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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에서는 ‘부흥’이나 ‘쇠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어버리는 시대가 실제로는 50년이나 100년에 걸쳐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시간은,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의 생애 대부분 혹은 전부에 해당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최고 전성기를 살았던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넘치는 자긍심으로 ‘피렌체 찬가’를 썼다. 그러나 그보다 딱 100년 뒤에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이탈리아를 보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를 지었다. 이렇게 보면 과거 수천 년 역사의 흐름을 꿰뚫는 지성인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라는 감옥에 갇힌 나약한 수인(囚人)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는 너무나도 완만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의미와 마주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아내면서 이 순간도 역사의 한 과정임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이 역사적 시간에 내던져진,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의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해서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시대, 바로 오늘, 바로 지금, 바로 이 공간과 나의 만남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시대에 갇히고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 가능성으로서 잉태되어 있는 것이다. 시대는 역사적 개인이 걸어가야 할 저 떳떳한 대로(大路)를 향해서 거대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인간은 모두 죽을 것이나, 역사는 이어질 것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당신을 존중한다. 당신은 당신 나름의 방식으로 당신이 짊어진 사명을 수행하겠지. 60세의 당신은 이제 남은 인생을 국민을 위해 바치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지금 27살인 나는 당신보다는 더 오래 살 것 같다. 나 역시 나의 시간, 나의 능력, 나의 육체를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바치겠다. 나는 당신보다도 더, 어쩌면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이 나라를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이 나라의 이름이 아니라, 바로 이 나라의 사람들이다. 나와 나의 세대는 당신과 당신의 세대가 만든 세상을 산다. 그러나 나의 손자손녀 세대의 사람들은 나와 내 세대가 만든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불과 한 두 세기 안에 우리 모두는 다시 책에 기록된 단 한 줄의 역사 뒤로 숨게 되겠지만, 우리가 이 시대를 밝히는 데 썼던 정의로운 정신의 횃불은 다시 후배들의 손으로 건네져 언제까지나 이 땅위의 사람들 앞에 바른 길을 밝혀 줄 것이다. 잊지 말기를! 시대는 누군가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들면, 누군가로 하여금 그것을 지켜보게 만들고,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나를 역사가로 만들었다는 것을!

2012/12/20 01:41 2012/12/20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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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한 번 잘못 한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투표는 고사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정부가 들어선 적도 있지만, 이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마치 한 번의 투표로 모든 미래가 결정되고, 한 번의 실수로 앞날이 절단날 것처럼 떠들어대는 후보자들의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정치라는 건 아주 이성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다분히 감정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선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에게 보장된 거의 유일한 합법적 분탕질의 기회다. 시민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자신들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2차 세계대전 때보다도 더 많은 피를 흘리며 이룩한 혁명의 유일한 결과물이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얻고자 하는 목표이다.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한 가지 점에서 대단히 경탄해 마지않는데, 그건 여전히 모택동의 초상화를 광장 한 복판에 걸어놓고 신처럼 숭배하는 일당지배국가 중국과, 3대 세습이라는 전근대적 독재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과 인접 해 있으면서도 시민의 자발적 투표에 의한 정부의 구성이라는 민주정치의 기본 질서를 거의 완벽하게 실행하면서, 한국보다 100년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국의 길을 걸은 일본보다도 한 발 앞서서 정권 교체까지 이룩한 점이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측면에서 투표라는 권리를 행사하고 그 결과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국가와 민족은 현대에조차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한국인들의 시민 의식은 상당히 성숙하다고 할 수 있다.

선거라는 것은 큰 틀에서, 시민들의 요구와 열망을 확인하고, 방향을 정하는 기회일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또 행정적으로 구체화 해 나갈 것인가는 선출자들이 임기 중에 고민할 문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 선거’를 통해 평가 받게 될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과정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시민이다.

2011/10/26 01:50 2011/10/26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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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록 많은 서양인들을 만나보지는 못 했지만,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습된 관용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학습된 관용 정신이란 나와 다른 사고방식도 존중하는 이성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웃 나라와의 백년에 걸친 전쟁이나 구교와 신교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세계 대전의 골조차도 극복하게 만드는 화합의 힘은, 내 생각을 조리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설득력과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관용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이슬람’이다. 요즘 서양 특히 유럽의 사람들은 이슬람에 대해 과거 십자군 전쟁 시대 못지않은 증오심 혹은 혐오를 표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중동 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에 따른 다수의 난민 유입이 원인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유럽 사회는 전체 인구의 약 7%가 이슬람교도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이슬람 국가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이다. 프랑스의 경우 이슬람 인구의 비율이 가파르게 증가하여 두 자리 수를 넘어섰다. 복지 혜택이 풍족한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에도 이슬람 난민들이 물밀듯이 들이치는 형국이다.

