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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騎士)이자 가수인 탄호이저는 천성이 오만하며 절제보다는 탐락을 미덕으로 여기는 자다. 용모가 수려하고 노래 솜씨가 뛰어나서 그를 흠모하는 아가씨들이 많았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 방자한 청년에게 걱정스런 시선과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탄호이저 역시 순수니 절제니 신앙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전통의 미덕이라며 고수하고 있는 이 촌구석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는 진심으로 이 따분한 마을은 자신이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여겼다.

결국 탄호이저는 길을 떠났다. 관능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열정에 있는 그대로 도취되기 위해, 이윽고 환희의 마력에 휩싸여 영원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 그리하여 그가 도착한 곳은 베누스베르크, 즉 ‘비너스의 도시’였다. 술에 취한 사티로스와 목양신들이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을 거느리고 흥청망청 향락을 벌이는 무릉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매력적이며, 꿀보다도 더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비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잘생기고 누구보다도 노래 솜씨가 뛰어나며 관능에의 욕망으로 충만한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의 마음을 사, 그녀가 지배하는 쾌락의 정원에서 신과도 같은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탄호이저가 하프를 타며 노래를 시작하면 어느 새 비너스는 그의 등 뒤로 다가와 흰 팔로 탄호이저의 늠름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부드러운 가슴을 등 뒤에 맞대며 귓가에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탄호이저는 정념이 솟구치고 피가 끓어오르며 하프를 타던 손을 멈추고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비너스는 이 세상의 모든 미를 합한 것보다도 아름다웠고, 이 세상 모든 사랑의 기교를 몸소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일찍이 꿈꿨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 비너스의 도시에서, 그러나 탄호이저는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늘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요정들은 탄호이저의 노래 소리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비너스의 빛나는 얼굴도 더 이상 고향 마을 처자들의 소박한 용모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관능에의 진한 욕구가 식자, 침대 위에서의 향락도 더 이상 그를 사로잡지 못 했다. 그러자 탄호이저에게는 갑자기 비너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솟구쳤다. 마치 자신이 비너스의 포로가 되어, 잘못된 향락의 길로 빠진 피해자처럼 생각되었다. 가슴 한편에서 새로운 삶, 무절제와 탐락을 벗어던지고 보다 의식이 있고 신사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탄호이저의 눈은 새로운 의지로 반짝이는 듯했다.

떠날 때가 되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비너스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탄호이저를 저주했다. “배신자! 당신을 붙잡지는 않겠어. 그러나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곧 당신의 파멸이 될 거야. 결코 평화를 찾지 못 할 사람. 결코 용서를 얻지 못 할 그대. 그러나 치유를 원한다면, 그때는 내 품에 돌아오게 되겠지.” 그러자 탄호이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당신에게서 평화와 안식을 찾지는 않을 거요. 나의 구원은 성모 마리아에게 있으니까!”

베누스베르크에서 빠져나오자,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같았다.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새들의 지저귐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축복하는 소리로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자못 신사적인 태도로 말을 몰았다.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내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 삶을 살리라. 참된 사랑을 찾고, 참된 신앙을 가지리라!

이윽고 탄호이저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탄호이저의 마음 한 구석은 무거워졌다. 한때 그토록 거만하게 굴었던 나를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들을 경멸하고 오만한 태도로 마을을 떠났는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다니! 마을 근처에 이르자 몇몇 사람들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과거에 오만방자했던 탄호이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그러나 탄호이저가 신사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인사를 하자, 마을 사람들은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그들은 탄호이저가 오랜 시간 넓은 세계를 여행하며 드디어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재능 있는 젊은이가 성숙해서 돌아온 것을 크게 반겼다. 탄호이저는 마음 한 구석에서 죄책감을 느꼈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에 이내 그 죄책감을 벗어버렸다. 그는 정말 자신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성숙한 인간,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 지난날 탄호이저에게 그토록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던 그녀가 아직도 그를 못 잊고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바르트부르크의 노래의 전당에서 오래전에 떠나간 탄호이저를 아직도 그리워하며 회상에 잠겨있었다. 볼프람의 안내를 받고 노래의 전당으로 간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와 재회하고, 그녀에게로 자신을 이끈 기적을 찬양하며 이 조신한 아가씨의 마음을 다시 휘어잡기 위해 달콤한 말들을 쏟아냈다.

바르트부르크의 영주는 탄호이저의 귀환 소식을 듣고 그를 환대하는 의미에서 노래 경연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경연 대회를 통해 탄호이저가 그동안 어떤 경험을 했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탄호이저는 흔쾌히 경연 대회의 참가를 수락했다.

