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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봤다. 한국 개봉 소식이 들려올 때부터 보러 가고 싶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마침 근무 때문에 서울에 올라간 수요일이 개봉일이었고, 게다가 ‘문화의 날’이라고 해서 영화 티켓을 반값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브리의 작품이라면 제값을 주고 봐도 아깝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할인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혼자서 영화관에 가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한때, 통신사 VIP 특전으로 다달이 영화 티켓 2장을 제공해 주던 ‘좋았던 시절’에는, 이렇게 근무차 서울에 갔을 때나, 혹은 와이프가 특별히(?) 허락해 주었을 때 혼자 영화관에서 가서 영화를 보는 게 취미이자 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통신사에서 제공해 주던 영화표가 한 달에 1장으로 줄어들더니,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는 그나마도 사라져 버렸다. 그 사이 영화 티켓 값도 2배 가까이 올라버렸다. 2시간 남짓 즐기는 취미생활 비용으로 1만 5천원이라는 가격이 ‘객관적’으로도 비싼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심리적 한계선은 확실히 넘어버린 것 같다. 이제 나는 어지간해서는 혼자 영화관 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영화관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은퇴 번복을 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지만, 이제는 그의 변덕과는 무관하게 그의 육체적 나이 때문에 이 작품이 정말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봉 첫날이고, 게다가 영화 티켓도 할인했기 때문인지 영화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보통 영화관에 가면 맨 뒷줄에 앉는 것을 선호하는데, 이날은 자리를 고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극장 왼쪽에 치우친 자리에, 앞 뒷줄로 나눠 앉은 가족들 사이에 뻘쭘하게 끼어 앉게 되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작화가 특히 아름다웠고, 음악이 좋았다. 이야기 자체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큰 실망도 없었다.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이라고 거창하게 말해놓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하지만, 사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 대한 만족도, 특히 이야기 측면에서의 만족도는 <모노노케 히메>를 정점으로 그 이후부터 작품이 거듭될수록 꾸준히 낮아져 왔기에, 이번에도 스토리 면에서는 이빨이 몇 개가 빠지고 얼개가 성긴 혼잣말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딱 그대로였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모호하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불친절하다 못해 무성의하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최고의 작품은 <모노노케 히메>라고 생각한다. <모노노케 히메>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걸작이다. 물론 나는 모든 영화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메시지를 반드시 친절하게 전달하는 것이 영화의 미덕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때때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없는 것이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다. 또 어떤 메시지는 굳이 어렵고 복잡한 방식을 통해서만 그 전달력이 배가 되기도 한다.

내가 <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을 보았을 때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자연의 세계와 문명의 세계의 대립,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 길을 고민하는 인간이라는 주제가 그야말로 ‘초딩이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물론 이렇게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머리는 없었지만)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캐릭터들도 주인공급뿐만 아니라 조연급들까지 탄탄하게 디자인되어서 굳이 너저분한 서사를 덕지덕지 붙이지 않더라도 겉모습이라든가 목소리, 짧게 내뱉는 대사만으로 그 캐릭터가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 것인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이 넘쳤다.

한편, <모노노케 히메> 다음 작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메시지가 아주 중요한 작품은 아니었다. 약간의 교훈을 담은 단순한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흥미로운 소재들과 그 소재들을 엮어내는 뛰어난 연출이다. 터무니없는 오해일 수도 있으나 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전 작품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보겠다.”라는 강한 의지를 읽었는데,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역량은 그 의도를 달성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썩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으나, 명작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80세를 넘긴 고령의 거장은 더 이상 관객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또 그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만년에 인생을 반추하는 현자에게는 무심한 듯 내뱉는 한 줄의 대사에서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자동적으로 환기되며, 텅 빈 서사의 틈새가 온갖 경험과 추억들로 자동적으로 메워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객은, 관객의 눈에 긴 대롱을 갖다 대놓고 그 좁은 틈으로 앵무새 부리만 보여주면, 잘해야 앵무새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메시지의 측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엔터테인먼트의 측면에서도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일본에서는 일절 홍보하지 않았다지만, 한국에서는 그래도 최소한의 홍보는 했다. 그런데 메인 예고편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작품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다크 버전쯤 되는 <판타지 모험 활극>이라고 예상하게 될 것이다. 작품을 배급하는 배급사로서는 이렇게 홍보해야 팔릴 수 있으니 부득이하게 그렇게 포장한 것이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의 셀링 포인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아예 대중들에게 소구할 셀링 포인트가 없다고나 할까.

