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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물건이든 굉장히 오래 쓰는 편이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 처음 사용한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수능 시험 답안지에 마킹을 했을 정도. 그렇다고 쓸 수도 없게 되어버린 고물을 끼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물건을 잘 망가뜨리지도 않고 잘 잃어버리지도 않으니 쓸 수 있는 한은 나름 애착을 가지고 오래 쓰는 편.

그런 나조차도 깜짝 놀랄 만큼 오랜 기간 사용한 아이템이 있으니, 바로 이 노스페이스 백팩이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니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것 같다. 내가 고1때라면 2002년이니, 무려 15년 전. 아무튼 고등학생 시절 내내 잘 사용했다. 2004년도 8월쯤 찍은 사진에도 이 가방을 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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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는 시퍼런 색깔의 키플링 백팩을 주로 사용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이 노스페이스 백팩을 꺼내 썼던 기억이 있다. 튼튼하고 공간도 넉넉한데다가 비를 좀 맞아도 끄떡없는, 그야말로 막 쓰기 좋은 백팩이었기 때문. 그래서 정말 막 썼던 것 같다.


2013년에 삼성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 당시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와이프가 샘소나이트 백팩을 선물해주었고, 대학원생이 된 지금까지 그 백팩을 잘 사용하고 있다. 노스페이스 백팩은 정말로 다시 쓸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도 이삿짐 꾸리는 용도로 다시 꺼내 쓴다든가 하면서 강제 수명 연장을 시켰고, 급기야 해외 자료조사를 나갈 때에는 여차하면 버려도 좋다라는 마음으로 들고나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버클은 깨지고 바닥에는 구멍이 나고 그물망은 헤지는 등, 결국 가방은 물리적으로도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 버려야 되나 싶은 차에, 와이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올해 결혼기념일 선물로 필드 워크용 백팩을 하나 사주었다. 이제 정말 미련 없이 이 녀석을 보내줘야 할 때.

 

헌 옷 수거함으로 보내버리기 전, 장장 15년을 함께 한 이 녀석의 사진을 한 장 남겨둔다.

2017/12/31 00:46 2017/12/3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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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7, 결혼 3주년.

1이나 2라는 숫자보다도 3이란 숫자는 어쩐지 꽉 차있는 느낌이 든다. 부부로서 같이 생활한 시간이 어느 덧 3. 그 사이 예쁜 딸이 생겼다. 가만히 딸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요 녀석이 우리를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게 아빠 엄마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빠 엄마였다. 가족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까지 하여 어느 모로 보나 완전한 부부 사이가 되었음에도 진짜 가족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부부로 함께 한 시간보다 남남으로 산 시간이 여전히 훨씬 더 길어, 두 시간이 엇비슷해 지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이 필요하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단 일분일초도 나의 부모님이 아닌 적이 없었던 아빠 엄마와는 친밀감이 같으려야 같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 사이에 아기가 태어났다.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지만, 이 아기의 눈에도 벌써 아빠 엄마의 낯은 익은 모양이다. 마치 내가 나의 아빠 엄마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 아기는 나와 내 아내를 바라본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있는, 단 일분일초의 예외도 없는 나의 부모님. 나를 아빠로, 내 아내를 엄마로 불러줄 이 아이가 생김으로 하여 우리 부부는 정말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한 손에는 나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내 아내의 손을 잡고서 걸어가는 아기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아기는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이지만, ‘연인으로서의 부부 사이에는 큰 지장을 초래하는 훼방꾼이다. 우리 부부는 20141227일에 식을 올린 후 그 날은 서울의 임피리얼 팰리스라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났었다. 그 첫 날을 기념하여 결혼기념일마다 같은 호텔을 찾아 묵었는데, 결국 올해는 가지 못했다. 그래도 장모님께서 하루저녁 아기를 봐주기로 하셔서 정말 오랜만에 둘이 오붓하게 외출해서 영화도 한 편 보고 술잔을 기울이며 맛있는 저녁도 먹었다.

