있었다. 서로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이질적인 풍경이 한 데로 겹쳐져있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몇 차례 호객꾼들의 끈질긴 제안을 물리친 끝에, 손님이 별로 많지 않은 양꼬치 집으로 들어갔다. 양꼬치 스무개 가량과 칭따오 한 병을 주문 해 놓고, 세 남자의 길고 긴 수다는 시작되었다.

1년 사이에 제법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세 사람의 삶은 1년 전보다 훨씬 비슷해졌다. 세 사람 모두 직장인이 되었고, 세 사람 모두 만나는 사람이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안주와 불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지닌 채 월급, 저축, 결혼, 주택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근심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있었다. 이 시대 착한 남자들의 자화상이란!

11시쯤 맥주 두 병으로 간단하게 1차를 끝낸 우리는 다시 거리에서 몇 차례 호객꾼들의 집요한 접근에 시달리다가 24시간 커피숍에 들어가 앉았다. 거기서 다시 우리들의 수다는 12시를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정확히 새벽 1시였다. 서둘러 한 시간 전쯤 방전되어버린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 유희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깨어있었다. 아니, 어쩌면 깜빡 잠들었다가 소리를 듣고 일어난 건지도 모르지.

내가 잠든 건 아마 2~3시쯤이었던 것 같다. 깨어나 보니 9시 반쯤이었다.

2014/08/18 01:21 2014/08/18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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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내가 유희를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가지만, 이번 주말같이 특별한 경우에는 유희가 서울로 올라오기도 한다. 부모님은 홍콩에서 공부 중인 동생을 위로방문하기 위해 금요일 아침 비행기로 떠났다. 나마저 대전으로 내려가 버리면 이 집에는 돌봐줄 사람도 없이 방치될 개가 무려 세 마리나 있다. 화이트 데이도 끼어있는 주말. 그래서 유희를 집으로 초대에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계획은 훌륭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최근 수원의 사업장에서부터 서울로 파견되어 근무 환경이 싹 바뀐 탓에 다시 모든 것에 새로 적응해야만 했다. 게다가 특별히 할 일도 없이 한가로웠던 전 사무실에서와는 달리, 이곳에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하루 수십 통에서 많게는 백통 이상의 전화를 걸어대며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나는 비교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물론 그것은 내 주위 환경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무관심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환경이 바뀌게 되면 긴장을 하게 되고, 그 긴장이 풀릴 즈음 이렇게 한 번 앓는다. 아무튼 금요일은 최악의 하루였다. 거의 나오지 않다시피 하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전화 통화를 해댔으니, 나중에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열이 오르는지 오한까지 들었다. 강남에서부터 양재역까지 유희를 만나러 가는 겨우 한 정거장의 거리가 만 리길처럼 느껴졌다. 사무실 답답한 공기에 질려 일부러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건물 밖으로 걸었는데, 초봄 추위에 사시나무 떨 듯이 떨다가 헛구역질까지 할 뻔했다. 화이트 데이에는 보잘 것 없는 사탕 한 봉지를 사주더라도 뭔가 의미 있게 엽서라도 써 주고 싶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정신을 놓고 지내다보니 그마저도 챙기지 못 했다. 서울까지 올라오는 유희를 화이트 데이에 빈손으로 맞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 텀블러를 하나 샀다. 몇 달 전부터 표면이 다 상한 스타벅스 텀블러를 사용하는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어서다. 내가 선물을 고르는 기준은, 물론 상대방이 무엇을 받으면 기뻐할까를 먼저 생각하긴 하지만, 세부적인 것을 고르는 점에서는 결국 내 맘에도 드는 것을 고르게 된다. 상대방에게 주는 선물에는 상대방의 취향에 대한 고려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내 취향도 반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표면에 갈색이 그라데이션으로 도색되어 있는 금속 재질의 텀블러를 하나 샀다. 거기에다가 초콜릿 한 봉지는 덤으로. 텀블러를 구입했더니 공짜 음료 한 잔을 준다고 하기에 몸을 녹일 겸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들고, 다른 한 손에는 텀블러와 초콜릿이 든 가방과 또 점심 때 회사 와인 할인 판매 행사 때 구입한 와인 한 병을 들고, 미열에 들뜬 몸을 간신히 휘적거리며 양재역으로 향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지, 유희는 나를 보고는 대번에 걱정부터 했고, 꼭 같이 가야할 곳이 있다며 정자역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철 5번 출구로 나아가 24시간 의료원에 데려가 기어이 링거를 맞혔다. 약기운 덕분인지 체력이 돌아온 듯하여 금요일과 토요일은 신나게 놀아재꼈으나, 결국 링거의 힘은 거기까지였는지 유희가 떠난 토요일 밤부터는 다시 앓아누웠다. 일요일은 거의 침대 아니면 소파에 누워서 보낸 듯하다. 일요일 저녁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온 엄마가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따뜻한 국물이 있는 먹을거리를 좀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엄마가 사온 설렁탕을 뜨끈하게 데워서 밥까지 말아 한 그릇 해치우고, 지어온 약에 홍삼 엑기스, 쌍화탕까지 마셨다. 이제 한 숨 푹 자고나면 내일은 좀 개운해지지 않을까. 비교적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책이나 읽다가 눈을 붙여야겠다.
2014/03/16 22:41 2014/03/1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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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기분상으로는, 혹은 어쩌면 사실상으로도 군대에 한 번 더 간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나는 국내에 가장 큰 그룹의 한 계열사에 몸담았고, 지금은 그 모든 계열사의 인력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 흔히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다소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내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있고, 여건이 훨씬 더 악화되기는 했지만 적은 시간이라도 연습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말이면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간다. 차 안에서는 주로 중국어 회화 교재나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유성 중심지에 위치한 작은 오피스텔 하나를 임대해서 쓰고 있다. 내 개인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어느 새 여자 친구와 공유하는 공동의 공간이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군대에 있을 때 분당의 집이 그러했던 것처럼, 직장인이 된 지금 주중의 번잡한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홀가분해 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제법 유쾌한 일이다. 서울,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하고 번쇄하다고 할 수 있는 강남 한복판으로 출근을 하게 된 이후로는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었다. 대중교통 이용이 극히 제한되는 집의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환승 주차장까지는 차를 몰고 가야만 하지만, 일 주차비는 신분당선 이용객 할인과 경차 할인을 적용 받아서 1,500원 선에서 해결하고 있다. 이 정도면 파견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월 식대 비에서 어느 정도 충당할 수도 있겠지.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그리고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짬을 내에서 하는 독서가, 주말 바이올린 레슨과 더불어 내 정신의 건강을 지켜주는 보루라고 할 수 있겠다.
2014/03/11 00:46 2014/03/1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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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잃는 것. 꿈을 잃는 것. 삶을 잃는 것.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완벽한 평형을 이룬 양팔 저울, 그 어느 한 쪽 위를 어쩌면 충동적으로 톡 건드렸을 때 마음은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인생은 종국에는 회한만을 남긴 채 끝나버리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 끝에 다다랐을 때 어쩌면 오늘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