이야기의 구조만 놓고 보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비슷하다.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이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가족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소위 ‘팔아먹기 위한’ 작품을 만든다면, 판타지 세계로 진입하는 시점을 최대한 작품의 앞쪽에 배치할 것이다. 거기에 관객들이 보고싶어하는 모든 볼거리가 모여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런닝타임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했는지 떠올려 보자. 주인공 치히로가 판타지 세계로 진입하기 이전의 이야기는 매우 짧다. 치히로는 이사 갈 새집을 향해 가는 차의 뒷좌석에 누운 채로 등장하는데, 그 드러누운 자세와 심드렁한 표정만으로도 이 캐릭터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매우 압축적으로, 그러면서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렇게 캐릭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은 과감히 생략한 채, 주인공을 태운 차량은 이세계로 거의 직행(물론 차에서 내려서 터널을 통과한다는 단계가 있지만) 해버린다. 그 뒤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야말로 신비의 집합체.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노련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판타지 세계로 진입하는 시점을 최대한 뒤로 미룬다. 그리고 그 앞에 주인공 ‘마히토’의 온갖 서사들을 구질구질하다 싶을 정도로 너절하게 늘어놓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그것이 해결되는 것도 판타지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인공 치히로는 분명 판타지 세계에서 큰 교훈을 얻고 성장을 하지만, 그 성장의 경험이 현실에서 어떻게 반영될 것인지에 대해서 관객들은 알 수도 없고,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이미 판타지 세계에서의 모험 자체가 기승전결이 완벽해서, 관객들이 다른 곳에서 ‘해결’을 갈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인공 마히토는 이미 현실 세계에서 온갖 문제들과 마주하고 있다.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마히토보다 먼저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는 새엄마 나쓰코도, 자세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무언가 가혹한 삶이 무게와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작중 현실 세계에서의 서사를 길게 늘여놓았으니, 판타지 세계가 현실 세계와 단절된 어떤 독립된 세계로 존재할 수가 없다. 필연적으로 현실 세계와 강하게 조응하는, 사실상 현실 세계의 그림자 같은 세계로 그려진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번민과 고뇌를 짊어진 캐릭터들이 들어가는 ‘판타지 세계’는 그 자체로 독립된 모험과 활극의 무대가 아니라, 어쩌면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이거나(나쓰코의 경우) 혹은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장소(마히토의 경우)가 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으니,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니 이것은 명백히 ‘판타지 모험 활극’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그토록 기대하는 판타지 세계로의 진입 시점까지 가능한 뒤로 미루고 현실 세계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면서까지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을 포함하여 지브리의 대부분의 작품을 감상한 나이기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담긴 작품들의 인용, 미야자키 감독 본인의 가치관 및 인생 경험에 대한 은유를,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눈치 못 채도 어쩔 수 없지 뭐”라는 듯한 감독의 태만도 느껴졌다. 감독의 태도가 그러할진대, 일개 관객인 내가 이 작품에 숨겨진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관객들을 향해 감독을 대신하여 그 비유를 열심히 풀이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해석해 주어야 할 의무는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나 자신도 소위 지브리 마니아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광팬에 비하면, 한 알의 겨자씨에 새겨진 그 태산준령을 절반도 헤아리지 못할 것 같다.

너무 작품에 대해서 혹평만 한 것 같은데, 마무리는 칭찬으로 해야겠다. 우선 작화는 정말 아름다웠다. 미려한 그림체, 아름다운 색감, 그리고 몇몇 장면에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여줬다. 꼭 초당 프레임이 높은 부드러운 화면이 그렇지 못한 것에 비해 훌륭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동적인 움직임이 연출과 잘 어우러져서 감탄스럽기도 했다. 단, 캐릭터 디자인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인물 캐릭터들은 모두 몰개성. 최악은 ‘와라와라’인데, 디자인에 아무런 성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우스꽝스러운 앵무새 캐릭터는 고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면모라도 있었지만 말이다.