이윽고 노래 경연 대회가 시작되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노래의 주제로 던져지자, 이 정숙한 도시 바르트부르크의 사람들은 저마다 진실 되고 고귀하며, 정신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자코 듣고 있던 탄호이저는 점점 이 순진한 사람들의 생각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사랑의 본질이라고? 이 자리에서 나보다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가 뭐래도 나는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사랑의 독차지하였던 사람이다! 정신과 영혼의 사랑?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맑은 샘? 그 정절을 지키는 지순함? 내가 이 사람들에게 진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겠다!

“샘이 있다면, 나 불타는 갈증을 식히기 위해 그 샘으로 기꺼이 입술을 축이리. 샘이 마르지 않는 것은 마치 나의 갈망이 꺼질 줄 모르는 듯, 영원히 내 그리움이 불타도록 영원히 나 그 샘에서 활기를 찾겠소.”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탄호이저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는 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는 셈 치고, 진실함의 미덕을 가르치는 노래로 탄호이저에게 교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탄호이저는 이를 비웃으며 외쳤다. “우리의 육신에는 즐거운 향락이 어울려! 그리고 사랑은 그 향락 속에만 있지!”

그러자 귀부인들은 탄호이저의 음탕한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다 이내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마을의 신심 깊은 기사들은 격분하여 탄호이저를 추방하려고 들었다. 그때서야 탄호이저는 자기가 그만 자제심을 잃고 어떤 위험을 초래하였는지를 깨닫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기사들의 거친 포승이 그의 몸을 휘감으려는 순간, 그 앞으로 한 여인이 몸을 내던졌다. 영주의 조카인 엘리자베트였다. 엘리자베트는 기사들 앞에 무릎 꿇고서 눈물로 호소했다. “나의 소원은 이 분의 구원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감히 이 사람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엘리자베트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탄호이저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고통스런 참회의 길을 떠나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 해 달라고 탄원했다.

엘리자베트의 헌신에 탄호이저는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자신이 돌아와서는 안 될 곳에 돌아왔음을 깨달았고, 변했다고 믿은 자신이 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삶의 의지로 믿었던 열정은 결국 향락에 대한 권태로움의 반대급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떠나겠소, 순례자들과 함께. 천사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로마로!” 탄호이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함께 로마로 향하는 고통스런 순례길에 올랐다.

그 뒤로 또 긴 시간이 흘렀다. 구원을 위해서라지만 탄호이저를 고생스러운 순례길에 보낸 엘리자베트는 날마다 고통스러워하며 예배당에서 탄호이저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이교의 신인 비너스와 향락에 빠져 젊음을 낭비하고, 신앙으로부터 등을 돌린 탄호이저가 구원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나날이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야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던 순례자들의 무리가 바르트부르크로 돌아왔다. 엘리자베트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뛰어나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지만, 그 안에서 탄호이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절망했다.

엘리자베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성모 마리아에게 이제 그만 자신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볼프람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그녀의 집으로 데려다 주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볼프람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홀로 바위산을 향해 걸어간다.