그레이티스트 쇼맨이라는 뮤지컬 영화를 봤는데, 뮤지컬 영화답게 유치찬란하고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다가 마치 초점을 잘못 맞춘 사진처럼 강조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강조된 대상이 전혀 달라서 영화 전체의 흐름이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래도 음악영상만큼은 탄탄했다. 뮤지컬 영화의 미덕만큼은 잘 지켜주었다고 해야할까. 뮤지컬 영화는 낯간지러워서 잘 못본다는 아내도 대놓고 무대’, ‘를 표방한 덕분에 멀쩡히 대화하다가 갑자기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들이 나와도 덜 어색했다고 한다.

저녁 식사는 청담 이상이라는 이자카야 스타일의 식당에서 먹었다. 메뉴는 모듬 사시미, 술은 화요. 한 병에 3만원이었던 화요는 깔끔한 맛이 괜찮았다. 6만원짜리 모듬 사시미는 가격에 비해 퀄리티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이런 날에는 바가지를 좀 써도 괜찮다. 호텔 1박에 비하면 싼 값이기도 하고. 그래도 매년의 전통을 이어나가지 못한 것은 아쉽다. 내년에는 딸아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좀 더 수월해질 테니, 그때는 셋이서 같이 가볼까, 그 호텔에.

2017/12/27 23:26 2017/12/27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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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사료 조사차 나가사키를 방문하였을 때 묵었던 호텔 근처에는 마침 나가사키 3대 카스테라 가게 중 하나로 명성이 높은 분메이도(文明堂)의 총본점이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호화스러운 건물일 수도 있지만, ‘3총본점이니 하는 호사스런 이름에 비하면 막상 건물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이 일본 특유의 그 부담스러울 정도의 친절함으로 응대하는데, 가난한 대학원생이 얇은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카스테라 한 상자를 살지 두 상자를 살지 망설이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저들의 시선에 이마가 간지러웠다.

장인장모님을 생각하며 한 상자, 그리고 부모님을 위해서도 한 상자. 계산하려다보니 한 조각씩 개별 포장해서도 팔기에 나도 맛이나 보자는 생각에 슬쩍 끼워 넣었다. 후쿠오카행 고속버스를 타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기에 상점가로 가서 천천히 둘러보다가 프랜차이즈 카페인 도토루에 들어갔다. 이미 9월이었지만, 나가사키의 날씨는 여전히 무더워서 한국의 한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였는데, 평소 같으면 당연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겠으나 카스테라와는 왠지 따뜻한 커피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렇게 주문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닌 탓인가,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우선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쌉싸름하다. 이 쌉싸름한 맛이 정신을 차리게 도와준다. 입안에 커피 향이 퍼지고, 뜨거운 액체는 목을 타고 넘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커피를 하루에 두, 세잔씩은 꼭 마시게 된 것은.

카스테라 봉지를 뜯고 적당히 안 입 베어 물었다. 달콤했다. 커피가 적셔놓은 입안에서 카스테라는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역시 달콤했다. 본고장 나가사키의 카스테라는 밀도가 높아서 무겁고 단단하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씹을 때 어느 정도의 탄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서인가, 약간 퍽퍽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역시 카스테라는 커피든, 우유든 음료와 함께 먹어야 하는가보다.

맛을 음미하는 것은 한 입 까지다. 상당히 허기도 져있는 상태였던 터라 손에 들려있던 조각 카스테라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가사키 카스테라의 특징이랄 수 있는, 카스테라 밑바닥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굵은 설탕 알갱이들이 오도독 씹혔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입안에 남은 설탕의 맛을 지웠다. 참 깔끔한 간식.


2017/11/02 23:10 2017/11/0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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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서 이처럼 아름다운 새 생명이 태어난 것은, 우리의 사랑이 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리라.



