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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7년은 훗날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영정이 진(秦)나라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를 맞이한 해였다. 훗날의 위업으로 역사상 시황제(始皇帝)라 일컬어지는 인물이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적극적인 정복 사업을 벌이기는커녕 섭정 여불위의 손아귀에서 이제 막 벗어나 겨우 친정(親政)을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정이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 그는 겨우 13세의 소년에 불과했고, 반면 여불위는 영정의 아버지인 영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부터 그를 도와, 영자초가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장양왕) 이미 승상으로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해온 노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정은 즉위 후 10년간을 여불위의 그늘 아래서 숨을 죽이며 보냈다. 그러나 영정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불비불명(不飛不鳴)하며 10년의 세월 동안 서서히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기원전 238년, 여불위의 수하였던 노애의 반란을 계기로 기회를 잡은 영정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여불위를 압박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 여불위가 자결함으로써 비로소 영정의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거의 시기를 같이 하여 진나라를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위수 지역 북쪽에 관개수로를 설치하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위수는 남북으로 기다랗게 자리한 진나라의 허리를 관통하고 있는 강이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이 위수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함양의 북동쪽으로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역은 땅이 매우 넓지만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인공 운하를 설치하여 물을 끌어오면 별 쓸모가 없는 황무지가 단숨에 곡창 지대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한(韓)나라 출신으로 토목 기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정국(鄭國)이란 인물이었다. 진나라에서 이 진언이 채택이 되어, 정국이 운하 건설의 총책임자로 선정되었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정국이 사실은 한나라가 파견한 첩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국 시대의 나라들 중 가장 세력이 약했
던 한나라는, 반대로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언제 진나라의 병사가 파도처럼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나라 조정은 선수를 치기로 했다. 물론 힘으로 겨뤄서는 승산이 없다. 힘으로 안 된다면 꾀로 승부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 한나라의 속셈은, 진나라에 전대미문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스스로 국력을 소진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어설픈 감언이설로 이런 대공사를 일으키게 할 수는 없다. 정말 진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처럼 완벽하게 꾸밀 필요가 있다. 한나라도 국가의 명운을 걸고 펼치는 작전인 만큼 신중을 기해서 완벽에 가까운 제안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가짜 제안에 그쳤어야 할 것이 오히려 너무 완벽한 계획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 운하가 완성되었고, 완벽하게 기능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다.

정작 더 신중을 기했어야 할 부분은 비밀의 유지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정국의 정체가 탄로 났고, 이 일은 진나라를 뒤흔든 일대 스캔들이 되었다. 이때 진나라 조정의 왕족들이며 진나라 토박이 귀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타국 출신의 관료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였다.

기원전 237년은 전국시대의 말기에 해당한다. 주나라가 주도하는 봉건 질서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보통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사회적으로는 100개도 넘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패권을 다투느라 한시도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혼란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왕성한 지적 활동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립한 수많은 제후국들은 저마다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해 많은 인재들이 필요했고, 이런 수요가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천한 신분이면서도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자가 있었고, 타국 출신이면서도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시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새파랗게 어린 증삼으로부터 자신의 가르침을 ‘충서(忠恕)’라는 단 두 글자로 요약 당해버린 공자도 춘추시대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나와 여러 국가를 떠돌며 일자리를 구했다.

이런 시대였던 만큼, 외국 출신의 인사가 국가의 중요한 책임을 맡아보는 자리에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진나라는 외국 인재 등용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진나라는 비록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는 있어도 중국 대륙의 중심이 아니라 서쪽으로 치우친 변방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진나라가 중국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상당히 소외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당시 진나라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맹하고 호전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열등한 야만족의 인상이 짙게 풍긴다. 진나라의 건국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진나라는 은나라 주왕을 섬기던 신하 악래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은나라의 주왕은 폭정으로 주나라에게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 폭군이었고, 악래는 그 주왕과 죽이 잘 맞은 간신이었던 모양이다. 주나라는 은나라 정복 후 설령 주왕의 친족이라 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제후로 봉했을 정도로 처분에 관대했지만, 악래는 처형했다. 그런 악래의 후손들이 변방에 세운 나라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까, 당시 중국 대륙 중앙에 위치한 국가들이 진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은 곧 뛰어난 인재를 배출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국민들의 기질이 용맹하다고 해도, 이것을 잘 통합하고 이끌 지도자가 없어서는 패자(覇者)가 될 수 없다. 진나라가 외국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납득이 갈 뿐만 아니라, 훌륭한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무리 국경의 의미가 오늘날과 같지 않은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외국 인재의 등용을 모두가 달갑게 여긴 것은 아니다. 외국 인사를 관료로 임명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오늘날에는 심지어 험한 일을 도맡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조차 눈을 흘기는 것이 인심이다. 따지고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나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게 그들을 배척하는 본심이지만, 항상 대의명분은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또한 높은 문화 수준으로 동질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중국 중앙부의 국가들과는 달리, 진나라 토박이들은 열등의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외국 출신의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정국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순수 진나라 토박이들은 이것이 외국 출신의 인사들을 추방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회복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진나라 왕 영정은 이제 겨우 여불위를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시작부터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영정의 국가 운영 방침을 결정하는 중대한 사안이기도 했다. 당시 영정의 나이는 고작 이십대 초반. 그의 결정에 따라 향후 수십 년 진나라의 정책 노선이 달라질 터였다.

