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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일을 20여 일 남겨두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초음파 영상을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 표정이 굳어졌다. 아기가 자궁 안에서 성장을 멈췄단다. 말문이 턱 막힌 채 연신 눈물만 쏟는 아내를 데리고 대학병원을 찾아가니, 당장 내일이라도 배를 가르고 애기를 꺼내야만 할 것 같다고 했다.

 

별안간 입원하게 된 아내는, 전신 마취 후 제왕절개로 아기를 꺼내면 이 세상에 나오는 모습을 지켜봐줄 수가 없지 않느냐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하반신 마취만 하고 수술을 받으면 바깥세상의 공기로 첫 숨을 쉬는 아기를 안아줄 수 있으니,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간호사가 반신마취 적합도를 보겠다며 피를 뽑아갔는데, 곧 돌아와서는 수치가 기준치에 겨우 걸친다며, 아무래도 전신마취를 해야겠단다. 수술실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아내는, 마침내 수술실 안에서 마취과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며 하소연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술 직전, 마취 방법을 다시 바꾸었다.

 

자신의 배를 열어 지난 37주간 소중히 품고 있던 아기를 내보낸 어미와, 몸무게 2.03kg으로 세상에 나와 첫 울음을 터뜨린 아기는 서로 뺨을 맞대었다. 내 아내는 연신 고마워, 고마워를 읊조리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미숙아에 가까운 체중으로 태어난 아기를 급히 인큐베이터로 옮기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 이제 편히 쉬도록 수면제를 주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괜찮다며 깨어있는 채로 봉합 수술까지 다 받았단다. 나중에 회복실에서 나온 아내에게 왜 수면제를 맞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더니, 예전에 하반신 마취로 제왕절개 수술 받은 언니로부터 수면마취에서 깨어나고 나니 수술 중에 아기를 안았던 일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내는, 자신과 뺨을 맞대고 울던 아기의 그 일성(一聲), 결코 몽롱한 꿈결 너머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기는 꼬박 1주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지내고, 다시 2주를 중환아실에서 보냈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렇게 작게 태어난 아기가 기특하게도 호흡기 없이 숨을 잘 쉬고, 젖병을 물리면 마다하거나 남기는 법이 없을 만큼 식욕이 왕성했다고 한다. 아기는 3주 만에 몸무게를 500g이나 늘려서, 411일 무사히 퇴원했다. 마침 그날은, 원래 아기가 태어나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이었다.

 

꼼지락거리는 그 작은 손에, 가만히 내 손가락을 갖다 대니 움켜쥔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너희에게 줄 기쁨을 마음껏 누려라. 그리고 그 애가 컸을 때 갚아 주어라."

 

30여 년 전,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께서 아버지에게 해주신 말씀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 말씀은 다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졌다. 이 뜨거운 생명이 내 손끝을 잡았을 때,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다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전달된, 이 지혜로운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기의 이름은, 가족의 전통을 따라 한 글자로 지었다. (). 한자는 나의 아버지가 직접 골라주었다. ()과 무()와 돈()이 합쳐진 무적의 글자다. 김윤. 박유희와 김민의 딸이다.

2017/04/15 23:51 2017/04/1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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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 '국법의 귀함(貴き)을 논함'과 제7편 '국민의 직분을 논함'은 이어지는 하나의 논설로써, 주로 국민과 정부의 관계, 국민과 정부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이 어째서 '국법'을 존중하고 따라야하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우선 제6편에서는 "죄인을 벌하는 것"(P.56), 즉 '사법(司法)‘의 권한은 오직 “정부에 한정된 권”(p.56)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사법권을 독점하는 까닭은, “한 사람의 힘으로 다세(多勢)의 나쁜 사람들을 상대로 삼아서, 그를 막으려 하더라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p.54)라는 사정에 말미암아 국민들이 자신들의 명대(名代, 대리인)로서 정부(政府)를 세워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직분”(p.54)을 위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총명대”로서 일을 하는 것이므로, “정부가 하는 일은 곧 국민이 하는 일”(p.54)이기 때문에, 국법을 따라는 것은 곧 “스스로 만든 법에 따르는 것”(p.55)이다.    

후쿠자와가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부와 국민의 약속을 무시하고 개인이 사사로이 죄인을 벌하는 사재(私裁) 행위다. 현대 사회에서도 공권력에 의한 정당한 법의 집행이 아닌, 이른바 타인에 대한 사적제재(私的制裁)는 엄중한 심판의 대상이다. 제7편에서 후쿠자와는 “정부의 정사에 관계없는 자는 결코 그 일을 평의해서는 안 된다.”(p.65)라고 말하고 있는데, 얼핏 모든 법리적인 판단의 권한은 정부에게 있으므로, 국민들은 그저 그 결정에 묵묵히 따라야한다는 권위적인 해석으로도 비칠 수 있으나, 후쿠자와가 진정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사로이 시비를 판결하고, 그에 대한 무분별한 처벌을 자행하더라도 이것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는커녕,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칭송해 마지않는 일본 사회의 전통이 아닌가 싶다.    