음악도 훌륭했다.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음악이 너무 튀어서 작품의 내용을 가려버리지 않고, 작품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조성하는 데 기능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는 역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 그가 창조 해내는 세계는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든 없든, 설득력이 있든 없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세계의 공기로 숨을 쉬어보고 싶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이 정말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다. 그러나 혹여 앞으로 한 두 작품을 더 만든다고 하더라도 창작자로서 절정의 시기에 만들어 낸 그런 빼어난 작품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그 아쉬움이 아주 크지는 않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쉽고 재밌으면서, 오직 전 생애를 창작자로 산 예술가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의 편린을, 많이도 말고 딱 한 조각 정도 담은 그런 동화같은 작품을 하나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과한 바람이려나.

2023/11/02 02:00 2023/11/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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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MIDWAY)』 (2019년 작품)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Roland Emmerich)

모든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경험한 최대, 최악의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은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영원한 패전국’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겠는가? 미국, 영국과 한편에서 싸웠더라면 지금까지도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자국의 역사를 ‘무결점’의 역사로 포장하고 떵떵거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국제 사회에서 대접받으며, 어쩌면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 하나를 꿰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 일본은 자기 주제도 모른 채 ‘거인’ 미국에 덤빈 하룻강아지요,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수많은 인명을 헛되이 희생시킨 전범국가로 영원토록 기억되게 되었다.

대체 왜? 전쟁이 끝난 지가 70년도 넘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당시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등지고 독자 노선을 걸어간 것이 그 원인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 뼈아픈 판단 착오를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일본의 지도자들이 선택한 길은 미국이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하지 않고, 하라는 것은 될수 있는 한 하는 것. 즉, 철저한 ‘종미(從米)’였다.

요즘 아베 내각의 행보를 보면서 일본이 다시 태평양전쟁 때처럼 무모한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일본이 철저한 ‘종미’ 노선을 버리지 않는 한, 그와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다.

영화 『미드웨이』는 시종 ‘미국’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이지만,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전후 70년간 철저하게 미국을 추종해온 일본을 어여쁘게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 내에서, 적어도 아베 수상을 위시한 정치계에서 만큼은 태평양전쟁이 일부 이성을 상실한 군국주의자들의 파멸적 선택이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어있다. 그 이전 한반도나 대만에 대한 식민지배는, 당시 열강이라면 어느 나라든 자행하던 행위로 ‘국제적 기조’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 인식이다. 중국은 여기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있다. 난징 대학살과 같은 개별적 사례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태평양전쟁 자체는 일본도 전쟁 범죄라고 시인하고 있고, 이에 대한 사죄와 반성도 표면하고 있는 만큼 중국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하여 한국만큼 격렬하게 역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국민통합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인지 모르겠으나, 반일감정을 교묘하게 조장, 활용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중국 회사 로고가 보이기에 『미드웨이』 제작에 중국 자본이 투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요즘 중국은 이런 투자를 할 때는 반드시 ‘가시적’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어서, 과연 중국 자본의 영향이 이 영화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를 관심 깊게 살펴봤다. 아마 그 보상은 영화 전체의 전개에서 보자면 사실상 불필요한 시퀀스였던 ‘둘리틀 특공대’ 이야기였을 것이다. 도쿄 폭격을 성공시킨 둘리틀 특공대가 중국 땅으로 숨어들자, 이것을 이유로 중국의 민간인들까지 무차별하게 학살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아주 잠깐 묘사되었고, 거기에다가 마지막 엔딩에서는 일본인이 학살한 민간인이 ’25만 명’에 달했다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자막으로 삽입시키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자본의 영향임에 분명한 이런 묘사를 제외하면, 이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미국의 전쟁 상대인 일본군의 모습은 ‘무사도’를 체현한 사무라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다.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광기의 집단과 그저 자기의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한 장병들을 분리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역사관, 전쟁관을 미국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이 미국과 다른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하지 않는 이상,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역사적 진상을 추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상업영화에서든, 국제정치에서든.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자면, 진주만 공습부터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지는 실제 역사적 과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꽤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사를 잘 모른다면, 스펙타클한 전쟁 장면을 즐기기에는 다소 밋밋하고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미드웨이 해전이 발발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진주만 공습을 다루는 것은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그 분량이 너무 길었다. 거기에다가 진주만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 사이에, 앞서 언급한 이유로 ‘둘리틀 특공대’ 에피소드까지 삽입되어서 영화의 전개가 너무 루즈해진 감이 없지 않다. 전투기들의 공중전이나 폭격씬은 나름 볼만하지만, 너무 비슷한 장면들이 반복되다보니 후반에 가서는 몰입도가 떨어졌다. 일본의 항공모함 3척을 격침시키고 일단 미국 항모 엔터프라이즈호로 귀환했던 딕 베스트가 다시 비행대대를 이끌고 일본의 마지막 항모인 히류를 공격하러 갈 때에는 그만 ‘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아무리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묘사라지만, 똑같은 수직강하 폭격 장면을 대체 몇 번이나 보여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그래도 십수 년전에 봤던 영화 『진주만』에 비하면 감정 과잉은 적은 편이고, 역사 고증도 그럭저럭 잘 된 편이라 제법 볼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0/01/09 15:25 2020/01/0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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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 포에버(Callas Forever) (2002년 작품, 2007년 한국 개봉)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
출연: 화니 아르당(Fanny Ardant),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