2013/10/30 23:56 2013/10/3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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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무난하다’라는 한 마디 말로 정리되어버릴 수도 있는 나의 인생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갈 수도 있고, 돌아서 갈 수도 있지만,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길이 있다. 나는 글을 써야만 한다.

2013/10/28 23:43 2013/10/28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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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한 일이 있어 퇴근 후 아산에 다녀왔다. 밤 10시에 대전에 돌아와, 바이올린 연습을 겨우 두 시간 하고 12시를 넘겨 방에 돌아왔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생활을 해 왔다. 하루 3시간도 채 자지 못 하는 날이 많았고, 덕분에 깨어있는 시간 중 많은 부분을 약간은 취한 듯 멍한 상태에서 보내야 했다. 심지어는 늦잠으로 인해 사무실에 지각하는 매우 드문 사태까지도 벌어졌다. 운동도 3주 째 못 가서 몸이 많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전에 없이 활기에 넘치며 행복감으로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불규칙한 생활은 이번 주말로 끝나게 될 것 같다. 결국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게 되겠지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의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어쩌면 내가 발을 내딛는 곳은 전혀 새로운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어본다.

2013/05/08 01:41 2013/05/08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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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든 수면 시간만큼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고뇌였다. 숱한 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보낸 끝에 이제 마음을 굳히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자 하나, 운명이 내 앞에 문을 열어놓을지는 알 수가 없다.

2013/05/07 01:51 2013/05/07 0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