후쿠자와는 적토(敵討)나 천주(天誅)를 비판한다. 적을 토벌하는 것이나, 하늘이 벌을 주는 것은 말만 들어서는 어느 것이나 정당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국민의 총대리인인 정부가 ‘공무(公務)’로서 집행하는 형벌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회에 극심한 해악을 기치는 ‘암살(暗殺)’ 행위에 불과하다. 저마다의 사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여 놓고서, 그 명분을 공의(公義)에 가탁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사회의 질서는 확보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후쿠자와에게 사법행형의 분한은 정부에게 위임하고, 국민들은 “운죠오(세금)를 지불하고 정부의 보호를 사는 것”(p.68)이,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는 현실적이고도 올바른 방법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부도 자기 분한을 지키지 못 하고 폭정(暴政)을 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p.68) 그와 같은 경우에 국민들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사법의 정의를 오직 정부에게 일임한 이상에는, 정부가 공권력을 정당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이것을 견제하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선거’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견제를 할 수 있으나, 후쿠자와는 분명 여기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 하고 있는 듯하다. 리(理)를 져버린 정부의 명령에 그대로 따르는 것도 신념에 어긋나고, 그렇다고 정부에 무력으로 들이받는 것도 지금까지 주장해 온 바와 배치된다. 결국 후쿠자와가 제시한 마지막 길은 숭고한 죽음, 즉 순사(殉死)다. 사적인 제재는 그르고 공적인 사법행형은 정당한 것처럼, 자기 주인을 위한 사사로운 죽음은 어리석고 무가치하며, 국민이 곧 객(客)인 동시에 주인(主人)인 정부에 다가가 “인민의 권의를 주장하고 정리를 주창”(p.74)하며 목숨을 버리는  ‘마루티르돔(순교, 순사)’은 “천만 명을 죽이고 천만 량을 허비하는 내란의 군사보다도 훨씬 더 낫다.”(p.72)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법이, 1970년 자기 한 몸을 불사른 전태일이라는 개인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을 상기하면 후쿠자와의 논설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마르티르돔’ 운운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사회의 불의를 일일이 광정(匡正)하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의 목숨이 필요할 것인가.

2016/10/08 12:38 2016/10/0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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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추가적인 업그레이드나 서비스 지원이 중단된 텍스트큐브를 벗어나 전 세계인의 공용 툴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워드프레스로의 전환을 야심차게 추진했으나, 결국 갈라파고스 현상의 산물인 한국형이라는 덧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설치하는 순간, 일반적인 한국의 블로거들이 요구할 법한 모든 기본적인 기능이 갖추어져있는 텍스트큐브에 비해, 워드프레스는 계층화된 카테고리를 화면에 표시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마저 설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만큼 워드프레스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겠지만, 각종 플러그인을 검색하고 설치하고 설정을 바꾸느라 몇 시간씩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진입 장벽이 높다. 갈라파고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이국의 생태계에 적응해보려던 노력은 실패한 것이다.

 

2016/10/04 12:00 2016/10/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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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권유(學問のすゝめ). 짐짓 점잔을 뺀 듯 근엄함마저 느껴지는 제목이지만, 그 의미는 결국 공부 좀 하라라는 것이 아닌가. 지난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극중 인물 영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은 이 나라는 공부가 국시(國是)”라는 대사 한 마디가 여전히 관객들의 가슴에 묵직한 공명을 일으켰던 우리나라의 현실을 상기해보면, “공부 좀 하라라는 타이름은 어쩌면 한국의 청년들에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들어온 잔소리이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누군가에게 공부 좀 하라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을 만큼 자신만만했던 한 일본인 학자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전체의 인구 중 160명에 한 명 꼴로 자신의 이 근엄한 잔소리를 자청해서 들었다고 한다.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충고가 마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라는 말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 진부해서 별다른 신선함을 느끼게 하지 못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제법 충격적인 이야기다. 필시 당시의 일본 국민들과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사이에는, ‘학문권장하는 일갈이 마치 새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세찬 조류(潮流)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만든 시대적인 맥락이 존재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맥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학문의 권유라는 책의 안과 밖, 모두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학문의 권유의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여러 가지 질문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권장하는 학문(學問)’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널리 배우고(博學) 깊이 질문하는(審問)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분야의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儒學)인가, 혹은 일본 고유의 국학(國學)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어떤 학문인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의 대상을 인간 보통 일용에 가까운 실학(實學)’이라고 못 박았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읽고 쓰고 셈하는 것과, 지리학구리학(究理學)역사학경제학수신학이다. 그런데 이들 학문을 하는데, 어느 것이나 서양(西洋)의 번역서를 조사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각 분야의 제목은 한자로 적혀있으나 그 내용은 서양의 학문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하는 진정한 학문이요, 한학(漢學)과 같은 전통의 학문은 일용에서 멀어진 우활(迂闊)한 것들이니, “우선은 다음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것들이다.