며칠 전 우연히 TV에서 방영하기에 보게 된 영화.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세련되지 못 한 영상과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이야기 진행에 채널을 돌려버릴 뻔도 했지만, ‘마리아 칼라스’라는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끝까지 보았다.

음반(recode)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다. 1902년에 녹음된 카루소의 음반이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된 이후로부터 정확히 한 세기 동안이 클래식 음반의 흥망성쇠가 망라된 시대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클래식 음반 산업의 분명한 쇠퇴를 목격하고 있다.

음악은 불멸할 것이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고,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때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경지에서 출발하는 출중한 연주자들도 계속 배출될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반 산업이 사장(死藏)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이제는 노쇠한 거장들이 젊은 연주자들에게 거침없이 쏟아내는 찬사는 차라리 애처롭게 느껴진다. 앨범의 속지는 점차 화보(畵報)처럼 변해간다. 베토벤 교향곡 녹음은 시중에 수백 종이 나와 있다. 클래식 애호가의 자식은 부모로부터 베토벤 5번 녹음을 열 장쯤 물려받을 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앨범 컬렉션에 11번째 녹음을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한 시대의 쇠퇴기에 이르러 비로소 역사는 정리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언가 쇠락해가는 쓸쓸한 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거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에겐 역사가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사실 죽은 자에 대한 숭앙, 영웅화와 신격화, 이런 것도 하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아무튼 클래식 음반의 역사는 완결되었다. 이제 이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진정한 신화(神話)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카라얀이 그렇고,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그러하며,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가 그렇다. 이들이 과연 가장 뛰어난 지휘자, 성악가, 연주자들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었다.”고.

마리아 칼라스 역시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승자’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1922년에 태어났고 1942년에 데뷔했다. 1949년에 첫 앨범을 냈고, 1965년에 은퇴해 그 후로 일체의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음반을 내며 활동한 시기는 채 20년이 되지 않지만, 리코딩의 역사에 금자탑을 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앨범은 현재까지 약 3000만장 정도가 팔렸는데, 성악가 중에서 마리아 칼라스보다 더 많은 음반을 팔아치운 사람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유일하며, 여자 성악가 중에서는 마리아 칼라스에 견줄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칼라스 포에버’의 배경은 1977년. 마리아 칼라스가 은퇴한 때로부터 12년이 흐른 시점. 이야기는 음반 제작자인 래리가 은퇴한 칼라스에게 새로운 음반 제작을 제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음색도 쇠락하고 만 칼라스는 극구 거절하지만, 래리는 새 시대에 걸맞은 ‘오페라 비디오’ 제작을 제안하며, 노래 문제는 과거에 그녀가 녹음한 앨범에서 음원을 가져와 ‘립싱크’로 찍어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러면서 래리는 그녀의 예술적 열망을 은근히 부추기는 노련한 설득의 기술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픽션이다. 역사적으로 1977년은 칼라스가 화려하게 복귀에 성공한 해가 아니라, 그녀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영화의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는 한 때 칼라스와 함께 오페라 연출 작업 한 적이 있는 만큼 그녀와는 친분이 깊고, 사실 누구보다도 칼라스의 재능을 아꼈던 사람이다. 이 영화는 철저히 프랑코 제피렐리의 시각에서 마리아 칼라스를 재해석하고 추모하는 하나의 추증작이다.