역시 젊었던 탓인지, 영정도 혈기왕성했다. 외국 인사들을 추방하고 진나라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자는 의견에 솔깃했다. 지난 10년간 자신을 억눌렀던 여불위도 실은 한나라 출신이었다고 하니까, 그로 인해 더욱 타국 출신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영정은 결심을 한다. 곧 축객령(逐客令)이 내려졌다. 객(客)이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손님’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객(客)들을 좇아내라(逐)라는 령이라고 해서 통칭 축객령이라고 한다.

이웃 나라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하던 정국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것은 당연하지만,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진나라 조정을 섬겨왔던 많은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성취를 잃고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이사(李斯) 역시 그런 난처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사(李斯)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 뒷간의 쥐와 곳간의 쥐의 태도가 다른 것을 보고 환경의 중요성을 통찰했다고 하니까,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사가 초나라에 머물러서는 뒷간의 쥐 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일찌감치 진나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는 과연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여 순조롭게 승진했다. 축객령이 내려질 당시 이사는 객경(客卿)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경(卿)은 공경대부(公卿大夫)로 통칭되는 중국 고유의 직위 제도 안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다. 경(卿) 앞에 객(客)자가 붙은 것은 외국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위치가 높은 만큼 표적이 되기도 쉽다. 이사는 당장에라도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사가 왕에게 글을 한 편 써 올린다. 축객령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명을 물릴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축객령에 간(諫)한 글’이라 하여 ‘간축객서(諫逐客書)’라 불리는 유명한 글이다. 여기 그 전문을 소개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진나라 관리들이 외객의 추방을 결의하였다고 하는데, 신의 생각으로 이는 당치도 않은 결정입니다. 옛날 목공(穆公)은 어진 선비를 구하여 유여를 서쪽의 융(戎)에서 취했고, 백리해를 동쪽의 완(宛)에서 얻었으며 착숙을 송나라에서 맞이했고 비표, 공손지를 진(晉)나라에서 찾았습니다. 이 다섯 사람의 모국은 진나라가 아니었지만 목공은 그들을 등용하여 20개국을 병합하고 마침내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또 효공(孝公)이 상앙의 법을 채용하여 풍속을 개혁함으로써 백성은 번영하고, 나라는 부강하게 되고, 백관은 즐거이 봉사하고 제후는 친히 복종하고, 초(楚), 위(魏)의 군사를 깨뜨려 넓힌 토지가 천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군사가 강한 것입니다. 혜왕(惠王)은 장의의 계획을 써서 삼천(三川)의 땅을 둘러 빼고, 서쪽으로 파(巴), 촉(蜀)의 땅을 합하고, 북쪽으로 상군(上郡)을 치고, 남으로 한중을 취하여 여러 오랑캐를 아우르고, 언(?), 영(?)을 제압하고, 동은 성고의 험난한 곳을 의지하여 기름진 토지를 뺏고, 마침내 6국의 합종을 해체하여 진나라에 복종케 하였습니다. 그 공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왕(昭王)은 범수를 얻어 그 계략에 의하여 양후(穰候)를 폐하고 화양군을 추방함으로써 공실을 굳세게 하고, 사가의 번창하는 길을 막고, 제후의 땅을 잠식하여 진나라의 제업을 이룩하였습니다. 이 네 분의 군주는 모두 외객을 등용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외객이라 하여 반드시 진나라를 배반한다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란 말입니까? 만약 이 네 분의 군주가 일찍이 외객을 물리쳐 받지 않고 어진 선비를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부귀함을 거두지 못 하고 진나라의 굳센 명성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폐하는 곤륜산(崑崙山)의 유명한 옥을 손에 넣었고, 수후주(隨侯珠)와 화씨벽(華氏璧)을 지니고 계시고, 명월주(明月珠)로 몸을 치장하고, 태하의 명검을 차고, 성리의 좋은 말을 타며, 취봉(翠鳳)의 깃털을 세우고, 악어가죽으로 만든 북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이들 여러 가지 보배는 어느 하나도 진나라에서 난 물건이 아닌데 폐하께서 이런 물건을 귀중히 생각하는 것은 어쩐 일이십니까? 