두 번째는 과연 학문을 누구에게 권유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감동적인 문구로써 학문의 권유의 초편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실학(實學)사람 된 자는 귀천과 상하의 구별 없이 모두 다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글의 내용에 따르면 학문 권장의 대상(바꿔 할하면 학문을 수행해야 할 주체)은 모든 인민(人民)이다. 그런데 이 글이 본래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신의 고향인 나카츠(현재 오이타현[大分県] 나카츠시[中津市])에 개교한 학교의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메이지 412(18721~2)에 쓴 글이라는 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의 주체를 단지 일부의 지배계층으로 한정하지 않고 국민 전체로 외연을 넓힌 것은, 불과 50년 전인 분세이(文政) 8(1825)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가 자신의 대표작인 신론(新論)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지,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혁명에 가까운 생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사농공상 각자가 그 직분을 다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에게는 저마다에게 주어진 역할이 따로 있고, 그 역할에 따라 분수에 맞게끔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지만,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배워서 그 직을 능히 수행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과연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나 실용의 학문만 익히면 신분의 고하(高下) 없이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무지문맹한 백성만큼 가련하고 또 미워할 만한 사람”(p.12)이 없으니, “정부는 그 정사를 베풀기를 쉽게하는 통치의 편의와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는 백성들을 적당히깨우칠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마지막 질문은, 저자가 생각하는 학문, 저자가 상정한 대상에게 권유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왜 이 책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권하는 학문도, 호로지 그 한 가지 일로써 취지로 삼고”(p.14)있는 그 한 가지는 바로 전국의 대평(大平)을 지키려고 하는 것”(p.14)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면 당시 일본은, 국민이 무지한 까닭으로 대평을 상실하였단 말인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하는 실용의 학문을 국민들이 익히기만 하면, 국가의 부강과 어진 정치가 실현되고, 대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 그의 웅변은 자못 심금을 울리지만, 그의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앞으로 꼼꼼히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6/10/04 08:10 2016/10/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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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로마에 내렸다. 기체와 건물을 잇는 연결 통로에서부터 한기가 느껴졌다. 로마의 시내까지는 고속 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테르미니 역에 포진하고서 호구들을 노리는 바가지 택시기사를 애써 외면하고 역 밖으로 한 걸음 내딛으니, 칼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할퀴었다. 채 몇 발짝을 떼지 못 하고, 우리는 다시 방향을 돌려 그 바가지 택시기사의 음흉한 도움의 손길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이번 여행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불과 수 십 미터를 못 가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중동계 상인이 벌려놓은 노점 앞에 멈춰 서서 하나에 5유로씩 하는 칙칙한 색깔의 목도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노점상이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아줬다. 관광지에서 한국어 인사말 한 두 마디 듣는 것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에요?” 이쯤 되면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다. “한국에서 좀 살았어요. 인천에서 일 했어요.”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에 돌아올 수 있다는 전설이 있는, 그러나 정비 관계로 메마른 바닥을 드러낸 채 그나마도 높은 장벽에 둘러싸여버린 트레비 분수 근처에서, 한때 인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피부가 가무잡잡한 중동계 외국인노동자 출신의 노점상으로부터 한 개 5유로씩 하는 거무칙칙한 목도리를 두 개 사는 것으로, 우리의 이탈리아 여행은 시작되었다.
2015/01/22 01:13 2015/01/22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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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에서 출판한 キケロ書簡集(高橋 宏幸 編)”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서간집에는 키케로가 남긴 방대한 서간문들 중에서 선정된 112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각주의 내용은 전부 편집자의 주석이며, 한역 시에 추가한 주석은 없다.

