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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계절이다.

2019/11/09 00:48 2019/11/09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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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감기에 걸려서 다 같이 병원에 갔다가 애견카페에 들렀다.


2019/11/04 00:00 2019/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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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라는 것을 처음으로 본 것은 2000, 미국에서였다. 벌써 20년 전 일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다. 1999년 겨울,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1년 살이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하버드 옌칭 라이브러리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1년 간 일을 하게 된 것을 기회로, 그 참에 나와 동생도 1년 동안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했던 것이다. 몇 해 전 이미 미국에서 1년간 생활했던 아버지는 일단은 함께 미국으로 갔지만, 한국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 집 구하는 것 등 굵직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을 도와주고는 귀국해야만 했다.

미국에서 장만해야 했던 것 중에서도 중요한 것 중의 하나, 특히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이 바로 컴퓨터였다. 컴퓨터를 사기 위해서 아버지와 함께 전자제품 매장에 갔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Best Buy가 아니었을까.

나의 관심사는 오직 새 컴퓨터에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때 카메라 매장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진열되어있던 제품들이 바로 디지털카메라였다. 요즘에야 '카메라'라고 하면 별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곧바로 '디지털카메라'를 떠올리고,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를 오히려 '필름카메라' 내지는 줄여서 '필카'라고 부르고 있지만, 2000년 당시만 하더라도 필름 없이 메모리에 전자 파일 형태로 이미지를 저장하는 디지털카메라라고 하는 것을 그리 흔히 볼 수 없는 시대였다. 늘 시대를 앞서가는 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는 이때 충동적이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디지털카메라 한 대를 구입하기로 결정해버렸다.

진열대에는 100달러 정도 하는 상당히 값싼 카메라부터 그 열 배 가격의 카메라까지 다양한 카메라들이 있었다. 20년 전과 지금이 물가가 다르다고는 하나, 그 당시 100달러짜리 디지털카메라라는 것은 대체 어떤 카메라였을지 궁금하다. 모르긴 몰라도 사용에 엄청난 제약이 따르는, 당시에도 이미 구형인 모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신중한 고민 끝에 아버지는 1,000달러가 넘는 가격표가 붙어있는 카메라를 골랐다. 그것이 바로 도시바의 PDR-M70 모델. 무려 330만 화소를 가진, 당시로써는 꽤 높은 사양의 카메라였다.

 



 이 카메라는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집안에서 굴러다녔다
2000년대 전반기는 그야말로 '똑딱이'라 불린 콤팩트 디카의 전성시대였는데, 그런 콤팩트 디카(이를테면 우리 집안에서 그야말로 막 굴러다니던 카시오의 EX-S100 같은 카메라)에 비하면 PDR-M70은 센서 크기도 큰 편이고, 렌즈 구경도 큰 편이어서 그랬는지 어지간한 똑딱이 카메라들보다는 괜찮은 화질을 보여줬고, 결정적으로 모양도 '카메라다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사용했었다.

 

2019/10/28 01:29 2019/10/28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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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바꿨다. 만 9년을 사용해 온 니콘 D3100에서 소니 A7R3로. 

9년 전 니콘 D3100을 산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날씨 좋은 날 밖에 나가 찍은 사진. 지금은 둘 다 볼 수 없는 고미와 아미. 9년 동안 적지 않은 사진을 찍었지만, 초기에 찍은 이 사진이 베스트인 것 같다. 내일은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야외로 나가봐야겠다.

2019/10/27 01:40 2019/10/27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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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물건이든 굉장히 오래 쓰는 편이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 처음 사용한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수능 시험 답안지에 마킹을 했을 정도. 그렇다고 쓸 수도 없게 되어버린 고물을 끼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물건을 잘 망가뜨리지도 않고 잘 잃어버리지도 않으니 쓸 수 있는 한은 나름 애착을 가지고 오래 쓰는 편.

그런 나조차도 깜짝 놀랄 만큼 오랜 기간 사용한 아이템이 있으니, 바로 이 노스페이스 백팩이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니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것 같다. 내가 고1때라면 2002년이니, 무려 15년 전. 아무튼 고등학생 시절 내내 잘 사용했다. 2004년도 8월쯤 찍은 사진에도 이 가방을 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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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는 시퍼런 색깔의 키플링 백팩을 주로 사용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이 노스페이스 백팩을 꺼내 썼던 기억이 있다. 튼튼하고 공간도 넉넉한데다가 비를 좀 맞아도 끄떡없는, 그야말로 막 쓰기 좋은 백팩이었기 때문. 그래서 정말 막 썼던 것 같다.