만약 진나라에서 나는 물건만을 쓰신다고 하면 야광의 벽옥은 조정에 장식할 수 없고, 뿔과 상아로 만든 기물은 완상할 수 없으며, 정(鄭), 위(衛)의 미녀는 후궁으로 들일 수 없고, 결제 같은 준마도 마구간에 넘칠 수 없으며, 강남의 금, 은도 쓰임새에 충당할 수가 없고, 서촉의 단청도 채색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후궁을 장식하고, 궁내의 쓰임새를 충당하고, 심정을 즐겁게 하고, 이목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진나라 산물이 아니면 쓸 수가 없다고 한다면, 완의 주옥으로 만든 비녀, 구슬을 붙인 귀고리, 아호(阿縞)의 비단옷, 금수의 장식은 대왕의 앞에 올릴 수가 없으며, 토속 그대로 아취를 더한 조나라 미인 역시 지금처럼 폐하를 모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독을 치고, 항아리를 두드리고, 쟁을 퉁기고, 무릎을 치며 노래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참으로 진나라의 음악이며 정(鄭), 위(衛), 상간(桑閒), 소(昭), 우(虞), 무(武), 상(象)은 이국의 음악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진나라에서는 물독과 항아리를 두드리는 대신 소와 무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이 곧 마음을 즐겁게 하고 눈으로 보기에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물을 취하는 것은 이와 다르게 논설의 가부와 행위의 곡직을 말하지 않고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제외하여 외국 사람을 추방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진나라가 존중하는 것은 여색과 음악뿐이며 인물은 경멸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일어서서 해내(海內)의 제후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신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고, 나라가 크면 사람이 많고, 군대가 굳세면 병졸이 용감하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태산은 한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기에(泰山不辭土壤) 그토록 크며, 바다는 한 가닥의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아(河海不擇細流) 그토록 깊어진 것입니다. 임금 역시 한 인간일지라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덕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의 땅에는 사방의 구별이 없고, 임금의 백성에는 이국의 차별이 없고, 네 계절이 조화하여 그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귀신도 성인의 시대를 칭송하여 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삼황과 오제로 하여금 적이 없게 했던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민을 버리고 적국을 이롭게 하며, 빈객을 물리치고 제후를 도와 천하의 선비를 뒷걸음질 치게 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아니하며, 발을 묶어 진나라로 들여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원수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됩니다. 진나라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고도 보배로 삼을 것이 많으며, 진나라에서 난 선비가 아니고도 충성을 바치는 자가 많습니다. 이제 외객을 추방하여 적의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줄여서 원수에게 이롭게 하고, 국내에서는 스스로 모자라는 것을 견디고, 국외에서는 열국의 원한을 사면, 어떻게 나라의 편안을 바라며 어떻게 소원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타국 출신의 인사들이 진나라 조정에 진심을 다해 충성할 리가 없다, 결국 자기 출신 나라의 이익이 결부되면 배신을 할 게 분명하니까 미리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논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주장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물리치기가 더 어렵다. 아무리 정연한 논리를 세워 반박하더라도 듣는 쪽에서 귀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사(李斯)의 글은 과연 명문이다. 논리적으로도 흠잡을 구석이 없다. 그러나 이 글이 진정 명문으로 꼽히는 까닭은, 이 글이 단지 완벽한 논리만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는 어떤 기백이 서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진나라 토박이들의 옹졸한 생떼로 들뜬 왕의 가슴을,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웅장한 기상으로 달궈놓는 것이다. 이사는 글에서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도 서슴지 않지만, 요순시대 이야기를 꺼내며 왕이 앞으로 이룩해야 할 위업이 어떤 것인지를 넌지시 암시한다. 요순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그것은 중국 대륙이 완전히 통일되어 하나의 왕 아래 질서를 갖추고 국가의 구분 없이 모든 백성이 화목을 누렸던 이상의 시대가 아닌가? 장차 그런 시대를 다시 열어야 할 분이 지금 이 나라 사람 저 나라 사람 운운하는 것은 너무 쩨쩨한 것 아닌가? 이사가 글 서두에 구구절절 늘어놓은 과거의 예는 단지 과거의 예일 뿐이다. 그런 케케묵은 이야기들은 사실 무시해도 좋다. 하지만 장차 진나라가 중국 대륙의 태산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한 줌의 흙이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시기에, 오히려 산을 스스로 허물 작정인가?