국가와 국가의 대립, 구교와 신교의 대립, 슬라브, 노르만, 게르만, 골, 유태인 등의 민족적 대립, 그리고 성적취향의 대립마저 극복할 것처럼 보였던 유럽 사회이지만, 거센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이것이 테러라는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왜 이슬람은 유럽에서 관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 할까. 비록 이슬람이 기독교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통합을 이루어온 유럽 사회의 시각에서 보자면 종교적, 인종적으로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지만, 수천 년간 교회에서 박해를 받아온 동성애자나 유대인을 사회에서 추방하자는 의견이 여전히 존재한다고는 해도 정치적으로 큰 공감대를 얻지는 못 하는 상황에서, 유독 이슬람에 대해서만은 적개심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인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이 이슬람쪽에 있다고 주장한다. 재밌는 것은, 유럽인들의 입장에 서면 당연하게 들릴 이 주장이, 비유럽권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다. 아시아인인 우리에게도 이슬람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다.

얼마 전, 이란의 여자 축구 대표팀이 국제 경기에 히잡을 쓴 채로 출전했다가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몰수패를 당한 일이 있었다. 전 세계인의 스포츠인 축구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데에 대하여, 보수적인 협회측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국제 경기의 룰을 지키지 않고 끝까지 히잡을 고집하는 이란팀을 이해하지 못 했다. 사실 이런 여자 축구 대표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딱하다. 이란은 여전히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며, 국가의 법률은 종교적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성립하고 있다. 만일 이란 여자 축구 대표팀이 국제 경기 규칙을 지키기 위해 히잡을 벗어버렸다면, 경기는 진행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조국으로 돌아갔을 때에 그 팀이 존속하지 못 할 가능성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광신적 남성들의 폭력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우려까지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슬람은 여전히 종교 중심적인 사회다. 즉 사회의 구성원들이 종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과 두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사회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근대의 사상가들은 근대 국가의 법률과 종교상의 교리를 분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근대 국가를 설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그대로 떠안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 어떤 철학보다도 강하게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성립하는 합리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성직자들의 편익을 위해 신자들을 희생시켜도 그것의 불합리성을 지적할 수가 없다. 교리는 위에서 아래로 향할 때는 성직자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되지만, 아래에서 위로 향할 때에는 절대성을 부여 받아 결코 비판될 수 없는 것이다.

루소도 사회계약론에서 국가 전체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은 완전히 합치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시민 혁명기의 사상가들은 완전한 이성에 의한 국가를 꿈꾸었기 때문에 종교적 비합리성을 근절시키기 바랐고, 프랑스의 혁명 정부는 유럽 사회를 교회와 단절시키려는 시도도 했다. 그들은 심지어 ‘일요일’을 없애기 위해서 한 주를 열흘로 바꿔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시도는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 했지만, 오늘날 유럽인들은 여전히 많은 수가 기독교 신자이고, 교회를 나감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가치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교리가 낳은 편견에 사로잡혀서 합리적이지 않은, 그리고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지 않는 주장을 제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로 간주 된다. 동성애는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죄악일 수 있지만, 민주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교회는 여전히 피임과 낙태에 대해 반대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그것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이 인정된다.

유럽에서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보다 축소된 영역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가 아닌, 지금 살아있는 세계에 관한 한 종교보다는 이성적은 토의, 합리적 근거에 기초한 법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권익을 보호하는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에, 유럽 사회는 관용 정신을 교육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확실히 덜 진보되었다. 이것은 밥을 숟가락으로 먹느냐 손으로 먹느냐 처럼 문화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논할 대상이 아니다. 소수의 권력자가 비합리적인 사회 구조를 교모하게 이용하여 다수의 자유를 침해하고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어떤 문화의 산물로도 인정될 수 없다. 이란의 정치 지도자들은 공개적인 연설을 통해서 공공연하게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비난한다. 남자들은 여러 여자들을 아내로 삼지만,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관계한 여자는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다. 이것이 한 사회의 문화로 법률로 도덕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유럽으로 밀려드는 무슬림들은 서구의 합리적인 가치관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민을 간 것이 아니다.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주를 한 것이다. 이 이슬람인들은 유럽으로 치면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서 현대 사회로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주어지는 사회보장 혜택을 마다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한 그 어떤 시민의 의무도 수행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인 사고와 관용의 정신은, 종교적 배타주의에 젖어든 그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유럽의 관용 정신이 그들을 포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유럽 사회가 무슬림들에 의해 이슬람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머지않아 무슬림들도 종교적 광신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배우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첨병은, 지금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유럽 사회의 이슬람들이 될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앞장서게 될 것이다. 유럽은 일, 이백년이나 앞서서 이것을 이뤄냈지만, 인류의 장대한 역사에서 보자면 겨우 진보의 한 걸음을 먼저 내딛었을 뿐이다.