B.C. 65717일 조금 전, 로마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내년에 있을)나의 선거1)에 대해서는 자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바탕으로 예측해보자면 전망은 대충 이러하네. 벌써부터 선거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푸블리우스 갈바2)뿐이지만, 시민들은 우리에게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그 지극히 솔직한 태도로 그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네. 푸블리우스의 이런 성급한 선거 활동은 우리 쪽에도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 그도 그럴 것이, 푸블리우스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도 나에 대한 의리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거든. 이처럼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면, 점차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언제쯤 선거 운동을 언제 개시하면 좋을까가 문제이네만, 킨키우스가 자네쪽 소년이 이 편지를 가지고서 다시 자네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할 거라고 알려준 날, 그러니까 곧 마루스 평원에서 호민관 선거가 치러지는 717일부터 시작할까 생각하고 있네. 함께 입후보하는 이들은, 현재까지 확실한 건 갈바와 안토니우스3), 그리고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야. 마지막 이름을 보고는 웃거나 혹은 탄식을 내뱉었겠지. 거기에 자네가 벽에다가 이마라도 박고 싶어지도록 한 사람 더 추가하자면, 카에소니우스5)마저 입후보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아퀼리우스는 출마하지 않을 것 같네6). 그가 출마를 부정했고, 신병이 있다고 선언한데다가, 법정에서 자신이 쌓아올린 왕국을 출마를 사양하는 이유로 들고 있네. 카테리나7)에 대해서는 심판인들이 대낮에 해가 진다는 따위의 판결을 하지 않는 한, 출마는 무리겠지8). 아우피디우스와 팔리카누스에 대해서는 일부러 쓸 필요도 없어. 현재 (올해 치러질 선거에)입후보 한 사람들10) , 카이사르11)의 당선은 확실하다고 생각되네. 또 한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텔무스와 실라누스12)일 거라고 보여지네. 하지만, 그들은 인맥이 빈곤하고 세간의 평가도 너무 낮아서, 툴리우스13)가 급부상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네만, 이건 나만의 생각일세. 내 계산으로는, 텔무스가 카이사르와 함께 당선되는 것이 가장 상황이 좋다고 생각되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입후보하게 될 해에 함께 겨루게 된다면, 지금 입후보 해 있는 사람들 중에는 텔무스가 가장 강력한 입후보자가 될 거라 여겨지기 때문이지. 그는 플라미니우스 가도14) 정비의 감독관을 맡고 있지만, 이 사업은 내가 선거에 출마할 즈음이면 여유롭게 마무리 지어지겠지15). 그러니까 나로서는 그가 차라리 이번 기회에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네. 이정도가 입후보자들에 대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네. 그리고 아마도 선거에서는 갈리아16)가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쪽의 법정(法庭) 일이 좀 잠잠해지면 9월에 피소의 부관으로서 그가 있는 갈리아로 재빨리 넘어갔다가17) 1월쯤에 돌아올까 생각중이네. 명사들18)의 의향이 어떤지 대충 파악이 되면 알려줌세. 적어도 시() 안의 경쟁 상대들만 놓고 본다면, 뒷일은 순조롭게 풀릴 거라고 보고 있네. 그렇지만 그 군단(軍團)만큼은 자네가 훨씬 더 가까이에 있으니까, 자네가 좀 맡아줬으면 좋겠네. 즉 우리들의 친구 폼페이우스19)가 이끄는 그 일개 군단 말일세20). 설령 선거에서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너무 섭섭해 하지는 않을 거라고 전해주게.

선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 실은 자네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 싶은 일이 있네. 자네의 백부인 카에킬리우스21), 푸블리우스 바리우스22)에게 큰돈을 사기 당했네. 그래서 백부께서는 바리우스에게 속아서 떠안은 물건을 두고 바리우스의 형제인 카니니우스 사툴루스와 다툼을 시작했지. 다른 채권자들까지 여기에 가세했는데, 그 중에는 루쿨루스23)와 푸불리우스 스키피오24), 루키우스 폰티우스25)도 있네. 특히 루키우스 폰티우스는 만약 재산 압류가 발생할 경우 그 재산에 대한 법정 관리인으로 세우려는 것 같네만,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좀 도가 지나친 것 같네. 어쨌든 여기서 좀 문제가 생겼다네. 자네 백부님께서는 나에게 사툴루스26)를 고소하는 편에 서 달라고 부탁을 하셨네. 그렇지만 사툴루스는 단 하루도 내 집을 방문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네. 사툴루스는 항상 루키우스 도미티우스27) 다음으로 나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지. 나 자신이나 동생 퀸투스가 입후보했을 때에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네.

사툴루스 본인과의 이런 친밀한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도미티우스와의 관계도 있어서 나로서는 정말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일세. 나의 당선의 열쇠는 도미티우스가 쥐고 있네. 나는 이런 상황을 자네 백부님께 잘 설명 드렸지.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하였다네. “만약 백부님과 사툴루스, 두 사람만의 문제였다면 저는 지체 없이 백부님의 요청에 응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채권자들이 공동으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고, 게다가 그 채권자들은 하나같이 매우 부유하여서 굳이 백부님께서 전면에 나서서 사람을 세워주지 않아도 모두들 소송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없는 상황이니, 당신께서도 저의 체면과 현재 제가 처해있는 상황을 좀 배려 해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지만 백부님께서는 내 말을 기대했던 것처럼은-그리고 신사에 어울리는 태토로는- 받아들여주시지는 않는 모양이야. 최근 며칠 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네만, 내가 그러한 대답을 드린 후로는 딱 연락이 끊기고 말았네.