결국 축객령은 폐지되었다. 이사가 계속 중용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번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인 정국조차 첩자 노릇을 관두고 공사에 최선을 다해 운하를 완벽하게 완성시킨다는 조건 하에 처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직위도 그대로 두었다. 이후에 정국은 자기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일국의 일개 첩자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운하의 완성자로 이름을 남기고 싶은 토목 전문가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정말 운하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정국의 이름을 따 정국거라고 불린 이 운하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 고대 중국의 뛰어난 건축 기술의 증명이 되었다.


<오늘날 새로 정비된 정국거의 모습>

이사의 호소가 이제 막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접어든 야심찬 젊은이의 가슴을 새로운 기백으로 채우고 시선을 미래로 돌리게 만든 것이다. 어차피 조만간 자신이 대륙을 통일하면 진나라, 초나라, 한나라의 구분도 없다. 이사의 글을 읽고, 영정은 벌써 여기에 생각이 미쳤는지도 모른다.

정국이 완성한 운하로 황무지는 옥토로 변모했다. 이 옥토의 생산물이 진나라가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사 등 외국 인재들을 두루 활용한 것도 종전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중국 대륙을 통일했고, 영정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게 되었다. 대륙 변방의 가장 야만한 나라 중 하나였지만, 외국의 것을 배척하지 않고 잘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에 마지막에는 오히려 다른 나라들을 모두 제압하고 패자(覇者)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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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젊어서는 포용력이 있고 진취적인 기백이 넘쳤던 영정이, 통일 이후에는 그런 장점을 모두 잃고 만다. 너무 젊어서부터 두드러지면 쇠퇴도 빠른 것일까. 진나라는 이사나 정국 같은 타국 출신의 책사, 기술자들을 등용함으로써 패업을 이룬 나라다. 그런데 통일 이후에는 밖으로는 오랑캐 대책으로 만리장성을 쌓아 국력을 소모시키고, 안으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대표되는 사상 탄압 정책으로 다양성의 씨를 말려버렸다. 결국 진나라는 통일을 이룩한 지 15년 만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망하고 말았다. 외국인 기술자를 등용하여 만든 운하는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외침을 막으려고 세운 성벽은 오히려 국가가 망하는 원인이 되어버렸으니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 우리의 것, 국가, 민족을 외치는 것을 진정한 애국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간축객서의 태산불사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辭土壤 河海不擇細流)란 구절과 더불어 이런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09/10/15 04:54 2009/10/15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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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 전문

2009/05/29 03:36 2009/05/29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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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힘없는 한 개인으로 와서 시대의 격류에 휩쓸리다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혹은 그 흐름에 저항하고 물줄기를 돌려보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혹은 저 고소(高所)의 바위 위에 정좌하고 앉아 골짜기의 탁류를 관조하는 것일까?

세상에 정의가 흐려지고 소의가 대의에 앞서며 비열함이 떳떳함을 목 조르는 일은 흔히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정의를 잃은 지 너무 오래되어 간사함의 뿌리가 온 땅에 깊이 내렸다. 그러니 의로움이 싹 틀 한 줌의 땅이라도 남아 있을런가.

사마천에게 신(神)은 곧 인간의 역사(歷史)였다. 의로운 사람들이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굶어 죽었고,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던 도척은 부귀와 천수를 모두 누렸다. 이것을 두고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가 그릇된 것 같다. 그러나 훗날 공자와 같은 성인이 나타나, 백이와 숙제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 의로움을 제시하니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니 백이와 숙제는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그 위로를 받을 것이고, 도척은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실천적인 정의로움은 죽은 뒤 하늘에서 작은 안락함으로 보상받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후세의 정당한 평가 속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즉 인간의 역사에서 결국 그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어떤 울분이 들끓게 만들었다. 그는 정의를 상실한 사회에서 무언가 변화를 주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방편의 세련되지 못 함이나 작은 흠결들을 말하길 좋아하지만, 나는 다만 그 대의를 따르고자 한다. 젊은 사람들의 사명은 현실 운운하기 이전에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모범을 따라 이 시대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백이열전


2009/05/23 16:10 2009/05/2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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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튀프 서문


2009/05/11 18:55 2009/05/11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