2011/08/10 00:19 2011/08/10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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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민들이 정치에 대하여 갖는 영향력 이상으로 시민의 권익이 배려되는 사회적 시스템을 본 일이 없다. 만일 시민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산업 부르주아들이 제1, 2신분이었던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 권력을 뺏어오는 방법으로서 시민들의 참정권을 고안해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종교적 박해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경제적 박해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투표권은 종종 지배 계층의 무분별한 권력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로 존재하지만, 보다 강력한 장치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미래의 바람직한 사회상은, 중앙 정치보다는 지방 정치가 중시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국회에서 정당간에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다툼이 거대하게 부풀려져서 시골 촌부에게까지 확대 전파되도록 하는 거대 신문들은 없어지는 대신, 지역의 이해와 관심사를 다룬 지방지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실생활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거대한 정치 담론들에 너무 많이 휘둘리고 있으며, 지배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설계하는 정책들에 대해 수동적인 대응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가들이 결코 자신들의 특권을 희생시키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중국과는 달라서, 시민들이 한 정치가의 정치적 생명을 끊을 수도 있고, 한 정당을 파괴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정치 및 경제 분야의 지배자들이 사회 시스템 속에 교묘하게 심어놓은 각종 방해의 장치들과 시민들 스스로의 무관심 때문에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지 못 하다.

아마도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힘겨루기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현상일 것이다. 오늘날 피지배 계층은, 과거 신민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 봉기나 납세 거부보다는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만일 정치를 통해 국가의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일부 세력이 아닌, 다수 국민들의 권익이 추구되어야 한다면, 그런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힘을 적절히 활용해야만 할 것이다.

2011/07/26 02:59 2011/07/26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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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때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군대를 일으키고 필요한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하여 국가의 가용한 모든 인적 자원과 생산 수단이 동원된다. 이때 국민 개개인은 징병을 당함으로써 신체적 자유가 구속되고, 자본과 생산 수단이 국가에 의해 점유되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을 위한 자유로운 경제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자유의 침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 시에는 언론의 자유, 정치적 행위의 자유 나아가서는 생각의 자유마저 빼앗기게 된다. 가령 전쟁의 무익함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를 제시하거나,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는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는 행위는 때때로 도덕적 비난을 넘어 법적 제재를 받기도 한다.

전쟁 시에 개인들이 이런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용인하는 이유는, 전쟁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대사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일차원적인 이유는 적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다. 인간은 쳐부수고 싶은 적이 있을 때에는 그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이 상처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동물이다. 적개심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합리적인 판단을 방해하며, 감정에 따라 분풀이를 하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증오심이 국가나 정당의 선전을 통해 마치 긍정적인 에너지인 것처럼 둔갑되는 경우는 왕왕 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은 이른바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 영국, 프랑스 국민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독일인 병사들을 더 많이 살해하고, 그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강화 조약을 맺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광스러운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자랑스러운 조국은 동시에 전쟁의 광기로부터 벗어나 합리성을 되찾을 것을 역설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거나 그들을 지위에서 끌어내리거나 심지어는 감옥에 처넣어버린 나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승리자들을 그토록 만족시켰던, 패자에 대한 가혹한 처사는 이후에 더 큰 전쟁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증오심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맹목적이 되어버린 사람만큼 통제하기 쉬운 대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추기는 이 수단은, 오늘날의 정당정치 체제에서도 대단히 유효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서만 권력을 얻을 수 있다. 이론상으로 그 권력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위임받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은 권력의 주인인 지지자를 가장 두려워해야 하며, 국민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즉 정당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가장 만만하게 본다. 한편 국민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지지하지 않는 정당의 정책에만 늘 비난을 퍼붓는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적개심과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정치인들은 적(敵)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 공적인 경우에 그러하다. 국가 원로와 경제인과 엘리트들을 서민의 적으로 돌리거나, 노동자와 대학생을 자유주의의 적으로 돌리는 일은, 거의 언제나 특정 정당에게 유리하다. 국민들이 어느 한 편견의 지지자가 되어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더 많이 증오하고 비난할수록, 정당은 실제 정책의 방향성이나 그것의 실천 여부와는 상관없이 확고한 지지기반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단체든 자신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그렇다면 ‘정치적 화합’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놓는 한, 화합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방법은 국민들이 똑똑해지는 것이다. 관용은 분명 증오심보다는 격조가 있는, 추구할 만한 덕목이다. 그러나 관용의 정신은 단지 그것이 도덕적인 가치라는 이유만으로 추구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감정이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이유 때문에도 반드시 추구되어야 할 가치이다. 우리는 정치인이나 언론이 즐겨 언급하는 범주, 이를테면 ‘서민’, ‘학생’, ‘지역민’, ‘고용주’ 따위에 스스로를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국민은 누구나 어떤 범주에라도 포함될 여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 기준을 명확히 하고, 다른 생각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 시민의 자격이다.

2011/07/19 00:15 2011/07/19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