2013년에 삼성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 당시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와이프가 샘소나이트 백팩을 선물해주었고, 대학원생이 된 지금까지 그 백팩을 잘 사용하고 있다. 노스페이스 백팩은 정말로 다시 쓸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도 이삿짐 꾸리는 용도로 다시 꺼내 쓴다든가 하면서 강제 수명 연장을 시켰고, 급기야 해외 자료조사를 나갈 때에는 여차하면 버려도 좋다라는 마음으로 들고나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버클은 깨지고 바닥에는 구멍이 나고 그물망은 헤지는 등, 결국 가방은 물리적으로도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 버려야 되나 싶은 차에, 와이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올해 결혼기념일 선물로 필드 워크용 백팩을 하나 사주었다. 이제 정말 미련 없이 이 녀석을 보내줘야 할 때.

 

헌 옷 수거함으로 보내버리기 전, 장장 15년을 함께 한 이 녀석의 사진을 한 장 남겨둔다.

2017/12/31 00:46 2017/12/3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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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7, 결혼 3주년.

1이나 2라는 숫자보다도 3이란 숫자는 어쩐지 꽉 차있는 느낌이 든다. 부부로서 같이 생활한 시간이 어느 덧 3. 그 사이 예쁜 딸이 생겼다. 가만히 딸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요 녀석이 우리를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게 아빠 엄마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빠 엄마였다. 가족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까지 하여 어느 모로 보나 완전한 부부 사이가 되었음에도 진짜 가족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부부로 함께 한 시간보다 남남으로 산 시간이 여전히 훨씬 더 길어, 두 시간이 엇비슷해 지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이 필요하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단 일분일초도 나의 부모님이 아닌 적이 없었던 아빠 엄마와는 친밀감이 같으려야 같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 사이에 아기가 태어났다.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지만, 이 아기의 눈에도 벌써 아빠 엄마의 낯은 익은 모양이다. 마치 내가 나의 아빠 엄마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 아기는 나와 내 아내를 바라본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있는, 단 일분일초의 예외도 없는 나의 부모님. 나를 아빠로, 내 아내를 엄마로 불러줄 이 아이가 생김으로 하여 우리 부부는 정말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한 손에는 나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내 아내의 손을 잡고서 걸어가는 아기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아기는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이지만, ‘연인으로서의 부부 사이에는 큰 지장을 초래하는 훼방꾼이다. 우리 부부는 20141227일에 식을 올린 후 그 날은 서울의 임피리얼 팰리스라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났었다. 그 첫 날을 기념하여 결혼기념일마다 같은 호텔을 찾아 묵었는데, 결국 올해는 가지 못했다. 그래도 장모님께서 하루저녁 아기를 봐주기로 하셔서 정말 오랜만에 둘이 오붓하게 외출해서 영화도 한 편 보고 술잔을 기울이며 맛있는 저녁도 먹었다.

그레이티스트 쇼맨이라는 뮤지컬 영화를 봤는데, 뮤지컬 영화답게 유치찬란하고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다가 마치 초점을 잘못 맞춘 사진처럼 강조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강조된 대상이 전혀 달라서 영화 전체의 흐름이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래도 음악영상만큼은 탄탄했다. 뮤지컬 영화의 미덕만큼은 잘 지켜주었다고 해야할까. 뮤지컬 영화는 낯간지러워서 잘 못본다는 아내도 대놓고 무대’, ‘를 표방한 덕분에 멀쩡히 대화하다가 갑자기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들이 나와도 덜 어색했다고 한다.

저녁 식사는 청담 이상이라는 이자카야 스타일의 식당에서 먹었다. 메뉴는 모듬 사시미, 술은 화요. 한 병에 3만원이었던 화요는 깔끔한 맛이 괜찮았다. 6만원짜리 모듬 사시미는 가격에 비해 퀄리티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이런 날에는 바가지를 좀 써도 괜찮다. 호텔 1박에 비하면 싼 값이기도 하고. 그래도 매년의 전통을 이어나가지 못한 것은 아쉽다. 내년에는 딸아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좀 더 수월해질 테니, 그때는 셋이서 같이 가볼까, 그 호텔에.

2017/12/27 23:26 2017/12/27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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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사료 조사차 나가사키를 방문하였을 때 묵었던 호텔 근처에는 마침 나가사키 3대 카스테라 가게 중 하나로 명성이 높은 분메이도(文明堂)의 총본점이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호화스러운 건물일 수도 있지만, ‘3총본점이니 하는 호사스런 이름에 비하면 막상 건물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이 일본 특유의 그 부담스러울 정도의 친절함으로 응대하는데, 가난한 대학원생이 얇은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카스테라 한 상자를 살지 두 상자를 살지 망설이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저들의 시선에 이마가 간지러웠다.