이러한 상황을 부디 잘 헤아려주게. 그리고 친구가 이처럼 심각한 괴로움에 처해있을 때, 나로서는 그 친구를 고소하는 편에 서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따름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사툴루스는 나를 위해 크게 힘을 써줬고, 봉사 해 준 사람이니까. 좀 냉정한 시선으로 보자면, 내가 앞으로 있을 선거 활동을 위해 백부님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설령 그 말 대로라 하더라도 내 입장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왜냐하면 소의 가죽이나 산짐승을 얻고자 한 일은 아니니까28). 내가 어떤 경기에 출장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내가 얻은 지지를 조금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서 얼마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자네는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이 정도면 자네도 내 생각을 충분히 납득 해 줬으리라 믿어.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네. 자네가 보내준 헤르마테나29), 정말로 기쁘다네. 배치가 너무 훌륭해서 김나시움 전체가 마치 그녀에게 바쳐진 공물같이 느껴질 정도야. 정말로 고맙네.

 

1) 63년도의 집정관 선거
2)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65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
3)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휴블리다. 키케로와 함께 63년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후에 속주 마케도니아의 총독으로 재직하던 중 부정축재로 고발되어 키케로의 변호를 받았지만 유죄가 선고되었다.
4) 퀸투스 코르피키우스. 67년 혹은 66년의 법무관.
5) 마루쿠스 카에소니우스. 69년에 키케로와 함께 조영관으로 근무했다. 65년 이전(키케로와 같은 해인 66?)에 법무관을 지냈다.
6) 코르피키우스 이하의 3인은 신분이나 경력으로 봐서는 특별히 열위에 있는 인물들은 아니지만, 키케로는 집정관으로서는 역부족으로 판단하고 있다. 가이우스 마퀼리우스 갈루스는 키케로의 친구로, 66년에 키케로와 함께 범무관을 지냈다.
7)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테리나. 63년에 국가전복의 음모를 획책하였지만 키케로에게 발각되어 사형.
8) 그는 속주 아프리카에서 부정축재의 죄로 고발당했다.
9) 역시 집정관이 되기에는 격이 떨어진다는 의미. 티투스 아우피디우스는 출신이 미천했지만 법무관(67?)으로까지 출세하였고, 아시아 속주의 총독으로서도 훌륭한 실적을 쌓았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팔리카누스도, 피케눔의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역시 법무관(68년 이전)까지 역임했다.
10) 다음 해(64)의 집정관. 실제 당선된 것은 A2의 시작 부분에 나와있듯 카이사르와 피글루스.
11) 유명한 카이사르가 아니라, 그의 먼 친척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12) 미누키우스 텔무스는 66년 이전에 법무관을 지낸 인물로, 집정관에 당선된 피글루스의 별명일 가능성도 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62년의 집정관 선거에서 당선.
13) 루키우스 툴리우스. 75년의 범무관?
14) 로마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가도.
15) 가도정비의 공적이 선거전에서 강력한 순풍이 될 거라는 의미.
16) 여기서 말하는 갈리아는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로마쪽)(갈리아 키살피나) 중에서도 파두스 강(포 강)보다 안쪽에 위치한 갈리아(갈리아 키스파나)를 말함. 이 지역은 89년에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17)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67년의 집정관)은 당시 갈리아의 총독. 키케로는 63년에 부정축재 혐의로 고발된 그의 변호를 맡아서 성공을 거두었다.
18) nobiles의 번역.
19) 그나에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B.C. 106 ~ B.C. 48). 키케로와 동년배. 수많은 군공을 세워 하위 관직을 역임하지도 않고 단번에 집정관이 되어(70), 훗날 제일 삼두정치의 한 축을 맡았다.
20) 폼페이우스는 당시 동방원정중으로 1개 군단이라는 것은 그가 이끄는 병사들을 말함. 물론 이것은 농담조의 얘기로, 폼페이우스와 그가 이끄는 군대에 대해 선거 활동을 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1)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부유한 기사로, 대단히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라 전해진다.
22) 상세불명
23)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74년의 집정관으로, 72~71년에 폰토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서 전과를 올렸다(당시는 그에 대한 개선식을 요청하고 대기중이었다). 대부호로 호화로운 생활로도 유명하다.
24) 퀸투스 가에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52년의 집정관. 60년에 선거운동 중 매수죄로 고발당해, 키케로의 변호을 받았다.
25) 상세불명
26) 상세불명
27)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 54년의 집정관.