결혼 1000일을 기념하여


2017/09/21 23:58 2017/09/2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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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일을 20여 일 남겨두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초음파 영상을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 표정이 굳어졌다. 아기가 자궁 안에서 성장을 멈췄단다. 말문이 턱 막힌 채 연신 눈물만 쏟는 아내를 데리고 대학병원을 찾아가니, 당장 내일이라도 배를 가르고 애기를 꺼내야만 할 것 같다고 했다.

 

별안간 입원하게 된 아내는, 전신 마취 후 제왕절개로 아기를 꺼내면 이 세상에 나오는 모습을 지켜봐줄 수가 없지 않느냐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하반신 마취만 하고 수술을 받으면 바깥세상의 공기로 첫 숨을 쉬는 아기를 안아줄 수 있으니,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간호사가 반신마취 적합도를 보겠다며 피를 뽑아갔는데, 곧 돌아와서는 수치가 기준치에 겨우 걸친다며, 아무래도 전신마취를 해야겠단다. 수술실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아내는, 마침내 수술실 안에서 마취과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며 하소연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술 직전, 마취 방법을 다시 바꾸었다.

 

자신의 배를 열어 지난 37주간 소중히 품고 있던 아기를 내보낸 어미와, 몸무게 2.03kg으로 세상에 나와 첫 울음을 터뜨린 아기는 서로 뺨을 맞대었다. 내 아내는 연신 고마워, 고마워를 읊조리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미숙아에 가까운 체중으로 태어난 아기를 급히 인큐베이터로 옮기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 이제 편히 쉬도록 수면제를 주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괜찮다며 깨어있는 채로 봉합 수술까지 다 받았단다. 나중에 회복실에서 나온 아내에게 왜 수면제를 맞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더니, 예전에 하반신 마취로 제왕절개 수술 받은 언니로부터 수면마취에서 깨어나고 나니 수술 중에 아기를 안았던 일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내는, 자신과 뺨을 맞대고 울던 아기의 그 일성(一聲), 결코 몽롱한 꿈결 너머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기는 꼬박 1주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지내고, 다시 2주를 중환아실에서 보냈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렇게 작게 태어난 아기가 기특하게도 호흡기 없이 숨을 잘 쉬고, 젖병을 물리면 마다하거나 남기는 법이 없을 만큼 식욕이 왕성했다고 한다. 아기는 3주 만에 몸무게를 500g이나 늘려서, 411일 무사히 퇴원했다. 마침 그날은, 원래 아기가 태어나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이었다.

 

꼼지락거리는 그 작은 손에, 가만히 내 손가락을 갖다 대니 움켜쥔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너희에게 줄 기쁨을 마음껏 누려라. 그리고 그 애가 컸을 때 갚아 주어라."

 

30여 년 전,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께서 아버지에게 해주신 말씀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 말씀은 다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졌다. 이 뜨거운 생명이 내 손끝을 잡았을 때,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다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전달된, 이 지혜로운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기의 이름은, 가족의 전통을 따라 한 글자로 지었다. (). 한자는 나의 아버지가 직접 골라주었다. ()과 무()와 돈()이 합쳐진 무적의 글자다. 김윤. 박유희와 김민의 딸이다.

2017/04/15 23:51 2017/04/1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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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 '국법의 귀함(貴き)을 논함'과 제7편 '국민의 직분을 논함'은 이어지는 하나의 논설로써, 주로 국민과 정부의 관계, 국민과 정부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이 어째서 '국법'을 존중하고 따라야하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우선 제6편에서는 "죄인을 벌하는 것"(P.56), 즉 '사법(司法)‘의 권한은 오직 “정부에 한정된 권”(p.56)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사법권을 독점하는 까닭은, “한 사람의 힘으로 다세(多勢)의 나쁜 사람들을 상대로 삼아서, 그를 막으려 하더라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p.54)라는 사정에 말미암아 국민들이 자신들의 명대(名代, 대리인)로서 정부(政府)를 세워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직분”(p.54)을 위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총명대”로서 일을 하는 것이므로, “정부가 하는 일은 곧 국민이 하는 일”(p.54)이기 때문에, 국법을 따라는 것은 곧 “스스로 만든 법에 따르는 것”(p.55)이다.    