장인장모님을 생각하며 한 상자, 그리고 부모님을 위해서도 한 상자. 계산하려다보니 한 조각씩 개별 포장해서도 팔기에 나도 맛이나 보자는 생각에 슬쩍 끼워 넣었다. 후쿠오카행 고속버스를 타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기에 상점가로 가서 천천히 둘러보다가 프랜차이즈 카페인 도토루에 들어갔다. 이미 9월이었지만, 나가사키의 날씨는 여전히 무더워서 한국의 한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였는데, 평소 같으면 당연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겠으나 카스테라와는 왠지 따뜻한 커피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렇게 주문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닌 탓인가,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우선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쌉싸름하다. 이 쌉싸름한 맛이 정신을 차리게 도와준다. 입안에 커피 향이 퍼지고, 뜨거운 액체는 목을 타고 넘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커피를 하루에 두, 세잔씩은 꼭 마시게 된 것은.

카스테라 봉지를 뜯고 적당히 안 입 베어 물었다. 달콤했다. 커피가 적셔놓은 입안에서 카스테라는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역시 달콤했다. 본고장 나가사키의 카스테라는 밀도가 높아서 무겁고 단단하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씹을 때 어느 정도의 탄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서인가, 약간 퍽퍽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역시 카스테라는 커피든, 우유든 음료와 함께 먹어야 하는가보다.

맛을 음미하는 것은 한 입 까지다. 상당히 허기도 져있는 상태였던 터라 손에 들려있던 조각 카스테라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가사키 카스테라의 특징이랄 수 있는, 카스테라 밑바닥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굵은 설탕 알갱이들이 오도독 씹혔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입안에 남은 설탕의 맛을 지웠다. 참 깔끔한 간식.


2017/11/02 23:10 2017/11/0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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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서 이처럼 아름다운 새 생명이 태어난 것은, 우리의 사랑이 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리라.



결혼 1000일을 기념하여


2017/09/21 23:58 2017/09/2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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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일을 20여 일 남겨두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초음파 영상을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 표정이 굳어졌다. 아기가 자궁 안에서 성장을 멈췄단다. 말문이 턱 막힌 채 연신 눈물만 쏟는 아내를 데리고 대학병원을 찾아가니, 당장 내일이라도 배를 가르고 애기를 꺼내야만 할 것 같다고 했다.

 

별안간 입원하게 된 아내는, 전신 마취 후 제왕절개로 아기를 꺼내면 이 세상에 나오는 모습을 지켜봐줄 수가 없지 않느냐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하반신 마취만 하고 수술을 받으면 바깥세상의 공기로 첫 숨을 쉬는 아기를 안아줄 수 있으니,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간호사가 반신마취 적합도를 보겠다며 피를 뽑아갔는데, 곧 돌아와서는 수치가 기준치에 겨우 걸친다며, 아무래도 전신마취를 해야겠단다. 수술실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아내는, 마침내 수술실 안에서 마취과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며 하소연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술 직전, 마취 방법을 다시 바꾸었다.

 

자신의 배를 열어 지난 37주간 소중히 품고 있던 아기를 내보낸 어미와, 몸무게 2.03kg으로 세상에 나와 첫 울음을 터뜨린 아기는 서로 뺨을 맞대었다. 내 아내는 연신 고마워, 고마워를 읊조리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미숙아에 가까운 체중으로 태어난 아기를 급히 인큐베이터로 옮기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 이제 편히 쉬도록 수면제를 주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괜찮다며 깨어있는 채로 봉합 수술까지 다 받았단다. 나중에 회복실에서 나온 아내에게 왜 수면제를 맞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더니, 예전에 하반신 마취로 제왕절개 수술 받은 언니로부터 수면마취에서 깨어나고 나니 수술 중에 아기를 안았던 일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내는, 자신과 뺨을 맞대고 울던 아기의 그 일성(一聲), 결코 몽롱한 꿈결 너머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기는 꼬박 1주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지내고, 다시 2주를 중환아실에서 보냈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렇게 작게 태어난 아기가 기특하게도 호흡기 없이 숨을 잘 쉬고, 젖병을 물리면 마다하거나 남기는 법이 없을 만큼 식욕이 왕성했다고 한다. 아기는 3주 만에 몸무게를 500g이나 늘려서, 411일 무사히 퇴원했다. 마침 그날은, 원래 아기가 태어나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이었다.

 

꼼지락거리는 그 작은 손에, 가만히 내 손가락을 갖다 대니 움켜쥔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너희에게 줄 기쁨을 마음껏 누려라. 그리고 그 애가 컸을 때 갚아 주어라."