영화 속에서 칼라스는 래리의 설득으로 결국 복귀를 결심한다. 복귀작은 그 어떤 오페라보다도 여주인공의 정열이 돋보이는 비제의 ‘카르멘.’ 너무 오래 무대와 떨어져 있었던 칼라스에게는 립싱크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정열적인 삶을 산 여인 카르멘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칼라스는 점차 과거의 열정을 되찾는다. 그녀는 점점 연출에 관여하고 싶어 하고, 안무에 관심을 쏟고, 출연진과 연출자들을 다그치며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작품 속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잘생긴 청년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까지 느끼며, 칼라스는 50이 넘은 자신의 나이를 잠시 잊는다.

카르멘의 촬영은 대성공으로 끝난다. 카르멘의 공개를 앞두고 래리는 발 빠르게 칼라스와의 다음 작품 구상에 나서지만, 칼라스는 래리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라 트라비아타를 찍자는 래리에게 칼라스는 말한다. “하지 않겠어.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토스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푸치니의 토스카. 마리아 칼라스가 1953년 이 오페라를 처음 녹음한 음반을 내놓은 후, 그 음반은 불멸의 명반이 되었으며, 오페라 토스카의 영원한 결정반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리고 1965년, 은퇴 직전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마리아 칼라스가 맡은 배역이 또한 토스카였다. 마리아 칼라스와 토스카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칼라스는 이번에는 립싱크가 아니라 직접 자신이 노래도 다시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엔터테이너가 아닌 예술가로서 대중 앞에 당당히 서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미 노쇠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칼라스에게 그런 새로운 기회를 안겨줄 수 없었다. 칼라스는 결심을 한다.

“부탁 한 가지가 있어. 당신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야. 카르멘 영상을 폐기 해 줘.” 이번 작품 제작에 50%의 지분을 투자한 래리로서는 정말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결국 래리는 ‘진실한 예술가’로 남고자 한 칼라스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한다.

자, 마리아 칼라스가 연기한 ‘카르멘’이 어떠했는지, 거짓 아닌 그녀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보자.



사실 칼라스의 음성은 사람들이 흔히 ‘미성(美聲)’이라 부르는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목소리에 단순한 음악적 기교 이상의 어떤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는 진정한 ‘연극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순탄한 인생과는 거리가 멀다. 카르멘도 그러하거니와 토스카도 그렇다.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가족도 음악도 버리다시피 했지만, 결국 그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인생은 어차피 불완전하다. 오페라는 이 불완전한 삶에 대한 모사다. 마리아 칼라스의 약간의 불완전성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인생의 불완전성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화 마지막, 칼라스는 평범하게 한 사람의 여자로서 살았다면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그저 ‘가지 않은 길’을 동경하는 넋두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커리어의 정점에서 은퇴하고 진정 한 사람의 여자로서 한 남자의 사랑을 바랐던 칼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대사는, 아무리 픽션이라 하더라도 흘려들을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니고 우리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 래리 켈리. 그는 탁월한 선구안과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프로듀서이며, 예술가들의 까다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의 소유자이다. 거기에 교묘한 설득의 기술까지 갖추고 있다.