후쿠자와가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부와 국민의 약속을 무시하고 개인이 사사로이 죄인을 벌하는 사재(私裁) 행위다. 현대 사회에서도 공권력에 의한 정당한 법의 집행이 아닌, 이른바 타인에 대한 사적제재(私的制裁)는 엄중한 심판의 대상이다. 제7편에서 후쿠자와는 “정부의 정사에 관계없는 자는 결코 그 일을 평의해서는 안 된다.”(p.65)라고 말하고 있는데, 얼핏 모든 법리적인 판단의 권한은 정부에게 있으므로, 국민들은 그저 그 결정에 묵묵히 따라야한다는 권위적인 해석으로도 비칠 수 있으나, 후쿠자와가 진정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사로이 시비를 판결하고, 그에 대한 무분별한 처벌을 자행하더라도 이것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는커녕,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칭송해 마지않는 일본 사회의 전통이 아닌가 싶다.    

후쿠자와는 적토(敵討)나 천주(天誅)를 비판한다. 적을 토벌하는 것이나, 하늘이 벌을 주는 것은 말만 들어서는 어느 것이나 정당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국민의 총대리인인 정부가 ‘공무(公務)’로서 집행하는 형벌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회에 극심한 해악을 기치는 ‘암살(暗殺)’ 행위에 불과하다. 저마다의 사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여 놓고서, 그 명분을 공의(公義)에 가탁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사회의 질서는 확보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후쿠자와에게 사법행형의 분한은 정부에게 위임하고, 국민들은 “운죠오(세금)를 지불하고 정부의 보호를 사는 것”(p.68)이,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는 현실적이고도 올바른 방법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부도 자기 분한을 지키지 못 하고 폭정(暴政)을 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p.68) 그와 같은 경우에 국민들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사법의 정의를 오직 정부에게 일임한 이상에는, 정부가 공권력을 정당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이것을 견제하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선거’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견제를 할 수 있으나, 후쿠자와는 분명 여기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 하고 있는 듯하다. 리(理)를 져버린 정부의 명령에 그대로 따르는 것도 신념에 어긋나고, 그렇다고 정부에 무력으로 들이받는 것도 지금까지 주장해 온 바와 배치된다. 결국 후쿠자와가 제시한 마지막 길은 숭고한 죽음, 즉 순사(殉死)다. 사적인 제재는 그르고 공적인 사법행형은 정당한 것처럼, 자기 주인을 위한 사사로운 죽음은 어리석고 무가치하며, 국민이 곧 객(客)인 동시에 주인(主人)인 정부에 다가가 “인민의 권의를 주장하고 정리를 주창”(p.74)하며 목숨을 버리는  ‘마루티르돔(순교, 순사)’은 “천만 명을 죽이고 천만 량을 허비하는 내란의 군사보다도 훨씬 더 낫다.”(p.72)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법이, 1970년 자기 한 몸을 불사른 전태일이라는 개인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을 상기하면 후쿠자와의 논설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마르티르돔’ 운운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사회의 불의를 일일이 광정(匡正)하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의 목숨이 필요할 것인가.

2016/10/08 12:38 2016/10/0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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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추가적인 업그레이드나 서비스 지원이 중단된 텍스트큐브를 벗어나 전 세계인의 공용 툴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워드프레스로의 전환을 야심차게 추진했으나, 결국 갈라파고스 현상의 산물인 한국형이라는 덧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설치하는 순간, 일반적인 한국의 블로거들이 요구할 법한 모든 기본적인 기능이 갖추어져있는 텍스트큐브에 비해, 워드프레스는 계층화된 카테고리를 화면에 표시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마저 설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만큼 워드프레스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겠지만, 각종 플러그인을 검색하고 설치하고 설정을 바꾸느라 몇 시간씩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진입 장벽이 높다. 갈라파고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이국의 생태계에 적응해보려던 노력은 실패한 것이다.

