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Filed under 서재/수필

“흩뿌리는 빗줄기에도 여러분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이 ... 불굴의 의지로 ... 조국을 수호 ... ”

바람이 분다.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진다. 쌓아올린 타이어 표면을 때린 빗방울은 부셔져 파편을 날린다. 전투복은 축축하다.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다. 삐져나온 타이어에 엉거주춤 기대고 앉아있다. 가로등은 철조망을 비추고 있다. 인공 광원에 이끌린 곤충들이 전혀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광분한 나방의 무리가 민들레 꽃씨처럼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 또렷이 보인다. 억세 보이는 잡목의 줄기가 나방의 날개에 닿아 아래위로 흔들린다. 나방은 넓은 잎의 뒷면에서 잎줄기를 여섯 개의 다리로 단단히 잡고 젖은 날개를 파르르 떤다. 귓가에 모기 앵앵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산모기의 가느다랗고 예리한 침은 전투복을 우습게 뚫어버린다. 병사는 진지 아래 도로를 주시하고 있다. 이따금 모기 물린 곳이 가려운 듯 몸을 긁는다.

“발견 즉시 ... 사살하라.”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댄다. 묵직한 철 덩어리의 촉감이 느껴진다. 손잡이를 꽉 쥔다. 번개가 번쩍인다. 여러 개 천둥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또 한 차례 빗줄기가 지나간다. 다시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도로를 바라본다. 서치라이트를 밝힌 차들이 오간다. 이따금 경비대의 차량이 큰 소음과 함께 지나간다. 사복 차림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 웃음소리가 습한 공기를 가르고 이곳까지 또렷이 들려온다. 방독면을 쓴다. 안경을 벗어서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다. 내뱉은 숨이 삼분의 일쯤은 되돌아오는 것 같다. 위장크림을 바른 피부가 끈적인다. 땀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흘러내려 코끝에 맺힌다. 다시 방독면을 벗을 수 없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어 떨어뜨려버린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방비 ... 너희의 작전은 실패 ... 이제 그만 투항하라, 투항하라!”

“... 그러니까 병들은, 6주에 한 번인 외박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똑같지, 장교들은 주말만 바라보고 살고 있으니까.”

진지 안쪽에서 나방들이 날아오른다. 병사의 헬멧에 나방이 앉았다. 마치 장식 같다. 전투화에도 몇 마리 나방이 앉아있다. 모기가 목덜미를 물었다. 불편해진 자세를 뒤바꿔 보지만, 마뜩치 않다. 진지 바닥 물웅덩이는 더 커졌다. 조심스럽게 디딘 땅에서는 물기가 배어나온다. 모기가 문다. 나방이 날아오른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몇 차례 하늘이 번쩍인다. 이어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빗줄기가 오락가락.

“훈련소에서 말입니다 ... ”

“훈련소에서 말이지 ... ”

상황종료.

2010/08/18 23:23 2010/08/18 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