볼프람은 엘리자베트에게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음을 알지만,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홀로 고개를 떨어뜨린다. 볼프람은 저녁별에게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엘리자베트를 결코 잊지 못 하는 자신의 인사를 저녁별이 대신 전해주기를. 이제 가냘프게 흔들리는 그녀의 생명이 꺼지고 나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한편 탄호이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함께 고생고생하며 겨우 로마에 당도했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전해 받고 지상에서 그 권세를 대신 행사하는, 지상 교회의 수장 교황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교황은 베누스베르크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향락에 물든 생활을 하며 신을 져버린 탄호이저는 낡은 지팡이에 새싹이 돋지 않는 한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이라며 저주를 내렸다. 탄호이저는 절망에 빠진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다른 순례자들과 떨어져 홀로 괴로움을 곱씹었다. 이제 그에게 돌아갈 곳은 베누스베르크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어느 밤, 베누스베르크를 향해 가다가 고향 마을 인근을 지나게 된 탄호이저는 한 남자의 노래 소리에 이끌려 다가간다. 그는 볼프람이었다. 볼프람은 탄호이저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 했다. 탄호이저는 다 헤진 옷을 걸치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한데다가 몹시 야위어 있었다. 그 옛날 자신감과 생기가 넘치던 아름다운 청년의 면면은 사라져버리고, 겨우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서 있는 초라한 사나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탄호이저는 볼프람에게 베누스베르크로 가는 길을 묻는다. 어느 때고 치유가 필요해지면 결국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비너스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탄호이저는 스스로를 향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탄호이저의 체념을 눈치 챈 비너스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탄호이저는 모든 구원의 희망을 버리고 비너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비너스는 이제야 말로 탄호이저의 영혼을 취해 영원히 자기 곁에 두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탄호이저의 낯빛은 이미 시체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지옥의 쾌락에…….” 탄호이저는 절규했다. 이때 볼프람이 그를 막아섰다. “전능하신 주여! 당신의 종을 구하소서!” 비너스는 거듭 탄호이저를 재촉했다. “비켜나시오, 내게서 멀리 떨어지시오!” 탄호이저는 볼프람을 향해 위협적으로 말했다. “한 단어가…….” 볼프람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을 구할 것이요.” “아니, 나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소. 비키시오, 볼프람!” “어서 내게로 와요, 탄호이저, 당신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 비너스가 팔을 벌려 탄호이저를 맞이하려 했다. “탄호이저, 한 천사가 당신을 위해 희생했소.” 볼프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천사가 곧 당신 위에 나타나 축복할 거요.” 그러나 탄호이저는 거의 비너스 품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윽고 볼프람이 외쳤다. “엘리자베트요!” 볼프람의 눈에서도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탄호이저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엘리자베트…….” 그때였다. 마을에서 장례 행렬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애통함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비너스는 절규하며 사라졌다. 볼프람이 잠시 행렬을 멈추게 하고 탄호이저를 관 가까이에 데려갔다. 새벽의 어스름한 빛 속에, 그러나 새벽별처럼 평화로운 모습으로 엘리자베트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 탄호이저는 쓰러졌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동녘에서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온화한 빛이 한 순례자의 낡은 지팡이를 비추었을 때, 그 위에 돋아난 푸른 새싹에 맺힌 이슬이 반짝였다.

이상이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바그너는 이 곡을 1843년 테플리체에서 작곡하기 시작하여 1845년에 완성한다. 대본은 하인리히 하이네, 호프만 등의 작품과 독일 전승들을 참고, 짜깁기하여 직접 썼는데 역시 내용은 좀 엉성한 편이다. 갈등 구조가 뜬금없고 해결이 갑작스럽다.

성(聖)과 속(俗)의 대립 구도, 그리고 타락과 회개의 이야기 구조는 서양 예술에서 줄기차게 반복되어 온 하나의 패턴이다. 비너스는 속된 사랑을, 엘리자베트는 성스러운 사랑을 상징하며, 타락한 삶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상승의 이야기 구조는 본 오페라의 주인공인 탄호이저의 삶 속에 매우 ‘극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뻔한 얘기는 그만 하자. 바그너의 음악극 속 주인공은 탄호이저이지만, 내 이야기 속 주인공은 탄호이저가 아니다. 재능이 넘치고 끝까지 방종하여 정신 못 차리다가 여인의 희생으로 구원 받는 행운의 사나이는, 이 블로그에서 주인공으로 거론될 자격이 없다. 21세기에도 ‘왜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나’ 같은 주제가 여전히 술자리 이야깃거리로 거론되고, 이를 다룬 심리학 서적이나 심지어 거지같은 소설도 줄기차게 출판되는 판에, ‘엘리자베트’를 주인공으로 꼽을 이유도 없다.

오히려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면 엘리자베트를 초월하는 진상 중의 진상, 그러나 정작 사람들로부터 주목도 제대로 못 받아 존재감마저 미미한 미련퉁이 남자, ‘볼프람 폰 에셴바흐’야 말로 이 블로그에서는 주인공으로 대접 받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자 그럼 위의 줄거리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이 한심남의 스토리를 좀 자세히 들여다보자. 알고 보면 볼프람, 이 남자도 노래에 소질이 좀 있다. 탄호이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노래 경연 대회에서 첫 타자로 노래를 뽑아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정도다. 그런데 성품이 지나치게 올곧다. 여인들을 보고 반할 수는 있지만, 차마 그들의 순수를 조금이라도 흐트러뜨리는 짓은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탄호이저처럼 갈증이 나면 샘물을 들이키기는커녕, 이래서야 샘물을 퍼서 가져다준대도 입을 못 댈 사람이다.

볼프람은 엘리자베트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탄호이저의 노래에 푹 빠져있던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가 떠나가 버린 뒤 상심에 잠겨있는데도 볼프람은 그 주위를 맴돌며 애만 태울 뿐 엘리자베트를 어찌 해보지 못 한다. 남의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어진 선을 과감하게 넘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볼프람에게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어느 날 탄호이저가 돌아온다. 지난날 탄호이저의 거만한 태도를 기억하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계심을 품을 때, 가장 먼저 탄호이저의 개심을 믿고 그를 환영한 사람이 다름 아닌 볼프람이었다. 그것은 볼프람이 탄호이저의 본심을 꿰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볼프람이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엘리자베트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었으니까!