 

2016/10/04 12:00 2016/10/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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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권유(學問のすゝめ). 짐짓 점잔을 뺀 듯 근엄함마저 느껴지는 제목이지만, 그 의미는 결국 공부 좀 하라라는 것이 아닌가. 지난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극중 인물 영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은 이 나라는 공부가 국시(國是)”라는 대사 한 마디가 여전히 관객들의 가슴에 묵직한 공명을 일으켰던 우리나라의 현실을 상기해보면, “공부 좀 하라라는 타이름은 어쩌면 한국의 청년들에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들어온 잔소리이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누군가에게 공부 좀 하라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을 만큼 자신만만했던 한 일본인 학자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전체의 인구 중 160명에 한 명 꼴로 자신의 이 근엄한 잔소리를 자청해서 들었다고 한다.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충고가 마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라는 말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 진부해서 별다른 신선함을 느끼게 하지 못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제법 충격적인 이야기다. 필시 당시의 일본 국민들과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사이에는, ‘학문권장하는 일갈이 마치 새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세찬 조류(潮流)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만든 시대적인 맥락이 존재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맥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학문의 권유라는 책의 안과 밖, 모두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학문의 권유의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여러 가지 질문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권장하는 학문(學問)’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널리 배우고(博學) 깊이 질문하는(審問)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분야의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儒學)인가, 혹은 일본 고유의 국학(國學)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어떤 학문인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의 대상을 인간 보통 일용에 가까운 실학(實學)’이라고 못 박았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읽고 쓰고 셈하는 것과, 지리학구리학(究理學)역사학경제학수신학이다. 그런데 이들 학문을 하는데, 어느 것이나 서양(西洋)의 번역서를 조사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각 분야의 제목은 한자로 적혀있으나 그 내용은 서양의 학문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하는 진정한 학문이요, 한학(漢學)과 같은 전통의 학문은 일용에서 멀어진 우활(迂闊)한 것들이니, “우선은 다음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것들이다.

두 번째는 과연 학문을 누구에게 권유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감동적인 문구로써 학문의 권유의 초편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실학(實學)사람 된 자는 귀천과 상하의 구별 없이 모두 다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글의 내용에 따르면 학문 권장의 대상(바꿔 할하면 학문을 수행해야 할 주체)은 모든 인민(人民)이다. 그런데 이 글이 본래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신의 고향인 나카츠(현재 오이타현[大分県] 나카츠시[中津市])에 개교한 학교의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메이지 412(18721~2)에 쓴 글이라는 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의 주체를 단지 일부의 지배계층으로 한정하지 않고 국민 전체로 외연을 넓힌 것은, 불과 50년 전인 분세이(文政) 8(1825)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가 자신의 대표작인 신론(新論)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지,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혁명에 가까운 생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사농공상 각자가 그 직분을 다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에게는 저마다에게 주어진 역할이 따로 있고, 그 역할에 따라 분수에 맞게끔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지만,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배워서 그 직을 능히 수행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과연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나 실용의 학문만 익히면 신분의 고하(高下) 없이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무지문맹한 백성만큼 가련하고 또 미워할 만한 사람”(p.12)이 없으니, “정부는 그 정사를 베풀기를 쉽게하는 통치의 편의와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는 백성들을 적당히깨우칠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마지막 질문은, 저자가 생각하는 학문, 저자가 상정한 대상에게 권유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왜 이 책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권하는 학문도, 호로지 그 한 가지 일로써 취지로 삼고”(p.14)있는 그 한 가지는 바로 전국의 대평(大平)을 지키려고 하는 것”(p.14)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면 당시 일본은, 국민이 무지한 까닭으로 대평을 상실하였단 말인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하는 실용의 학문을 국민들이 익히기만 하면, 국가의 부강과 어진 정치가 실현되고, 대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 그의 웅변은 자못 심금을 울리지만, 그의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앞으로 꼼꼼히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6/10/04 08:10 2016/10/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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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로마에 내렸다. 기체와 건물을 잇는 연결 통로에서부터 한기가 느껴졌다. 로마의 시내까지는 고속 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테르미니 역에 포진하고서 호구들을 노리는 바가지 택시기사를 애써 외면하고 역 밖으로 한 걸음 내딛으니, 칼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할퀴었다. 채 몇 발짝을 떼지 못 하고, 우리는 다시 방향을 돌려 그 바가지 택시기사의 음흉한 도움의 손길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이번 여행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불과 수 십 미터를 못 가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중동계 상인이 벌려놓은 노점 앞에 멈춰 서서 하나에 5유로씩 하는 칙칙한 색깔의 목도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노점상이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아줬다. 관광지에서 한국어 인사말 한 두 마디 듣는 것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에요?” 이쯤 되면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다. “한국에서 좀 살았어요. 인천에서 일 했어요.”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에 돌아올 수 있다는 전설이 있는, 그러나 정비 관계로 메마른 바닥을 드러낸 채 그나마도 높은 장벽에 둘러싸여버린 트레비 분수 근처에서, 한때 인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피부가 가무잡잡한 중동계 외국인노동자 출신의 노점상으로부터 한 개 5유로씩 하는 거무칙칙한 목도리를 두 개 사는 것으로, 우리의 이탈리아 여행은 시작되었다.
2015/01/22 01:13 2015/01/22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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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번역