28) 호메로스의 일리아스22-159에서 인용. 흔하디흔한 것을 위해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는 뜻.
29) 투스쿨룸에 있는 키케로의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아티쿠스가 보낸 아테나 여신의 흉상.

2014/09/03 01:25 2014/09/03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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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에서 출판한 “キケロ?書簡集(高橋 宏幸 編)”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서간집에는 키케로가 남긴 방대한 서간문들 중에서 선정된 112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각주의 내용은 전부 편집자의 주석이며, 한역 시에 추가한 주석은 없다 B.C. 67년 8월, 로마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이전부터 나는 내 의지대로 행동 해 왔지만, 자네가 아주 정성들여 쓴 두 통의 편지에 나와 같은 생각이 담겨있는 것을 보고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네. 게다가 살루스티우스1)도 자네와 루케이우스 사이에 예전의 그 좋았던 우호 관계를 돠찾아주기 위해 전력을 다하라고 거듭 나를 채근한다네. 하지만 온갖 수를 써보았음에도 자네에 대한 그의 예전과 같은 호의를 되살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왜 자네에 대한 마음이 그렇게 틀어져버렸는지 그 이유마저도 알아낼 수가 없었네. 분명 그는 자네가 행한 중재 건을 거듭 이유로 내세우고 있네. 또 자네가 여기 있었을 적에 그가 자네에게 분노했던 사정도 나는 알고 있지. 하지만 그것 말고도 그의 감정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것이 있는 것 같네. 그게 무엇인지 자네가 편지를 보내거나 내가 캐묻는 것보다도 차라리 자네가 직접 이쪽으로 와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걸로 푸는 게 훨씬 빠르지 않을까. 물론 자네가 그렇게 하고 싶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말이지만. 그러나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자네가 자네의 평소 보여 온 인격에 어울리는 행동을 취하고 싶다면, 꼭 그리 해야한다고 생각하네. 일전에는 내가 하는 말이라면 그도 들어줄 거라고 해놓고 왜 이제 와서 자신 없는 소리를 늘어놓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게. 그의 마음이 얼마나 더 완고해지고, 그 분노가 얼마나 더 굳어져가고 있는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네. 하지만 자네가 와 준다면 분명 잦아들 걸세. 그렇지 않으면 (이 불화를 일으킨)책임이 있는 쪽에겐 매우 성가신 일이 되겠지.2) 내가 이미 당선되었을 것3)이라고 생각하고 편지를 보낸 모양이네만, 지금 로마에서는 입후보자처럼 온갖 부정에 시달리는 자들도 없으며, 선거가 대체 언제쯤이나 치러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네. 이에 대해서는 필라델프스4)가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 내 아카데미아5)를 위해 입수한 것들, 가능한 빨리 보내줬으면 좋겠네. 아카데미아를 실제로 쓸 때는 물론이거니와 다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기쁘다네. 또 자네가 모은 서적들은 누구에게도 넘기지 말게나. 약속했듯이 나를 위해 남겨두게. 나는 온통 그 서적들 생각뿐이라네. 반면 그밖에 일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네. 모든 일들이, 자네가 떠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얼마나 나빠졌는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라네. 1) 그나에우스 살루스티우스. 키케로와 아티쿠스의 친한 지인. 공직에 몸담았던 흔적은 없음. 2) 완곡하게 아티쿠스 쪽에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음. 3) 이듬해인 B.C. 66년에 행해진 법무관 선거. 각 정무관직의 선거가 행해지는 날짜는 꽤 유동적이었다. 4) 아티쿠스의 노예 또는 해방노예로 추정. 5) 투스쿨룸에 있는 키케로의 별장에 속한 김나지움의 하나.
2014/09/02 00:29 2014/09/02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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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프로포즈도 한 적이 없다. 언젠가부터 결혼이라는 단어가 우리 둘 사이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고는 했지만, 특정할 수 있는 어느 날 "결혼을 하자"고 정한 것은 아니었다.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어떤 흐름에 휩쓸리고 마는 우리의 인생처럼, 이번에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덧 나는 결혼이라는 단계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이러한 이행을 매우 자연스러운 내 인생의 한 과정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혹은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언제 결혼이라고 하는 뚜렷한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와중에도 '결혼 준비'라고 하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입학식 날' 만큼이나 엄정하고 확실한 시작점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국이 광복을 맞은 지 정확히 69주년이 되는 지난 금요일부터 결혼 준비의 대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8.14 밤부터 8.15 금요일 아침까지