볼프람은 앞장서서 탄호이저를 엘리자베트에게로 데려간다. 이 장면에서 볼프람은, 배경이 되는 벽면에 서서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이 감격의 재회를 하자, 자신에게는 희망의 빛이 사라졌다며 절망한다. 이런 미련퉁이! 이런 답답한 인간!

‘그녀만 행복하다면…….’은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만큼이나 역사가 깊고 해명이 불가능한 멍텅구리 순진남들의 심리다. 결국 볼프람, 너는 엘리자베트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어!

그러나 볼프람은, 평범한 순정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상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는다. 탄호이저가 순례지에서 돌아오지 않자 절망에 빠진 엘리자베트가 죽어가며 자신의 희생으로 탄호이저의 죄를 대속(代贖)하기를 비는 모습을 보고서, 한편에서 볼프람은 그녀의 가련한 숙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바위산으로 홀로 올라가는 엘리자베트를 차마 붙잡지도 못 하고 그녀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떠오른 저녁별을 붙잡고 하소연한다.

이 하소연이 저 유명한 아리아 ‘저녁별의 노래’가 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사랑한 사람은 탄호이저였다. 엘리자베트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도 탄호이저, 그리고 엘리자베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사람도 역시 탄호이저였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볼프람이다. 물론 이야기 속의 인물이니까 그랬겠지만, 볼프람은 자신이 결코 탄호이저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볼프람은 자신의 역할을 엘리자베트의 조력자로 한정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다른 남자를 위해 희생하기로 한 결심까지 받아들이고, 그 숙명을 완수하는 것을 돕는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서도 그 미운 탄호이저가 비너스의 품으로 안기려 드는 것을 전력을 다해 막는다. 현대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 장면이 다루어졌다면 이때 볼프람은 탄호이저의 뺨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긴 뒤, 땅 위에 엎어진 탄호이저를 깔고 앉아 멱살을 잡고 외쳤을 것이다. “정신 차려! 너 때문에 엘리자베트는 죽었단 말이야. 나의 엘리자베트가…….” 눈물이 뚝뚝.

오페라 계의 진정한 루저(looser) 볼프람. 종종 여인네들은 너무 쉽게 ‘나도 이런 사랑 한 번 받아 봤으면’하고 말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오페라 안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당하기만 하는 이 슬픈 사랑의 숙명은 도저히 구제 받을 길이 없다!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영원한 시간을 두고 맴도는 것처럼, 조금만 멀어져도 가슴에 서리가 내리고 조금만 가까워져도 속까지 시커멓게 태워버리는 이 바보 남자들의 가련함이라니.

오페라 탄호이저의 숱한 명곡들을 뒤로 하고, 이 세상 짝사랑으로 가슴앓이 하는 모든 순정남들을 생각하며 ‘저녁별의 노래’를 띄워본다.


Wie Todesahnung, Damm'rung deckt die Lande,
umhullt das Tal mit schwarzlichem Gewande;
der Seele, die nach jenen Hoh'n verlangt,
vor ihrem Flug durch Nacht und Grausen bangt!
Da scheinest du, o lieblichster der Sterne,
dein sanftes Licht entsendest du der Ferne
die nacht'ge Damm'rung teilt dein lieber Strahl,
und Freundlich zeigst du den Weg aus dem Tal.

O du mein holder Abendstern,
wohl grußt' ich immer dich so gern;
vom Herzen, das sie nie verriet,
gruße sie wenn sie vorbei dir zieht,
wenn sie entschwebt dem Tal der Erden,
ein sel'ger Engel dort zu werden.

죽음의 예감처럼 어둠은 땅에 내려
검은 옷자락으로 골짜기를 덮네
저 높은 곳을 희구하는 영혼도
어둠과 공포를 향한 비행이 두렵다
그때 네가 나타나는구나, 아 사랑스런 별
부드러운 빛이 멀리서부터 다가와
그 사랑스런 빛이 어둠을 꿰둟고
계곡의 길을 은은히 밝힌다

아, 나의 다정한 저녁별,
너에게 나 언제나 기쁘게 인사한다
나의 그녀가 너의 곁을 지나갈 때에
그녀를 끝까지 따르는 나의 인사를 전해다오
천국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천국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2009/08/10 03:17 2009/08/10 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