본 내용은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에서 출판한 キケロ書簡集(高橋 宏幸 編)”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서간집에는 키케로가 남긴 방대한 서간문들 중에서 선정된 112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각주의 내용은 전부 편집자의 주석이며, 한역 시에 추가한 주석은 없다.

B.C. 65717일 조금 전, 로마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내년에 있을)나의 선거1)에 대해서는 자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바탕으로 예측해보자면 전망은 대충 이러하네. 벌써부터 선거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푸블리우스 갈바2)뿐이지만, 시민들은 우리에게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그 지극히 솔직한 태도로 그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네. 푸블리우스의 이런 성급한 선거 활동은 우리 쪽에도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 그도 그럴 것이, 푸블리우스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도 나에 대한 의리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거든. 이처럼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면, 점차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언제쯤 선거 운동을 언제 개시하면 좋을까가 문제이네만, 킨키우스가 자네쪽 소년이 이 편지를 가지고서 다시 자네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할 거라고 알려준 날, 그러니까 곧 마루스 평원에서 호민관 선거가 치러지는 717일부터 시작할까 생각하고 있네. 함께 입후보하는 이들은, 현재까지 확실한 건 갈바와 안토니우스3), 그리고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야. 마지막 이름을 보고는 웃거나 혹은 탄식을 내뱉었겠지. 거기에 자네가 벽에다가 이마라도 박고 싶어지도록 한 사람 더 추가하자면, 카에소니우스5)마저 입후보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아퀼리우스는 출마하지 않을 것 같네6). 그가 출마를 부정했고, 신병이 있다고 선언한데다가, 법정에서 자신이 쌓아올린 왕국을 출마를 사양하는 이유로 들고 있네. 카테리나7)에 대해서는 심판인들이 대낮에 해가 진다는 따위의 판결을 하지 않는 한, 출마는 무리겠지8). 아우피디우스와 팔리카누스에 대해서는 일부러 쓸 필요도 없어. 현재 (올해 치러질 선거에)입후보 한 사람들10) , 카이사르11)의 당선은 확실하다고 생각되네. 또 한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텔무스와 실라누스12)일 거라고 보여지네. 하지만, 그들은 인맥이 빈곤하고 세간의 평가도 너무 낮아서, 툴리우스13)가 급부상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네만, 이건 나만의 생각일세. 내 계산으로는, 텔무스가 카이사르와 함께 당선되는 것이 가장 상황이 좋다고 생각되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입후보하게 될 해에 함께 겨루게 된다면, 지금 입후보 해 있는 사람들 중에는 텔무스가 가장 강력한 입후보자가 될 거라 여겨지기 때문이지. 그는 플라미니우스 가도14) 정비의 감독관을 맡고 있지만, 이 사업은 내가 선거에 출마할 즈음이면 여유롭게 마무리 지어지겠지15). 그러니까 나로서는 그가 차라리 이번 기회에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네. 이정도가 입후보자들에 대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네. 그리고 아마도 선거에서는 갈리아16)가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쪽의 법정(法庭) 일이 좀 잠잠해지면 9월에 피소의 부관으로서 그가 있는 갈리아로 재빨리 넘어갔다가17) 1월쯤에 돌아올까 생각중이네. 명사들18)의 의향이 어떤지 대충 파악이 되면 알려줌세. 적어도 시() 안의 경쟁 상대들만 놓고 본다면, 뒷일은 순조롭게 풀릴 거라고 보고 있네. 그렇지만 그 군단(軍團)만큼은 자네가 훨씬 더 가까이에 있으니까, 자네가 좀 맡아줬으면 좋겠네. 즉 우리들의 친구 폼페이우스19)가 이끄는 그 일개 군단 말일세20). 설령 선거에서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너무 섭섭해 하지는 않을 거라고 전해주게.