사실 이 래리 켈리란 인물은 마리아 칼라스와는 달리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인물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자신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믿는 듯하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칼라스의 예술적 재능을 아꼈고, 그녀의 은퇴를 누구보다도 아쉬워했으며, 비교적 이른 칼라스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애통함을 느꼈던 사람이 바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영화 속 래리는 칼라스에게 복귀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녀가 다시 한 번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도록 돕는다. 결정적으로는 진실한 예술가로 남기로 한 칼라스의 바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칼라스 포에버’의 최고의 조력자로 그려진다.

사실 나는 래리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여러모로 래리라는 캐릭터와는 상반되는, 실존한 음반 제작자 월터 레그다. 월터 레그는 EMI의 음반 프로듀서였다. 그는 예술가들의 재능,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에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하 직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티스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엘범의 ‘창조자’라고 여겼던 그는, 어떤 점에서는 영화 속의 래리처럼 배짱이 있고 오만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매우 호감형 외모에 때때로 근사하고 달콤한 말도 늘어놓을 줄 아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게이’였던 래리와는 달리 월터 레그는 비교적 통통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성격은 훨씬 더 보수적인데다가 한층 더 오만했다. 그는 동료가 친근감의 표시로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가벼운 접촉조차 참아내지 못 했다. 월터 레그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사내 분위기로 유명했던 EMI에서도 그 정점에 선 인물의 하나였다. 여러모로 래리 켈리의 캐릭터는 EMI보다는 차라리 데카에 가깝다.

레그는 일찌감치 마리아 칼라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1953년 그녀와 함께 토스카를 녹음했으며, 이 앨범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팔리는 토스카 앨범이 되었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의 커리어 동안 오직 레그와만 함께 작업 했다.

레그의 오만함과 그의 독자적 행보를 견디다 못 한 EMI는 그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앨범이 제작된 1964년이었다.

우리는 종종 앨범의 역사를 생각 할 때에 예술가들에게만 너무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음반 제작사나 프로듀서들의 역할을 간과하고 만다. 사실 위대한 음반들은 프로듀서들의 예민한 촉각과 불굴의 의지로 제작되었다. 또 그 이면에는, 아티스트들을 하나의 신화로 포장하는 제작사의 교묘한 홍보 전략도 숨어있고 말이다.

레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단언하건데 예술의 영역에서 위원회라는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 필요한 것은 카라얀, 커쇼,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다.”라고. 레그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레그와 카라얀. 이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카메라의 초점은 카라얀에게 맞춰져 있다. 세상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 자체의 구성만 놓고 보면 그리 높이 평가하기 어렵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굴곡진 인생과 음반사에 남겨놓은 그녀의 업적을 추모하고, 또 아티스트 뒤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한 세기 동안 리코딩의 역사를 이끌었던 프로듀서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한 번쯤 볼만한 영화라고 하겠다.

2009/08/30 06:04 2009/08/30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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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카랄도 (1982년 작품)
감독: 베르너 헤어조크
출연: 클라우스 킨스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조스 루고이, 미구엘 앤젤

“‘카야하리 야쿠’, 정글 인디언들이 이 땅을 가리켜 ‘신이 아직 창조를 마치지 않은 땅’이라 불렀다. 그들은, 인간이 사라진 후에야 신이 다시 돌아와 창조를 마칠 것이라 믿었다.”

이 영화는 위의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곧이어 모터가 고장난 보트를 손수 노 젓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12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이틀 밤을 새며 강을 따라 이곳에 왔다. 노를 젓느라 살갗이 벗겨진 그의 손에는 붕대 대신 헝겊이 감겨 있었다. 그는 이미 공연이 시작된 가극장으로 달려간다. 표가 없다며 그를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안내인을 향해 그는 말한다.

“이퀴토스에 가극장을 세울 거요. 그리고 카루소를 주연으로, 그곳에서 개관 공연을 할 거요. 어느 극장보다도 근사할 거요. 그리고 당신도 그곳에서 함께 일하게 될 거요.”

“현실이 오페라의 썩어빠진 모방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어!” 그는 외친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신이 온다면, 카루소의 목소리를 하고 올 것이다.”

피츠카랄도. 그는 오페라 광이다. 현실을 오페라 속의 구태의연한 이야기보다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신이 오페라 가수의 음성을 하고 올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낙관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아마존 밀림 한 가운데에 오페라 하우스를 지으려는 무모한 꿈을 가진 사람이다.