학창 시절에는 휴일이면 종종 오후 제법 늦은 시각까지도 잠을 자고는 했다. 아니, 고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방학 중이나 휴일의 평균 기상 시간은 오후 1시 전후였다. 아마 대학생이 된 이후로, 그보다는 좀 더 확실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한 이후로, 아무리 휴일이라 하더라도 오후 늦게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직장인이 되고나니 휴일 기상시간은 9시 전후, 늦어도 10시 반 이전이 되었는데(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나를 두고 여전히 '게으름의 죄악'에 빠졌다고 힐난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새벽닭이 울 때까지 밤을 충분히 즐길 체력이 더 이상 내게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즉, 빨리 잠들면 그만큼 빨리 일어나게 된 다는 것. 요즘은 주말이라 하더라도 새벽 2시를 넘겨 자는 일은 드물고, 제아무리 늦어도 3시 언저리에는 반드시 잠들게 된다. 그 시간을 넘어가면 그 어떤 신나는 일로도 정신을 깨어있도록 유지시키기가 힘들다.

그래도 비교적 어제는 늦게 잔편이었다. 동탄에서 지찬이와 종필이를 만났는데, 이렇게 셋이서 모인 것은 거의 정확하게 1년 만이었다. 사실 만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데, 그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만남이 그렇게 간절하지 않은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동탄이라는 동네는 내가 한 때, 그러니까 결혼은커녕 연애에 대한 생각도 없던 시절에 단기적으로는 투자의 목적으로, 장기적으로는 내가 안거(安倨)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활용하기 위해 매입한 오피스텔이 있는 곳. 최근에 골치를 썩이던 세입자를 가까스로 내보내면서 오피스텔을 청소하기 위해서도 몇 번 들른 일이 있는 낯익은 동네. 그래서 가는 길도 잘 알고 있으니, 이곳에 살고 있는 지찬이의 편의를 위해 나는 기꺼이 동탄으로 찾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찾아가는 데에야 애를 먹지 않았지만, 밤의 동탄은 낮의 동탄과는 사뭇 달랐다. 내 오피스텔 인근이 설마 그런 엄청난 환락가였을 줄이야. 저녁 메뉴를 고르기 위해 이 가게 저 가게 둘러보며 고작 몇 블록을 오가는 사이, 도대체 호객꾼이 몇 명이나 달라붙었는지! 동탄의 공원 풍경은 참으로 기이하기까지 했다. 아직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 제법 선선한 날씨에 동네의 젊은 주부들은 장바구니를 끼고 걸어가는가 하면, 어린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기도 했는데 이런 매우 일상적인 풍경 속에는 행인, 특히 남성들의 얼굴빛만 살피고 있는 호객꾼들의 무리가 마구잡이로 뒤섞여있었다. 서로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이질적인 풍경이 한 데로 겹쳐져있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몇 차례 호객꾼들의 끈질긴 제안을 물리친 끝에, 손님이 별로 많지 않은 양꼬치 집으로 들어갔다. 양꼬치 스무개 가량과 칭따오 한 병을 주문 해 놓고, 세 남자의 길고 긴 수다는 시작되었다.

1년 사이에 제법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세 사람의 삶은 1년 전보다 훨씬 비슷해졌다. 세 사람 모두 직장인이 되었고, 세 사람 모두 만나는 사람이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안주와 불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지닌 채 월급, 저축, 결혼, 주택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근심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있었다. 이 시대 착한 남자들의 자화상이란!

11시쯤 맥주 두 병으로 간단하게 1차를 끝낸 우리는 다시 거리에서 몇 차례 호객꾼들의 집요한 접근에 시달리다가 24시간 커피숍에 들어가 앉았다. 거기서 다시 우리들의 수다는 12시를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정확히 새벽 1시였다. 서둘러 한 시간 전쯤 방전되어버린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 유희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깨어있었다. 아니, 어쩌면 깜빡 잠들었다가 소리를 듣고 일어난 건지도 모르지.

내가 잠든 건 아마 2~3시쯤이었던 것 같다. 깨어나 보니 9시 반쯤이었다.