선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 실은 자네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 싶은 일이 있네. 자네의 백부인 카에킬리우스21), 푸블리우스 바리우스22)에게 큰돈을 사기 당했네. 그래서 백부께서는 바리우스에게 속아서 떠안은 물건을 두고 바리우스의 형제인 카니니우스 사툴루스와 다툼을 시작했지. 다른 채권자들까지 여기에 가세했는데, 그 중에는 루쿨루스23)와 푸불리우스 스키피오24), 루키우스 폰티우스25)도 있네. 특히 루키우스 폰티우스는 만약 재산 압류가 발생할 경우 그 재산에 대한 법정 관리인으로 세우려는 것 같네만,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좀 도가 지나친 것 같네. 어쨌든 여기서 좀 문제가 생겼다네. 자네 백부님께서는 나에게 사툴루스26)를 고소하는 편에 서 달라고 부탁을 하셨네. 그렇지만 사툴루스는 단 하루도 내 집을 방문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네. 사툴루스는 항상 루키우스 도미티우스27) 다음으로 나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지. 나 자신이나 동생 퀸투스가 입후보했을 때에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네.

사툴루스 본인과의 이런 친밀한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도미티우스와의 관계도 있어서 나로서는 정말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일세. 나의 당선의 열쇠는 도미티우스가 쥐고 있네. 나는 이런 상황을 자네 백부님께 잘 설명 드렸지.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하였다네. “만약 백부님과 사툴루스, 두 사람만의 문제였다면 저는 지체 없이 백부님의 요청에 응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채권자들이 공동으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고, 게다가 그 채권자들은 하나같이 매우 부유하여서 굳이 백부님께서 전면에 나서서 사람을 세워주지 않아도 모두들 소송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없는 상황이니, 당신께서도 저의 체면과 현재 제가 처해있는 상황을 좀 배려 해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지만 백부님께서는 내 말을 기대했던 것처럼은-그리고 신사에 어울리는 태토로는- 받아들여주시지는 않는 모양이야. 최근 며칠 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네만, 내가 그러한 대답을 드린 후로는 딱 연락이 끊기고 말았네.

이러한 상황을 부디 잘 헤아려주게. 그리고 친구가 이처럼 심각한 괴로움에 처해있을 때, 나로서는 그 친구를 고소하는 편에 서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따름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사툴루스는 나를 위해 크게 힘을 써줬고, 봉사 해 준 사람이니까. 좀 냉정한 시선으로 보자면, 내가 앞으로 있을 선거 활동을 위해 백부님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설령 그 말 대로라 하더라도 내 입장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왜냐하면 소의 가죽이나 산짐승을 얻고자 한 일은 아니니까28). 내가 어떤 경기에 출장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내가 얻은 지지를 조금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서 얼마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자네는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이 정도면 자네도 내 생각을 충분히 납득 해 줬으리라 믿어.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네. 자네가 보내준 헤르마테나29), 정말로 기쁘다네. 배치가 너무 훌륭해서 김나시움 전체가 마치 그녀에게 바쳐진 공물같이 느껴질 정도야. 정말로 고맙네.