전축에 카루소의 레코드를 걸 때면 으레 다가오는 돼지에게 피츠카랄도는 약속했다. 언젠가 아마존 한 가운데에 오페라 하우스를 지으면, 너에게 객석 정 중앙에 붉은 벨벳으로 장식한 의자를 마련 해 주겠다고.

피츠카랄도는 가극장을 세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일대 모험을 감행한다. 그는 낡은 증기선 한 척을 구입하여 수리하고, 감히 어떤 배로도 거슬러 오를 수 없는 급류 너머의 고무 농장에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또 다른 지류를 타고 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윽고 두 지류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 그는 반대편 지류로 가기 위해 300톤의 증기선을 타고서 산을 넘는다.

아무런 그래픽 효과나 미니어처의 사용 없이, 순수하고 또 고지식하게 인력만으로 배를 끌어 올려 밀림을 통과시키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스펙터클하며, 관객을 압도하는 장면일 것이다.

배는 결국 산을 넘지만, 그의 모험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마존 밀림 한 가운데에 오페라 하우스를 세우려 했던 피츠카랄도의 의지는, 어쩌면 다 끝마쳐지지 않은 카야하리 야쿠의 창조 작업을 마무리 지으려는 한 서구인의 광기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신의 진노를 다스리는 제사의 의미로, 이 거대한 배를 급류에 떠내려보내버린다.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 하고 사업 실패를 눈앞에 둔 피츠카랄도는, 강 하류로 내려와 배를 팔아 돈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극단의 단 1회 오페라 상연권을 산다.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선장에게 쥐어주며, 제일 좋은 시가와 붉은 벨벳 의자를 사오라고 부탁한다.

실패한 사업자로서 이퀴토스의 항구로 돌아가는 피츠카랄도는, 배 위에서 자신만을 위한 오페라를 상연한다. 관객은 오직 자기 한 사람. 그는 붉은 벨벳 의자의 등받이를 짚고 선 채, 시가를 태우며, 자신만을 위한 오페라 공연을 감상한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벨벳 의자에 앉지는 않는다. 이 의자는 그가 카루소를 좋아하는 돼지에게 약속한 그 의자이므로…….

피츠카랄도는 실제 인물이라고 한다. 물론 영화화 과정에서 다소의 각색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영화 속 인물이 실제와 동떨어진 공상적인 인물이라 할지언정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의 인생,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다. 그가 사업에 실패했다고는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누가 그가 인생에서도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까? 모험의 증거는 “내가 그것을 했고, 내가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거장 헤어조크는 배가 산을 타고 넘는 장면을 아무런 그래픽 효과나 특수 장치 없이 인력만을 이용해 ‘실제로 배를 산 위로 넘기며’ 찍었다. 그리고 배가 급류에 휩쓸리는 장면도 정말 배를 급류에 내맡긴 채 그 안에서 찍었다. 이 과정에서 스태프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힘들었다. 무척 긴 영화이며, 유럽 영화인만큼, 이야기가 할리우드 영화처럼 술술 풀리지 않는다. 아마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의 느릿느릿한 항해 과정을, 우리는 역시 느긋한 호흡으로 함께 해야 한다. 그 대자연에 대한 응시, 자연의 소리에 대한 귀 기울임은, 피츠카랄도 개인의 거친 광기와 대비를 이루며 이 영화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개인적으로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읽었던 아마존 강 항해 과정이 떠올라, 그 자연의 생생함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깊은 숲’이란 정말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가.

피츠카랄도가 단 1회 상연권을 사서 연주토록 한 오페라는, 빈첸초 벨리니(1801~1835)의 ‘청교도’다.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이여, 그대에게 사랑을’이라는 아리아로, “내 사랑하는 이여, 한 때 나는 그대를 향해 남몰래 눈물지었지만, 이제 사랑의 신은 승리와 기쁨 속에서 나를 그대에게 인도하고 있소. 이제 그대는 나의 것이오.”라는 내용의 가사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들지만, 오늘날 가쁜 호흡의 영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섣불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2009/06/17 19:46 2009/06/17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