2014/08/18 01:21 2014/08/18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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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내가 유희를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가지만, 이번 주말같이 특별한 경우에는 유희가 서울로 올라오기도 한다. 부모님은 홍콩에서 공부 중인 동생을 위로방문하기 위해 금요일 아침 비행기로 떠났다. 나마저 대전으로 내려가 버리면 이 집에는 돌봐줄 사람도 없이 방치될 개가 무려 세 마리나 있다. 화이트 데이도 끼어있는 주말. 그래서 유희를 집으로 초대에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계획은 훌륭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최근 수원의 사업장에서부터 서울로 파견되어 근무 환경이 싹 바뀐 탓에 다시 모든 것에 새로 적응해야만 했다. 게다가 특별히 할 일도 없이 한가로웠던 전 사무실에서와는 달리, 이곳에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하루 수십 통에서 많게는 백통 이상의 전화를 걸어대며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나는 비교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물론 그것은 내 주위 환경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무관심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환경이 바뀌게 되면 긴장을 하게 되고, 그 긴장이 풀릴 즈음 이렇게 한 번 앓는다. 아무튼 금요일은 최악의 하루였다. 거의 나오지 않다시피 하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전화 통화를 해댔으니, 나중에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열이 오르는지 오한까지 들었다. 강남에서부터 양재역까지 유희를 만나러 가는 겨우 한 정거장의 거리가 만 리길처럼 느껴졌다. 사무실 답답한 공기에 질려 일부러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건물 밖으로 걸었는데, 초봄 추위에 사시나무 떨 듯이 떨다가 헛구역질까지 할 뻔했다. 화이트 데이에는 보잘 것 없는 사탕 한 봉지를 사주더라도 뭔가 의미 있게 엽서라도 써 주고 싶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정신을 놓고 지내다보니 그마저도 챙기지 못 했다. 서울까지 올라오는 유희를 화이트 데이에 빈손으로 맞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 텀블러를 하나 샀다. 몇 달 전부터 표면이 다 상한 스타벅스 텀블러를 사용하는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어서다. 내가 선물을 고르는 기준은, 물론 상대방이 무엇을 받으면 기뻐할까를 먼저 생각하긴 하지만, 세부적인 것을 고르는 점에서는 결국 내 맘에도 드는 것을 고르게 된다. 상대방에게 주는 선물에는 상대방의 취향에 대한 고려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내 취향도 반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표면에 갈색이 그라데이션으로 도색되어 있는 금속 재질의 텀블러를 하나 샀다. 거기에다가 초콜릿 한 봉지는 덤으로. 텀블러를 구입했더니 공짜 음료 한 잔을 준다고 하기에 몸을 녹일 겸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들고, 다른 한 손에는 텀블러와 초콜릿이 든 가방과 또 점심 때 회사 와인 할인 판매 행사 때 구입한 와인 한 병을 들고, 미열에 들뜬 몸을 간신히 휘적거리며 양재역으로 향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지, 유희는 나를 보고는 대번에 걱정부터 했고, 꼭 같이 가야할 곳이 있다며 정자역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철 5번 출구로 나아가 24시간 의료원에 데려가 기어이 링거를 맞혔다. 약기운 덕분인지 체력이 돌아온 듯하여 금요일과 토요일은 신나게 놀아재꼈으나, 결국 링거의 힘은 거기까지였는지 유희가 떠난 토요일 밤부터는 다시 앓아누웠다. 일요일은 거의 침대 아니면 소파에 누워서 보낸 듯하다. 일요일 저녁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온 엄마가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따뜻한 국물이 있는 먹을거리를 좀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엄마가 사온 설렁탕을 뜨끈하게 데워서 밥까지 말아 한 그릇 해치우고, 지어온 약에 홍삼 엑기스, 쌍화탕까지 마셨다. 이제 한 숨 푹 자고나면 내일은 좀 개운해지지 않을까. 비교적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책이나 읽다가 눈을 붙여야겠다.
2014/03/16 22:41 2014/03/1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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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기분상으로는, 혹은 어쩌면 사실상으로도 군대에 한 번 더 간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나는 국내에 가장 큰 그룹의 한 계열사에 몸담았고, 지금은 그 모든 계열사의 인력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 흔히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다소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내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있고, 여건이 훨씬 더 악화되기는 했지만 적은 시간이라도 연습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말이면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간다. 차 안에서는 주로 중국어 회화 교재나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유성 중심지에 위치한 작은 오피스텔 하나를 임대해서 쓰고 있다. 내 개인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어느 새 여자 친구와 공유하는 공동의 공간이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군대에 있을 때 분당의 집이 그러했던 것처럼, 직장인이 된 지금 주중의 번잡한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홀가분해 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제법 유쾌한 일이다. 서울,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하고 번쇄하다고 할 수 있는 강남 한복판으로 출근을 하게 된 이후로는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었다. 대중교통 이용이 극히 제한되는 집의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환승 주차장까지는 차를 몰고 가야만 하지만, 일 주차비는 신분당선 이용객 할인과 경차 할인을 적용 받아서 1,500원 선에서 해결하고 있다. 이 정도면 파견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월 식대 비에서 어느 정도 충당할 수도 있겠지.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그리고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짬을 내에서 하는 독서가, 주말 바이올린 레슨과 더불어 내 정신의 건강을 지켜주는 보루라고 할 수 있겠다.
2014/03/11 00:46 2014/03/11 00:46