 

1) 63년도의 집정관 선거
2)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65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
3)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휴블리다. 키케로와 함께 63년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후에 속주 마케도니아의 총독으로 재직하던 중 부정축재로 고발되어 키케로의 변호를 받았지만 유죄가 선고되었다.
4) 퀸투스 코르피키우스. 67년 혹은 66년의 법무관.
5) 마루쿠스 카에소니우스. 69년에 키케로와 함께 조영관으로 근무했다. 65년 이전(키케로와 같은 해인 66?)에 법무관을 지냈다.
6) 코르피키우스 이하의 3인은 신분이나 경력으로 봐서는 특별히 열위에 있는 인물들은 아니지만, 키케로는 집정관으로서는 역부족으로 판단하고 있다. 가이우스 마퀼리우스 갈루스는 키케로의 친구로, 66년에 키케로와 함께 범무관을 지냈다.
7)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테리나. 63년에 국가전복의 음모를 획책하였지만 키케로에게 발각되어 사형.
8) 그는 속주 아프리카에서 부정축재의 죄로 고발당했다.
9) 역시 집정관이 되기에는 격이 떨어진다는 의미. 티투스 아우피디우스는 출신이 미천했지만 법무관(67?)으로까지 출세하였고, 아시아 속주의 총독으로서도 훌륭한 실적을 쌓았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팔리카누스도, 피케눔의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역시 법무관(68년 이전)까지 역임했다.
10) 다음 해(64)의 집정관. 실제 당선된 것은 A2의 시작 부분에 나와있듯 카이사르와 피글루스.
11) 유명한 카이사르가 아니라, 그의 먼 친척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12) 미누키우스 텔무스는 66년 이전에 법무관을 지낸 인물로, 집정관에 당선된 피글루스의 별명일 가능성도 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62년의 집정관 선거에서 당선.
13) 루키우스 툴리우스. 75년의 범무관?
14) 로마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가도.
15) 가도정비의 공적이 선거전에서 강력한 순풍이 될 거라는 의미.
16) 여기서 말하는 갈리아는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로마쪽)(갈리아 키살피나) 중에서도 파두스 강(포 강)보다 안쪽에 위치한 갈리아(갈리아 키스파나)를 말함. 이 지역은 89년에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17)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67년의 집정관)은 당시 갈리아의 총독. 키케로는 63년에 부정축재 혐의로 고발된 그의 변호를 맡아서 성공을 거두었다.
18) nobiles의 번역.
19) 그나에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B.C. 106 ~ B.C. 48). 키케로와 동년배. 수많은 군공을 세워 하위 관직을 역임하지도 않고 단번에 집정관이 되어(70), 훗날 제일 삼두정치의 한 축을 맡았다.
20) 폼페이우스는 당시 동방원정중으로 1개 군단이라는 것은 그가 이끄는 병사들을 말함. 물론 이것은 농담조의 얘기로, 폼페이우스와 그가 이끄는 군대에 대해 선거 활동을 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1)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부유한 기사로, 대단히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라 전해진다.
22) 상세불명
23)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74년의 집정관으로, 72~71년에 폰토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서 전과를 올렸다(당시는 그에 대한 개선식을 요청하고 대기중이었다). 대부호로 호화로운 생활로도 유명하다.
24) 퀸투스 가에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52년의 집정관. 60년에 선거운동 중 매수죄로 고발당해, 키케로의 변호을 받았다.
25) 상세불명
26) 상세불명
27)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 54년의 집정관.

28) 호메로스의 일리아스22-159에서 인용. 흔하디흔한 것을 위해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는 뜻.
29) 투스쿨룸에 있는 키케로의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아티쿠스가 보낸 아테나 여신의 흉상.

2014/09/03 01:25 2014/09/03 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