 

30여 년 전,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께서 아버지에게 해주신 말씀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 말씀은 다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졌다. 이 뜨거운 생명이 내 손끝을 잡았을 때,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다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전달된, 이 지혜로운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기의 이름은, 가족의 전통을 따라 한 글자로 지었다. (). 한자는 나의 아버지가 직접 골라주었다. ()과 무()와 돈()이 합쳐진 무적의 글자다. 김윤. 박유희와 김민의 딸이다.

2017/04/15 23:51 2017/04/1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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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독서노트

제6편 '국법의 귀함(貴き)을 논함'과 제7편 '국민의 직분을 논함'은 이어지는 하나의 논설로써, 주로 국민과 정부의 관계, 국민과 정부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이 어째서 '국법'을 존중하고 따라야하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우선 제6편에서는 "죄인을 벌하는 것"(P.56), 즉 '사법(司法)‘의 권한은 오직 “정부에 한정된 권”(p.56)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사법권을 독점하는 까닭은, “한 사람의 힘으로 다세(多勢)의 나쁜 사람들을 상대로 삼아서, 그를 막으려 하더라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p.54)라는 사정에 말미암아 국민들이 자신들의 명대(名代, 대리인)로서 정부(政府)를 세워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직분”(p.54)을 위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총명대”로서 일을 하는 것이므로, “정부가 하는 일은 곧 국민이 하는 일”(p.54)이기 때문에, 국법을 따라는 것은 곧 “스스로 만든 법에 따르는 것”(p.55)이다.    

후쿠자와가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부와 국민의 약속을 무시하고 개인이 사사로이 죄인을 벌하는 사재(私裁) 행위다. 현대 사회에서도 공권력에 의한 정당한 법의 집행이 아닌, 이른바 타인에 대한 사적제재(私的制裁)는 엄중한 심판의 대상이다. 제7편에서 후쿠자와는 “정부의 정사에 관계없는 자는 결코 그 일을 평의해서는 안 된다.”(p.65)라고 말하고 있는데, 얼핏 모든 법리적인 판단의 권한은 정부에게 있으므로, 국민들은 그저 그 결정에 묵묵히 따라야한다는 권위적인 해석으로도 비칠 수 있으나, 후쿠자와가 진정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사로이 시비를 판결하고, 그에 대한 무분별한 처벌을 자행하더라도 이것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는커녕,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칭송해 마지않는 일본 사회의 전통이 아닌가 싶다.    

후쿠자와는 적토(敵討)나 천주(天誅)를 비판한다. 적을 토벌하는 것이나, 하늘이 벌을 주는 것은 말만 들어서는 어느 것이나 정당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국민의 총대리인인 정부가 ‘공무(公務)’로서 집행하는 형벌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회에 극심한 해악을 기치는 ‘암살(暗殺)’ 행위에 불과하다. 저마다의 사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여 놓고서, 그 명분을 공의(公義)에 가탁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사회의 질서는 확보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후쿠자와에게 사법행형의 분한은 정부에게 위임하고, 국민들은 “운죠오(세금)를 지불하고 정부의 보호를 사는 것”(p.68)이,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는 현실적이고도 올바른 방법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부도 자기 분한을 지키지 못 하고 폭정(暴政)을 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p.68) 그와 같은 경우에 국민들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사법의 정의를 오직 정부에게 일임한 이상에는, 정부가 공권력을 정당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이것을 견제하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선거’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견제를 할 수 있으나, 후쿠자와는 분명 여기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 하고 있는 듯하다. 리(理)를 져버린 정부의 명령에 그대로 따르는 것도 신념에 어긋나고, 그렇다고 정부에 무력으로 들이받는 것도 지금까지 주장해 온 바와 배치된다. 결국 후쿠자와가 제시한 마지막 길은 숭고한 죽음, 즉 순사(殉死)다. 사적인 제재는 그르고 공적인 사법행형은 정당한 것처럼, 자기 주인을 위한 사사로운 죽음은 어리석고 무가치하며, 국민이 곧 객(客)인 동시에 주인(主人)인 정부에 다가가 “인민의 권의를 주장하고 정리를 주창”(p.74)하며 목숨을 버리는  ‘마루티르돔(순교, 순사)’은 “천만 명을 죽이고 천만 량을 허비하는 내란의 군사보다도 훨씬 더 낫다.”(p.72)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법이, 1970년 자기 한 몸을 불사른 전태일이라는 개인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을 상기하면 후쿠자와의 논설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마르티르돔’ 운운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사회의 불의를 일일이 광정(匡正)하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의 목숨이 필요할 것인가.

2016/10/08 12:38 2016/10/08 1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